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니지의 과일상이었던 모하메드 부아지지의 분신으로 북아프리카의 독재정권이 도미노처럼 무너진 지 4년이 지났다. 3년 전, 혁명은 물론 나아질 미래도 함께 꿈꾸었던 국가들의 2014년은 극명하게 다르다. 튀니지의 대장정은 대선을 통해 완결되었으나 이집트는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의 제로섬 게임에 발이 묶였고, 리비아는 국가의 뼈대부터 지어올려야 하는 형편이다. 시리아가 사분오열된 가운데 나타난 ISIS라는 괴물과 쿠르디스탄의 자치는 1916년 그어진 국경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었다.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국가들이라고 안정된 것은 아니다. 걸프 국가들는 페트로달러로 혁명의 불을 끄려 들었고, 석유의 축복을 받지 못한 왕정 국가들은 개혁과 붕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아랍의 봄”, 1차대전 이후 중동이 맞이한 최대의 과도기를 가능케 한 역사적 맥락과 경제와 제도는 지극히 상이하다. 이번 특집 “끝나지 않는 사막의 겨울”에서는 개별 흐름의 구조와 행위자들, 더 나아가 전망까지도 살펴보고자 한다.
독재와 가난에 신음하던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튀니지, 이집트, 알제리, 모로코에서 치솟는 인플레이션율과 실업, 빈부격차에 항거하는 시민들이 개혁을 외쳤다. 기나긴 독재와 경제난을 타파하고자 하는, 아래로부터의 외침이었다.
2011년 ‘아랍의 봄’의 이야기가 아니다. 1980년대 북아프리카를 뒤덮은 “빵 폭동” 당시의 이야기다. 불이 옮겨붙은 기름이었던 독재와 빈부격차, 실업은 북아프리카에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고여 있던 기름이며, 그것을 가능하게끔 한 구조는 단발적이지도 단선적이지도 않다. 따라서 앤더슨이 말했듯 ‘아랍의 봄’은 SNS의 혁명이 아니고, 대규모 시위는 계속해서 일어나 왔으며, 구조의 형성과 존속에 대한 이해 없이 아랍의 봄의 경과와 전망을 논하는 것은 단편적 겉핥기라는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신의 몸과 튀니지에 불을 지른” 분신자살을 통해 혁명의 시발점이 된 무함마드 부아지지는 튀니지의 소도시에서 과일을 파는 대졸자였다. 이 문장에서 튀니지의 고질적 병폐 몇 가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대학 졸업자가 과일상으로 전락할 만큼 극심한 실업, 수도와 지방 간 양극화, 이슬람에서 금하는 자살을 목도한 후에야 시위를 일으킬 만큼 무감각한 시민사회. 이것의 뿌리는 지난 몇 년 간의 문제를 거슬러 1956년 독립 이전부터 튀니지가 겪어낸 역사의 축적으로까지 뻗어올라간다.
우리는 안전한 나라입니다
튀니지는 혁명이 일어날 법한 나라가 아니었다. 《포린 어페어스》의 에릭 골드스틴은 혁명 이전의 튀니지가 “안정된 번영을 구가하는 국가의 모든 조건을 갖추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랬다. 튀니지인들은 중동 최고의 교육수준을 자랑했고, 지대 추구가 아닌 수출과 제조업으로 일궈낸 중산층의 기반은 탄탄했으며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폭발의 가능성 없는 안정된 인구성장세를 보였다. 1인당 GDP는 모로코와 이집트의 두 배로, 북아프리카 최대의 석유수입을 자랑하는 이웃나라 알제리보다도 높은 수치였다. 알제리의 불안한 고요와 카다피식 사회주의의 리비아 사이에서 튀니지는 귀하디 귀한 안전지대였으며, 수도인 튀니스(Tunis)는 유럽인 여행객들로 북적거렸다.
튀니지의 자유화 정책은 거시적 측면에서는 사실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 부르기바가 이끈 사회주의 실험이 실패한 1969년을 지나, 70년대 내내 튀니지는 매년 평균적으로 4.7퍼센트의 경제성장을 지속했고 지대 추구 대신 식민지 유산인 제조업을 발전시켰다. 정치적으로도 개혁이 가져다준 긍정적 변화는 분명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여성의 사회참여 장려와 세속화 정책을 통해 튀니지의 이슬람이 온건 노선을 걷도록 했다는 점이다. 튀니지가 자랑하는, 아랍의 봄의 주축이 된 이 중산층도 이 시기에 형성됐다. 인적 자본에의 투자를 늘리기 위해 대학을 대폭 세웠고, 현재까지도 튀니지는 중동 제1의 교육수준을 자랑한다.
무혈 쿠데타를 통해 1986년 집권한 벤 알리의 경제정책은 튀니지가 경찰국가로 변모해 가는 과정과 맥을 같이한다. 벤 알리는 경제개방과 보호무역을 병행했다. 자유경제구역을 지정했고 외국 기업을 끌여들여 실업 문제를 해결했다. 90년대에는 튀니지 경제의 양대 축 중 하나가 된 관광업이 발달했다. 또 사회 집단의 발달을 이끈 것은 시민들이 아닌 튀니지 정부였다. 정부에 대항할 가능성이 있는 단체들, 즉 노조, 인권단체, 언론 등은 조합주의를 도입한 정부의 통치 하에 종속화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한때는 파업을 이끌었던 튀니지의 강력한 노조인 UGTT(Union Générale Tunisienne du Travail, 이하 UGTT)다. 어떤 의미에서 튀니지는 굉장히 안정된 국가였다.
가만히 있으라
문제는 독재와 부패였다. 튀니지의 경제적 자유화는 결코 정치적 자유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튀니지는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1956년 이후 단 두 명의 대통령만을 본 나라다. 가히 ‘신화 창조’를 했던 부르기바의 ‘컬트 통치’에 이어 튀니지를 경찰국가화한 벤 알리의 통치는 그야말로 두려움의 통치였고 그는 표현의 자유와 야권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90년대 관광업의 발달은 벤 알리가 조종한, ‘현대화된 정권이 들어선 관광 명소’의 이미지 때문에 가능했다. “외화를 위해 나라를 팔아먹었다prostituted”는 이슬람주의자들의 비난이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실제로 벤 알리에게 ‘공공의 적’은 당시 튀니지의 유일한 정치적 대안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조직화된 집단이었던 이슬람주의였다. 이슬람주의자, 좌파, 기자, 인권운동가 등 수천 명이 정치범으로 몰려 감옥에 갇혔다. 여기에는 국민들의 자발적 협동도 있었다 : 90년대 알제리가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 간 내전에 휘말리는 것을 목도한 튀니지 국민들은 벤 알리의 통치에 순응했다. 이를 기반으로 벤 알리는 92년 세속주의 신문들과 잡지마저 폐간시켰고 1994년과 1999년 대선에는 타 후보의 출마를 금한 후 대통령직을 역임했다.
분명 경제적 자유화는 자유화의 형태를 띠었다. 보조금과 정부 개입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견주의를 기반으로 한 공적 부문은 여전히 비대했고 경제의 흐름은 자율적이지 못했다. 또한 공적 부문과 사적 부문의 경계는 모호했고, 규제는 매우 자의적으로 적용되고 악용되었다. 국민 개개인을 감시와 처벌의 이중적 행위자로 만든, 실로 “오웰적” 통치였다. 그렇게 튀니지의 시민사회는 도구화되고 분열되었다. 이와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 벤 알리 일가를 중심으로 한 뿌리깊은 부패와 정경유착의 문제였다. 가령 주튀니지 미국 대사에 의하면 “튀니지 상업 엘리트의 절반 이상이 벤 알리의 세 성인 자녀, 7명의 남매, 2번째 부인의 10명의 남매와 개인적으로 연루된 이들”이었다. 은행과 기업과 수출이 이들 일가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다. 세계은행은 벤 알리 정부의 개입이 “멋대로였고 경쟁을 제한했으며 관료들과 개인적 연줄이 있는 이들을 선호했”으며, “투명성과 예측가능성이 낮았다. 이는 경쟁, 효율성, 투자, 생산의 저하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이는 청년실업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독재 정권 주도의, 제조업 위주의 경제 발전이 막다른 벽에 부딪힌 상황에서 자본의 자율성은 억압되었고 경제는 정체되었다. 새로운 물꼬를 틀 지식의 창조는 벤 알리의 경찰 국가에서는 불가능했다. 《포린 어페어스》의 아론 젤린은 1980년대 급속도로 형성된 대학들이 배출하는 졸업생은 매년 7만 명, 그러나 이들에게 가능한 직업은 3만 개뿐이라고 말한다. 이 문제가 축적된 결과물이 바로 30퍼센트를 상회하는 청년실업률이다.
튀니지의 고질병인 유럽에의 의존 역시 이 당시 생겨난 병폐 중 하나다. 사적 부문의 발전과 제조업의 다각화, 외국인 투자를 추구했던 튀니지는 유럽경제공동체와 의류 및 제조업 부문에서 경제협력을 체결하지만 유럽의 보호무역의 장벽은 높았고, 유럽으로부터 수입해 가공한 섬유나 농산물을 유럽에 수출하려 해도 유럽의 수입쿼터제에 가로막혔다. 또 유럽의 보호무역이 강화되며 튀니지의 값싼 노동력은 유럽 기업들에 착취당했고, 여기에 원유와 밀, 인산염의 가격이 변동하며 물가가 급등하고 무역적자가 심화되어 부채가 쌓이게 된다. 이렇게 되자 1978년, 튀니지 노조 UGTT가 정부가 물가연동제를 시행하지 않는 것에 반발하여 대규모 파업을 일으키고, 이에 대한 정부의 무자비한 탄압을 통해 이틀 동안 150명이 사망한다.
고작 1100만 인구를 가진 튀니지 내수 발달에는 한계가 있으며, 튀니지 경제의 높은 대외의존도는 납득할 수 있다. 그러나 유럽에 의존도가 높다는 것은 유럽의 경제변동에 그만큼 취약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80년대를 넘어 90년대에는 벤 알리의 효율적 행정과 세계화에 힘입어 유럽의 자금을 흡수할 수 있었으나 동시에 갈수록 역내 통합도를 높여가는 EU 시장을 두고 한국, 대만 등 아시아 신흥 국가들과도 경쟁해야 했다. 2004년 튀니지 GDP의 92.5퍼센트가 수출-수입에 의존할 정도로 튀니지 경제의 대외의존도는 높으며, 이 중 7할은 유럽과의 무역이다. 그러나 유로존 위기를 거치며 유럽연합의 총수요가 쪼그라들었고, 이는 튀니지의 수출에 즉각적 영향을 끼쳤다. 더군다나 90년대 들어서 유럽과 경제협정을 연달아 체결하며 관세의 감소로 세원이 줄어들었고 국내 기업들의 입지가 불안정해졌다. 그러나 튀니지의 경제는 수치상으로는 여전히 견고해 보였다.
북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게, 혁명이 터졌다. 전세계로부터 국제적 칭송이 이어졌다. 80년대 유가 하락과 소련의 붕괴를 겪으면서도 건재했던 아랍 예외주의(Arab Exceptionalism)이 무너질 듯 싶었다.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제헌위가 구성됐고, 2011년 10월의 선거에서는 라시드 간누치(Rachid Gannouchi)가 이끄는 이슬람 부흥주의 정당인 엔나흐다(Ennahda)가 승리해 연정을 꾸렸다. 벤 알리 시절 억압받은 목소리들이 국민적 통합을 이끌어내 민주주의를 실현할 것 같았다.
자스민 혁명 당시 군의 시위대 진압. 그러나 군은 시위대에 발포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이집트나 리비아의 제로섬 정치와 비견할 바 아니었으나 2년 동안 엔나흐다가 이끈 정치는 신작로가 아닌 울퉁불퉁한 돌길을 달리는 정치였다.
먼저 안보의 문제가 있었다. 벤 알리 정권이 무너지며 튀니지의 불안정을 틈타 리비아 및 알제리와 맞닿은 국경을 통해 밀수된 무기와 함께 이슬람 원리주의 테러단체들이 유입됐다. 대표적인 것이 안사르 알 샤리아(Ansar al-Sharia)다. 이들 단체의 유입은 곧바로 정정불안으로 이어졌다. 2012년 9월에는 미국 대사관이 공격받았고, 2013년 2월에는 인기 높은 좌파 세속주의 정치인인 초크리 벨라이드(Chokri Belaid)가 암살됐다. 튀니지는 정치적 안정과 국민적 통합을 자랑거리로 삼는 나라다. 이런 튀니지에서 고위 정치인의 암살이 가져다 준 충격은 엄청났다. 세속주의 야권을 이끄는 니다 투니스(Nida Tunis)의 베지 카이드 에셉시(Beji Caid Essebsi)는 엔나흐다가 테러리스트들의 활동을 방관하거나 지원하고 있다며 비난했고, 일부는 “이슬람주의자들은 모두 테러리스트들이다”는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이에 엔나흐다의 하마디 제발리(Hamadi Jebali) 총리는 “정부가 튀니지인들을 실망시켰다”며 사임했다. 제발리는 테크노크라트 정부를 구성할 것을 제안했고 엔나흐다는 이를 일부 수용했다. 그러나 7월, 또다른 야권 정치인인 모하메드 브라히미(Mohammed Brahimi)가 대낮에 가족들 앞에서 암살됐다. 이는 공교롭게도 헌법의 방향성 논란과 맞물렸다. 튀니지는 프랑스 식민통치 시기, 또 부르기바와 벤 알리 통치 하에서 형성된 세속주의의 유산을 보존하는 국가다. 한데 그런 튀니지를 엔나흐다는 이슬람화하려 들었다. 헌법 6조를 통해 샤리아가 헌법의 기반임을 규정하려 든 것이다. 연이은 암살과 맞물려 이에 대한 야권의 반발은 엄청났다. 튀니지 전체가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로 양분됐고, 엔나흐다의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튀니지를 뒤덮었다. 이에 엔나흐다는 2월과 달리 재빨리 안사르 알 샤리아를 주범으로 지목하며 불법 단체로 지정했으나 이로는 대국민적 불만을 완화하기에 역부족이었다. 금방이라도 세속주의가 엔나흐다를 끌어내릴 것처럼 보였다.
인플레이션 역시 마찬가지였다. 엔나흐다 정부는 혁명의 척추였던 중산층의 생활 수준을 상향시키는 데 실패했다. 유로존 위기 이전부터 약화된 중산층의 구매력은 결코 다시 상승하지 못했다. 33%의 청년 실업률은 낮아지지 못했고, 물가는 연 6%씩 상승했다.
역설적으로 이집트가 무너졌기 때문에 튀니지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해 7월, 선거로 당선된 무슬림형제단이 대국민적 지지를 받는 군부에 의해 축출된 것은 엔나흐다에게는 소름끼치는 전망이었다. 9월 엔나흐다는 헌법을 통한 튀니지의 이슬람화 시도를 중단함으로써 무슬림형제단의 행보를 피해가는 데 성공했다. 세속주의와 엔나흐다 간 화해를 이끌어낸 것은 그 시작이 독립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가는 튀니지의 강력한 노조 UGTT였다. UGTT는 헌법과 선거법의 제정이라는 과제를 완수한 후 사임하겠다는 엔나흐다의 약속을 받아냈고, 엔나흐다가 사임한 후 선거를 책임질 임시 정부가 들어선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뒤이은 12월 엔나흐다는 산업부 장관이며 무소속 정치인인 메흐디 조마를 임시 정부의 총리로 지명했다. 2014년 1월에는 헌법이 제헌위 216명 중 200명의 찬성으로 통과됐다. 헌법 제정이라는 마지막 임무를 끝낸 엔나흐다의 알리 라라예드 총리가 사임해 조마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올해 3월에는 대통령 몬세프 마르주키가 혁명 이후로 3년간 튀니지에 내려졌던, 벤 알리의 유물인 비상사태를 해제했다. 굳었던 것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The Old Goes Anew
2014년은 1990년대가 아니다. 반 세기를 넘는 시간 동안 단 두 명의 대통령의 통치 하에서 튀니지 인들은 가히 부르기바의 신격화와 뒤이은 벤 알리의 경찰국가를 차례로 경험했다. 그리고 튀니지인들은 그 독특한 역사적 경험을 통해 나름의 무언가를 터득한 듯 싶다. 귀결은 명확하지 않을지언정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명확하다.
먼저 튀니지의 여야는 만나서 대화한다. 이로써 튀니지는 벤 알리의 유물이었던 제로섬 정치를 피할 수 있었다. 엔나흐다의 사임을 요구하는 목소리와 함께 튀니지의 정정불안이 정점에 달했던 2013년 12월, 튀니지는 통합의 국민성이 정치문화의 형성으로 고스란히 이어질 수 있음을 증명했다. 에셉시와 간누치의 역사는 튀니지의 정치경제적 양극화의 역사이기도 하다. 1994년 벤 알리 정권 하 공직을 떠났을지언정 에셉시는 외무상직과 프랑스, 독일 대사직을 역임한, 튀니지 부르주아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반면 간누치는 에셉시의 공직 생활 중 두 차례나 옥살이를 했으며 엔나흐다 운동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에셉시와 간누치가 꿈꾸는 튀니지의 미래는 극명하게 다르다. 그럼에도 아무도 협상 테이블을 떠나지는 않는다.
하비브 부르기바 총리 재임 당시 국방부 장관을 지냈던 에셉시.
《뉴욕 타임즈》의 카를로타 갈(Carlotta Gall)은 기존의 세속주의 정치 엘리트를 대변하는 니다 투니스와 튀니지의 이슬람을 대변하는 엔나흐다의 협상에 관한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전한다. 테러 공격이 계속되고 경제난이 정점에 달했을 때 에셉시는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간누치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당신이 이 난국에 책임이 있다. 그러니 당신은 해결책의 일부이기도 해야 한다”며 에셉시는 간누치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이는 둘 다에게 정치적 손해를 수반하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러나 인터뷰 12일 후 간누치는 에셉시에게 전화를 걸었고, 에셉시의 해외 일정에 맞추어 파리까지 따라왔다. 브라히미의 암살 후 정치적 난국이 지속되던 넉 달 동안 그 둘이 독대한 횟수는 최소 5번에 달한다. 계속되는 경제난과 안보 불안에도 불구하고, 튀니지 정국의 양대 거두가 마주앉았다는 사실은 튀니지의 끓어오른 거품을 식힐 수 있었다. 튀니지의 안정은 출혈 없이 양끝으로부터 왔다.
튀니지가 해답이다
자신들의 역사뿐만 아니라 주변국의 “혁명”, 종파갈등과 내전 속에서 국가의 기틀 자체가 무너진 폐허에서도 튀니지는 쓸 만한 교훈 몇 가지를 찾아냈다.
먼저 튀니지는 과욕과 이슬람화라는 이집트 무슬림형제단의 행보를 피하는 데 성공했다. 무르시는 이집트를 이슬람 국가로 규정하고 엔나흐다와 마찬가지로 이집트 헌법의 기반을 샤리아에 두려고 시도했었다. 엔나흐다는 2013년 7월 무슬림형제단의 통치에 맞서 타흐리르 광장에 집결한 수백만 명의 이집트인을, 정치경제적 안정에 실패했다는 명분으로 무슬림형제단에 이집트 군부에 의해 끌려나가는 것을 보았다. 다른 모든 이슬람 부흥주의처럼, 엔나흐다의 사상적 기반은 무슬림형제단에서 시작된다. 무슬림형제단의 축출과 뒤이은 지하화를 전적으로 남 일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입장인 것이다. 무르시의 축출을 기점으로 엔나흐다의 정책은 완전히 변한다. 먼저 헌법의 샤리아 조항에서 세속주의 정당들에게 ‘통 큰 양보’를 했고, 에셉시의 나이를 흠잡지 않고 대선 출마를 허용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게는 초크리 벨라이드와 모함메드 브라히미의 암살을 주도한 안사르 알 샤리아를 테러집단으로 지정했다. 이는 정치적 이슬람이라는 관점에서 지극히 중요하다. 세속주의가 아닌 온건 이슬람 부흥주의가 급진 이슬람 부흥주의를 불법화한 것이다. 엔나흐다는 이슬람과 민주주의가 공존할 수 있음을 보였고, 정치화된 이슬람이 협력과 중용을 실천할 수 있음을 증명해냈다.
여기에 무시할 수 없는 것은 무슬림형제단과 엔나흐다의 차이다. 무슬림형제단은 가말 압둘 나세르의 뒤를 이은 안와르 사다트와 호스니 무바라크 통치 하에서 끊임없이 탄압받았다. 그러나 이는 엔나흐다도 마찬가지였다. 벤 알리의 경찰국가는 유례 없는 통제와 탄압을 자행했고, 그 주적은 이슬람 부흥주의였다. 게다가 엔나흐다는 무슬림형제단에 뿌리를 둔 이슬람 부흥주의 단체다. 그러나 정부 탄압 하에 감옥에 갇히고, 감옥 안에서 사상과 이론을 발전시켜야 했던 무슬림형제단과 달리 엔나흐다에 대한 벤 알리의 탄압은 추방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추방당한 엔나흐다의 고위 인사들이 정착한 곳이 다름아닌 파리와 런던이며, 이들은 급진 이슬람 부흥주의의 기틀을 마련한 사이드 쿠툽과 마우두디 대신 런던의 민주주의와 정당정치에 노출되었다. 엔나흐다의 노선이 자유민주주의의 본고장에서 형성된 것이다.
엔나흐다의 지도자인 라시드 간누치
또 군부의 문제도 있었다. 장기간 군사독재로 150만의 군을 보유하고 군부가 장악한 경제가 GDP의 4할을 차지하는 이집트와 달리, 튀니지의 군부는 5만 명 남짓한 지극히 전문적이고 유능한 군인들로 이루어진 비정치적 집단이다. 1957년과 1962년 군 쿠데타 시도 이후 부르기바는 군대를 비정치화했고 그 병력도 제한했다. 이는 벤 알리의 군 정책으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혁명 당시 시위대에 대한 벤 알리의 발포 명령에 합참의장인 라시드 암마르가 불복했다는 것은 상징적인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튀니지가 성공적으로 피한 것은 ‘과도한’ 역사청산으로 나라 운영의 기틀 자체를 뿌리뽑은 리비아의 행보다. 2013년 리비아가 제정한 정치제한법(Political Isolation Law)는 카다피 정권에 협력했던 인사의 공직 출마를 제한했다. 이는 다시 말해 카다피의 통치 하에 정부에 고용된 사람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것으로, 1969년 이후로 정부와 나라를 경영했던 실무자들을, 리비아를 굴러가게 할 줄 아는 유일한 이들을 내쳤다는 것이다. 비슷한 선례는 2003년에 이미 있었다. 사담과 그 정치기반을 뿌리뽑기 위해 미국은 10만 명의 바트당원의 공직 출마를 제한했고, 이는 이라크의 국가 경영 자체를 마비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현재 리비아에는 통일된 정부도 없으며, 카다피의 공백을 틈타 하나씩 종파와 부족 간 갈등이 머리를 들고 있다.
그러나 튀니지는 다른 경로를 택했고, 성공했다. 에셉시와 간누치의 협상을 통해 엔나흐다는 벤 알리 정부 인사들의 선거 출마를 금지하는 법안의 상정을 철회했다. 첫 입법선거에서는 벤 알리 정권 당시 인사들의 출마를 불허했으나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올해 10월 튀니지는 벤 알리 정권 당시 관료들까지 끌어안은 총선을 성공적으로 치러냈고, 11월 말에는 대선이 치러진다. 이번 대선에 출마하는 벤 알리 정권 당시 장관급 인사만 세 명이며, 단일화에 실패한 이들은 아마 에셉시에게 자리를 양보할 공산이 크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튀니지의 재건사업은 혁명의 여파에 몸살을 앓는 타 아랍 국가들과 비해 절대적으로 우월한 조건에서 시작했다. 인구 8천만의 이집트와 달리 튀니지의 인구는 고작 1100만 명이며 그 98%는 수니 무슬림이다. 이 중 급진 살라피 무슬림의 비율은 낮으며, 튀니지는 이슬람 법학파 중 가장 진보적이라 여겨지는 말리키 법학파의 본산이기도 하다. 산유국도 아니고 지정학적 요충지를 차지하지도 않은 덕에 외세의 개입도 적었다.
그럼에도 1990년대의 문제는 여전히 지속된다. 진정한 경제적 자유화를 판단하기에는 시기상조이며 유럽에 대한 높은 대외의존도, 보조금 경제를 중심으로 한 비대한 공공 지출, 청년실업의 문제가 있다. 따라서 실제로 필요한 것은 내수의 증진과 대외의존도의 감소, 공공 지출의 감소, 물가 안정, 그리고 일자리 창출이다. 《포린 폴리시》의 오사마 롬다니에 의하면 2010년과 2013년 사이 튀니지의 보조금 지출은 무려 270퍼센트나 증가했다. 대외 부채는 해결되지 않고 있으며 튀니지는 유럽과 일본, 걸프 국가들로부터 재정적 보조를 얻어내려 하고 있으나 경제위기에서 막 회복하려 드는 유럽, 소비세의 증가로 경제가 주저앉은 일본, 국내 돈 풀기에도 바쁜 걸프 국가들의 상황을 생각해 볼 때 대외 원조를 통한 튀니지의 경제 안정은 먼 이야기다. 게다가 튀니지 경제는 내적 모순을 안고 있다. 외국인 투자와 기업 유치를 통해 일자리를 창출해야 하지만 국내 기업들의 경쟁력은 위협받게 된다. “유럽과의 경제교류를 진척시키겠다”고 에셉시는 말하지만 이것이 과연 튀니지가 나아갈 방향인지는 불확실하다. 정부는 일자리 창출을 위한 어떤 방향성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투자는 물론 국내 안정과도 직결되는 안보 문제도 있다. 알제리와 리비아의 불안정을 틈타 무장 단체들은 튀니지로 계속 유입되며, 이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 정치경제적 발전을 논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그러나 안보 문제에는 개선의 여지가 적다. 리비아의 불안정이 더욱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튀니지 국경으로부터 고작 20마일 떨어진 리비아 서부에는 튀니지 반정부 무장단체를 위한 훈련 캠프가 마련되어 있을 정도로 튀니지의 안보는 아슬아슬하다. 알제리의 미래를 생각해 보면 튀니지의 안보는 제자리걸음만 해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올해 81세를 맞이한 부테플리카 대통령이 임기 중 사망할 경우 알제리의 권력공백이 어떠한 불안정으로 이어질 지 알 수 없다.
“우리의 젊은 민주주의는 고난과 시험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고, 튀니지의 알리 라라예드 전 총리는 퇴임 연설에서 말했다. “우리가 일궈낸 것을 자랑스러워해야 하며, 신의 가호와 함께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자신감을 가지고 같은 길을 걸어야 한다”. 이 연설에는 쿠데타나 내전 없이 평화적으로 정권이 이양된 데에 대한 튀니지 관료의 자부심이 담뿍 묻어났다. 그 말대로 튀니지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살아 있다. 종파갈등으로 불안이 상존하는 중동에서, 튀니지는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는 귀하디 귀한 선례다.
박정민(연세대 정치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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