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 2014 7월

노예 12년, 그 이후 – 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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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인물 솔로몬 놀섭의 <노예 12년>

 

영화 <노예 12년>은 실존 인물 솔로몬 놀섭이 집필한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솔로몬은 미국 북부 뉴욕주(州)에 사는 흑인으로, 자유인 신분이었지만 납치를 당해 미국 남부에서 부당하게 12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노예 생활 12년은 미국 노예 전체의 삶을 완전히 대변할 수 없다. 솔로몬은 12년 후 자유를 되찾지만, 평생을 노예로 살며 온갖 학대를 당한 노예들이 더 많았다. 노예 해방 후에도 흑인들은 백인에게 재산으로서 예속되지만 않았을 뿐 숱하게 인권침해를 당했다. 노예 해방 이후에도 흑인들은 12년보다 훨씬 긴 세월을 노예로 살았다.

 

자유의 나라 미국
1700년대 초반부터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흑인 노예들이 미국으로 대량 유입되기 시작했다.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함이었다. 미합중국이 생겨나던 때에도 노예 문제는 건국 인사들 간에 논란이 많았다. 하지만 남부에서 대농장을 경영하던 인사들의 영향력 때문에 노예제는 존속되었다. 초대 대통령 워싱턴 이후 링컨이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전까지 약 72년 중 50년은 노예를 소유하고 있는 정치인이 대통령으로 재임하였다. 모든 사람의 평등과 자유를 추구하는 독립 선언으로 수립된 미합중국이었지만, 노예는 자유의 주체로 간주되지 않았다.

목화 농장에 사용할 노동력이 필수였던 남부와 달리 비교적 농업의 비중이 낮았던 북부에서는 빠르게 노예제도가 사라졌다. 이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자 미 북부와 남부는 일시적으로 북위 36도 30분을 기준으로 노예제를 폐지한 북쪽의 ‘자유주(州)’, 그리고 노예제를 존속한 남쪽의 ‘노예주(州)’로 나누는 내용의 미주리 협정을 1820년 체결했다. 1808년 노예 수입이 금지되고, 미 남부에 노예 인구 부족 현상이 일어나자, 미주리 협정에도 불구하고 미국 전역에서는 자유주 내 흑인을 납치해 노예주 지역으로 팔아 넘기는 흑인 납치 사건이 만연하게 되었다.

<노예 12년>은 자유주와 노예주가 나뉘어 있던 시절 흔했던 흑인 납치 사건을 다룬 영화이다. 흑인 솔로몬 놀섭은 자유인으로서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살던 유능한 바이올리니스트였다. 백인 신사 몇 명에게 공연 제의를 받고 함께 워싱턴으로 떠난 솔로몬은 사실은 인신매매단이었던 그들의 속임수에 넘어가 남부에 노예로 팔리게 된다. 솔로몬은 계속해서 자신이 자유의 몸임을 주장하지만 그럴수록 가혹한 채찍질만 돌아올 뿐이었다. 솔로몬은 ‘플랫’이라는 새 이름을 부여받아 조지아에서 도망친 노예로 12년 동안 두 명의 주인을 섬기며 노예 생활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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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이 처음 만나는 주인은 포드이다. 그는 솔로몬에게 바이올린을 선물하는 등 인간적인 면모를 보인다. 하지만 솔로몬의 본래 신분이 노예가 아님을 알게 된 후에도 포드는 그의 해방을 위해 노력하진 않는다. 오히려 솔로몬이 문제를 일으킬까 우려한 포드는 그를 루이지애나주로 팔아버린다. 솔로몬은 여기서 두 번째로 앱스라는 주인을 만나게 된다. 악덕 노예주 앱스는 루이지애나주의 목화 농장 지주로, 노예들을 마구잡이로 채찍질하는 등 잔혹하게 학대한다. 앱스는 노예 중 한 명인 ‘팻시’를 마음에 두고 그녀에게 집착하는데, 그는 팻시를 성노예로까지 부리지만 그녀에 대한 사랑을 인정하진 못하는 인물이다. 팻시를 향한 앱스의 애정에 질투를 느낀 앱스 부인은 팻시에게 가혹하게 군다. 이유 없이 얼굴에 술병을 맞고, 손톱으로 긁히고, 씻지 못하도록 비누조차 허락 받지 못한 팻시는 노예로의 삶을 견디지 못하고 솔로몬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까지 부탁하지만, 솔로몬은 단호하게 거절한다. 둘은 서로에 의지하며 힘겨운 삶을 산다. <노예 12년>에서 그리는 노예들은 주체적으로 살아갈 의지는커녕 마음대로 생을 마감할 자유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이 영화는 ‘자유의 나라’ 미국의 역사에 이토록 잔혹한 이야기가 존재했다는 것을 덤덤하게 날 것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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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n Nigger Run’과 ‘Roll Jordan Roll’

빠른 화면 전환이나 과장으로 시청자를 자극하는 헐리우드 영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영화의 만듦새가 조금은 지루할 수도 있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노예 12년>은 갈등이 지속적으로 고조되다가 대단원을 이루는 구성이 아닐뿐더러 인물의 얼굴이나 한 풍경을 오랫동안 잡는 롱테이크 기법을 자주 사용하는 느린 영화이다. 하지만 관객들은 이 영화가 충분히 충격적이라고 말한다. 영화 보기가 불편해 상영관에서 나왔다는 사람이 있었다는 정도다. 이는 영화가 노예들의 참담했던 삶을 여과 없이 그리고 효과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에서는 학대 당하는 노예를 시각적으로도 여과 없이 표현하지만 청각도 십분 이용한다. 작중 등장하는 ‘Run Nigger Run’과 ‘Roll Jordan Roll’라는 노래는 삽입된 배경음악이 아니라 씬 내에서 등장인물들이 직접 부른 것이다. ‘Run Nigger Run’과 ‘Roll Jordan Roll’ 두 곡 모두 1867년에 발간된 Slave Songs of the United States이라는 선집에 실렸는데, 이 선집은 최초로 흑인 민요를 대중화한 것이라고 한다. ‘Roll Jordan Roll’는 이 선집의 첫 번째 곡으로, 지금까지도 가스펠 음악의 표본으로 전해내려온다.

영화에서 ‘Run Nigger Run’은 솔로몬이 포드의 노예일 때 노예 관리인 티가 부르는노래다. 이 곡은 노예들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내용인데 솔로몬이 처음 노예로 팔려가서 들은 노래인 만큼 솔로몬이 자신이 노예로서 고된 노동을 시작해야 함을 자각하게 된다. 가사에는 ‘pattyroller’들이 도망치는 너희들 잡을 거라며 위협하는 내용이 있는데(Run nigger run well the pattyroller will get you / Run nigger run well you better get away) 여기서 등장하는 ‘pattyroller’는 도망 노예들을 잡아들이는 정부에 고용된 민병대이다. 빠른 템포의 이 곡은 노예들을 놀리는 듯, 위협을 즐기는 듯한 티빗이 노래가 진행될수록 본인의 노래에 심취하는 것이 재미있다.

재즈, 래그타임, 리듬 앤 블루스, 소울 등 흑인이 음악의 역사에 끼친 영향은 크다. ‘Roll Jordan Roll’은 흑인 영가(Negro Spiritual) 전통의 토대가 되는 텍스트이다. <노예 12년>의 곡은 영화를 위해 새로이 작곡한 것이며, Roll Jordan Roll의 버전은 다양하다. 영화에서 ‘Roll Jordan Roll’이 나오는 부분은 한 편의 뮤직비디오를 보는 것과 같이 흡입력 있고 강렬하다. 이 곡은 앱스의 목화 농장에서 땡볕 아래 일하던 노예가 목화를 따다 쓰러져 죽고 마는데, 노예들이 그를 묻고 부르는 노래다. 노래를 시작하는 노인의 깊게 패인 주름과 처음엔 노래를 따라 부르지 않다가 점점 온 마음을 다해 노랠 따라 부르기 시작하는 솔로몬의 눈빛이 노래의 가락에 더해져 관객의 마음을 후빈다.

 

생존하는 것, 사는 것
솔로몬이 납치되어 노예주로 이송될 때 하는 말이 있다. “I don’t want to survive. I want to live.” 살아남으려면 무조건 순응해야 한다고 조언하는 사람에게 솔로몬은, 단순히 생존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살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이다. 솔로몬은 노예로 생활하며 계속해서 갖가지 방법으로 탈출을 꿈꾼다. 심부름을 가다가 숲 속으로 도망쳐 버릴 궁리도 하고 몰래 종이를 훔치고 라즈베리즙으로 잉크를 만들어 자신의 사정을 적은 편지를 써 보내려고도 한다. 비록 이러한 노력들은 수포로 돌아가고 이 때문에 위기에도 빠지지만 솔로몬은 탈출의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결국 그는 캐나다 목수 배스의 도움으로 진실을 규명하는 편지를 자신의 친구들에게 보내게 되어 자유를 되찾게 된다.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솔로몬의 노력이 영화의 끝에서야 결실을 맺는 것이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솔로몬이 공개처형을 당하려다 겨우 살아남는 장면이다. 평소에 솔로몬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무능력한 노예 관리인 티빗이 솔로몬에게 부당하게 굴자 솔로몬은 그와 싸움에 말려들게 되는데, 솔로몬에게 폭행을 당한 티빗은 다른 백인들까지 데려와 솔로몬을 묶어 나무에 걸고 처형하려고 한다. 린칭(lynching)이라고 불렸던 공개처형은 당시 노예들에게 흔히 가해졌던 벌이다. 주인 포드의 허락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개처형은 중단되지만, 솔로몬은 발 끝만 간신히 땅에 닿은 채로 포드가 올 때까지 나무에 걸려 있게 된다. 솔로몬의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고자, 스크린은 푹푹 꺼지는 진흙 바닥을 디디고 또 디디는 솔로몬의 발을 오랫동안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이 장면은 단순히 까치발로 버티는 의지의 발만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다. 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은 당장이라도 죽을 위기에 처한 솔로몬이 존재하지도 않는 듯 무감각하게 반응하는 다른 노예들이다. 배경의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잔디밭에서 뛰어 놀고 성인 노예들은 자신의 역할을 조용히 수행해나간다. 노예의 인권이 얼마나 당연하게 짓밟혔고 노예들은 얼마나 이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 장면은 살고자 노력하지만 생존하는 것도 버겁고 어려운 솔로몬의 삶을 통해 당시 노예들의 참담한 현실을 말하고자 한다.

영화의 주인공은 솔로몬이지만 그만큼이나 주목 받는 인물이 팻시다. 팻시는 앱스의 노예들 중 가장 심한 학대를 받았다. 그녀는 미국 노예제도의 참혹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하지만 노예 해방 후에도 수많은 팻시들은 학대와 차별을 이겨내야만 했다. 국가 조차 그들에 대한 차별을 ‘분리만 할 뿐 동등’하다고 주장했고 차별을 정당화했다. 그들은 언제쯤 진정한 해방을 누릴 수 있었을까.

 

(하편에서 계속됩니다)

 

2014. 7. 30

김정연(이화여대 국제학)

jylove9926@naver.com

미중관계, Duck 때문에 덕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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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도 식후경
닉슨 대통령 방중을 계획하기 위한 회담 마지막 날, 인민대회당은 미국과 중국 양국 간의 의견 차이로 정적만이 감돌았다. 정적을 깨고 주은래 중국 총리는 미국 대표인 헨리 키신저에게 오찬을 한 뒤 계속 이어나가는 것을 제안하였다. 이날 식사에는 북경을 대표하는 북경오리를 비롯해 12가지 요리가 나왔다. 주은래 총리는 손수 밀전병에 오리고기를 키신저에게 싸주며 북경오리 먹는 법과 유래를 알려주었다. 오찬 이후 신기하게도 교착상태에 빠진 마지막 의제가 양측의 타협으로 해결되었다.

마지막 회담 마지막 의제에서 예상치 못하게 문제가 생겼다. 닉슨 대통령의 방중을 어떻게 발표할지를 놓고 양측이 팽팽한 기싸움을 하였다. 미국 측은 모택동 주석이 닉슨 대통령을 초청했으며 닉슨 대통령도 이를 수락했다는 내용으로 발표를 제안했다. 양측은 각각 초안을 교환하였으나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서로 어느 쪽이 더 관계를 개선하고 싶어 하는지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북경오리가 메인 요리였던 오찬 이후 양측 모두 타협해 “중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닉슨 대통령의 공공연한 열망을 익히 알고 있어 닉슨 대통령을 초청했고, 대통령도 이를 ‘기꺼운 마음으로’ 수락했다.”라는 표현에 동의하였다. 이로써 역사적인 닉슨 대통령의 방중이 성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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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7월 1일, 닉슨 미국 대통령의 외교 안보 보좌관이었던 헨리 키신저는 호찌민, 방콕, 뉴델리, 그리고 라왈핀디를 거치는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 순방길에 올랐다. 순방 중, 7월 8일 키신저는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파키스탄 대통령과의 만찬은 취소되었고, 히말라야 산자락에 위치한 산장에 머무르게 되었다. 다음날 새벽 키신저와 일행은 공항으로 이동해 파키스탄 대통령 전용기에 몸을 실었다. 이 비행기의 목적지는 당시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않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 ‘베이징’이었다. 키신저의 이번 여정은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 순방이 아닌,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 및 관계 개선 타진을 목표로 한 비밀작전이었다. 복통은 순방을 취재하기 위해 따라온 기자들을 속이기 위한 방법으로, 보안상의 유지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작전이었다.

당시 중국과 소련 관계는 국경에서 군사적 교전이 발생하는 등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그리하여 중국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전략적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적(소련)의 적인 미국을 이용하는 것은 중국의 오랜 외교 전략 중 하나인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로 오랑캐를 다스림)에도 부합하는 선택이었다. 미국의 경우, 베트남전으로 상처 입은 국제적 리더십을 재정비하는 기회가 필요했다. 중국과의 수교를 이용해, 미국은 전쟁 와중에도 장기적인 평화 설계를 위해 노력한다는 점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미국과 중국 양측 모두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였다. 당시 중국과 미국 간 연락 채널이었던, 폴란드 바르샤바 주재 미국 대사관과 중국 대사관 사이에 오가던 회담은 급물살을 탔다. 결국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였던 국가인 루마니아와 파키스탄이 다리가 되어 중국 방문을 준비하였다. 마침내 폴로 작전을 통해 키신저는 중국에 입국해 주은래 총리를 만나 닉슨 대통령의 방문을 논의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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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오리를 먹어보지 못하면 평생의 여한이 된다(不吃烤鸭真遗憾)”
북경오리에 관련된 말 중 “만리장성에 오르지 않으면 대장부가 될 수 없고, 북경오리를 먹어보지 못하면 평생의 여한이 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북경오리는 북경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자리매김하였다. 흔히들 북경오리를 생각하면 북경에서 시작된 요리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북경오리는 중국 남경에서 처음 시작된 요리이다. 14세기 초 중국의 원나라가 제위 계승을 두고 쇠락을 거듭하자, 주원장이 남경을 점령하고 1368년 명나라를 건국했다. 당시 남경에서 유행하던 오리요리 맛을 본 주원장이 오리구이 맛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그 후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오리요리도 북경으로 올라와 황제가 즐겨먹는 궁중음식이 되었다. 이후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왕조가 바뀌었지만 북경오리는 여전히 사랑받는 음식이었다. 청의 건륭제는 하루걸러 북경오리를 먹었을 정도로 사랑이 각별했다. 청 말기 최고 권력자였던 서태후 또한 무척 북경오리를 좋아했으며 바삭바삭한 껍질만 먹고 고기는 아랫사람들이 먹도록 하였다고 한다.

북경오리는 생후 2개월이 지나면 운동을 시키지 않고 강제로 사료를 먹여 특별하게 키운 오리를 사용한다. 북경오리의 맛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껍질’이다. 껍질 맛을 좋게 하기 위해 목 부분에 작은 구멍을 내고 오리 항문을 막은 후 공기를 넣을 수 있는 대롱을 꽂고 바람을 불어 넣는다. 피부와 피하지방이 분리되어 오리 껍질에 주름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마지막으로 내장을 빼내고 맥아당을 발라 매달아 놓고 장작에 구우면 완성된다. 주로 껍질과 고기를 밀전병에 오이채나 파와 함께 싸 소스를 찍어 먹는다.

 

중국 현대사의 산증인
1864년 개업한 ‘전취덕’이라는 북경오리 음식점이 있다. 닉슨 대통령이 방중 했을 당시 이 ‘전취덕’에서 북경오리를 먹었다고 한다. 이후 북경오리는 북경을 방문하는 유명인사들이 놓치지 않고 찾는 음식이 되었다. 부시 대통령, 클린턴 대통령, 헬무트 콜 총리, 반기문 사무총장 등 많은 유명인사들의 사진이 ‘전취덕’ 가게 벽면에 자리하고 있다. 중국이 세계 속으로 나오는데 있어 키신저의 복통과 더불어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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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에 갈 일이 있다면 평생 여한이 되지 않게 ‘베이징 카오야’ 이 한마디는 잊지 말자. 부시 대통령 부자도, 닉슨 대통령도,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도,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모두 북경오리 앞에서는 매료되었다. 입에서 사르르 녹는 오리 껍질 맛을 느끼며 주은래 총리와 회담하는 키신저가 되어보자.

김준석(경희대 언론정보)
rejune1112@naver.com

“2펜스면 취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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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면 나와요, 우리의 사랑이 뜨겁던 우리의 사랑을 키웠던 그 집에서 먼저 한잔 했어요” 지아의 ‘술 한잔 해요’의 노래가사다. 이외에도 소주와 관련된 이별노래가 참 많다. 노랫말처럼 연인과 헤어진 후 우리의 곁에는 늘 소주가 함께한다. 소주는 동료들과 일을 마친 후 함께하는 자리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최근 치맥의 인기로 맥주를 많이 마시기는 하지만 그래도 소주의 인기는 여전하다. 값싼 술에 기대 현실의 괴로움을 잊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화는 아니다. 과거 영국에서도 소주에 비견될 만큼 대중적인 술이 있었으니, 바로 ‘진(gin)’이다.

 

불행의 서막, 진 장려 정책

‘진은 네덜란드 사람들이 만들었고, 영국 사람이 발전시켰으며, 미국 사람이 영광을 주었다’는 말처럼 진은 네덜란드에서 시작된다. 1650년경 실비우스 박사(Franciscus Sylvius)가 신장 장애 치료제로 쓰기 위해 이뇨효과가 있는 주니퍼 열매 등을 첨가해서 진을 만들었다. 약용으로 만들었던 진은 30년 전쟁 이후 군인들이 들여오면서 영국에 소개된다. 이후 진은 네덜란드 태생 윌리엄 3세가 명예혁명 이후 왕위에 오르면서 유명해진다. 그는 영국 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하고 증류산업을 장려했다. 진의 질에 대한 규제가 없고 증류 자격증은 지원서만 있으면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누구나 진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진 장려 정책이 불러올 재앙을 모르고 있었다.

 

1페니면 마실 수 있고 2펜스면 만취할 수 있어요!

국가에서 진의 생산을 장려하여 진의 생산량은 나날이 증가했다. 1750년에는 영국 세인트 자일스 지역의 가구 중 4분의 1이 진을 파는 가게였을 정도로 당시 영국은 진의, 진에 의한, 진을 위한 사회였다. 국가 정책뿐만 아니라 진은 빈민가 사람들에게 적은 비용으로 ‘황제가 되는 기분’을 느끼게 해줬기 때문에 인기가 높았다. ‘1페니면 취할 수 있고, 2펜스면 만취할 수 있다.’ 이 문구는 그만큼 진의 가격이 저렴하고 도수가 높다는 것을 한 문장으로 잘 보여준다. 영국 빈민가 사람들이 진을 마시면서 삶의 스트레스를 푸는 것에서 그쳤으면 좋았겠지만 앞서 말한 진의 특성 때문에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가 발생했다.

18세기 진 숍이 생기고 나서 처음으로 여자들이 남자들과 나란히 앉아서 술을 마시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 때문에 여성들이 가정을 돌보지 않고 매춘을 하게 됐다고 생각했고 진을 ‘엄마의 파멸’, ‘바람난 아내를 둔 남자의 위안’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런 현상을 잘 묘사한 것이 윌리엄 호가스의 그림 ‘진 거리’이다. 이 그림에는 진에 미쳐서 피폐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림의 중앙에는 자신의 아이가 떨어지는 것도 모르는 여성이 등장하는데 당시 진에 취한 여성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실제로 주디스 뒤푸르라는 여성은 자신의 아이를 교살하고 아이의 옷을 팔아서 술을 마셨다고 한다.

처음에는 국가 경제를 위해서 진 생산을 장려했지만 사회적 문제가 심각해지자 진 법률을 시행했다. 진의 생산을 줄이기 위해서 높은 관세를 매기고 판매 가능한 주류의 양을 제한했다. 진을 생산하기 위한 조건을 까다롭게 해서 아무나 술을 제조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발이 거세서 법률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폐지됐다. 1751년에 다시 진 규제법을 실시한 후 진의 소비가 줄어들게 됐지만 사실 이것은 영국에 심각한 가뭄 때문에 곡물 가격이 상승하고 빈곤층의 임금이 하락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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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법 속에서 피어난 bathtub gin

진은 미국에서금주법 때문에 인기를 얻게 된다. 금주법은 1차 세계 대전 중 곡물을 아끼고 맥주를 주로 제조하던 독일인에 대한 반감 때문에 시행하게 됐다. 좋은 취지로 만든 법이었지만 법안을 만든 의원들이 몰래 술을 마실 정도로 처음부터 실현이 불가능한 법이었다. 민간에서는 금주법 시행 기간 동안 밀조와 밀매가 성행했다. 그 중에서도 진의 인기가 대단했는데 이는 다른 술에 비해서 제조과정이 간단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공업용 알코올에서 독성 물질을 뺀 뒤 팔았는데 이 주조 작업을 욕조에서 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진을 ‘욕조 진’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만들어진 술은 값이 싸서 주로 서민층에서 소비됐다.

좋지 않은 환경에서 공업용 알코올로 만든 진은 맛이 없어서 다른 음료와 섞어 마셔야 했다. 이것이 진을 베이스로 하는 칵테일이 많이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1933년에 금주법이 폐지되면서 진의 밀매도 끝이 나지만 1960년대에 보드카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미국에서 인기가 많았고 아직까지도 유명한 술로 남아있다.

 

신장 장애 치료제와 말라리아 치료제가 만나면? 진토닉!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밀회’에서 밀월여행을 떠난 혜원(김희애)이 자신의 옛날 이야기를 선재(유아인)에게 들려주다가 떠올리는 노래가 있다. 빌리 조엘의 ‘피아노 맨(Piano Man)’이라는 곡이다. 혜원이 선재에게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처럼 이 노래는 한 노인이 말하는 삶의 고독에 대한 내용이다. “내 옆에 앉은 노인이 진토닉과 사랑을 나누고 있어요.” 가사에서 노인이 진토닉을 마시면서 등장한다. 진토닉은 이외에도 여러 음악, 영화, 책 등에 등장하는 유명한 칵테일이다. 한국음료문화연구회가 네이버 카페<칵테일과 꿈>과 실시한 <한국인이 가장 많이 마신 칵테일 베스트 10>에서 진토닉이 2010년부터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한국에서도 인기가 대단한 칵테일이다.

오랜 역사를 가진 진과 토닉이 만나면 진토닉(Gin & Tonic)이 되는데 이 사연도 진과 마찬가지로 영국과 관련이 있다. 페루에서는 키나나무 껍질로 말라리아를 치료했다. 이 나무껍질이 유럽에 소개되고 후에 토닉워터로 발전하게 된다. 이 나무껍질을 친촌(Chinchón)지역의 백작부인 혹은 예수회 선교사가 유럽에 가져왔다는 설이 있기 때문에 유럽에서 ‘백작부인의 가루’, ‘예수회 사람의 가루’라고 불린다.

인도가 영국령일 당시 병사들이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해 영국 장교는 병사들에게 키니나무 껍질에서 추출한 키니네를 마시게 했다. 하지만 키니네의 맛이 좋지 않았고, 쓴 맛을 중화시키기 위해서 설탕, 라임, 진을 넣어서 마셨다. 이들이 생존을 위해 마셨던 것이 진토닉의 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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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칵테일의 대명사 진토닉을 만들어보자!

1. 드라이 진, 토닉워터, 라임이나 레몬 한 슬라이스를 준비한다.

2. 약 230ml 한 잔을 기준으로 45ml의 드라이 진을 넣고 적당량의 얼음을 넣는다.

3. 잔의 나머지를 모두 토닉워터로 채운다.

4. 레몬이나 라임으로 장식을 하면 좀 더 보기 좋고 향기로운 진토닉이 완성된다.

 

이정배 (이화여대 정치외교)

hijungbae@gmail.com

 

일본의 보통국가화에 대처하는 미국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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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일본이 자국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 허용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아베 내각은 일본과 밀접한 국가에 대한 무력 공격으로 인해 일본에게 “명백한 위협”이 존재하는 경우 집단적 자위권이 행사될 수 있다는 내용의 각의 결정문을 결의하였다. 이를 통해 그 동안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를 부정해 온 헌법 해석을 변경한 것이다. 이 발표가 나온 후 마리 하프 미국 국무부 부대변인은 정례 기자 브리핑에서 “일본 정부의 집단적 자위권과 관련한 결정을 환영한다”며 “미일의 안보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일본의 노력을 가치 있게 평가한다”고 밝혔다.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보유·행사에 대한 미국의 강력한 지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미국은 앞서 아베 총리가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해 헌법 해석을 변경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발표했을 때도 이를 적극 지지했다.

미국의 이러한 지지는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전략적 이익에 부합한다는 계산을 바탕에 둔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이 추구하는 최우선 목표는 자국의 강력한 영향력 유지를 통한 지역의 안정이다. 동아시아 지역은 현재 중국의 부상으로 지역 정세가 급변하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은 3월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올해 국방예산을 전년 대비 12.2% 가량 증가시켰다고 발표하였다. 올해뿐 아니라 최근 계속해서 국방예산을 증가시켜 군 현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에 미국에겐 아시아 지역에서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높은 수준의 군비지출을 유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미국은 2020년까지 미 해군 전력의 60% 가량을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집중시키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미국은 군비지출을 축소해야 하는 목표 또한 가지고 있다. 지난해 미국의 연간 재정 적자 규모는 6천 800억 달러에 달했으며 미국 정부의 총 부채는 17조 달러에 육박한다. 이런 엄청난 규모의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해 미국은 전체 국방예산을 삭감하고 있다. 작년 한해 미국의 연간 군비 지출은 6천400억 달러로 2012년 지출에 비해 7.8%가량 낮아졌다.

결국 미국과 중국의 군비 규모 차이는 여전히 크지만, 장기적으로 중국의 군비증강 속도에 보조를 맞추는 것이 미국에게는 부담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든든한 동반자인 일본이 안보 분야에서 역할을 강화한다면 미국은 장기적으로 군비 부담을 줄이면서도 중국을 효과적으로 견제해 동아시아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일본의 변화를 통한 미일동맹의 강화가 동아시아 지역의 미국의 전략적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다.

 

미국에게 일본의 군사력이란?

미국에게 일본은 동아시아 지역에 자국의 영향력을 투사하게 해주는 중요한 발판이다. 미국과 일본의 긴밀한 안보협력관계는 2차 세계대전 이후 1951년에 체결된 미일안보조약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조약과 평화헌법 9조를 바탕으로 미국은 전범국가인 일본을 군대 없는 평화국가로 만들려 구상했고, 일본은 안보를 미국에 맡기고, 경제발전에 집중하는 정책노선을 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냉전의 격화로 일본의 재군비를 막는 것보다 공산권의 팽창을 막는 일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에게 더 중요하게 되면서 미국은 일본의 재군비를 용인하였다.

일본이 군비를 본격적으로 구축하기 시작한 계기는 한국전쟁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미국은 주일미군을 한반도에 투입하게 되었고 이것이 일본 치안에 공백을 낳았다. 이에 일본 정부는 경찰예비대를 창설하게 되었고, 곧이어 해상경비대도 발족하였다. 이들은 각각 54년에 육상자위대와 해상자위대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같은 해 항공자위대 또한 창설되었다. 평화헌법 9조는 “육·해·공군 기타의 전력을 보유·유지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기에 일본은 군대를 보유할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창설된 자위대는 이름만 자위대일뿐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규모를 키워오며 군대의 외형을 갖추게 되었다.

자위대의 성장은 미국에게 동맹국의 힘이 증가하는 것을 의미했고,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큰 힘이 되어 왔다. 냉전 속에서 미국은 일본을 평화국가로서가 아닌, 군사 동맹국으로서 간주해왔다. 1978년 채택된 미일 방위협력지침은 일본에서 군사 사태가 일어날 경우 미일의 군사협력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이는 1997년 신방위협력지침으로 발전하였다. 신방위협력지침은 일본의 주변지역에 일어난 사태에 대한 미일의 군사협력에 대해 규정하면서 일본 집단적자위권의 단초가 되었다. 1982년 부임한 나카소네 야스히로 일본 총리는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일본은 미국의 “불침항모”라는 발언까지 하며 미국과의 안보 협력의 굳건함을 표현하기도 했다.  또 1996년의 미일 안보공동성명은 “냉전 후의 안보 정세 하에서 일본의 방위력이 적절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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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게 집단적 자위권이란?

일본이 보통국가가 아닌 것은 평화헌법 9조로 인한 국군과 교전권의 부재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상 군대라고 볼 수 있는 자위대가 자국 영토의 방위를 위한 교전권에서 한 발짝 나아가 집단적 자위를 위한 교전권까지 갖게 된다면, 그때 일본은 이미 보통국가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유엔 헌장 제51조는 “이 헌장의 어떠한 규정도 국제연합회원국에 대하여 무력공격이 발생한 경우, 안전보장이사회가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할 때까지 개별적 또는 집단적 자위의 고유한 권리를 침해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며 모든 국가에게 집단적 자위권을 부여한다. 한편 일본의 평화헌법 9조는 “국권의 발동인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이를 포기한다”, “국가의 교전권은 인정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자국 영토를 침략당했을 경우에 행하는 정당방위를 제외하고 헌법상 일본은 무력을 사용할 수 없다. 유엔 헌장과 평화 헌법의 내용이 집단적 자위권의 존재 여부에서 충돌하는 것이다. 이에 일본정부는 1968년 현행 헌법 상에서는 “방위만 할 수 있다”고 규정하는 헌법 해석을 발표하였고, 1981년 “집단적 자위권을 보유하지만 행사할 수 없다”고 발표함으로써 입장을 확실히 했다. 아베 내각의 이번 각의 결정문은 이것을 뒤바꾸어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를 허용한 것이다.

이미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 행사 할 수 있는 상태였다고 볼 수도 있다. 미일동맹의 심화와 함께 안보 측면에서 일본의 역할이 변모하면서 일본은 미국에 의해 제한적인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허용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1997년에 발표된 미일 신안보협력지침은 주변사태에 대한 미일의 협력을 규정함으로써 일본이 동맹국의 분쟁에 개입할 수 있게 한다. 신안보협력지침 채택 이후 제정된 일본의 주변사태법은 “일본국 주변 지역에서 일본의 평화 및 안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사태에 대응하여 ···· 일본의 평화 및 안전 확보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1992년 국내적으로 PKO법 제정을 통해 PKO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하기도 하였다. 비록 주변사태법은 제2조에서 “대응조치의 실시는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행사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된다”고 규정하고 있고, PKO 활동 또한 후방 물자 지원 등 비군사적 활동이지만 이는 일본의 군사력이 더 이상 일본 영토 이내에만 국한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난 7월 1일, 여기에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를 가능케하는 헌법 해석 변경안을 공식적으로 채택했다. 이로써 일본은 그토록 바랐던 보통국가화에 보다 가까이 다가섰다.

 

미일동맹, 그 목적이 무엇이더냐

미국이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적극 지지하는 것은 미국에게 있어 일본의 재무장이 중국을 견제하는 동시에 역내에서 자국의 군사적 부담을 덜어주는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일본의 역할 확대를 통해 부상하는 중국의 힘에 대한 균형을 맞추고, 이를 통해 동아시아 지역의 안정을 추구한다. 하지만 성급한 일본의 보통국가화는 실제로는 동아시아 지역의 불안정을 낳고 있다. 역사 문제의 해결 없이 이루어지는 보통국가화는 일본과 주변국가들의 외교적 마찰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지역의 안정은 군사력을 통한 견제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역사 문제가 해결 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보유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는 중국의 반발뿐 아니라 미국이 전략적으로 포섭해야 할 대상인 한국과 일본의 외교 마찰을 심화시킬 뿐이다.

2014. 07. 06

이근호 (연세대 정치외교)

Newroot2@hanmail.net

 

 

냉전의 잔재인 핵, 평화롭게 없애는 방법은 없을까? – 핵탄두에서 핵연료로(Megatons to Megawatts Pro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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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때는 바야흐로 냉전이 종식되고 구 공산권이 붕괴되는 시점이었다. 이 때 미국은 ‘역사의 종언’을 외치며 좋아만 할 수는 없었다. 미국과학자협회(Federation of American Sceintists, FAS)의 조사에 따르면 소련에는 전략 핵무기는 물론 여전히 최소 2만7천여 개의 핵탄두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핵무기는 그 위험성 때문에 철저한 관리를 필요로 했지만, 연방 붕괴 직후의 러시아 정부는 이를 관리할 의지와 능력을 모두 상실한 상태였다. 이 때, 물리학자 네프(Thomas Neff) 박사는 미국과 소련의 고민을 전부 해결할 수 있는 묘안을 제시했다. 뉴욕타임즈 특별판에 ‘거대한 우라늄 판매(A Grand Uranium Bargain)’라는 제목으로 핵탄두의 우라늄을 폭탄이 아닌 원자력발전소의 핵연료로 사용할 수 있다고 기고한 것이다. 또한 동시에 미국이 소련의 우라늄을 처리하지 않으면, 탈냉전 후 핵군축이나 핵확산 금지 체제 등이 어려워질 수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 결과 1993년 2월 18일 가장 성공적인 핵확산금지 프로그램으로 평가받는 ‘핵탄두에서 핵연료로(Megatons to Megawatts Program)’가 체결되었다.

프로그램의 주요 골자는 구 소련의 핵무기를 미국이 에너지로 변환하여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해체된 러시아의 핵무기에서 고농축 우라늄(HEU)을 추출하여 저농축 우라늄(LEU)으로 변환한다. 이렇게 작은 단위로 쪼개진 우라늄은 미국 원전에서 원자력을 발생시키는 주요 원료로 사용된다. 그럼 미국은 그 대가로 사용된 우라늄의 대금을 러시아에 지급한다. 20년 계약 기간을 두고 한 번도 중단없이 순탄하게 진행되어, 2013년 12월에 계약기간이 종료되었다. 그리고 2014년 4월에 모든 잔금을 완불하므로써 ‘핵탄두에서 핵연료로’는 완전히 종료되었다.

 

국가 지원 없는 ‘상업적’ 거래

1993년 맺은 협정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미국과 러시아의 양쪽 이해관계가 합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 프로그램 수행 당사자는 미국 정부와 러시아 정부가 아닌 민간 회사라는 점이다. 1994년 지정된 협정의 수행자는 미국 에너지부에서 민영화된 미국농축법인(United States Enrichment Corporation, USEC)과 러시아 원자력부의 보조기관인 Techsnabexport(TENEX)였다. 고농축우라늄이 러시아 핵 시설에서 저농축 우라늄으로 전환되면, 그 산물을 USEC가 구매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거래가 민간 차원에서 진행된 것은 양쪽이 ‘핵’이라는 민감한 문제를 두고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두려워했고, 또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러시아가 좀 더 높은 가격에 판매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합의되어야 할 것은 가격이다. 이 부분은 미국과 러시아 모두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 핵탄두가 원자력발전소에서 쓸 수 있는 우라늄이 되려면 두 단계를 거쳐야 한다. 첫째, 핵탄두에서 천연 우라늄을 추출해야 한다. 둘째, 고농축우라늄인 천연우라늄을 전환해서 저농축 우라늄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우라늄을 추출하고 전환하는 과정에서 추가적인 비용이 발생하게 되며, 양측 모두 이 비용을 부담하려고 하지 않아 가격 협상이 지연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우라늄은 실질적으로 약관 체결 이듬해인 1995년 5월에나 출하될 수 있었다. 가격과 비용 문제에 대해서는, 미국이 추출과 전환 비용을 부담하고 러시아가 운반 비용을 부담한다는 조건 하에서 합의가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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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 좋고 매부 좋고

‘핵탄두에서 핵연료로’가 성공적인 결과를 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쓰임새가 높기 때문이다. 2006년 USEC의 중간 조사 결과, 미국 내 가정, 기업, 학교, 병원 등 민간 전역의 전구 10개 중 1곳의 꼴로 러시아발 전기가 공급되고 있었다. 당시 USA 투데이도 USEC를 인용하여 “미국을 향하던 소련의 핵탄두가 이젠 미국 전역의 도시를 비추고 있다”고 보도하며 287톤의 러시아 핵탄두가 우라늄으로 전환되었다고 밝혔다. 2006년까지 공급된 러시아발 핵연료는 미국 내 원자력 발전소에서 사용되는 우라늄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했다.

한편 러시아는 이 협정이 원활하게 진행되자, 미국과의 추가 협정을 통해 1999년에 고농축 우라늄을 저농축우라늄으로 자유로이 변환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약관 당사자인 TENEX는 캐나다, 프랑스, 독일과 같은 전통적 미국의 우방국에 에너지를 수출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TENEX는 이후 수출 국가를 늘려 일본, 멕시코, 중국 등 16개 국에 다각도로 진출하였고, 중국 내에서 원자력 발전소를 건립하는 핵심 사업자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TENEX는 우라늄을 수출하기 위한 교통 및 물류 인프라 역시 개발하고 있다. 에너지 산업을 통해 부활과 부흥을 꿈꾸는 러시아 입장에서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셈이다.

 

종료, 그리고 그 후

2013년 12월, 마지막 고농축우라늄이 러시아를 출발해 미국에 무사히 도달하고, 지난 4월 미국이 최종 대금까지 완납하면서 ‘핵탄두에서 핵연료로’ 프로젝트는 완전히 종료되었다. 미국 측 약관 당사자였던 USEC는 발표를 통해 20년간 폐기된 핵탄두에서 추출된 고농축 우라늄은 500톤에 달한다고 밝혔다. 이는 25kg짜리 핵탄두를 무려 2만 개나 만들 수 있는 양이며, 이 대가로 미국은 러시아에 약 80억 달러를 지불했다. 또한 총 120억 달러를 투입하여 시간당 6조 KW의 전력을 생산했다고 말했다. 이는 석유 100억 배럴, 석탄 30억톤을 사용해 생산해 낼 수 있는 에너지 규모이며, 같은 양의 전력을 생산하기 위해선 석유의 경우 6천억 달러, 천연가스는 4천 200억 달러, 석탄은 430억 달러 등의 비용이 소요된다. 전기 생산 비용도 줄이고 세계 전체의 핵탄두 수를 줄이는데 톡톡히 공헌한 것이다.

그러나 성공적이었다는 평가와 달리 일각에서는 그 한계도 지적한다. ‘핵탄두에서 핵연료로’에 자극 받은 미국 역시 자국의 핵탄두 175톤을 에너지원으로 변환시켜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175톤은 미국이 보유한 전체 핵탄두 수를 고려했을 때 미미한 양이었을 뿐이다. 결국 이 프로젝트는 여전히 세계 최대 핵보유국인 미국의 핵탄두 수를 줄이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게다가 프로그램이 연장되거나 새로운 프로그램이 제시되지 않아서 미완에 그쳤다는 지적도 있다. 이를 두고 러시아는 자국 내 안보 문제로 인한 것이라고 밝히긴 했지만, 구체적인 근거가 제시되지 않았고 미국은 논평조차 없어서 아쉬움을 낳고 있다. 또한 환경공해를 일으키는 우라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자력발전소에 대한 우려가 증폭되면서, 2020년까지 진행될 우라늄을 통한 발전 자체에 우려를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다.

 

원자력에 대한 세계시장의 수요가 높은 상황에서 호평을 받은 ‘핵탄두에서 핵연료로’는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특히 네프 박사가 뉴욕 타임즈에 기고했던 내용은 현재 미국 핵군축과 핵확산 금지 정책과 맥을 같이하고 있어 비슷한 사례를 확산시킬 것으로 보인다.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인도·파키스탄 등 핵보유국이 지닌 고농축우라늄의 수가 천오백 톤으로 추정되는 상황에서, 미국은 가장 많은 원자력 발전소가 있기 때문에 관련 시장에서 큰 손으로 활동할 수 있다. 또한 북한의 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 프로그램이 적용될 가능성도 고려되고 있다. ‘핵탄두에서 핵연료로’와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세계 각국이 실질적으로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길 기대해본다.

 

박새미 (이화여대 정치외교)

saemi1116@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