민중의 쟁취, 강대국의 방기. 독립이 2% 부족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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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12시 쇼와 천황이 항복을 선언한다. 일본 지배 하에 있던 대한민국은 광복을 맞는다.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승리한 독일 제국은 유럽 내에서 안정적인 영향력을 확보한다. 그것은 어설픈 판단의 결과가 아니었다. 당시 독일 제국의 수상 비스마르크는 지나친 확장이 독일의 안보를 위협할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한 판단 하에 독일은 전쟁의 승리 후 비팽창주의 즉, “명예로운 고립”을 선언한다. 비스마르크는 국내 문제 해결을 우선시하여 내실 있는 국가 발전에 힘쓴다.

냉소적으로 보자면, 비스마르크는 제국주의 후발자로서의 팽창정책을 추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는 내부적 상황에 기인하는데, 2차 산업 혁명 이후 독일 내부에는 노동자 수가 급증했으며, 그들은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 급여, 고용 안정과 같은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했다. 이에 1880년을 전후로 하여 독일에는 사회주의 분위기가 고착화되고, 사회당(SPD)이 정치권에서 실질적인 힘을 갖게 된다. 굳이 이론화하지 않아도 국가의 내부 안정성이 확보되지 않는 이상 대외적 팽창을 꿈 꿀 수 없다. 즉, 비스마르크가 직면한 독일 내부의 불안정성 문제는 곧 유럽 내 독일의 지위 안정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벌써 100년도 더 된 비스마르크의 정책 결정 맥락을 들으니 중국의 대외 노선이 떠오른다. 덩샤오핑은 “도광양회 유소작위(韜光養晦 有所作爲, 그늘 뒤에 숨어 힘을 키우고 때를 기다린다)”라는 경구를 들어, 밖으로 뻗어나가는 중국 대신 내부의 힘을 기르는 중국을 대외적으로 천명한다. 그의 발언은 1990년에 나온 것이며, 당시 동아시아 정세를 보면 소련이 붕괴하고 일본은 버블경제 붕괴의 여파를 간신히 빠져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즉, 역내 패권을 잡을 기회를 다시 노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덩샤오핑에게 중요한 목표는 외부적 팽창과 미국과의 대등한 관계의 정립이 아니라, 직전에 있었던 1989년의 천안문 사태로 인한 민주주의의 태동이었다. 최근에야 대국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겠다는 “책임대국”, 주변국과 미국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이끄는 가운데 국가의 힘을 키워나가겠다는 “화평굴기”가 대외정책 노선으로 제시된다.

다시 독일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비스마르크가 실각한 이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대외적 팽창 노선인 “해양국가”로서의 독일을 지향한다. 당시 해군 제독이었던 티르피츠와 육군참모총장 슐리펜은 짝짜꿍이 맞아 의회에서 해군 군함 확장에 관한 예산을 의결시키고, 해군 전함 확대 정책을 수립한다. 그 당시 독일의 전력 상황이나 경제력을 감안해 봤을 때 독일 함대를 키워 패권국가인 영국의 함대를 압도하려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물론 처음에는 영국을 제압한다는 호기로운 의도가 있었다.). 그들의 현실적인 목표는 유럽 내부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중심으로 한 내전이 발생했을 시에 독일의 해상 보급로를 영국으로부터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전력은 독일보다 열악했으며, 1905년 러일전쟁으로 러시아는 매우 쇠약해진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독일은 유럽 내전을 생각하면서 해군의 증강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영국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패권국가로서의 영국은 그때까지 계속해서 유럽 대륙의 평화를 명분으로 여타 유럽 국가를 견제해 왔다. 그들에게 든든한 동반자는 프랑스였다. 그런데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힘을 모아 프랑스를 무너뜨리고, 러시아를 무너뜨린다면 유럽 대륙세력의 독일과 영국의 대결 구도가 형성될 것은 분명했다. (당시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를 통해 러시아를 견제하여 시간을 벌고 자국의 군대로 프랑스를 우선적으로 격퇴시킬 전략을 취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어진 독일과 영국의 군함 경쟁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런데 유럽에서 일어난 군비경쟁으로 덕을 본 국가 중 하나는 인도다. 영국은 당시 많은 식민지 국가를 확보하고 있었으나, 어찌되었든 예산상의 한계는 있었다. 또한 유사시에 유럽 내부로 투입될 육군이 필요했다. 이에 영국 의회는 인도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 육군과 해군을 자국으로 귀환시켰다. 영국 군대의 철수로 지배 체제가 한결 느슨해진 인도에서는 1885년 창당한 친영적 정치단체인 인도국민회의(Indian National Congress, INC)가 독립 항쟁 노선으로 전향했다. 1905년 영국이 벵골을 분할하여 민족 통합을 방해하려는 정책을 취하자 이에 반대하여 인도국민회의는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를 앞세운 반영 운동(스와라지-완전자치, 스와데시-국산품 애용)을 전개한다.

다시 현재. 2015년 10월. 러시아는 시리아의 홈스 지역에 공중 폭격을 가한다. 공식적으로는 ISIS(Islamic State in Sham)를 공격하기 위한 작전이라고는 했으나, 홈스 지역은 이미 ISIS의 영향력이 거의 없는 상태였으며, 대신 시리아 반정부군이 세력을 결집하고 있는 곳이었다. 《포린 폴리시》는 최근의 기사를 통해 시리아와 러시아의 유착관계를 설명했다. 시리아의 타르투스 항은 중동지역에 존재하는 유일한 러시아 해군기지이며, 시리아는 러시아가 중동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또한 표면적으로는 러시아의 이번 개입을 중동지역 내 서방세력과 러시아의 파워게임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더 큰 위협은 푸틴 정권에 대한 것이다. 푸틴은 카다피 정권의 붕괴를 직접 목격했다. 그렇기에 ISIS를 빌미로 서방이 중동지역과 시리아에 개입을 하고, 시리아 반군이 이에 힘입어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을 붕괴시킨다면 이는 곧 바로 옆에 있는 푸틴 정권의 안정성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 러시아는 계속해서 전투기를 투입하고 지상군을 배치하려 한다.

그런데 또 하나의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한다. 우크라이나 동부로부터 러시아군의 철수가 이루어지고 있다. 2014년 9월과 2015년 2월 두 차례 민스크 협상이 체결되었으나, 러시아군은 좀체 약속을 이행하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협상 내용에 의거하면 러시아는 중화기를 2km 밖으로 철수시켜야 했으나, 잠시 주춤하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무기를 재배치한다. 우크라이나 동부의 도녜츠크 지역의 교전 상황은 9월까지 극심했다. 그러나 10월, 러시아가 중동사태에 개입하고 서방국가들과 갈등이 더 첨예해 지면서 오히려 우크라이나 사태는 진전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영국이 인도에서 군을 철수했던 맥락과 비슷하다. 시리아 공습 이후 러시아는 더욱 적극적인 개입을 위해 중동 지역에 군사력 투입을 서서히 늘려간다. 이미 시리아 공군기지에는 러시아 전투기가 배치되었으며, 푸틴은 공식적으로 지상군 파견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으나 블라디미르 코모예도프 러시아 하원 국방위원장은 “우크라이나 동부에 참전한 자원군의 시리아 파견을 막을 수 없다”며 지상군 투입의도를 은근히 내비치기도 했다. 현재 상황을 분석해 볼 때 러시아 경제가 다시 일어나고 있다고는 하지만, 1차대전 직전의 영국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예산 제약 하에 놓여있다. 다시 말해 러시아는 시리아와 우크라이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우크라이나 동부와 시리아 모두에 군대를 나눠서 투입하는 것은 전략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결과적으로 러시아는 시리아와 중동에의 개입을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고, 우크라이나 동부에서의 군사 지원을 줄여 중동 쪽에 투입한다.

결국 역사의 데자뷰다. 우크라이나 사태의 진전이 국가 간 평화협정의 결과가 아니고 러시아의 국익을 위한 전략의 부수적인 결과라면 비록 현상적으로 평화가 왔다고 하더라도 사태가 완전히 종결되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즉, 러시아가 철수했더라도 러시아의 개입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1919년, 1차대전이 끝나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근거해 파리강화회의가 진행되었다. 주지하다시피 식민지 해방은 패전국에 한하는 것이었으며, 우리나라는 1945년 일제가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할 때까지 독립할 수 없었다. 독립을 위한 자구적인 노력은 있었으나 결코 스스로 얻어낸 광복이라고 할 수 없었다. 이쯤 되면 피지배 국가가 독립할 수 있는 힘이 과연 평화로운 국제협상에 기인할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우크라이나의 경우 러시아의 막대한 영향력 하에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중심부와 주변부의 구분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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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10일 말레이시아 소재 라부안 섬의 일본군 항복 조인식 장면이다. 오스트레일리아에 패배한 일본 37군 사령관 마사오 바바는 전 일본군의 완전한 항복을 인정한다.

 

과연 근대 국가 체제가 형성된 이후 순수하게 자국의 노력으로 얻어낸 독립이 있었는지, 혹은 그것이 가능한지 쉽게 확신할 수 없는 사안이다. 중동과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들이 현재 종교, 민족의 분포와 국경의 괴리에서 기인하는 국지전을 벌이고 있으며,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의 경우 독립과 독립 후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한국에서 일본 식민 괴뢰정부가 나간지 70주년이지만 친일파 잔재, 위안부, 역사왜곡 등 동북아시아에는 여전히 대일본제국의 망령이 떠돌고 있다. 결코 순수한 독립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현재의 국제 정치를 돌아보자. 힘의 논리에서 파생된 부수적인 결과가 국가의 독립과 지역의 평화라면 국제사회의 평화를 위한 노력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국제정치의 문제는 노력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단지 기막힌 우연을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자유방임주의의 논리처럼 국가가 각각의 국익을 추구하다 평화가 왔더라 하면서 국제정치 문제를 방임할 것인가. 100년도 넘은 오래된 문제가 비슷한 유형으로 다시 국제정치의 시험대에 올랐다.

 

남지윤(연세대 정치외교)

demian859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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