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 2014 9월

[특집] 월드 파워의 대외정책

foreignpolicy_forall
최근의 국제정세는 냉전 이후 미국 주도의 소위 ‘단극 질서’에서 미국 외의 기타 강대국도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다극 질서’로 변화하고 있다. 이번 <프리즘> 특집 “월드 파워의 대외정책”에서는 국제 사회에서 중요한 행위자로 기능하고 있는 미국, 중국, 러시아, 그리고 유럽연합의 대외정책을 하나하나 살펴본 후, 그 방향성을 나름의 시각으로 파악했다. <프리즘>과 함께 이번 특집 한 편으로 국제 정세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다져보자.

[미국] 헤어지지 못하는 중국, 떠나가지 못하는 중동

[중국] 신중하게 위대하게: ‘대국’으로의 도약을 노리는 중국의 대외정책

[러시아] 러시아, 세계의 심장부를 지배할 수 있을까

[유럽연합] 50년; 통합의 역사, 부활의 역사

2014.9.23

[특집] 신중하게 위대하게: ‘대국’으로의 도약을 노리는 중국의 대외정책

china_rises

2013년 시진핑 지도부의 출범 이래 국제 문제에 대처하는 중국의 태도는 사뭇 달라졌다. 그 변화는 작지만 의미심장한 것이었고, 치밀한 계산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중국의 급격한 부상에 미·일의 초조함은 커졌지만, 중국 지도부는 미·일 양국 외에 EU 및 러시아와도 유연하고 전략적인 관계를 맺으며 점차 세계 질서를 바꿔나가고 있다.

 

도약을 위한 도움닫기

1960년대 말, 국경 분쟁과 사회주의 노선의 차이로 흐루시초프 정권과 소원해진 마오쩌둥은 미국을 끌어들여 소련을 견제하고자 했고, 이러한 발상은 1970년대 ‘핑퐁외교’와 미·중 수교의 토양이 되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사후인 1970년대 말부터 공산당 내부에서는 당의 목표를 마오쩌둥의 ‘전쟁과 혁명’에서 ‘평화와 발전’으로 새롭게 고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으며, 1981년 권력을 장악한 덩샤오핑은 이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국가의 대외정책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미국·소련으로부터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국가의 자주권을 확보하고 대외관계를 안정시키며 이를 토대로 경제성장에 주력한다는 ‘독립자주 대외정책’과 ‘비동맹원칙’이 중국 대외정책의 근간으로 확립되었다. 이 근간은 지금까지도 중국 대외정책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1990년대, 소련이 붕괴하면서 중국 대외정책에도 약간의 조정이 가해졌다.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또 하나의 ‘극점’이 되어,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를 ‘다극화’한다는 새로운 중심 목표가 설정된 것이다. 이는 세계 정세의 급변화라는 외부 요인과 자국 역량을 새롭게 평가한다는 내적 변화가 맞물린 결과였다. 그러나 미국의 막강한 경제력·군사력과 중국의 발전 정도를 비교해보았을 때 다극화는 단기간에 달성될 만한 것이 아니었고, 중국 지도부도 이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다변적인 외교를 통한 ‘평화발전’이 장기간 이루어져야 할 것이었다.
1024px-Gerald_and_Betty_Ford_meet_with_Deng_Xiaoping,_1975_A7598-20A

이후 중국은 연 평균 10% 안팎의 고도 경제성장을 기록해왔고, 2001년에는 세계무역기구(WTO)에도 가입함으로써 국제체제에도 성공적으로 진입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2002년 시작된 후진타오 정권의 대외정책 모토는 ‘도광양회(실력을 드러내지 않고 참고 기다림)’와 ‘화평굴기(평화롭게 우뚝 섬)’였다. 이후 중국은 국제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과 크게 대립하는 일 없이 국내 발전에 골몰했다. 그러나 중국의 조용한 부상에 대해 미국과 일본은 점차 우려와 견제를 표면화하기 시작했다.

 

‘챔피언’ 미국의 견제

세계 군사비 지출 2위와 GDP 2위를 기록 중이며 미국과는 전혀 다른 가치와 신념을 보유한 중국은 현재 미국에게 가장 신경쓰이는 존재이자, 미국이 ‘아시아로의 귀환’ 정책을 서두를 수밖에 없는 제1의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은 세계 패권을 유지하고 자국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중국의 부상을 봉쇄 혹은 미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유도하려 노력하고 있다. 특히 2008년 경제위기 이후 국방비를 지속적으로 삭감해야 하는 미국에게 일본 및 한국과의 군사동맹은 중국을 봉쇄할 수 있는 효율적인 수단이다.

9156446213_30080b1f03_b
한국은 중국과 지리적으로 매우 밀접하고 경제 의존도도 높기 때문에, 미국에 완전히 치우치지 않고 최소한의 균형을 맞추려는 모습을 보인다. 여기에 미국이 제안하는 한·미·일 삼각 체제는 한·일 양국 간 역사 문제와 일본의 태도로 인해 지지부진한 상황이며, 한국 내에서는 한·미·일 대 북·중·러의 대립구도 형성을 반대하는 의견도 존재한다. 반면 우익 민족주의에 기반한 아베 정권은 중국의 부상을 크게 우려하고 있으며, 불안정한 동아시아 정세를 이용해 자국의 군사적 역량을 확대하고, 정식 군대를 보유한 ‘보통국가’로 거듭나고자 한다. 이러한 연유로 일본은 현재 중국과의 갈등을 의도적으로 심화시키고 미국과의 협력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여기에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 영토 분쟁과 과거 일본의 침략 행위에 대한 당당한 태도는 중·일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촉매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 미국의 행보를 살펴보면 오바마 행정부의 ‘중국 조이기’가 점차 노골화되는 듯 보인다. 지난 4월 말, 오바마 미 대통령은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4개국을 순방했다. 이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세력을 다지려는 시도였으며, 순방 국가 목록에서 중국은 제외되었다. 오바마는 4월 25일 성명을 통해 “우리가 관심 있는 것은 중국의 평화적인 부상이지, 중국을 봉쇄하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지만, 그 의도에는 중국을 봉쇄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는 지적이 많다. 일본 방문 마지막 날인 25일, 오바마는 분쟁 지역인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 문제에서 중립을 지켜왔던 기존의 입장을 바꾸어 공동 성명을 통해 이 지역을 미·일 안보조약의 적용 대상에 포함시켰다. 이는 일본의 영유권을 간접적으로 인정한 행동이었고, 중국은 이러한 결정에 크게 반발했다.

 

복잡한 관계, 불편한 공존

중국의 입장에서 일정 수준의 미·일 동맹은 환영할 만한 것이다. 미·일 동맹은 동아시아 질서 안정에 기여하는데다 무엇보다 일본의 군사증강과 보통국가화를 막을 수 있는 주요한 명분이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의 핵무장에 매우 민감한 중국은 미국의 핵우산과 핵확산 방지에 대한 의지가 일본의 핵개발을 좌절시키는 ‘제동장치’ 역할을 한다고 여긴다. 중국 지도부는 지난 2월 26일 화춘잉 중국 외교부 대변인을 통해 “냉전시기 미국이 일본에 주었던 331킬로그램의 무기급 플루토늄을 반환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Gordon_Brown_and_Barack_Obama_at_the_UN
그러나 미·일 동맹에 대한 중국의 ‘호의’도 그것이 중국의 ‘핵심이익’과 충돌하지 않을 때에 한정된다. 중국의 핵심이익은 크게 자국의 정치제도와 국가 안보, 주권, 영토, 경제와 사회의 안정적 발전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핵심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중국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외교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하나는 평화적인 환경 속에서 경제 발전을 지속하여 ‘전면적 소강사회(먹고 살 만한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 주도의 봉쇄를 뚫고 세계적으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다.

지난 3월 4일, 시진핑 국가 주석은 조 바이든 미 부통령과의 만남에서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를 중국의 핵심이익으로 공표한 바 있다. 때문에 4월 순방에서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를 미·일 방위조약에 포함시킨 오바마 행정부에 대해 중국이 미 대사 초치라는 높은 수준의 항의를 표시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중국이 소강사회 건설을 제1목표로 둔 2020년까지, 이해관계를 둘러싼 미·중 간 갈등이 존재할 수는 있어도, 그러한 대립이 외교 단절이나 무력 충돌이라는 극한까지 치닫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두 가지 목표 충돌할 경우 주권이나 영토와 관련된 사안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소강사회 건설이 영향력 확대보다 우선시된다.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이 가진 자본·기술·시장은 중국이 제일 목표로 하는 경제 발전의 기초이며, 이를 지속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곧 소강 사회 건설의 토양이 된다. 미국 역시 환경 문제, 테러리즘, 북핵 문제, 우크라이나 사태와 같은 국제 이슈에서 중국의 ‘전략적 협력’을 필요로 하기에 당분간 중국의 영역을 극단적으로 침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멀지만 편한 관계, EU

중국은 세계 각국과 독자적인 경제 활로를 모색함으로써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에 반발하면서 경제 성장이라는 실리도 챙기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중국과 교역량이 가장 큰 지역 중 하나인 유럽에 대해, 중국은 동반자 관계를 설정하고 무역 협정을 체결하는 ‘일대일 공략’으로 관계 개선 및 유지에 힘쓰고 있다. 중국이 주창하는 ‘동반자 관계’는 안보와 이념의 테두리를 넘어 양국의 공동 이익을 장기적으로 추구하기 위한 관계이며, 무역과 투자 등 경제 교류는 관계의 중요한 골자가 된다. 시진핑은 올해 3월 23일 유럽 순방길에서 네덜란드와 ‘전면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체결했고, 26일 프랑스와도 ‘우선적 전략동반자 관계’를 맺었다. 유럽 국가들과의 동반자 관계에는 보통 대규모의 경제 교류가 뒤따르게 된다. 3월 방문에서 중국이 프랑스와 체결한 계약 금액을 모두 합하면 한화로 26조 원이 넘는다. EU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독일과의 교역도 청신호다. 독일-중국의 무역은 그 총액이 중국과 EU 전체 무역 총액의 1/3을 차지할 만큼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중국과 유럽 간 경제 교류가 이토록 활발할 수 있는 까닭은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기 때문일 뿐 아니라 서로가 정치적으로 크게 거리낄 것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양측은 중국의 근대화 이후 국제 사회에서 대립한 일이 많지 않다. 또 유럽과 중국은 모두 국제 질서가 미국 중심의 단극 체제에서 벗어나 자신들도 중요한 행위자가 될 수 있는 다극화로 옮겨가기를 희망한다. 특히 2012년 8월 30일, 중국 관영 매체 <인민일보>는 중국과 독일이 “극히 보기 드물 정도”로 친밀한 대화 채널을 갖고 있으며, “양국의 정치적 상호 신뢰가 점차 강화”되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은 EU의 리더인 독일과의 관계를 징검다리 삼아 EU 전체에 보다 쉽게 접근하려는 의도를 품고 있다.

 

거부할 수 없는 ‘큰 손’의 유혹

마찰이 전무한 것은 아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제3국의 국제 이슈에 관해서는 주로 미국과 의견을 같이한다. 때문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내에서는 보통 미국과 영국, 프랑스 대 중국과 러시아의 대결구도가 성립되곤 한다. 최근 시리아 사태에서도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이 주장하는 전면적인 군사 제재를 계속해서 반대해왔다. 그러나 ‘경제 거인’ 중국과의 교류로 얻을 수 있는 막대한 투자와 거대한 시장 때문에 유럽 각국은 ‘사적인’ 자리에서는 중국과 밀월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지난 2012년 5월, 티벳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를 비공식적으로 만나 “티벳의 독립을 지지한다”고 발언함으로써 중국과의 ‘밀월 궤도’에서 이탈한 적이 있다. 총리의 발언이 계산적이었는지 충동적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내부 민족 문제에 대한 주권을 침해받았다고 여긴 중국의 반발은 강력했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 홍레이는 “총리의 발언이 가져올 악영향을 없앨 실질적 조치를 취하고, 중·영 관계를 보존하기 위한 행동에 나서야”한다고 촉구했다. 캐머런 총리가 그러한 ‘행동’에 나선 것은 그로부터 1년이 조금 지난 뒤였다. 2013년 10월 영국 정부는 중국인 관광객에게 비자 발급 조건을 크게 완화하겠다고 발표했고, 두 달 후인 12월에는 캐머런 총리가 전격적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실린 한 칼럼은 비자 발급은 핑계일 뿐이며, “총리의 이번 방문이 작년 달라이 라마의 만남과 중국의 분노(fury)에 대한 사과를 의미”한다고 비꼬았다.
Boxer_Rebellion

우리, 친한 걸까

중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포괄적 전략적 협력 동반자’라는 장황한 수식어로 요약된다. 러시아의 적극적인 제스처로 1980년대 후반부터 양국 관계는 급속히 회복되었고, 송유관 건설 사업과 경제 협력, 상하이협력기구 출범 등 정치와 경제 전반에 걸쳐 다양한 교류가 진행되었다. 군사적 측면에서의 협력도 증진되어 지난 2013년 7월 10일, 동해 인근에서 대규모의 중·러 해상 합동 훈련이 진행되었다. 미국 언론은 태평양 해안에서 중국의 이러한 적극적 행동을 미국의 ‘아시아로의 귀환’ 정책에의 대항으로 보고 있다. <뉴욕타임즈>는 7월 10일, “이번 훈련은 미국이 태평양 지역에 더 많은 해·공군 병력을 배치하는 것에 대응해, 중국이 이 지역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분석했다. 중·러의 해상 합동 훈련은 오는 5월 말에도 치러질 예정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소속된 양국은 시리아 내전이나 이란 핵 문제와 같은 국제 이슈에 대해서도 미국을 견제하는 또 하나의 축으로서 대체로 비슷한 행보를 보여왔다. 그러나 양국의 친분은 때로 ‘포괄적 전력적 협력’이라는 수식어만큼이나 공허하게 들리기도 한다.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해 중국 지도부는 “주권국의 내정에 대한 비개입주의 원칙을 지지하고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주권, 영토보전을 존중한다”고 밝혀 러시아의 개입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3월 초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사태의 확대를 막기 위해 모든 국가들이 침착하게 행동하고, 제재를 실행해야 한다”고 밝힘으로써 미국과 독일의 입장을 조심스레 지지했다.

미국이라는 ‘공동의 적’도 중·러 관계를 ‘친분’으로 단순화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뉴욕타임즈>는 양국이 “공통의 어젠다가 부족”하며, 심지어 동남아 지역과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는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는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과 관련해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는 러시아가 동남아 지역과의 점증하는 무기 거래량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반면 중국은 에너지 외교를 통해 전통적으로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고 있던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차츰 키워나가고 있다.
Vladimir_Putin_at_APEC_Summit_in_Thailand_19-21_October_2003-17

결정적으로, 양국은 국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국의 역할을 완전히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중국은 국제 문제에 있어 보다 신중한 입장을 택하며, 다른 구성원들과의 관계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주의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중국이 단순한 지역 패권국이 아니라 세계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계적 패권국으로의 부상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실제로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포린 폴리시>는 3월 5일 한 칼럼에서 “중국의 이해관계는 점차 복잡해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중국의 이웃들이 겪는 갈등에 대해서도 보다 영리하게 대처할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룰 테이커’에서 ‘룰 메이커’로

중국 지도부는 개혁 개방 정책 이래 또 하나의 ‘월드 파워’가 되겠다는 명확한 목표를 향해 빠르고도 치밀하게 다가가고 있다. 2013년 출범한 시진핑 지도부는 제일 목표인 ‘소강사회의 건설’까지 미·일 양국과의 전면 대결은 피하고 있지만, 점차 노골화되는 견제와 ‘핵심이익’의 침해에 대해서는 ‘주동작위(할 일을 주도적으로 한다)’라는 새로운 모토와 함께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다. EU 및 러시아와도 전략적·실리적 외교를 통해 국제 사회에서 영향력 확대를 꾀하는 중이며, 상하이협력기구와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력(RCEP) 등을 통해 새로운 지역 및 국제 질서를 구축하려는 모습 또한 보이고 있다.

2014년 2월 27일, 중국 관영 언론인 <인민일보>는 <파이낸셜 타임즈>를 인용하면서 “지난 5년간 중국은 ‘룰 테이커(rule taker)’에서 ‘룰 메이커(rule maker)’로 변화했다”고 선언했다. 30년 동안 ‘대국’으로의 도약을 준비해 온 중국의 발은 2014년, 이제 지면에서 떨어졌다.

 

김만희 (고려대 국어국문)
Manhee8701@naver.com

 [특집] 헤어지지 못하는 중국, 떠나가지 못하는 중동

foreignpolicy_america
“우리는 지금 전쟁을 끝내고 있으며 앞으로는 더욱 광범한 도전과 기회들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2012년 1월 5일 미 국방부에서 발표한 국방지침서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 21세기 미국 국방의 우선순위(Sustaining U.S. Global Leadership: Priorities for 21st Century Defense)」에서 위와 같이 밝혔다. 보고서에서 오바마는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전쟁을 끝내면서(As we end today’s wars)”라는 말을 반복하여 사용하는데, 이는 지난 10여년간 미국이 치러온 중동에서의 전쟁이 끝나가는 과정임을 의미한다. 즉, 중동에서의 전쟁이 이제는 그들의 국방 우선순위가 아닌 것이다. 이 8페이지의 짧은 분량 보고서에서 미국이 상투적으로 말하는 ‘자국과 자국의 동맹국 및 파트너들의 안정 보장’을 넘어서, 워싱턴은 이제 아시아에 초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오바마 행정부의 핵심 외교 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아시아 중시 정책Pivot to Asia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이제는 끝났다고 언급한 ‘중동에서의 전쟁’이라는 늪에서 미국의 발은 쉽게 빠지지 않는 것만 같다.

 

중동, 너의 의미
1024px-UStanks_baghdad_2003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이후 세계는 미국 주도의 단극체제 하에서 평화를 찾아가는 듯했다. 미국은 중동에서는 긴밀한 동맹국인 이스라엘과 사우디 아라비아를 통해 해당 지역에서 패권국으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였다. 미국이 지역적 영향력 유지와 석유 자원의 확보를 위해 중동 지역에 깊숙이 개입하기 시작한 것은 걸프전(1991)이 발발하면서였다. 중동은 당시 1979년 이란 팔레비 왕조의 무너뜨린 시아파 혁명, 사회주의권 붕괴로 불안한 정세 속에 있었다. 이란-이라크 전쟁(1981~88)과 걸프전은 아랍권 내 권력의 공백 상태에서 발생한 전쟁이었고, 걸프전이 미국 및 연합군의 도움으로 종전된 이후에는 중동 지역에서 미국의 패권에 대한 두려움과 폭력적인 방법으로 석유 자원 경로를 확보하는 미국에 대한 불신과 저항 심리를 남기게 되었다. 이는 결국 역사적으로 정통 이슬람의 가치를 고수하던 국가들과 다른 곳에 비해 서구화, 개방화되어 있는 국가들, 혹은 인종 간 경쟁의식(이란-사우디아라비아)을 가진 국가들 사이에 간극을 심화시켰고, 결국 반미국가(이란, 리비아, 예멘, 알제리 등)와 친미국가(사우디 아라비아, 이집트, 카타르, 쿠웨이트 등의 GCC 국가들)로의 양분을 고착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때 중동 국가에서 생겨난 미국에 대한 불신과 저항 심리는 이후 이슬람 원리주의의 확산을 촉진시켰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슬람 원리주의 집단은 98년 케냐와 탄자니아 미 대사관 폭탄 테러뿐 아니라 2001년 9월 11일 미국 본토의 세계무역센터 빌딩과 국방부 건물에 공격을 가하면서 미국의 안보를 직접적인 위협을 주는 단체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9.11 테러를 기점으로 시작된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2003년 이라크 전쟁을 통해 미국은 자국 안보 수호와 미국적 가치(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공유하는 친미 정권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밑 빠진 중동에 돈 붓기

미국이 막대한 노력을 기울이는 가운데, 중동의 정세가 과연 미국이 뜻하는 대로 흘러갔을까? 9.11 테러가 일어나기 전 미 클린턴 행정부는 균형 예산을 유지, 후임 조지 W. 부시 정권에 재정 흑자를 남긴 채 자리를 넘겨주었으나 9.11 테러 이후 약 1년 만에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GDP대비 1.5% 수준 적자로 재정수지를 반전시킨다. 9.11 테러의 직접적 타격을 받은 세계무역센터가 위치한 뉴욕에서는 일자리 상실, 세수 감소, 사회간접자본 시설 파괴 등으로 약 1000억 달러의 경제적 손실이 발생했다. 더불어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미 국방부 예산이 전보다 4% 증액되어 5000억 달러를 웃돌았다. 미 의회 조사국에 따르면 2001년부터 이라크 전쟁이 종전된 2011년까지 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 투입된 전쟁비용만 약 1조2830억 달러 규모인 것으로 밝혀졌다.

천문학적인 액수를 들인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모든 곳에서 환영 받은 것은 아니다. 특히 시작부터 여러 중동 국가들의 반발에 마주해야 했다. 중동에서 미국의 대표적인 우방국이라 할 수 있는 사우디 아라비아 역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반발로 테러와의 전쟁에서 소극적으로 협력하는 양상을 보여왔다. 미국은 2001년 10월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통해 하미드 카르자이를 필두로 한 친미 정권을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아프간 내 고질적 정치 분열과 치안의 부재로 하미드 정권이 정국을 효과적으로 장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 머물러 있다. 더군다나 미국이 국제사회의 반발을 무릅쓰고 2003년 명목상 ‘대량 살상 무기의 발견 및 무장해제’를 위해 침공한 이라크에서는 결과적으로 대량 살상 무기를 발견하지 못하면서 이내 미국은 침공의 정당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미국-이라크 전쟁은 미국과 영국의 연합군이 침공 초반 승기를 집어 들었지만 내부의 종파분쟁과 지역 점령군의 끈질긴 저항으로 실패한 전쟁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미국의 대(對)테러 공습은 탈레반의 근거지인 파키스탄에서도 이어졌다. 영국 언론 단체 탐사보도국(BIJ)에 따르면 미국의 대테러 전략의 한 축인 드론(무인기) 공습은 2005년부터 2013년 사이 총 376회 이루어졌다. 이 무인기 공격으로 지난해 11월 파키스탄 반군 탈레반의 지도자 하키물라 메수드를 사살하였지만 이에 대한 보복 폭탄 테러가 파키스탄 내에서 계속되는 실정이다.

이 같은 테러와의 전쟁에서 미국의 외교적 ‘성과’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알 카에다의 수장인 오사마 빈 라덴의 사살이다. 하지만 오사마 빈 라덴이 9.11테러의 상징성을 가지고 하더라도 그의 사살이 미국이 말하는 중동 문제의 완벽한 ‘해결’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친미 정권 수립을 목표로 했던 미국의 ‘해결책’은 현실에서 구현되기는커녕, 여전히 그 발을 빼지 못한 채 끊이지 않는 중동 전쟁의 블랙홀로 빠져들고 있다.

 

때 맞춰 등장한 혜성

이처럼 미국이 중동에서 더 이상 발을 넣지도 빼지도 못하는 상황에 있을 때 중국은 세계 제2의 강대국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1978년 덩샤오핑 집권 이래로 중국은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에서 시작해 지금은 시장경제체제를 갖추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은 2012년 말 기준 경제규모∙교역규모∙외국인 투자 유치(FDI) 2위, 외환보유고 세계 1위에 머물고 있다. 2000년에서 2007년까지 국내총생산(GDP) 1위를 굳건히 지키던 미국(당시 미국의 GDP는 2,3,4,5위의 GDP를 모두 합친 것보다 컸다)의 입장에서는 중국의 급격한 부상이 ‘상징적’으로도 위협적일 수 밖에 없었다.
Wang_Qishan_,Obama_Basketball_S&ED

중국의 막강한 경제력은 국방비 증강으로 이어진다. 중국은 지난 10년간 두 자리 수 이상으로 국방비를 늘려가고 있다. 시진핑 주석은 2013년 3월 취임사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강한 군대’를 양성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만큼, 2014년 국방비 역시 지난해보다 10% 늘어난 138조 5000억원 규모로 책정하였다. 반면 미국의 경우 재정적자와 무역적자의 극복을 위해 국방예산의 감축을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영국의 국방 전문 컨설팅사인 ‘IHS 제인스’에 따르면 최근 시퀘스터(미 연방정부의 예산 자동 삭감)의 여파로 미국의 국방비가 올해 처음 상위 9개국보다 적을 것으로 예측했다.

사실 중국의 국방비 증강이 미국의 국방력을 추월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미국은 소련 붕괴 이후 20여년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국방비를 쓰는 나라였다. 미국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최대치의 국방비를 쏟아 붓던 2011년 7113억 3800만달러를 시작으로 2015년 4956억 달러까지 국방 예산을 줄여왔지만, 여전히 전 세계 군비의 33%를 차지하면서 1위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국방력이 중국에 비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중국 정부가 국방비를 정확히 어느 부분에 어떠한 용도로 쓰이는 지 투명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이 이를 불안 요소로 여길 여지가 있다.

무엇보다 아시아 지역 패권을 주도하고자 하는 중국의 야망은 미국이 위협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아시아 지역에서 중국의 영향력의 확대는 중국 주도의 국제질서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새롭게 쓰이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의 개입주의자들의 관점에서 중국의 패권 확대는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곧 미 국력의 쇠퇴를 의미하는 것이다.

미∙중 관계에 있어서 대립만이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중국과의 ‘전략적 동맹 관계’를 맺으며 긴밀한 경제협력을 지속하고 있다. 특히나 미국이 이미 중국에 경제적으로 상당히 의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미 소비자 계층은 중국의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한 중국 제품의 수입을 통해 비교적 낮은 가격으로 제품들을 소비하는 혜택을 누리고 있다. 미국의 기업 입장에서도 중국으로 생산기지를 옮기면서 얻게 되는 기업 이윤(아시아 시장의 효과적 공략과 값싼 노동력으로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으로 사실상 그들이 미국 내부의 대중강경책을 저지하는 가장 큰 계층이라는 것은 ‘워싱턴의 잘 알려진 비밀’이다.

 

모여봐 친구들아, 중국이랑은 놀지 말고

131003-D-BW835-1140
미국은 다른 아시아권 국가들과 다시금 동맹을 강화하면서 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미국이 추진했던 한·미·일 동맹 역시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지난 7월 1일 아베 내각은 일본과 밀접한 국가에 대한 무력 공격으로 “명백한 위협”이 존재하는 경우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보통국가’가 되었음을 선포하였다. 전범국가인 일본이 다시금 집단 자위권을 행사하는 보통국가가 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에서 미국의 지지 없이는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일본의 군사력을 동아시아에서 패권적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더불어 미국은 자국의 우방국인 우리 나라까지 함께 한·미·일 삼각동맹을 맺으며 미국의 대리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허나 우리 나라와 일본은 경제적으론 상호 의존적이지만 두 나라 모두 강한 민족주의 성향을 띠는 나라로, 최근 고조된 역사 갈등으로 미국이 기대했던 두 국가 간의 강한 동맹은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베트남, 필리핀과 같은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미국이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군사 동맹을 강화하는데 발판을 마련해준 것은 다름 아닌 중국과 다른 국가들간의 영토분쟁, 남중국해 분쟁이었다. 이 곳은 2008년 오바마 정권의 출범 이후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인해 국제적 이슈로 크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4월 28일 아시아 순방 중 전통적 우방국인 필리핀을 방문하여 상호방위조약에 대한 지원을 재확인 하고 미군의 필리핀 군사기지 접근 및 이용을 허용하는 내용의 방위협력확대협정(EDCA)를 체결하였다. 미국은 남중국해 분쟁에서 필리핀에 대한 지지를 견지하면서 1992년 전면 철수 이후 22년만에 필리핀에 복귀할 수 있게 되었다. 마틴 뎀프시 미 합참의장 역시 지난 8월 14일, 베트남을 방문하여 미국이 조만간 베트남에 대한 살상무기 금수조치를 해제할 것을 암시하였다. 당시 뎀프시 합참의장은 베트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현재 우리의 가장 큰 이해관계가 걸린 곳은 해양부문”이며 무기 금수의 해제 이후에는 “해당 분야에서부터 협력에 나서야 할 것”이라 말하며 남중국해 분쟁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다시 한번 확고히 하며, 중국을 견제하면서 우방국들과의 동맹을 강화하는 ‘야무진’ 행보를 이어갔다.

이러한 미국과 동맹국들의 움직임에 중국은 미국의 남중국해 분쟁 ‘간섭’’을 지속적으로 견제해왔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지난 8월 11일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왕이 외교부장이 남중국해에 대해 언급한 다음날, 중국 외교부는 홈페이지를 통해 왕이 외교부장의 발언을 별도의 발표문으로 게재하였다. 왕 외교부장은 “역외 국가가 이곳에 와서 함부로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에 반대한다”며 “현재 남중국해 정세는 안정되어 있고 중국과 아세안 관계 역시 양호한 발전추세”를 유지하고 있다며 남중국해의 갈등에 대한 과장된 해석을 자제해달라고 언급하였다.

이외에 미국은 경제적으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rans-Pacific Partnership, TPP)을 통해 중국을 제외한 아시아∙태평양 국가들과 FTA보다 높은 수준의 자유화를 추구하는 무역협정을 추구해왔다. 현재 TPP 협정에는 미국과 캐나다∙멕시코∙호주∙뉴질랜드∙싱가포르∙브루나이∙베트남∙브루나이∙칠레∙페루∙일본 등 12개국이 참여 중이며 협정 체결 시 국내총생산(GDP) 합계로 세계 경제의 40%를 차지하는 최대 규모의 자유무역지대가 생성될 예정이다. TPP는 미국식 FTA를 표준 모델로 삼아 2015년까지 참여국 간의 모든 무역 장벽을 철폐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미국이 주도 하는 만큼, TPP는 회원국 간 지적재산권, 투자, 서비스 등의 규정은 통일되면서 노동권과 환경을 보호하는 등 정부가 주도하는 경제 구조들 가진 중국으로써는 받아들이기 힘든 조항들이 많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TPP 12개국 중 한 국가라도 거부권을 행사하면 다른 국가가 참여하기 힘들기 때문에, 사실상 중국을 배제하는 자유무역협정이며 미국이 위의 협정을 통해 정치적∙경제적으로 중국을 압박하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하다. 결국 미국이 아시아 국가들 과의 정치∙군사적 동맹을 재확인 및 확대하는 하나의 목적은 아시아 국가들에 영향력을 미침과 동시에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려는 것이다.

 

우습지 않니?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이런 세상이

현 오바마 정부 2번의 집권 기간 동안 가장 공을 들인 외교정책이 바로 아시아 중시 정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시점에서, 미국은 공들인 탑이 견고한지 아닌지 확인 할 새도 없이 쉽게 넘을 수 있는 허들에 맞닥뜨리고 있다. 이라크와 시리아에서는 미국이 계획했던 대로 독재자들의 축출 이후 친미정권이 수립되기는커녕, 해당 지역을 기반으로 하여 급진 수니파 무장단체인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ISIL)’ 혹은 ‘이슬람국가(IS)’가 창건되었다. 지난 6월 29일 IS는 이슬람 국가의 건국을 공식 선포하였고 IS는 당시 이미 기존 이슬람 지하드(성전)의 중심세력이었던 알 카에다를 넘어서는 민병대 수준의 무장단체로써의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당시 <월스트리트 저널>은 IS의 세력이 계속해서 확장되고 이는 결국 중동 전역에 이슬람 극단주의 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이라 전망하였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지. 지난 8월 7일 미국이 이라크 아르빌과 모술 댐 공습을 ‘허용’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IS는 20일 미국 언론인 제임스 폴리를 참수하는 영상을 처음 공개한 이후 미국인, 영국인을 참수하고 네 번째 인질을 공개하면서 자신들이 서방의 무고한 시민, 아울러 미국 본토에 직접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각인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IS의 움직임에 미국과 영국은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담에서 IS에 대응하는 정치∙군사연합체를 만드는 방안을 추진하였고 지난 19일 우방국으로는 처음, 프랑스의 IS 공습이 있었다. 미국은 중동지역 국가들을 포함해 40개국 이상에 IS격퇴를 위한 군사적∙인도적 지원 요청을 보낸 상태이지만, 협력을 약속한 중동 지역 국가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
Palestine_www.palestineremembered.com_NK20355
올해 4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 침공에도 미국과 유럽연합은 경제 제재 등을 통해 러시아를 압박하는 일관된 태도를 보여왔으나, 현재까지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간헐적으로 도발하면서 ‘그림자 전쟁’을 이어오고 있다. 오히려 서방의 가장 강력한 제재수단이었던 ‘러시아산 가스 수입 중단’은 러시아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유럽 국가들에게 경제 둔화의 역풍으로 몰아치는 상황이다. 전쟁이 확대될 것을 우려해 군사 개입을 최대한 배제해 왔던 오바마 역시 푸틴의 거침 없는 침공에 군사 개입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무거운 발걸음을 쫓는 날카로운 눈초리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정책은 미국 내에서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지난 8월 28일 갤럽(Gallup)의 조사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4년까지 오바마 행정부에 대한 지지도가 꾸준히 떨어져왔다. 미 국민을 대상으로 실시된 이 조사에서 오바마 행정부에 대해 ‘매우 지지한다’는 답변이 17%, ‘매우 반대한다’는 답변이 39%로 집계되었다. 2009년 실시된 조사에서 ‘매우 지지한다’는 답변이 32%, ‘매우 반대한다’는 답변이 30% 였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라는 상징성을 가진 찬란한 등장과 달리 지난 5년간 오바마의 국내∙외 정책은 크게 환영 받지 못한 모양이다.

더군다나 오바마 1기 행정부 국무장관을 지냈던 힐러리 클린턴은 2016년 민주당 차기 대선주자로 주목 받으면서 역대 최저 수준인 40% 대의 지지율을 기록하는 오바마 행정부와의 ‘거리두기’를 시도하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은 오바마 1기 행정부에서 외교정책을 주도했던 인물이라는 평을 받지만 지난 8월 10일 미 시사지 <애틀란틱>과의 인터뷰에서 “이슬람 급진 무장세력이 발호하도록 만든 것은 오바마 대통령 외교정책의 실패”라며 정면 비판했다. 클린턴 외에도 오바마 1기 행정부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제임스 존스 역시 <월스트리트 저널>에 실은 기고문을 통해 구체적으로 이라크 내전과 시리아 아사드 정권이 화학무기를 사용했을 때 단호히 대처하지 않은 오바마의 중동 정책을 비판하였다.

중동 정책 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오마바 행정부의 소극적인 모습 역시 비판 대상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28일 열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기자회견에서 “우크라이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하지는 않을 것”이라 말하였다. 지금 오바마 행정부는 우크라이나 사태보다 시리아와 이슬람국가(IS)에 정책적 중점을 두고 있는 상황이지만 이날 기자회견에서 IS에 대해 언급하며 “아직 전략을 마련하지 못했다”고 발언하면서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 내부에서의 비판에도 직면하게 되었다.

격동하는 국제 정세에 오바마의 발걸음이 무거운 것은 사실이다. 오바마 행정부의 건강보험개혁, 교육개혁 등 큼지막한 개혁들에 잡음이 생기면서 외교정책을 추진해 나갈 때 필요한 국내 지지에서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허나 사실 오바마 행정부가 맞닥뜨린 진퇴양난의 상황은 사실 그 오로지 현 정권의 책임만은 아니다. 특히 부시 행정부 시기에 시작된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사후 처리가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단선적인 정책 결정의 결과였다. 군사개입보다 다국적 협력을 통해 위기에 대응하겠다던 ‘오바마 독트린’은 이 가까운 선례에서 얻은 깨달음에 바탕한 것이라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 오바마는 단지 과거 행정부들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홀로 지게 되었을 뿐이다.
800px-Barack_Obama_at_White_House_gun_violence_meeting

왕관을 내려놓을 것인가

오바마 행정부의 최대 과제였던 ‘중국 견제’는 주위의 끊이지 않는 제동 장치들로 인해 조금씩 쉬어가는 모양이다. 2기 행정부 초기부터 레임덕 현상이 왔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바마의 임기는 남아 있다. 현 국제정세는 국제정치학자 로버트 길핀의 주장대로 기존 패권국의 쇠퇴로 국제질서∙협력∙제도가 지켜지지 않고 군사적 갈등이 야기되는 상황인 것일까. 미국이 나토(NATO) 및 중동 우방국들과 국제협력군을 꾸려 극단주의 수니파 무장단체 IS를 제압하려는 그 모습은 90년 걸프전의 재연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부상하는 중국과 제국의 자리를 위협받는 미국, 그리고 급변하는 국제정세에서 왕관을 쓴 자는, 무게를 견디기에 버거워 보인다.

 

김은경(국민대 정치외교)
eunkyongkim31@gmail.com

[특집] 러시아, 세계의 심장부를 지배할 수 있을까

russian_lone_bear_8_130

푸틴, 그 사람 히틀러와 다를 게 뭐요

지난 5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 영토 분쟁 문제가 무력 충돌로 번지는 가운데 영국 찰스 왕세자는 캐나다 이민사박물관에서 “지금 푸틴의 행동은 아돌프 히틀러(가 했던 것)와 같다”고 발언했다.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무력 개입이 격화되자 러시아 내 방송국들이 모두 국영으로 전환되며 정부의 검열 하에 놓이게 된 것을 영국 왕세자가 강도 높은 비난한 것이었다.

 

이 남자가 사는 법

우크라이나 동부의 크림반도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지역이다. 명백한우크라이나의 속령이나 자치공화국의 지위를 지니며 주민의 약 60%가 러시아계로 구성돼 있고, 러시아어를 지역의 제2 공용어로 사용한다. 또한 과거 소련의 서기장이었던 흐루시초프가 크림반도를 소련의 연방국인 우크라이나에게 넘겨주기 전까지 러시아령으로 존재했다는 점 등을 러시아는 이곳에 개입하는 명분으로 삼고 있다. 크림반도의 부동항은 러시아의 흑해 함대가 주둔하며 정기적으로 훈련을 벌이는 군사 요충지고, 해로를 통해 러시아가 석유와 천연가스를 수출하는 자원 기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유럽과 러시아를 양 옆에 둔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역할 때문이다. 러시아에게 우크라이나와의 관계란 과거 소련 연방국들의 러시아에 대한 평판이나 충성도를 확인할 수 있는 리트머스지며, 러시아는 이를 통해 러시아의 세력을 유럽에 과시하고자 한다.

Thousands of Ukrainians are continuing to express support to european integration and protesting against decision of Ukrainian government to refuse signing of association with EU in Vilnius. 27 November 2013. Kyiv, Ukraine.

그런 우크라이나에서, 2004년 민주혁명을 통해 들어선 과도정부는 침체된 경제를 살리고자 EU 가입을 추진했다. 그러나 2010년 취임한 친러 인사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이 푸틴과의 밀월 이후 우크라이나의 EU 가입 전면 재고려 성명을 발표했고, 이를 계기로 지난 3월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 반정부 시위가 발발했다. 이 과정에서 민중 시위대와 친러 무장세력이 무력 충돌하며 우크라이나 내 반러 감정이 고조되었는데, 이는 오히려 크림자치공화국에게 독립의 명분을 제공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더욱 격화된 무력 충돌을 견인한다. 그리고 이 틈을 타 푸틴은 동부의 크림반도 지역 자치주의 독립을 지지하고 무장 세력을 지지하며 사태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이를 두고 미국을 비롯한 유럽 정상들의 비난과 경제 제대로 표현되는 국가적 ‘협박’이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크림 반도 내 무력 개입을 불사하는 데엔 CIS(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독립국가연합)로 통칭되는 구 소련의 연방국들을 여전히 러시아의 연방국으로 간주하며 이들을 러시아의 통제 하에 놓고자 하는 푸틴이 있기 때문이다.

1990년 소련연방의 해체 이후 지속적으로 이뤄진 유라시아, 중앙아시아 내 미국의 세력 확대와 유럽의 동진은 냉전 체제 이후 세계 무대에서 재기하려는 러시아에게 큰 걸림돌이다. 유럽, 미국의 연합국 내 세력 확대가 러시아로서는 자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최대 요인이며, 이 난국을 타개하고자 러시아가 취한 외교 전략이 ‘블록화’다.

The_Caucasus_and_Central_Asia___Political_Map_7_6812151

CIS는 러시아가 블록을 형성하는 데 있어 우선 순위를 두는 지역이다. 소련 연방의 해제 이후 1991년 러시아 옐친 전 대통령의 주도로 결성되었으며 당시 구 소련의 연방국 중 발트3국을 제외한 11개국,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기스탄, 키르기스탄, 카자흐스탄, 몰도바가 연합해 만들었다. 각 국의 정치·경제·군사 주권과 상호 동등성을 인정하며 결성되었으나 연방의 해체 이후 우크라이나를 제외한 독립국가 대부분은 경제적 자립이 어려워 CIS 역내 관세 혜택을 통해 러시아로부터 경제적 도움은 물론 군사적 안보 지원과 에너지 개발 등의 보조를 받았다. 그리고 러시아는 이 같은 CIS 내 역학관계를 중앙아시아 및 유라시아 일대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는 주된 수단으로 삼았다.

하지만 2000년대 초 소위 ‘색깔혁명’으로 불리는 민주화 혁명이 조지아(러시아명 그루지야)와 우크라이나, 키르기스스탄에서 잇달아 일며 러시아와 CIS 국가 간 균열이 생겼고, 이는 러시아를 크게 자극했다. 2003년 조지아에서 장기 독재에 반대하며 친러 정부에 대한 민주 시위가 발생하자 러시아는 자국 군대가 주둔하던 조지아 내 분리정책 지역인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를 독립시켜 조지아를 두 동강 냈다. 우크라이나 역시 2004년 ‘오렌지 혁명’으로 불리는 민주화 혁명을 경험했으나 혁명 세력의 내부 분열로 친러 인사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이 러시아의 지원 하에 정권을 잡게 돼 우크라이나의 EU가입이 무산된다.

재기를 꿈 꾸는 거인, 그리고 증후군

2001년 9.11 당시 부시 대통령에게 제일 먼저 전화를 건 외국 정상은 블라디미르 푸틴이었다. 그는 공식 성명을 통해 미국의 아프간 전쟁을 지지하고, 러시아의 뒷마당쯤으로 간주되는 중앙아시아에서의 미군기지 건설을 허락했다. 미국은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키르기스탄에 마나스 공군기지를 건설함으로써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지원하고, 중동 지역에 파병되는 병력과 보급 물품을 지급할 수 있었다. 그 대가로 2002년 G8 정상회의에서 러시아는 2006년 G8 회의의 의장국이자 개최국으로 결정되었고, 북대서양조약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NATO) 역시 ‘나토-러시아 위원회’를 설치해 대화의 창구를 마련했다. 소련 연방의 해체 이후 발 빠르게 진행된 나토의 동진에서 빚어진 러시아와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된 것이다. 러시아 역시 미국과 유럽을 러시아의 경제 성장을 위한 전략적 파트너로 두었고, 이 시기 EU는 러시아의 최대 교역국으로 부상했다. 러시아 역시 푸틴의 집권 이후 박차를 가한 가스관 건설을 통해 EU로 향하는 천연 가스 공급을 책임졌다.

2000년대 초 러시아와 미국·유럽의 우호적 관계는 일종의 ‘딜’이었다. 러시아는 CIS 내 러시아의 영향력을 조절하는 대신, 푸틴 집권 1기 체제 동안 서방 국가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고자 했다. 이를 통해 러시아의 경제, 외교 문제를 해결하고, 궁극적으로는 러시아의 사회적 안정을 도모하고자 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미국과 EU 또한 러시아와 CIS 사이의 관계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으며, 러시아의 ‘개입 강도’라는 것 역시 지금과 달리, 국제 사회에서 우려할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NATO-러시아 위원회의 설치로 중단되었던 유럽의 동진이 2004년 NATO가 발트해3국 에스토니아와 리투아니아, 라트비아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이며 재개됐고, 2003년 이후 민주화 혁명으로 들어선 CIS 민주 정부들은 미국의 전폭적 지원 하에 NATO에 가입했다. 무엇보다 서방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재건을 꿈 꿨던 러시아를 건드린 것은 미국과 유럽의 미사일 방어(Missile Defense, MD) 프로그램이었다.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폴란드와 체코에는 각각 미사일과 레이더 기지가 설치되었다. 이 둘은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으로 2000년대 초 빠르게 부상하는 러시아에 대한 미국과 유럽의 명백한 견제였다. 이 같은 일련의 사건으로 서방 세계와 우호 관계를 맺던 푸틴 집권 1기의 실용주의 외교는 보다 강경한 노선을 걷게 된다. 2007년 2월 뮌헨 안보 컨퍼런스에서 푸틴은 미국의 일방주의 정책과 NATO 확장을 강한 어조로 비판했으며 이에 대한 강력한 대응이 있을 수 있음을 시사했다. 그리고 2008년 푸틴이 총리로 자리를 옮긴 직후, 러시아와 서방세계 간의 갈등은 조지아 전쟁으로 표출되었다.

하지만 러시아와 서방국가 간의 라이벌 의식은 분명 러시아가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거인’으로서의 잠재력이 있음을 반증한다. 이는 군사 문제에 관해 러-미 간 협력의 필요성에 따라 예외적 친선관계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2009년 오바마 정부의 ‘재설정’ 정책 기조와 대통령으로서 푸틴과 다른 정치적 카리스마스를 보여줘야했던 메드베데프 정부 내에서의 요구가 맞물리며 러시아-미국 간 군사 협력의 기반이 조성된 바 있다. 양국 정상은 전략무기감축에 대한 ‘New START’ 조약 체결에 따라 당시 2,200기에 달하는 장거리 핵탄두를 1,550기로, 지상·해상 배치 미사일은 1,600기에서 800기로 감축할 것을 약속했다. 소련 연방의 해체 이후 러시아-미국 간 맺어진 ‘전략무기감축조약(START-1)이 만료되며 새롭게 체결된 이 조약은 냉전 이후에도 세계 전체의 안정에 있어 러시아가 미국의 파트너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한 사건이었다.

러시아와 중국이 부릅니다 ‘우린 친구가 될 수 없어’

1024px-BRICS_leaders_G20_2013-2

푸틴의 집권 이후 약 10년, 국제 유가 급등과 석유와 천연가스 등의 천연자원 수출로 급속히 성장한 러시아는 세계경제를 이끄는 G8의 일원이 되었고, 신흥 경제대국을 아우르는 브릭스(BRICs)의 선두 주자였다. 그러나 2000년대 말 유가 하락과 2008년 전세계에 불어 닥친 금융 위기는 천연자원에 기형적으로 의존하고 있던 러시아 경제에 치명적이었다. 그리고 이 글로벌 위기 국면에서 중국이 미국의 우선적 협력 파트너로 지목되었다. 러시아로서는 강대국으로서의 자존심에 또 한번 커다란 상처를 입는 사건이었다. 글로벌 경제위기를 겪으며 러시아는 천연자원 기반의 경제 성장과 핵무기 보유가 강대국의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단 것을 확인했고, 21세기 전과 같은 일국 독주체제의 한계와 그 현실성을 재진단했다. 그리고 절치부심한 러시아가 꺼내 든 칼은 ‘다자간 협상 외교’이다.

러시아와 중국, 우즈베키스탄과 키르키스스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등 6개국이 결성한 상하이 협력기구(Shaghai Cooperation Organization, SCO)는 중앙아시아를 넘어 유라시아로 확장해 나가기 위해 러시아가 벌린 ‘판’이다. SCO는 소련 연방의 해체 이후 중국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그 주변국의 국경문제를 해결하고자 성립된 상하이-5를 전신으로 하며, 인종 분리주의와, 종교 극단주의, 테러에 대한 회원국 공동의 대응과 척결을 공동의 목표로 둔다. 기구의 조직과 운영에 있어 대장 노릇을 하고 있는 러시아는 역내 중국과 공조하며 중앙아시아에서 미국과 유럽의 영향력을 최소화 해 서방 세계에 대항할 수 있는 블록을 형성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은 러시아와 CIS 국가 사이에서 보였던 1대1의 직접적 개입이 아닌 한층 세련된 형태의 다자간 협상이다.

하지만 서방을 견제하며 비서구 세력의 중심으로 부상하기 위한 수단 자체가 러시아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중국은 SCO 기구 내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4개국의 전통적 유대관계를 인정하고 러시아를 기구의 주도국으로 인정하나 중국의 경제 대국화와 침착한 외교 전략으로 기구 내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중국과 긴밀하게 교류하며 실제 기구 내 역학관계는 중국으로 쏠려가고 있는 모양새다. 중국 역시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SCO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자국의 이익이 분명하다. 중앙아시아와의 우호적 관계를 통해 신장 등 소수 민족과의 갈등이 잦은 서쪽 국경지대를 안정시킬 수 있으며, 보다 효율적으로 자원을 수입할 수 있다. 기존 중국이 석유를 들여오고 있는 말라카 해협은 미국이 지키고 있어 미-중간 외교 관계에 따라 자원 수급에 변동이 생기게 되지만 중앙아시아를 통과하는 육로 가스관을 이용한다면 훨씬 안정적으로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경제 위기에 크게 휘청한 러시아와 달리 2009년에서 2011년 사이에도 높은 경제 성장을 이어간 중국은 2009년 투르크메니스탄-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중국을 잇는 중앙아시아 가스관을 건설했다. 이 같은 새로운 자원 수출의 판로 개척은 그 동안 유럽으로 향하는 가스 수송관을 독점해 오던 러시아에 대한 중앙아시아국들의 불만 표현이었으며, SCO를 이용해 역내 새로운 세력과 언제든 공조할 수 있다는 제스처였다. 중국의 영향력 확대로 인해 러시아는 집단안보조약기구(Collective Security Treaty Organization, CSTO)나 유라시아경제공동체와 같은 다른 협상기구들로 루트를 다각화하며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안보·경제 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나 이들 기구에서 역시 NATO와 EU라는 경쟁자를 상대해야 한다는 어려움을 안고 있다.

경쟁과 견제라는 SCO 내 러시아와 중국의 역학관계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전략적 협력관계’라는 거창한 말로 서로를 결속하고 있다. 1996년 러시아와 중국은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설정해 미국의 일방주의에 맞서는 다극체제를 선언했다. 당시 서방 세력은 옛 공산주의 패권의 부활을 우려했으나 이 둘은 자신들의 공조가 군사적 동맹을 의미하지 않음을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2001년 선린-우호 조약 8,9조는 양국은 “상대방의 주권, 안보, 영토적 통합성을 저해할 수 있는 어떠한 동맹이나 블록에 참여하지 않을 것, 상대방을 위협하는 세력들에 영토의 사용을 허락하지 않을 것, 상대방의 평화와 안보가 위험에 처할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즉시 접촉하고 논의할 것”이라고 명시함으로써 사뭇 공고해진 둘의 관계를 밝혔다.

미국을 위시하는 서방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러시아와 중국은 서로를 동반자로 설정했지만 이 둘의 결합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이고 이해타산적인 필요에 의해서다. 이 오묘한 관계를 “전략적 동반자 관계” 이상의 그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세계의 심장을 지배할 수 있을 것인가

Vladimir_Putin_in_Iran_16_17_October_2007_3_5_8445767401

동유럽을 다스리는 자가 심장지역(Heart Land)을 지배하고, 심장지역을 다스리는 자가 세계의 섬을 지배하고, 세계의 섬을 다스리는 자는 세계를 지배한다. 소련의 범위와 일치하는 유라시아의 중요성을 강조한 영국의 지정학자 핼포드 맥킨더가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출간한 <민주주의의 이상과 현실>이라는 책에 기록한 내용이다. 그리고 20세기 국제정치학자 스파이크만은 “유라시아를 지배하는 자, 세계의 운명을 통제한다”고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중동 일대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그의 저서  <평화의 지정학>를 통해 재차 강조했다.

푸틴은 CIS국가 포섭을 통해 옛 소련연방국의 부활을 끔 꾸고 있다. 2010년 러시아 군사독트린은 군사 협력의 파트너로서 단일 국가로는 벨라루스를 먼저 언급한 뒤 옛 소련연방국들이 속한 CSTO, CIS를 러시아 군사 안보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로 호명했다. 러시아는 미국 중심의 일극주의 해체를 명분으로 미국에 대항하고 있지만, 러시아의 푸틴이 바라는 것 역시 세계의 질서를 이끄는 패권국으로서의 부활이다. 그리고 2018년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푸틴에게 그 실질적 방법이란 중앙아시아 및 유라시아 국가들과의 블록 형성이다. 미국과 유럽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세계 심장부의 통합을 이끌어 내고, 이 중원을 다스리는 붉은 곰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여러모로 서툴고 성급한 러시아가 믿고 있는 것은 ‘영웅’ 푸틴 뿐이다.

김주량(이화여대 사회)
jasmin5203@gmail.com

[특집] 50년; 통합의 역사, 부활의 역사

1538862_10152096488402396_8490698814234237420_n
두 번의 세계대전 이후 국제 안보는 냉전의 블록 속에서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초강대국에 의해 규정되고 운영되었으며, 유럽은 보통 두 강대국들 사이에서 비교적 중립적인 행위자로 기능했다. 냉전 당시에도 서유럽은 대외정책을 펴는 데에 있어 독자성을 갖기 어려웠고, 국제분쟁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냉전이 종식된 1990년대 이후부터 적극적 개입 정책, 특히 군사 파병에 대한 EU의 인식이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2003년 이후 EU의 태도는 변하여 점차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통해 국제무대에서 주체적으로 활동하게 됐다.

 

소극적인 아이

20세기 후반 서유럽국가들은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후 대외정책을 실현하는 데에 있어, 대체로 무력 사용을 통한 개입을 꺼렸다. 2차 대전의 종전 이후 반세기 동안 EU는 대외적인 팽창 외교정책을 펴기 보다는 각국의 국내 재건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유럽 부흥 계획’이라고도 불리는, 1947년 7월부터 시작된 마셜플랜은 미국이 유럽과 일본내의 공산주의 확장을 막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럽을 재건하는 것 또한 중심 목표였다.
7611835700_1363e68266_z
유럽 국가 내에서 세계대전이 남긴 상처들이 차츰 치유되고 기존의 양극질서가 붕괴되는 와중인 90년대에는 발칸반도에서는 여러 차례 분쟁이 발생하였다. 1992년부터 시작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분쟁은 유교연방으로부터 독립하려는 보스니아에 대한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인들의 반발로 인하여 시작되었다. 그러나 92년 유럽의 내부에서 시작된 이 분쟁에 대하여 유럽공동체는 약 25억 유로의 경제적 원조 외에 군사조치를 포함한 어떠한 적극적인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1995년, 결국 미국의 중재로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3개국은 제네바에서 영토 분할에 대해 합의하였고, 그해 11월 미국의 데이튼에서 내전 당사국들 간의 평화 협상이 이루어졌다. 이 자리에는 비록 유럽의 주요국들이 대거 참석하였지만, 평화 협상 체결을 이끄는 주된 역할을 한 것은 미국이었다. 그리고 3년 동안의 내전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던 보스니아 내전은1995년, 유럽국들이 아닌 UN의 평화유지군 파견으로 막을 내렸다.  유럽 내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해서 당시의 유럽은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주도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

마크 에이스컨스 벨기에 전 국무총리는 “EU는 경제로는 거인, 정치로는 난쟁이, 군사적으로는 지렁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정치, 군사적으로 힘이 부족했던 유럽은 이를 보완하기 위해 무엇보다 국가들 간의 통합이 우선이라고 생각했고, 1993년 11월 1일 유럽공동체(EC)에서 유럽연합(EU)로 새롭게 변화하였다. 이로써 EU회원국들은 공동의 외교 및 안보정책을 갖게 되었다. 이는 과거 유럽국들은 유럽 내의 분쟁을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던 위치로부터 점차 탈피하기 시작했고, 국제무대에서 보다 존재감 있는 역할을 하기 위해 점차 통합·성장해 나갔음을 의미한다.
Evstafiev-bosnia-sarajevo-un-holds-head
이렇게 점차 EU 국가들이 통합되어가는 과정에서 1998년에 발생한 코소보 사태는 EU의 외교안보정책 변화에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코소보 사태 직후 1999년 쾰른에서 열린 회담에서 유럽이사회는 EU의 군사력 및 공동방위능력 향상을 위해 유럽안보방위정책(ESDP)을 수립하였는데, 이는 EU회원국들의 군비와 병력의 통합과 유럽군 창설 등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그 후 EU는 특히 군사적인 면에서 독자적으로 국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 1999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유럽 정상회담에서 ‘European Headline Goal’을 발표하였다. 이 합의의 골자는 2003년까지 6만 명 규모의 유럽연합 신속대응군(ERRF)을 창설하는 것이었다. 또한 “베를린 플러스 조약(Berlin-Plus Agreement)”이라는 유럽안보방위정책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이 설정되었다. 베를린 플러스 조약은 국제 평화유지와 위기 관리를 위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관여하지 않을 경우, 유럽연합이 NATO의 병력을 이용해, 자신의 이름 아래 주도적이고 독자적인 군사 활동을 개시 할 수 있도록 허용한 조약이었다. 신속대응군의 창설과 베를린-플러스 조약을 통해 EU는 독자적이고 통합된 군사체제를 갖출 준비를 마쳤다.

 

콘코디아’, 최초의 단독 군사작전

2003년 EU는 국제 분쟁 조정을 위한 최초의 군사작전을 수행하였다. 신속대응군의 창설과 Berlin-Plus Agreement를 통해 갖추었던 군사체제를 이용한 외교정책을 처음으로 실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작전명 ‘콘코디아’ (Concordia)로 일컬어지는 불리는 마케도니아 평화유지 임무는 350명이라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파견 병력으로 마케도니아에서 벌어진 소수 알바니아인과 정부군간 분쟁을 조정하는 것이었다. 이 작전을 통해 유럽은 EU라는 주체로서 첫 군사행동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실질적으로 EU만이 직접 독자적인 군을 파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NATO의 병력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미국과의 합의는 선결조건이었고, 작전 중에도 미국이 보유한 정찰기와 전략수송기를 이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마케도니아 평화유지 임무를 NATO로부터 인수해 사상 첫 군사작전을 수행함으로써 EU는 점차 적극적이고 독자적인 군사정책 구조를 설립할 발판을 마련했다.

같은 해, EU는 미국과 NATO의 지휘 없이 또 다른 국제 분쟁 해결을 위해 독자적으로 군사 행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콩고의 소수민족인 해마족으로 이루어진 콩고애국자동맹(UPC)과 다수민족인 렌두 부족 민병대연합 등 2개의 반군단체 간 충돌로 이투리 지역에서는 지난 99년 이래  5만 여 명이 목숨을 잃고, 50만명의 난민이 발생하였다. EU는 이러한 콩고 분쟁의 중단을 위해 평화유지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고 프랑스가 주축이 되어 약 1,700명의 군사들이 NATO로 부터가 아닌 EU로 부터 직접 파견되었다. 이는 EU가 처음으로 유럽 외의 국가에게 군사를 지원했던 사례이기도 하다.

 

생각도, 마음도 하나될 있도록

90년대 말 부터 시작된 독자적 군사운영체제를 통해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EU도 군사작전을 통한 국제 문제 해결에 실질적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국제 무대에서 조금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EU가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펴는 과정에서, 현실적으로 모든 회원국들이 통일된 주장을 내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단일 국가 내에서의 의견 통합도 어려운 실정에서 다양한 국가들이 한 목소리를 내기에는 아직 경험도 부족했고 이해관계의 불일치도 컸다. 2003년 일어난 이라크 전쟁은 EU가 통합되어가는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하나된 목소리를 내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EU는 이라크에 무력을 사용하려는 미국에게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표출하였지만, 무력 사용여부에 대한 EU 회원국들 간의 의견 충돌이 있었다. <뉴욕타임즈> 에 따르면 시라크 프랑스 전 대통령은 “어떤 상황이 올지라도 프랑스는 무력사용 및 이라크 파병에 대한 거부권을 표명할 것”이라고 언급했으며, “전쟁 발발의 주 원인이 될 수 있는 이와 같은 행동에 대하여 찬성할 수 없다”는 의견을 밝혔다. EU 설립의 주축이었던 독일 역시 같은 입장이었지만, 두 국가들과 반대로 영국과 스페인은 미국의 의견에 동의하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라크 파병에 대한 회원국들간의 갈등이 고조되자 스페인의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전총리와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전총리는 “EU 회원국들이 모두 한 마음으로 공공의 위협(이라크)에 맞서자”는, 미국을 지원하기 위한 서명안을 내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EU의 대표국이었던 그리스의 아포 스톨 장관은 “이라크 전쟁은 EU의 통합 과정에 피해를 주고 있다”며 “만약 우리가 국제사회에서 유럽국으로써 영향력을 가지고 싶다면 통일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로가 공통된 외교 안보 정책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전쟁 당시 EU국가들은 하나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사춘기를 지나, ‘EU’만의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국제 무대에 나서기는 했지만, EU회원국들이 의견을 통합하는 데 겪었던 어려움은 시리아 사태를 계기로 점차 극복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2011년 3월 시리아의 독재자 알아시드의 퇴출에 대한 반정부시위로 시작된 시리아 사태는 2012년 내전으로 치닫기 시작하였다. 시리아 사태를 중단하기 위해 EU는 수 차례의 적극적인 제재 조치를 취하였는데, 이라크 전쟁 때와는 다르게 EU의 ‘주요 3국’인 영국, 프랑스, 독일이 비록 그 방법에 있어서 차이를 드러냈지만, 제재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데는 의견의 일치를 보였다. 다른 국가들 또한 세 국가의 의견을 지지하는 구도였다. 시리아 사태에 대해 EU는 적극적이지만 비군사적인 제재를 선호했다. 매년 미국과 유럽에서 실시되는 설문조사인 ‘범 대서양 경향(Transatlantic Trends)’ 에 따르면, 유럽 국민들의 71%가 EU가 세계 무대에서 리더가 되는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지만, 그 중 70%이상이 비폭력적인 제재 방법을 원한다고 밝혔다.

<뉴욕타임즈>는 시리아가 경제, 무역, 여행등의 분야에서 미국보다 EU와 더 친밀한 교류를 해왔다고 보도했다. 특히 EU는 시리아 전체 인산염 수출량의 40%를 수입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시리아에 대한 EU의 경제 제재 조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그 외에도 제재안에는 시리아 중앙은행의 자산동결, 다이아몬드·금과 같은 시리아산 귀금속 수입 금지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EU는 무력 개입보다는 이러한 경제 조치와 외교적인 접근을 통해 사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캐서린 에쉬턴 EU 고위 대표는 ‘시리아는 무력진압을 중단하고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고 공식적인 목소리를 내었으며, EU는 비샤르 알-아시드 시리아 대통령 정권에 대한 반정부 시위대의 유혈 사태와 관련해 2011년부터 2012년까지 수 차례에 걸쳐 제재 조치를 취하였다.

 

 러시아의 ‘활약’에 숨 고르는 미국, 대타로 나서는 EU
RIAN_archive_186607_German_Chancellor_Angela_Merkel_pays_a_working_visit_to_Russia

EU의 가까운 동쪽에서 발생한 일련의 충돌과 위기들은 EU의 적극성을 보다 심화시켰다. 우크라이나 반정부 시위 이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무력 점거하고 크림자치공화국의 합병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 미국과 서방국가들, 특히 EU는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이러한 러시아의 행보가 나타났던 초기에는 미국이 서방국가들을 대표하여 공식으로 선언했지만, 곧 오바마 대통령이 독일의 메르켈 총리에게 러시아 제재 주도권을 넘긴 이후 독일을 위시한 EU는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여기에는 더 이상 모든 것을 혼자 떠안을 수 없다는 미국의 자기고백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독일과 러시아의 경제적 동맹관계는 EU가 더 일찍 강력한 조치를 취하는데 어려움을 주었기 때문에, EU는 초기에 러시아와 비자 면제 협상을 중단하는 등의 가벼운 제재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협상에 진전이 없자 메르켈 총리는 러시아의 은행 계좌 동결과 여행규제 등과 같이 제재의 수위를 높일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올해 3월 19일, 독일의 경제부총리 지그마르 가브리엘은 “독일 정부가 독일의 군사산업 기업인 라인메탈이 러시에서 진행하는 가상 전투 훈련장 건설을 중단시켰다”고 발표했다. 독일과 러시아가 2011년 체결한 ‘라인메탈 프로젝트’는 라인메탈이 러시아 볼가 지역의  뮬리노 시험장에 가상 전투 훈련 센터를 건설하는 프로젝트이며, 훈련장 건설은 러시아군의 연료 절약 및 장비 노후화의 감소 덕분에 몇 년 내에 그 진가를 발휘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었다. 시리아 사태 이후 EU는 군사조치를 제외한 경제적인 조치만을 취해왔었으며, 우크라이나 사태가 교착 국면에 접어들자, 차츰 제재 수위를 높여갔다.

우크라이나 사태 초기의 여러 제채 조치 이후, 러시아를 제재하기 위해 강경한 조치를 취해야한다고 하나된 목소리를 내었던 미국과 EU는 최근까지 조금의 의견 차이를 보였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사태를 더 심화 시킨 러시아에게 이전 보다 강력한 제재 조치를 취해야한다고 주장하던 반면, 프랑스와 독일은 미국이 주도하는 경제 재제에 대하여 이제는 직접적인 제재 보다는 대화를 통한 협상을 해야한다는 의견을 내새웠다. 미국은 러시아 정부가 대주주로 있는 8개의 기업들에 대해 미국 금융시장 접근을 차단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지만, 유럽은 유럽투자은행(EIB)과 유럽건설은행(EBRD)의 러시아 신규투자를 당분간 중단시키기로 하는 추가 조치만 취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결정적으로 유럽과 러시아 사이의 경제 투자 정도와 그 분야는 미국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고 다양한 것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7월 17일 우크라이나 남동부에서의 말레이시아 항공 추락은 또 다시 러시아 제재에 대한 EU의 입장을 혼란에 빠뜨려놓았다. 말레이시아 항공 MH17의 사망자 298명 중 193명이 네덜란드 국적이며, 이에 더하여 영국, 독일, 벨기에 국적을 합하게 되면 211명으로 전체의 71%가 유럽인이었던 것이다. 러시아와 우르라이나의 친러 세력이 개입된 것으로 추측되는 이번 항공기 추락 사고는 러시아에 대한 EU의 분노를 다시 한번 키울 수 밖에 없었다.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외무장관은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반군 간의 충돌을 줄이는 데 충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말했고, 7월 22일 결국 프란스 티메르만스 네덜란드 외무장관은, EU 장관들이 러시아 관리들에 대해 비자 금지와 자산 동결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고 발표하였다. 또한 <FOX NEWS>에 따르면 EU 집행위원회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물러서지 않을 경우 무기와 에너지, 금융 분야를 포함한 전면적인 제재에 나설 예정이라고 밝혔다. EU는 더 이상 과거의 소극적인 대외정책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또한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를 둘러싼 강력한 경제적 제재들은 러시아와 EU 사이를 예전과 같지 않게 만들었다.

 

EU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경제 거인”?, 중국과의 동반 성장 노린다

올해 3월 22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제3회 핵 안보정상회의 참석과 더불어 유네스코 본부와 EU 본부를 방문하였다. 중국 매체인 <신화통신>은 “시진핑 주석이 EU 브뤼셀 본부를 방문하여 중국과 유럽이 평화ㆍ성장ㆍ개혁ㆍ문명의 4대 파트너 관계를 구축할 것을 제안했다” 고 보도했다. 이에 대하여 EU의 반롬푀이 의장 또한 “시진핑 주석의 EU 본부 방문은 중국-유럽간 전략적 파트너관계의 탄탄함을 보여준다”고 보도하였다. EU가 국제정치적으로 발전하고 변화함과 함께 중국 또한 지속적이고 빠른 경제성장으로 국제적인 주요 행위자로 부상하며 EU와 가까운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이후 EU와 중국은 각종 국제현안 및 문제들에 대하여 서로의 입장을 공유하는 ‘전략적 동반자’적인 관계를 형성하였다. EU의 회원국들 가운데 독일과 네덜란드는 중국의 제1, 제2 무역파트너이고, 프랑스는 신중국과 대사급 외교관계를 처음으로 맺게된 서방국가이다. 중국과 유럽 국가들은 역사적으로 근본적인 이해충돌이 없고, 양측 모두 세계정치의 다극화를 주장하고 있다.

올해는 중국과 유럽이 <중국-EU 협력 2020전략계획>을 시작하는 해이다. <중국경제일보>는 이번 전략 계획은 “중-EU의 평화, 안전, 번영을 위해 지속가능한 발전, 인적자원 및 문화 등의 협력강화를 공동목표로 설정하였다”고 밝혔다. 이러한 전략계획은 경제, 정치 분야의 발전과 개혁의 시기에 놓인 중국과 유럽의 경제동맹관계를 더 가까워 질 수 있도록 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최근 몇 년간 중국과 EU 회원국들 간의 상호 교류도 빈번히 진행되어 왔으며, 20년간의 양국 무역 교류는 서로에게 큰 변화와 발전을 가져 왔다. 중국-EU의 호의적인 정치관계는 양자간 경제무역협력의 발전을 촉진하여 최근 몇 년간 중국-EU의 무역액은 해마다 20%이상씩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다. 만약 중국과 함께 경제 활력을 잃지 않고 지속 성장을 꾀할 수 있다면, EU의 결속력과 대외 발언권을 유지 및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근간이 마련될 것이다.

 

앞으로도 잘 해낼 수 있을까?

EU의 결성과 통합에는, 국제 문제에의 적극적 개입이 큰 영향을 주었다. 콘코디아 작전을 비롯한 1990년대 초 군사 작전은 EU가 기존의 소극적 성향에서 보다 적극적인 대외정책으로 탈바꿈하는 전환점이었으며, 동시에 대외정책과 안보 분야에 있어서 EU의 통합을 가속화하는 촉매로 작용하기도 했다.

EU의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대외정책의 방향에는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어느 정도 자율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빼놓을 수 없다. 이스라엘을 지지해오던 미국과는 달리, 2013년 EU가 이스라엘의 ‘그린라인’을 벗어난 지역과 정착촌내의 지역과는 경제적 교류를 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면서 이후 EU는 이스라엘과의 무역협정에서 여러 경제 제재 조치를 내놓았었다. (링크, 47쪽)

최근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공격에 대해서도 유럽 국가들은 하마스의 입장을 어느 정도 옹호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유엔인권이사회(UNHRC)는 “이스라엘내 군사작전으로 발생하고 있는 인권 침해를 강력하게 규탄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발표하였는데, 이 결의안에 대해 미국만 반대표를 던졌다. 또한 파리, 베를린, 빈, 암스테르담 등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는 반 이스라엘 및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가 진행되고 있다. 반면, 7월 18일부터 20일까지 실시된 CNN/ORC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57%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군사작전이 정당하다는 반응을 보였고, 10%만이 이스라엘의 무력 사용이 과도하다는 응답을 보인 바 있다.  양차대전 이후 EU와 미국은 대부분의 국제문제에 대해 서로 비슷한 입장을 취해왔지만, 미국 주도의 단극질서가 붕괴되기 시작하고, 미국이 동맹국들의 적극적인 ‘협력’을 요청하면서 EU의 자율성은 상대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4768764591_9e4f7f0eb8_b

한 때 세계의 강대국으로 불리우던 유럽의 몇몇 국가들과 더 많은 유럽국들이 합쳐져 현재 28개의 국가들로 구성된 EU는 현재까지 비교적 성공적인 국가 통합 기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장밋빛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2008년 그리스부터 시작된 경제위기와 여기서 비롯된 EU 내부의 갈등과 격차는 EU의 통합에 극복해야 할 장벽을 여실히 드러내주었다. 또 세계적인 경기 침체가 계속되면서, EU는 비록 중국과 접촉하는 등 개별적으로 활로를 모색하고는 있으나 내부에서는 통합에 대한 반발감 역시 커지는 듯하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최근 극우 정당들의 행보가 돋보이는 것도 이러한 국민 감정이 반영되는 까닭으로 보인다. 지난 50년 통합의 궤적 위에서, 과연 EU는 하나의 강력한 주체로서 다시금 국제 사회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힐 수 있을까?

 

표혜수(연세대 국제학)
sarahpyo8@gmail.com

김만희 (고려대 국어국문)
manhee87011@naver.com

우리에게 1차대전은 무엇이었는가

firstworldwar

100년 뒤에 생각하는 동아시아의 1차대전 (1)

 

역사로부터의 교훈’?

“지금 만찬회를 연 올해가 2014년입니다만, 이 해는 우리가 여러 중요한 날들을 기념하는 해이며 오늘날까지도 독일과 유럽을 형성하는 사건들을 돌아보는 해이기도 합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지난 6월 11일, 연방 수상 관저에서 연 외교단을 위한 만찬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메르켈 총리는 그러한 기념일 중에 100년 전 발발한 1차 세계대전을 기억할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이것은 단지 과거에 관한 문제만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와 관계가 있으며 오늘날 정치와 외교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문제”라고 말했다. 총리는 “우리는 역사로부터 무엇을 배웠습니까?”라는, 다분히 상투적으로 들리는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교훈은 간단했다. 독일은 대화를 통한 조율의 힘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차대전으로 치달은 1914년 7월 위기는 본질적으로 소통의 부재로 인한 위기였습니다. …사람들은 신뢰의 분위기가 아니라 의심의 분위기에 지배 당했습니다. …오늘날 실시간 정보의 홍수조차 인적 교류를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외교의 큰 이점의 하나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메르켈 총리의 말 속에서 1차대전이 재발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감지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총리는 대화와 외교 역시 나치즘과 같은 반인륜적 이념과 충돌할 때는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총리는 곧바로 세계대전을 겪은 이후 유럽이 이룩하고 구가하는 평화를 언급했다.

“20세기 전반의 재앙에 비춰보면, 20세기 후반 유럽의 통합 과정은 기적처럼 보입니다. 2차대전 이후 평화와 자유와 번영의 희망을 품은 유럽의 선각자들은 전쟁의 깊은 골과 해묵은 적대감을 잇는 다리를 놓기 시작했습니다. 서서히, 그러나 성큼성큼 이 희망들은 결국 성취되었습니다.”(링크)

다시는 파괴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평화와 안정을 일단 구조적으로 확립해 놓은 사람으로서는, 1차대전의 핵심적 측면으로 전쟁과 파괴의 구조적 조건을 굳이 지적하지 않는 것이다. 그에게 1차대전의 교훈이란, 외교에서 무력이 아니라 대화에 의존해야 한다는 교과서적 진리로 한껏 축소되어 있다. 이 ‘역사적 교훈’에는 역사성이 사상되어 있다.

 

Agriculture_in_Britain_during_the_First_World_War_Q54597
역사 바깥의 사건으로서의 1차대전

100년 전 1차대전의 참상을 떠올린다면, 메르켈 총리의 이 발언은 한 세기 동안 유럽의 국제 관계가 얼마나 급격히 바뀌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14년 6월 28일 프린치프가 사라예보에서 페르디난트를 저격하고서 한 달 남짓 지났을 때, 유럽 대륙은 이미 전쟁 속으로 빨려 들어가 있었다. 그해 9월이 되자 서부로 신속히 진군하려 했던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의 반격에 발목이 붙잡혀, 대살육의 쓰라린 맛을 경험했다. 예컨대 고작 8일 간 벌어진 마른 전투에서만도 이 3개국의 군인 200만 명이 맞붙었으며 그 가운데 50만 명이 죽거나 다쳤다. 이 싸움을 계기로 독일의 야심찬 슐리펜 계획은 개전과 거의 동시에 붕괴해 버렸다. 100년 전 이맘때라면 독일인 지도자가 이처럼 여유롭게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메르켈 총리가 자신의 발언에 대해 가지는 진정성을 의심할 이유는 없지만, 독일을 포함한 유럽이 1차대전 자체를 얼마나 현재의 문제로 생각하는지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유럽인들은 1차대전에 상응하는 잠정적 위협의 실현 가능성을 진지하게 상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제정치이론가 알렉산더 웬트는 『국제정치의 사회적 이론』에서 유럽연합의 성공 사례에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인지, 국가 간 친선 관계가 수립된 ‘칸트적 문화’의 국제사회는 적대 관계의 ‘홉스적 문화’나 경쟁 관계의 ‘로크적 문화’로 퇴보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까지 주장했다. 일단 유럽연합이 성립되고 나자, 최근의 유로존 위기로 인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유럽이 군사적 적대 관계로 돌아가지는 않으리라는 인식은 공유되고 있다.

전쟁의 비극적 기억이 이러한 평화적 현실과 맞물리면서 1차대전을 대하는 태도에는 새로운 면모가 한 가지 더해진다. 1차대전은 유럽과 미국에서 줄곧 대중적인 주제이기도 했지만, 전쟁 100주년을 앞두고 혹은 맞이해서 구미에서는 관련 도서가 여럿 간행되면서 새삼 많은 인기를 끌었다. 출판계뿐 아니라 유럽 각국의 정치 지도자와 일반 국민도 마찬가지로 1차대전 100주년이 되자 이를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를 열기도 했다. 그러나 메르켈의 연설에서 보듯 유럽에서 1차대전이란 어디까지나 다시 일어날 리는 없는 과거 참극에 대한 기억, 그리고 이미 확립되어 있는 유럽 통합의 현실을 틀어쥐기 위한 공통의 기억으로서만 존재한다. 결국 유럽에서 1차대전이란 자신의 역사에서 다시는 재현될 수 없는 사태, 현재 살고 있는 역사의 바깥으로부터 인위적으로 소환되는 기억 속의 사태로서만 의미를 가진다. 오늘날 유럽에서 이 전쟁은 역사적인 것에 대한 인식을 강조해야 하는 주된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변화해 버린 국제정치적 상황 속에서 실질적으로는 종교적 의례의 소재로 역할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 당대사로서의 1차대전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이렇게 말했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민족에게 소멸될 것을 각오하고 부르주아적 생산 양식을 채택하도록 강요하며, 그들에게 이른바 문명을 도입하도록 강요하는데, 이것은 곧 그들 자신 부르주아지가 되라고 강요하는 것과도 같다. 한마디로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모습대로 세계를 빚어내는 것이다.”

이 유명한 말에서 ‘부르주아지’를 ‘서방 국가’로 바꿔서 읽는 것이 허용된다면, 우리는 이 대목이 제국주의의 대외 팽창 양상에 대한 훌륭한 요약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이 글을 쓴 것은 19세기 중반이었지만, 그가 묘사한 유럽적 국제정치의 자기 전개는 향후 100년 동안 심화되어 갔다. 양차 세계대전에서 정점에 이르는 이러한 경향 속에서 ‘부르주아지의 모습’대로의 재편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지역은 아마도 동아시아일 것이다. 명청대에 전형적으로 형성된 동아시아의 중국 중심 화이질서는 서방과 그 아류적 변형인 일본에 의해서 해체되어 제국주의 세계로의 재편을 거쳐 오늘날과 같이 복수의 주권 국가가 병립하는 베스트팔렌 체제로 정착되었다.

1차대전을 계기로 이 ‘부르주아지의 모습’, 즉 민족국가 모델과 이 국가들이 상호 경쟁하는 로크적 국제정치 문화가 본격적으로 전 세계에 수출된 직후에 유럽은 메르켈이 말하는 기적적 평화를 이룩하는 데 성공했다. 얄궂은 사실은, 이 모습을 강요 받았던 지역은 늦게까지 1차대전의 망령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NationaalArchief_uboat155London

끝나지 않은 전쟁? 시작되지 않은 전쟁?

동아시아에 상존하는 상호 대립과 경쟁의 상황이 종래에는 ‘끝나지 않은 냉전’으로 흔히 불렸다면, 근래 동아시아 정세 분석에서 1차대전과의 비교가 새로운 상투어로 떠오른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러한 유비에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 군사적으로 부상하면서 남중국해를 둘러싸고 근래 주변국과 잦은 불협화음을 내는 중국에 대해 중국 위협론이 제기되는가 하면, 평화헌법의 개정 내지는 해석 변경을 통해 국방군의 창설 내지는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를 주장하는 일본에 대해 팽창주의적 속성이 의심 받고 있기 때문이다. 북핵 문제를 둘러싸고 열리는 6자회담에서 강대국 간의 협조가 쉽지 않았던 경험 등도 이러한 비교를 정당화하는 근거처럼 쓰인다. 이런 점에서 1차대전은 동아시아에서 끝나지 않은 전쟁이며, 동시에 시작되지 않은 전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작되지 않은 전쟁은 시작되지 말아야 할 전쟁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문맥에 따라서는 시작될 전쟁을 의미할 수도 있다.

올해 1월 22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스위스 다보스 회의에서 중국과 일본 간의 갈등이 1차대전 이전 영국과 독일 간의 갈등과 비슷하다고 발언하여 중국의 반발을 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총리가 중일 간의 전쟁 가능성보다는 평화의 필요성을 언급한 것이라고 해명했다(링크). 2월 2일 《블룸버그》의 보도에 따르면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부 장관은 “아시아는 19세기 유럽의 상황과 비슷하며, 군사적 갈등이 배제되지 않는다”고 발언했다(링크). 키신저가 명시적으로 1차대전을 언급했다고 확인되지는 않았으나, 국내 일부 언론에서는 이 발언이 사실상 아베 총리의 다보스 발언과 공명하는 것으로 소개했다(《연합뉴스》,《조선일보》,《한겨레》).

1차 세계대전의 이미지는 중일 간의 갈등만이 아니라 미중 간 협조의 당위성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되기도 했다. 2012년 7월 18일 힐러리 클린턴 당시 미 국무부 장관은 ‘스마트파워의 기술’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과 중국이 기성 강대국과 신흥 강대국이 만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는 오랜 물음에 새 대답을 줄 수 있을 것인가? …지금은 쇠락하는 영국과 부상하는 독일 간의 마찰로 지구적 갈등이 시작된 1912년이 아니다. 지금은 2012년이며, 강한 미국은 새로운 강대국 및 파트너와 지구적 갈등을 예방하고 지구적 번영을 촉진하기 위한 국제 체제를 재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링크)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2013년 11월 2일 중국공산당 제18기 삼중전회를 앞두고 “우리는 단결해 소위 ‘투키디데스 함정’을 피해야 한다. 즉 신흥국가와 선진국간, 또는 선진국과 선진국간에 파괴적인 긴장관계를 조성하지 않아야 한다”고 발언했을 때,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통해서 1차대전의 이미지를 우회적으로 지적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1차대전은 무엇이었는가

이처럼 동아시아를 포함한 비유럽 지역의 상당 부분에 전쟁과 갈등 요소가 잔존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메르켈 총리는, 위에서 언급한 6월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우리의 과거에서 배운 교훈은 유럽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교훈은 우리에게 전 세계에서 평화와 자유, 법치와 민주주의를 위해 활동하라는 의무를 안겨줍니다.” 그가 말하는 이 교훈은, 도덕적 측면에서는 100년 전 제국주의의 세계 전략과 반대로 뒤집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외부 세계에 문명적 요건을 전파하겠다는 사명을 내용으로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유럽의 경험을 모델로 하여 비유럽 세계를 재편할 수 있다는 사고를 논리로 한다는 점에서는 조금도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기실 1차대전으로부터 어떤 교훈적 함의를 발견하려고 했던 동아시아 논자들의 기본 발상도 이와 구분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동아시아에서도 유럽에 상응하는 문화 공동체, 역사 인식 공동체를 만들자는 근 20여 년의 논의도 대체로 이러한 사고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의 문제점은 특정 시공간에서 연원하는 경험을 마치 보편적 이상처럼 모델화하는 이데올로기적 편향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곳의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참조 체계로서 유효하다면 이념과 정책이 발생론적으로 국적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문제시될 수는 없다. 진정한 문제는 이러한 참조 체계가 단순한 지향점으로서만 기능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지향을 현실에 구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도 무비판적으로 채택된다는 데 있다.

제국주의 국제정치가 스스로를 확대한 결과로서 오늘날 동아시아에 1차대전 전야와 유사한 환경이 조성되었으므로 유럽적 통합 모델을 구현해야 한다는 논리는, 당위론에 지나지 않는다. 동아시아에서 그러한 미래에 도달할 수 있는지의 여부, 그런 미래에 도착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유럽의 경험이 적용 가능한지의 여부는 당위론과는 별개로서 파악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1차대전을 계기로 이 지역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시 만들어졌는지를 검토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동아시아에서 유럽연합을 만들자는 주장은 이 지역의 국가가 속성상 서방과 구분되지 않는다고 파악함으로써, 즉 마르크스가 말한 부르주아적 이미지에 따른 세계의 재편을 글자 그대로만 이해함으로써, 이 재편이 고유한 장소성에 의해 굴절적으로 진행된 측면을 간과한다. 유럽에서는 평화가 이미 만들어졌다는 이유에서 1차대전이 역사성이 사상된 기억으로서 소환된다면, 동아시아에서는 평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유에서 동일한 전쟁이 구체적 내용을 상실한 기호로서만 쓰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기에 우리는 1차대전을 계기로 하여 동아시아가 한편으로 유럽화된 측면과 더불어, 다른 한편으로 유럽적 국가 모델이 이 전쟁을 계기로 동아시아화된 측면을 동시에 감안하지 않으면 안 된다. 1차대전기 동아시아를 일종의 변형된 부르주아지 세계로서 이해하지 못하면, 동아시아가 1차대전 국면에서 유럽과 유사한 경로를 걸었으면서도 이후에는 그 변형이 고유의 모멘텀을 획득함으로써 유럽과 상이한 미래를 전개시켰다는 사실 역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정훈 (서울대 외교학과 석사과정)

intransigere@gmail.com

 

이 글은 1차 세계대전 발발 100년을 맞아, “100년 뒤에 생각하는 동아시아의 1차대전이라는 프리즘연재기사의 제1편입니다.

똘레랑스의 나라에서 극우를 외치다

amithe

당 이름보다 ‘극우정당’이라는 수식어가 더 유명한 프랑스 국민전선(FN)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 3월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11명의 지방자치 단체장을 배출하는 등 창당이래 최대 성과를 거두었으며, 5월 치러진 유럽의회 선거에서는 프랑스 1위를 달성했다. 심지어 9월 28일 시행된 상원선거에서 우파 정당인 대중운동연합(UMP)과 민주독립연합(UDI)가 상원의석의 과반을 차지했고, 사상 처음으로 극우정당인 FN에서도 두 명의 상원 당선자가 배출하였다. 주요한 의사결정권이 하원에 있는 프랑스 정치제도 상 현재 집권 사회당(PS)이 과반을 차지하고 있어 정국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하지만 우파의 승리와 FN의 3차례 선거에서의 눈부신 활약은 결코 우연이 아닌, 이유 있는 활약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FN은 창당자인 아버지 장 마리 르펜에서 딸인 마린 르펜 현 대표로 바뀌면서 하루가 다르게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7월 31일 프랑스 여론조사 기관인 IFOP는 ‘대선 1차 투표가 오늘 치러진다면 누굴 뽑겠느냐’는 질문으로 7월 21일과 22일 양일간 여론조사를 실시하였다. 총 947명이 응답한 여론조사에서 프랑스 양대 정당인 집권 PS도 제1야당인 UMP도 아닌 극우정당 FN의 마린 르펜 대표가 26%로 1위를 차지하는 이변이 나타났다. 과거 국민전선은 프랑스 정계의 “극좌와는 말을 섞어도, 극우와는 말을 섞지 않는다”는 불문율에 따라 장 마린 르펜 전 대표는 과격하고, 비상식적인 말들 내뱉는 프랑스 정계의 ‘문제아’이지, 대화와 정치의 대상이 아니었다. 전 정부인 사르코지 정부에서 총리를 역임한 UMP의 프랑수와 피용은 “사회당과 우리는 생각이 다르지만, 국민전선과 우리는 가치가 다르다”라고 말하며 국민전선과의 선을 명확히 긋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프랑스 정계에서 ‘아웃사이더’였던 국민전선은 차츰차츰 극우정당에서 대중정당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변신을 시작했다.

 

2002년 대선의 추억

프랑스의 대통령 선거는 결선투표제를 채택하고 있다. 1차 투표에서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하면 1차 투표 상위 득표자 2명이 결선 투표를 해야 하는 시스템이다. 200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일, 프랑스 정계 역사상 이변이 발생했다. 1차 투표 결과 당시 현직 대통령인 공화당연합(UMP의 전신)의 현직 자크 시라크 대통령(19.88% 득표)과 FN의 장 마리 르펜 총재(16.86% 득표)가 결선 투표에 올랐다. 양대 정당 중 하나인 사회당의 조스팽 후보(16.18% 득표)는 당시 진보세력의 난립으로 결선투표에 오르지 못하는 이변이 연출되었다. “인종은 평등하지 않고 흑인은 열등하다”,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지단, 앙리 등 이민자를 추방해야 한다”와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역사의 사소한 일이라고 말하는 등 상식을 뛰어넘는 언행을 보여온 장 마리 르펜 총재가 결선투표에 오르자 프랑스는 큰 충격에 빠졌다. 조스팽 사회당 후보는 즉시 정계은퇴를 선언했고, 5월 1일 노동절에는 장 마리 르펜의 극우적인 정책과 언행을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시위가 열리게 되었다. 프랑스 정계는 좌우를 막론하고 자크 시라크 대통령 재선 지지를 호소했다. 그 결과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결선투표에서 82.21%라는 놀라운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FN의 돌풍이 2002년 대선만의 예외적인 일종의 해프닝에 불과하지, FN이 다시 프랑스 정계 소용돌이 중심에 나타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변화’인가 ‘이미지 메이킹’인가?

2011년 FN은 큰 변화를 맞게 된다. 바로 당권이 극우 중에서도 강성 극우였던 장 마리 르펜 총재에서 그의 딸인 마린 르펜으로 넘어왔기 때문이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난 나의 이데올로기가 있고 내 방식으로 꾸려나갈 것이다. 난 치마를 입은 장 마리 르펜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마린 르펜은 아버지의 극단적인 이미지를 지우고 상식적인 선 안의 보수를 표방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나치에 대한 언급이나 인종주의에 대한 발언 등 상식을 넘어선 발언들에 대해 ‘정치적 과오’라고 칭하면서 아버지와의 선 긋기에 나서고 있다. 마린 르펜이라는 ‘개인 브랜드’도 FN의 대중화에 큰 공을 기여했다. 두 번의 이혼 후 재혼하고 세 자녀를 키우고 있는 마린 르펜은 화법이나 대중을 사로잡는데 있어서 아버지인 장 마리 르펜보다 세련되고 뛰어나다. 그녀는 아버지와 EU문제와 이민자 문제에 있어서는 의견을 같이한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파시스트라고 부르며 과격한 단어 선택과 기행을 펼치는 아버지와 달리, 마린 르펜은 분석적이고 논리적으로 자신의 논지를 펴나간다. 그녀는 EU 때문에 프랑스가 경제부진을 겪고 있고, 경제부진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독일 주도의 긴축정책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메르켈의 유럽’이라는 단어는 그녀가 독일을 자극할 때 즐겨 쓰는 용어다. 심지어 유럽의회 선거 후에는 “EU의 정치중심이 (독일에서)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다”고 말하며 독일을 이용해 프랑스 국내의 반EU정서를 자극했다.

le_pens2

마린 르펜의 극우 이미지 지우기 시도는 일단 성공적으로 보인다. 2013년 10월 29일 여론조사 기관 CSA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프랑스를 변화시킬 수 있는 정당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에 44%가 FN을 선택했고, “변화시킬 수 있는 인물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50%가 마린 르펜을 택했다. 2002년 대선에서 10년이 조금 지난 지금, FN을 바라보는 시각이 180도 바뀌었다. 프랑스의 고질적인 문제인 계속된 0%대 경제성장률과 10%를 상회하는 실업률, 증세문제, 이민자 문제 등을 기성 양대 정당이 해결하지 못하자, 극단적인 방법이지만 문제 해결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준 FN에 대해 국민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듯 보인다.

 

“사회당은 싹 쓸려나갔고 보수주의자들은 추락 중이다”

5월 26일 마린 르펜은 기자회견에서 “사회당은 싹 쓸려나갔고 보수주의자들은 추락 중이다”라고 말하며 “국민전선의 승리는 프랑스 정치의 진면목을 드러낸 것이다”고 밝혔다. 프랑스 양대 정당은 이미 힘을 다하였고, FN이야말로 프랑스 미래를 짊어질 수 있는 당이라고 말이다.

2012년 5월 6일 프랑스 공화국 24대 대통령으로 프랑수아 올랑드가 선출되었다.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이후 17년 만에 사회당 출신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전 정부인 사르코지 정부의 긴축정책을 중지하고 성장 정책을 통해 채무 감축과 일자리 문제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또 100만 유로 이상 소득자에 대해 75%의 세금을 부과, 법인세 인상, 최저임금 상향 등 경제에 사활을 걸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현재 언론들은 “기대에 못 미치는 정체”, “고장 난 경제성장” 등으로 프랑스 경제를 일컫고 있다. 또 경제부처 장관과 EU의 긴축기조에 대해 의견이 나뉘는 등 경제가 순항하지 못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현재 추진되는 정부의 경제정책들은 2017년까지의 장기 목표로 행해지는 정책으로, 마누엘 발스 국무총리는 현재의 경제정책 기조를 유지할 것임을 밝혔다. 하지만 재선 도전을 공공연하게 밝혀온 올랑드 대통령으로서는 국민들의 계속된 지지하락에 가슴이 타고 있다. 현재 취임한지 2년이 조금 넘은 현재 10%대 후반의 낮은 지지율을 기록하며, 역대 최고로 인기 없는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얻었다.

그렇다면 제1야당인 UMP 상황은 어떨까? 야당도 다들 것은 없다. 현재 대선 스캔들로 어수선한 UMP는 제1야당으로서의 날카로움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소용돌이는 UMP의 대선 선거운동본부 부본부장이었던 제롬 라브릴뢰가 대선 자금 문제에 불법적인 일이 있었다고 밝히면서 시작되었다. 선거비용 초과를 은폐하고, 없는 행사를 실시한 것처럼 조작해 1천100만유로(약 153억 원)의 허위 영수증을 끊은 것이 밝혀졌으며, 이로 인해 당시 사무총장이자 2012년 11월 UMP 대표로 당선된 장 프랑수아 코페 대표는 사임하고, 10월 당대표 선거를 비상체제로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음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밝혀온 사르코지 전 대통령에게까지 검찰의 칼날이 겨눠지고 있다. 그는 리비아의 독재자였던 카다피에게 690억 원의 선거자금을 받았다는 의혹 등으로 구금되어 조사를 받았다.

Siderov-LePen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속은 모른다

이렇듯 집권 PS는 리더십 부재와 경제 부양정책 실패로, 제1야당 UMP는 부패스캔들과 대선자금 스캔들로 프랑스 국민들에게 실망감만 안겨주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린 르펜은 사회 현안에 대해 다소 극단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중이다. FN의 인지도와 늘어나는 신입당원을 보면 FN의 주장들이 대중들에게 점차 설득력을 갖춰가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또 FN의 지지세력 내에서는 장 마리 르펜 시절의 노인층이나 극단주의자들이 아닌 35세 이하의 평범한 청년들과 전통적 좌파 지지층인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비율이 날로 높아지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내외 상황을 두고 봤을 때, 마린 르펜의 엘리제궁 행이 머나먼 꿈은 아닌 듯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극우다. 자유와 평등, 박애 등 소위 ‘공화국 정신’을 지닌 프랑스인들에게 있어서 세련되게 정제된 그녀의 정책들은 여전히 ‘파랗다’. 이민자에 대한 차별, 공공 장소에서 종교 의복 불허 등은 공화국 정신을 훼손시킬 만큼 극단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또 전체 지방선거에 있어서는 PS가 대패했으나, 파리 시장에는 스페인 이민자 출신의 안 이달고 부시장이 당선되는 것을 보면 아직 국민들의 마음이 완전히 올랑드와 집권 사회당 정부에 등을 돌렸다고 보기도 어렵다. 현재 FN의 인기가 PS, UMP에게 던지는 경고의 메시지인지, 아니면 정말 마린 르펜 대세론이 대선까지 이어질지는 기다려봐야 한다. 두 번의 선거결과에서 나타난 프랑스 유권자들의 메시지는 2017년 대선이 되어서야 알게 될 것이다.

 

2014.9.9
김준석(경희대 언론정보학)
rejune111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