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 2014 11월

0.01%의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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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땅 미국에서 치러지는 선거들이 금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사실상 2010년 이후 있었던 모든 선거에서 양당의 대결이 의미하는 것은 자금의 대결이었다. 올해 11월에 있었던 중간선거 역시 예외는 아니다. 법적 제도적 장치가 존재하는 현 상황에서 공화당과 민주당은 각각 코흐 형제와 톰 스테이어, 마이클 블룸버그와 같은 억만장자들의 금빛 권력에 흔들리고 있다. 슈퍼팩의 등장 이후 4년 만에 ‘금권정치’의 경종이 울리는 것이다.

 

돈의 이름으로 널 당선시키겠다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선거 자금의 중요성이 대두된 시기는 1970년대 이후로, 이 시기부터 전과 달리 후보자를 중심으로 투표가 이루어졌다. 후보자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투표는 정당을 중심으로 한 투표보다 개인 스스로의 경쟁력 확보를 필요로 했다. 이에 개별 후보들은 자신의 경쟁력을 위해 막대한 자금이 투입하기 시작했다. 선거 과정에서 선거캠프 조직, 선거캠프 참모의 인건비, 선거공약 개발 및 미디어를 통한 선거운동 등 자금이 필요한 부문은 많아졌고, 특히 TV광고를 통한 선거운동이 늘어나면서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기 시작했다.

사실 자금이 더욱 필요한 쪽은 당의 지원을 받으면서 인지도를 쌓아 놓은 현직자보다, 도전자의 위치에 있는 후보자들이었다. 특히 이들은 인지도, 조직력 부분에서 현직자의 업적을 극복하기 위한 자금이 필요했다. 선거자금의 투입은 당선이라는 산출을 얻기 위함이다. 미국 선거에서는 차츰 투입된 자금의 규모가 커질수록 득표율이 올라가는 비례 관계가 성립되기 시작했다. 도전자가 일정 수준의 자본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재선도 마찬가지이다. 선거자금의 측면에서는 재선자를 위한 국가 차원의 보조금이 있다고 알려져있지만 수혜자는 지원을 받는 대가로 여러 제약을 받게 된다. 즉 도전자와 재선자가 지출 규모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양측 모두 투입된 자본에 크게 영향받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이같은 현상에 대해 ‘자본에 기반한 정치적 불평등’이라는 시각과 ‘자본을 이용한 의사표현의 자유’라는 상반된 시각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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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에 제정되고 1974년에 개정된 연방선거자금법(Federal Campaign Finance Act, FCFA)은 이렇게 선거 자금의 무분별한 유입에 대한 문제 의식을 반영한 법으로, 선거판으로 쏟아지는 돈을 규제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연방정부는 연방선거자금법을 통해 선거자금의 기부나 지출에 대한 상한선 설정과 내역 공개, 선거자금 모금 및 지출에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는 연방선거관리위원회(Federal Election Commission, FEC)를 신설했다.

 

돈 파티다 돈 파티!

연방선거자금법의 개정으로 선거 자금에 대한 규제가 이루어지는 듯했지만, 2010년 대법원의 판결 이후 선거판은 다시 한 번 변화의 계기를 맞았다. 2010년, 보수 성향의 로비 단체 시티즌 유나이티드(Citizens United) 및 NGO 단체 스피치 나우(Speech Now)와 연방선거관리위원회의 소송 대결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은 기업은 물론 개인이 슈퍼팩(Super PAC)을 통해 무제한으로 기부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했다. 슈퍼팩(Super PAC)이란 기존의 ‘팩(Political Action Committee, 정치활동위원회)’을 뛰어넘는 민간 정치자금 단체이다. 2010년 이전까지 팩을 통해 선거자금을 모금하여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것 역시 법적으로 보장된 일이었지만, 개인으로서도 팩을 통해서도 기부할 수 있는 선거자금은 상한선이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2010년 대법원의 판결 이후 사실상 팩의 규제를 뛰어넘는 슈퍼팩이 법적으로 보장됐으며, 이로써 정치 자금의 비대화가 시작되었다.

슈퍼팩의 신설이 선거 자금에 미친 영향은 통계적으로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워싱턴 DC에 기반한 책임정치센터(the Center for Responsive Politics, CRP)에 따르면 2008년 동시선거에서 의회 선거만 따졌을 때 전체 24억 8,595만 달러 가량의 선거자금이 들어 갔다. 하지만 대법원 판결이 영향을 미친 2010년 의회에서 총 선거자금은 36억 3,171만 달러로 크게 상승하였다. 올해 11월에 있었던 중간 선거 역시 이와 비슷한 36억 7,000만 달러에 가까운 자금이 쓰였다. CRP 관계자는 슈퍼팩을 통한 선거 자금(정확한 출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다크 머니’ 혹은 ‘눈먼 돈murky money’라 불림)은 신고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실제로는 “이보다 1억 달러 이상 더 많을 것”이라며 역대 최고치를 갱신했을 가능성을 조심스레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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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손이 가장 크나

올해 중간선거 결과에서도 미루어볼 수 있듯 ‘다크머니 게임’에서 공화당이 압승하였다는 점은 확실하다. LA타임즈는 사실상 이번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의 선거 자금이 공화당에 크게 뒤지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선거에서 패배한 것이 ‘진화되지 않은 전략’, 즉 ‘선택과 집중’이 없는 전략을 채택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반대로 공화당은 예비선거 과정에서부터 당선 가능성이 높은 후보들을 ‘선택’해서 선거 막바지 경합 지역에서 돈을 쏟아 붓는 ‘집중’력을 보여줬다. 한 예로 공화당의 칼 로브가 설립한 슈퍼팩 ‘미국의 교차로(American Crossroads)’의 경우에는 선거 마지막 주에 보유 자금 5천만 달러 중 절반에 가까운 2천 1000만 달러 이상을 미디어 광고에 살포하였다. 또한 정치자금의 ‘빅 머니’ 상위 20명 가운데 15명이 친 공화당 성향의 사업가들이라는 점이 ‘다크머니 게임’에서 민주당의 패배를 불러 왔다는 분석도 있다. 여기에는 슈퍼팩을 통한 기부에 있어서 대개 경제적 지위가 높은 이들이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반영된 것이다.

공화당 측의 대표적인 큰 손으로 코흐 형제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번영을 위한 미국인(American for prosperity)’이라는 이름의 슈퍼팩을 통해 이번 선거에서만 해도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었다. 특히 이들은 올해 중간선거에서 접전 주로 알려진 아칸소, 아이오와, 루이지애나에서 총 2,500만 달러를 사용하였다. 그 결과 아칸소와 아이오와 주에서는 공화당 소속 상원의원이 선출되었다. 비록 루이지애나 주에서는 과반 득표자가 나오지 않은 관계로 12월 6일 결선 투표에 들어가겠으나 전문가들은 공화당 후보의 당선이 유력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이외에도 코흐 그룹은 총 11개 지역 상원의원 광고에 7700만 달러를 사용한 것으로 집계되어, 공화당 텔레비전 광고 비용을 가장 많이 댄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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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공화당 정치 자금의 큰 손, 데이비드 코크

민주당 측은 정치자금의 규모 면에서 공화당에 밀렸으나 결코 적은 수의 지원은 아니었다. 해리 리드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의 보좌관 출신 등이 설립한 ‘상원다수당 팩(Senate Majority PAC)’의 경우 공화당 후보 비방에 4천 7000만 달러를 사용했고 민주당의 대표 자금원인 헤지펀드 계의 거부 톰 스테이어와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 시장은 각각 7370만 달러, 2000만 달러를 민주당에 지원하였다. 억만장자이자 헤지펀드 매니저 출신인 톰 스테이어는 과거 화석연료에 주로 투자하였지만 환경운동가로 변신하면서 기후변화 입법에 찬성하는 민주당 후보들에게 자금을 지원하기 시작한 특이한 경우이다. 마이클 블룸버그는 성공한 기업가이면서 2002년부터 12년간 뉴욕시장으로 재임하면서 동성애, 총기 규제, 환경 등과 같은 이슈에서 진보적 성향을 보여 왔다. 현재는 보수진영 측의 코흐 브라더스와 비견되는 민주당의 든든한 후원자로 알려져 있다.

 

돈 냄새 나는 바람이 분다

이처럼 억만장자들의 쏟아지는 돈은 선거의 바람조차 다른 방향으로 바꾸는 듯 하다. LA타임즈의 조셉 텐페니의 분석에 따르면, 무제한적 기부금을 모을 수 있는 슈퍼팩의 등장으로 후보자 자신이 쓰는 자금은 지속적으로 적어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2010년 중간선거에서 후보자의 캠페인이 평균 7억 8천만 달러를 쓴 데 비해, 올해 캠페인당 평균 지출액은 6억 3천만 달러에 불과했다. 하원의원의 경우, 평균적으로 9억 4천만 달러의 비용을 지출하면서 4년전 약 10억 달러 선에서 하락세를 보였다.

또한 2010년 중간선거 유권자의 70% 이상이 45세 이상으로 조사되면서, 인터넷 혹은 SNS보다 TV 광고를 통한 선거 운동이 쏟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쾌재를 부르는 이들은 다름 아닌  TV 방송국이다. TV 방송국의 규모를 떠나, 올해 중간선거 기간에는 전국 방송인 케이블, 위성 TV, 지역 방송국까지 3분기 들어 엄청난 양의 흑자를 기록하였다. ‘선거 특수’를 준비했던 WHO 방송국은 말 그대로 ‘범람’하게 될 선거 광고와 그에 따른 수익을 위해 전략적으로 ‘4시 지역 뉴스’를 신설하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복합미디어 그룹 가네트사는 지난 중간선거보다 선거 광고 수익이 31% 증가하였고, 산하 방송국 46곳 역시 수익을 올렸다고 발표했다.

대개 이같은 TV를 통한 선거 광고는 상대 후보에 대한 비방 광고에 집중된 경향이 있다. 이는 비방 광고가 투입 대비 확실한 산출효과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더 타임즈>의 니콜라스 콘페소리는 선거 자금이 상대 후보의 약점을 찾아내거나 유권자에게 투표 독려를 하면서 사용되었다고 말했다. 특히 공화당은 해당 자금을 ‘떠오르는 미국(America Rising)’이라 불리는 ‘리서치 조직’ 설립에 썼는데, 이 조직은 민주당 후보를 당혹스럽게 할 정보를 발굴하는 목적으로 세워졌다.

 

피리 부는 사나이

워싱턴 DC에 위치한 ‘선라이트 재단’에 따르면, 2012년 선거에서 사용된 정치 후원금 60억 달러의 28%는 31,385명의 개인 기부자들이 낸 것이다. 미국 공식 인구가 3억 385만명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이는 인구의 0.01%에 해당하는 비율이다. 2012년에 당선된 후보 중 84%는 이 31,385명의 거부들로부터 후원금을 받았고, 이들 각개인의 기부금의 평균치에 해당하는 금액은 2만 6,584 달러로, 미국 중산층의 1년 가계 소득의 절반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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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라이트 재단의 리 드럿만은 이 1% 중의 1%에 해당하는 이들을 미국 정치의 ‘문지기’라 표현하였다. 이 0.01%의 문지기들은 대개 자신들이 원하는 정치적 이슈가 주목 받도록 미디어를 움직이고, 그에 대한 정치적 담론을 제한 및 유도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손꼽히는 기업들과 거부들은 본인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인에게 자금을 쏟아붓고, 그 정치인들이 당선되어 의회에서 그들을 위한 목소리를 낸다. 여기에 ‘로비’라는 합법적 장치가 선거 후에도 이들의 영향력을 보장한다. 이러한 구조에는 ‘문지기’들을 제외한 다수의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는 장치가 결여돼있다.  이처럼 경제력 있는 소수의 계층에 의해 독점되는 ‘금권정치’가 지속된다면, 더 이상 선거는 ‘시민들의 축제’라 불리기 어렵다. 이러한 경향이 가속화된다면 선거는,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의 이야기처럼 선두에 선 사람을 좇는 수동적인 축제가 될 지도 모른다.

 

김은경(국민대 정치외교)
Eunkyongkim31@gmail.com

 

 

Attack on Bus

11월 22일, 케냐 북부에서 소말리아의 이슬람 무장단체인 알샤바브 반군이 버스를 납치하여 非무슬림 승객 28명을 살해했다고 현지 경찰이 밝혔다. 이에 따르면 이 버스는 케냐 북부 소말리아와 접경지역 부근인 만데라에서 수도 나이로비로 향하던 중이었고, 60여 명의 승객이 탑승한 상태였으며 국경으로부터 약 31마일 떨어진 지점에서 납치되었다.

케냐는 2011년 8월 소말리아 내전에 참전한 이후로 알카에다와 연계된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인 알샤바브로부터 지속적인 테러의 위협을 당하고 있다. 케냐 당국에 따르면 소말리아 내전 참전 이후로 감행된 테러공격이 적어도 135건 이상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2013년 9월 말엔 소말리아에 주둔한 케냐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알샤바브가 수도 나이로비의 유명 쇼핑몰 웨스트게이트를 공격하여 67명이 사망했다.

소말리아 정부군은 아프리카 연합평화유지군(Africa Union Force)의 지원을 받아 알샤바브 반군의 테러를 근절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AFP통신은 소말리아 정부군과 연합군이 알샤바브가 점거한 마지막 남은 항만인 바라웨항을 탈환했고, 반군은 당분간 재정난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알샤바브는 10월 초 미국 공군의 공습작전으로 지도자인 압디 고다네(Abdi Godane)을 잃은 상태였다. 고다네의 자리는 아흐메드 오마르(Ahmed Omar)에게 인계된 것으로 추정된다.

목승훈(경희대 국어국문학)
ahrtmd18@naver.com

[끝나지 않는 사막의 겨울 1] 혁명 4년: 독재의 잔해 속 튀니지의 홀로서기

혁명4년

튀니지의 과일상이었던 모하메드 부아지지의 분신으로 북아프리카의 독재정권이 도미노처럼 무너진 지 4년이 지났다. 3년 전, 혁명은 물론 나아질 미래도 함께 꿈꾸었던 국가들의 2014년은 극명하게 다르다. 튀니지의 대장정은 대선을 통해 완결되었으나 이집트는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의 제로섬 게임에 발이 묶였고, 리비아는 국가의 뼈대부터 지어올려야 하는 형편이다. 시리아가 사분오열된 가운데 나타난 ISIS라는 괴물과 쿠르디스탄의 자치는 1916년 그어진 국경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었다.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국가들이라고 안정된 것은 아니다. 걸프 국가들는 페트로달러로 혁명의 불을 끄려 들었고, 석유의 축복을 받지 못한 왕정 국가들은 개혁과 붕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아랍의 봄”, 1차대전 이후 중동이 맞이한 최대의 과도기를 가능케 한 역사적 맥락과 경제와 제도는 지극히 상이하다. 이번 특집 “끝나지 않는 사막의 겨울”에서는 개별 흐름의 구조와 행위자들, 더 나아가 전망까지도 살펴보고자 한다.

독재와 가난에 신음하던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튀니지, 이집트, 알제리, 모로코에서 치솟는 인플레이션율과 실업, 빈부격차에 항거하는 시민들이 개혁을 외쳤다. 기나긴 독재와 경제난을 타파하고자 하는, 아래로부터의 외침이었다.

2011년 ‘아랍의 봄’의 이야기가 아니다. 1980년대 북아프리카를 뒤덮은 “빵 폭동” 당시의 이야기다. 불이 옮겨붙은 기름이었던 독재와 빈부격차, 실업은 북아프리카에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고여 있던 기름이며, 그것을 가능하게끔 한 구조는 단발적이지도 단선적이지도 않다. 따라서 앤더슨이 말했듯 ‘아랍의 봄’은 SNS의 혁명이 아니고, 대규모 시위는 계속해서 일어나 왔으며, 구조의 형성과 존속에 대한 이해 없이 아랍의 봄의 경과와 전망을 논하는 것은 단편적 겉핥기라는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신의 몸과 튀니지에 불을 지른” 분신자살을 통해 혁명의 시발점이 된 무함마드 부아지지는 튀니지의 소도시에서 과일을 파는 대졸자였다. 이 문장에서 튀니지의 고질적 병폐 몇 가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대학 졸업자가 과일상으로 전락할 만큼 극심한 실업, 수도와 지방 간 양극화, 이슬람에서 금하는 자살을 목도한 후에야 시위를 일으킬 만큼 무감각한 시민사회. 이것의 뿌리는 지난 몇 년 간의 문제를 거슬러 1956년 독립 이전부터 튀니지가 겪어낸 역사의 축적으로까지 뻗어올라간다.

 

우리는 안전한 나라입니다
튀니지는 혁명이 일어날 법한 나라가 아니었다. 《포린 어페어스》의 에릭 골드스틴은 혁명 이전의 튀니지가 “안정된 번영을 구가하는 국가의 모든 조건을 갖추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랬다. 튀니지인들은 중동 최고의 교육수준을 자랑했고, 지대 추구가 아닌 수출과 제조업으로 일궈낸 중산층의 기반은 탄탄했으며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폭발의 가능성 없는 안정된 인구성장세를 보였다. 1인당 GDP는 모로코와 이집트의 두 배로, 북아프리카 최대의 석유수입을 자랑하는 이웃나라 알제리보다도 높은 수치였다. 알제리의 불안한 고요와 카다피식 사회주의의 리비아 사이에서 튀니지는 귀하디 귀한 안전지대였으며, 수도인 튀니스(Tunis)는 유럽인 여행객들로 북적거렸다.

튀니지의 자유화 정책은 거시적 측면에서는 사실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 부르기바가 이끈 사회주의 실험이 실패한 1969년을 지나, 70년대 내내 튀니지는 매년 평균적으로 4.7퍼센트의 경제성장을 지속했고 지대 추구 대신 식민지 유산인 제조업을 발전시켰다. 정치적으로도 개혁이 가져다준 긍정적 변화는 분명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여성의 사회참여 장려와 세속화 정책을 통해 튀니지의 이슬람이 온건 노선을 걷도록 했다는 점이다. 튀니지가 자랑하는, 아랍의 봄의 주축이 된 이 중산층도 이 시기에 형성됐다. 인적 자본에의 투자를 늘리기 위해 대학을 대폭 세웠고, 현재까지도 튀니지는 중동 제1의 교육수준을 자랑한다.

무혈 쿠데타를 통해 1986년 집권한 벤 알리의 경제정책은 튀니지가 경찰국가로 변모해 가는 과정과 맥을 같이한다. 벤 알리는 경제개방과 보호무역을 병행했다. 자유경제구역을 지정했고 외국 기업을 끌여들여 실업 문제를 해결했다. 90년대에는 튀니지 경제의 양대 축 중 하나가 된 관광업이 발달했다. 또 사회 집단의 발달을 이끈 것은 시민들이 아닌 튀니지 정부였다. 정부에 대항할 가능성이 있는 단체들, 즉 노조, 인권단체, 언론 등은 조합주의를 도입한 정부의 통치 하에 종속화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한때는 파업을 이끌었던 튀니지의 강력한 노조인 UGTT(Union Générale Tunisienne du Travail, 이하 UGTT)다. 어떤 의미에서 튀니지는 굉장히 안정된 국가였다.

 

가만히 있으라
문제는 독재와 부패였다. 튀니지의 경제적 자유화는 결코 정치적 자유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튀니지는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1956년 이후 단 두 명의 대통령만을 본 나라다. 가히 ‘신화 창조’를 했던 부르기바의 ‘컬트 통치’에 이어 튀니지를 경찰국가화한 벤 알리의 통치는 그야말로 두려움의 통치였고 그는 표현의 자유와 야권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90년대 관광업의 발달은 벤 알리가 조종한, ‘현대화된 정권이 들어선 관광 명소’의 이미지 때문에 가능했다. “외화를 위해 나라를 팔아먹었다prostituted”는 이슬람주의자들의 비난이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실제로 벤 알리에게 ‘공공의 적’은 당시 튀니지의 유일한 정치적 대안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조직화된 집단이었던 이슬람주의였다. 이슬람주의자, 좌파, 기자, 인권운동가 등 수천 명이 정치범으로 몰려 감옥에 갇혔다. 여기에는 국민들의 자발적 협동도 있었다 : 90년대 알제리가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 간 내전에 휘말리는 것을 목도한 튀니지 국민들은 벤 알리의 통치에 순응했다. 이를 기반으로 벤 알리는 92년 세속주의 신문들과 잡지마저 폐간시켰고 1994년과 1999년 대선에는 타 후보의 출마를 금한 후 대통령직을 역임했다.

분명 경제적 자유화는 자유화의 형태를 띠었다. 보조금과 정부 개입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견주의를 기반으로 한 공적 부문은 여전히 비대했고 경제의 흐름은 자율적이지 못했다. 또한 공적 부문과 사적 부문의 경계는 모호했고, 규제는 매우 자의적으로 적용되고 악용되었다. 국민 개개인을 감시와 처벌의 이중적 행위자로 만든, 실로 “오웰적” 통치였다. 그렇게 튀니지의 시민사회는 도구화되고 분열되었다. 이와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 벤 알리 일가를 중심으로 한 뿌리깊은 부패와 정경유착의 문제였다. 가령 주튀니지 미국 대사에 의하면 “튀니지 상업 엘리트의 절반 이상이 벤 알리의 세 성인 자녀, 7명의 남매, 2번째 부인의 10명의 남매와 개인적으로 연루된 이들”이었다. 은행과 기업과 수출이 이들 일가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다. 세계은행은 벤 알리 정부의 개입이 “멋대로였고 경쟁을 제한했으며 관료들과 개인적 연줄이 있는 이들을 선호했”으며, “투명성과 예측가능성이 낮았다. 이는 경쟁, 효율성, 투자, 생산의 저하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이는 청년실업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독재 정권 주도의, 제조업 위주의 경제 발전이 막다른 벽에 부딪힌 상황에서 자본의 자율성은 억압되었고 경제는 정체되었다. 새로운 물꼬를 틀 지식의 창조는 벤 알리의 경찰 국가에서는 불가능했다. 《포린 어페어스》의 아론 젤린은 1980년대 급속도로 형성된 대학들이 배출하는 졸업생은 매년 7만 명, 그러나 이들에게 가능한 직업은 3만 개뿐이라고 말한다. 이 문제가 축적된 결과물이 바로 30퍼센트를 상회하는 청년실업률이다.

튀니지의 고질병인 유럽에의 의존 역시 이 당시 생겨난 병폐 중 하나다. 사적 부문의 발전과 제조업의 다각화, 외국인 투자를 추구했던 튀니지는 유럽경제공동체와 의류 및 제조업 부문에서 경제협력을 체결하지만 유럽의 보호무역의 장벽은 높았고, 유럽으로부터 수입해 가공한 섬유나 농산물을 유럽에 수출하려 해도 유럽의 수입쿼터제에 가로막혔다. 또 유럽의 보호무역이 강화되며 튀니지의 값싼 노동력은 유럽 기업들에 착취당했고, 여기에 원유와 밀, 인산염의 가격이 변동하며 물가가 급등하고 무역적자가 심화되어 부채가 쌓이게 된다. 이렇게 되자 1978년, 튀니지 노조 UGTT가 정부가 물가연동제를 시행하지 않는 것에 반발하여 대규모 파업을 일으키고, 이에 대한 정부의 무자비한 탄압을 통해 이틀 동안 150명이 사망한다.

고작 1100만 인구를 가진 튀니지 내수 발달에는 한계가 있으며, 튀니지 경제의 높은 대외의존도는 납득할 수 있다. 그러나 유럽에 의존도가 높다는 것은 유럽의 경제변동에 그만큼 취약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80년대를 넘어 90년대에는 벤 알리의 효율적 행정과 세계화에 힘입어 유럽의 자금을 흡수할 수 있었으나 동시에 갈수록 역내 통합도를 높여가는 EU 시장을 두고 한국, 대만 등 아시아 신흥 국가들과도 경쟁해야 했다. 2004년 튀니지 GDP의 92.5퍼센트가 수출-수입에 의존할 정도로 튀니지 경제의 대외의존도는 높으며, 이 중 7할은 유럽과의 무역이다. 그러나 유로존 위기를 거치며 유럽연합의 총수요가 쪼그라들었고, 이는 튀니지의 수출에 즉각적 영향을 끼쳤다. 더군다나 90년대 들어서 유럽과 경제협정을 연달아 체결하며 관세의 감소로 세원이 줄어들었고 국내 기업들의 입지가 불안정해졌다. 그러나 튀니지의 경제는 수치상으로는 여전히 견고해 보였다.

 

북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게, 혁명이 터졌다. 전세계로부터 국제적 칭송이 이어졌다. 80년대 유가 하락과 소련의 붕괴를 겪으면서도 건재했던 아랍 예외주의(Arab Exceptionalism)이 무너질 듯 싶었다.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제헌위가 구성됐고, 2011년 10월의 선거에서는 라시드 간누치(Rachid Gannouchi)가 이끄는 이슬람 부흥주의 정당인 엔나흐다(Ennahda)가 승리해 연정을 꾸렸다. 벤 알리 시절 억압받은 목소리들이 국민적 통합을 이끌어내 민주주의를 실현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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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스민 혁명 당시 군의 시위대 진압. 그러나 군은 시위대에 발포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이집트나 리비아의 제로섬 정치와 비견할 바 아니었으나 2년 동안 엔나흐다가 이끈 정치는 신작로가 아닌 울퉁불퉁한 돌길을 달리는 정치였다.

먼저 안보의 문제가 있었다. 벤 알리 정권이 무너지며 튀니지의 불안정을 틈타 리비아 및 알제리와 맞닿은 국경을 통해 밀수된 무기와 함께 이슬람 원리주의 테러단체들이 유입됐다. 대표적인 것이 안사르 알 샤리아(Ansar al-Sharia)다. 이들 단체의 유입은 곧바로 정정불안으로 이어졌다. 2012년 9월에는 미국 대사관이 공격받았고, 2013년 2월에는 인기 높은 좌파 세속주의 정치인인 초크리 벨라이드(Chokri Belaid)가 암살됐다. 튀니지는 정치적 안정과 국민적 통합을 자랑거리로 삼는 나라다. 이런 튀니지에서 고위 정치인의 암살이 가져다 준 충격은 엄청났다. 세속주의 야권을 이끄는 니다 투니스(Nida Tunis)의 베지 카이드 에셉시(Beji Caid Essebsi)는 엔나흐다가 테러리스트들의 활동을 방관하거나 지원하고 있다며 비난했고, 일부는 “이슬람주의자들은 모두 테러리스트들이다”는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이에 엔나흐다의 하마디 제발리(Hamadi Jebali) 총리는 “정부가 튀니지인들을 실망시켰다”며 사임했다. 제발리는 테크노크라트 정부를 구성할 것을 제안했고 엔나흐다는 이를 일부 수용했다. 그러나 7월, 또다른 야권 정치인인 모하메드 브라히미(Mohammed Brahimi)가 대낮에 가족들 앞에서 암살됐다. 이는 공교롭게도 헌법의 방향성 논란과 맞물렸다. 튀니지는 프랑스 식민통치 시기, 또 부르기바와 벤 알리 통치 하에서 형성된 세속주의의 유산을 보존하는 국가다. 한데 그런 튀니지를 엔나흐다는 이슬람화하려 들었다. 헌법 6조를 통해 샤리아가 헌법의 기반임을 규정하려 든 것이다. 연이은 암살과 맞물려 이에 대한 야권의 반발은 엄청났다. 튀니지 전체가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로 양분됐고, 엔나흐다의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튀니지를 뒤덮었다. 이에 엔나흐다는 2월과 달리 재빨리 안사르 알 샤리아를 주범으로 지목하며 불법 단체로 지정했으나 이로는 대국민적 불만을 완화하기에 역부족이었다. 금방이라도 세속주의가 엔나흐다를 끌어내릴 것처럼 보였다.

인플레이션 역시 마찬가지였다. 엔나흐다 정부는 혁명의 척추였던 중산층의 생활 수준을 상향시키는 데 실패했다. 유로존 위기 이전부터 약화된 중산층의 구매력은 결코 다시 상승하지 못했다. 33%의 청년 실업률은 낮아지지 못했고, 물가는 연 6%씩 상승했다.

역설적으로 이집트가 무너졌기 때문에 튀니지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해 7월, 선거로 당선된 무슬림형제단이 대국민적 지지를 받는 군부에 의해 축출된 것은 엔나흐다에게는 소름끼치는 전망이었다. 9월 엔나흐다는 헌법을 통한 튀니지의 이슬람화 시도를 중단함으로써 무슬림형제단의 행보를 피해가는 데 성공했다. 세속주의와 엔나흐다 간 화해를 이끌어낸 것은 그 시작이 독립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가는 튀니지의 강력한 노조 UGTT였다. UGTT는 헌법과 선거법의 제정이라는 과제를 완수한 후 사임하겠다는 엔나흐다의 약속을 받아냈고, 엔나흐다가 사임한 후 선거를 책임질 임시 정부가 들어선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뒤이은 12월 엔나흐다는 산업부 장관이며 무소속 정치인인 메흐디 조마를 임시 정부의 총리로 지명했다. 2014년 1월에는 헌법이 제헌위 216명 중 200명의 찬성으로 통과됐다. 헌법 제정이라는 마지막 임무를 끝낸 엔나흐다의 알리 라라예드 총리가 사임해 조마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올해 3월에는 대통령 몬세프 마르주키가 혁명 이후로 3년간 튀니지에 내려졌던, 벤 알리의 유물인 비상사태를 해제했다. 굳었던 것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The Old Goes Anew
2014년은 1990년대가 아니다. 반 세기를 넘는 시간 동안 단 두 명의 대통령의 통치 하에서 튀니지 인들은 가히 부르기바의 신격화와 뒤이은 벤 알리의 경찰국가를 차례로 경험했다. 그리고 튀니지인들은 그 독특한 역사적 경험을 통해 나름의 무언가를 터득한 듯 싶다. 귀결은 명확하지 않을지언정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명확하다.

먼저 튀니지의 여야는 만나서 대화한다. 이로써 튀니지는 벤 알리의 유물이었던 제로섬 정치를 피할 수 있었다. 엔나흐다의 사임을 요구하는 목소리와 함께 튀니지의 정정불안이 정점에 달했던 2013년 12월, 튀니지는 통합의 국민성이 정치문화의 형성으로 고스란히 이어질 수 있음을 증명했다. 에셉시와 간누치의 역사는 튀니지의 정치경제적 양극화의 역사이기도 하다. 1994년 벤 알리 정권 하 공직을 떠났을지언정 에셉시는 외무상직과 프랑스, 독일 대사직을 역임한, 튀니지 부르주아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반면 간누치는 에셉시의 공직 생활 중 두 차례나 옥살이를 했으며 엔나흐다 운동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에셉시와 간누치가 꿈꾸는 튀니지의 미래는 극명하게 다르다. 그럼에도 아무도 협상 테이블을 떠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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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브 부르기바 총리 재임 당시 국방부 장관을 지냈던 에셉시.

《뉴욕 타임즈》의 카를로타 갈(Carlotta Gall)은 기존의 세속주의 정치 엘리트를 대변하는 니다 투니스와 튀니지의 이슬람을 대변하는 엔나흐다의 협상에 관한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전한다. 테러 공격이 계속되고 경제난이 정점에 달했을 때 에셉시는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간누치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당신이 이 난국에 책임이 있다. 그러니 당신은 해결책의 일부이기도 해야 한다”며 에셉시는 간누치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이는 둘 다에게 정치적 손해를 수반하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러나 인터뷰 12일 후 간누치는 에셉시에게 전화를 걸었고, 에셉시의 해외 일정에 맞추어 파리까지 따라왔다. 브라히미의 암살 후 정치적 난국이 지속되던 넉 달 동안 그 둘이 독대한 횟수는 최소 5번에 달한다. 계속되는 경제난과 안보 불안에도 불구하고, 튀니지 정국의 양대 거두가 마주앉았다는 사실은 튀니지의 끓어오른 거품을 식힐 수 있었다. 튀니지의 안정은 출혈 없이 양끝으로부터 왔다.

 

튀니지가 해답이다
자신들의 역사뿐만 아니라 주변국의 “혁명”, 종파갈등과 내전 속에서 국가의 기틀 자체가 무너진 폐허에서도 튀니지는 쓸 만한 교훈 몇 가지를 찾아냈다.

먼저 튀니지는 과욕과 이슬람화라는 이집트 무슬림형제단의 행보를 피하는 데 성공했다. 무르시는 이집트를 이슬람 국가로 규정하고 엔나흐다와 마찬가지로 이집트 헌법의 기반을 샤리아에 두려고 시도했었다. 엔나흐다는 2013년 7월 무슬림형제단의 통치에 맞서 타흐리르 광장에 집결한 수백만 명의 이집트인을, 정치경제적 안정에 실패했다는 명분으로 무슬림형제단에 이집트 군부에 의해 끌려나가는 것을 보았다. 다른 모든 이슬람 부흥주의처럼, 엔나흐다의 사상적 기반은 무슬림형제단에서 시작된다. 무슬림형제단의 축출과 뒤이은 지하화를 전적으로 남 일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입장인 것이다. 무르시의 축출을 기점으로 엔나흐다의 정책은 완전히 변한다. 먼저 헌법의 샤리아 조항에서 세속주의 정당들에게 ‘통 큰 양보’를 했고, 에셉시의 나이를 흠잡지 않고 대선 출마를 허용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게는 초크리 벨라이드와 모함메드 브라히미의 암살을 주도한 안사르 알 샤리아를 테러집단으로 지정했다. 이는 정치적 이슬람이라는 관점에서 지극히 중요하다. 세속주의가 아닌 온건 이슬람 부흥주의가 급진 이슬람 부흥주의를 불법화한 것이다. 엔나흐다는 이슬람과 민주주의가 공존할 수 있음을 보였고, 정치화된 이슬람이 협력과 중용을 실천할 수 있음을 증명해냈다.

여기에 무시할 수 없는 것은 무슬림형제단과 엔나흐다의 차이다. 무슬림형제단은 가말 압둘 나세르의 뒤를 이은 안와르 사다트와 호스니 무바라크 통치 하에서 끊임없이 탄압받았다. 그러나 이는 엔나흐다도 마찬가지였다. 벤 알리의 경찰국가는 유례 없는 통제와 탄압을 자행했고, 그 주적은 이슬람 부흥주의였다. 게다가 엔나흐다는 무슬림형제단에 뿌리를 둔 이슬람 부흥주의 단체다. 그러나 정부 탄압 하에 감옥에 갇히고, 감옥 안에서 사상과 이론을 발전시켜야 했던 무슬림형제단과 달리 엔나흐다에 대한 벤 알리의 탄압은 추방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추방당한 엔나흐다의 고위 인사들이 정착한 곳이 다름아닌 파리와 런던이며, 이들은 급진 이슬람 부흥주의의 기틀을 마련한 사이드 쿠툽과 마우두디 대신 런던의 민주주의와 정당정치에 노출되었다. 엔나흐다의 노선이 자유민주주의의 본고장에서 형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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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나흐다의 지도자인 라시드 간누치

또 군부의 문제도 있었다. 장기간 군사독재로 150만의 군을 보유하고 군부가 장악한 경제가 GDP의 4할을 차지하는 이집트와 달리, 튀니지의 군부는 5만 명 남짓한 지극히 전문적이고 유능한 군인들로 이루어진 비정치적 집단이다. 1957년과 1962년 군 쿠데타 시도 이후 부르기바는 군대를 비정치화했고 그 병력도 제한했다. 이는 벤 알리의 군 정책으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혁명 당시 시위대에 대한 벤 알리의 발포 명령에 합참의장인 라시드 암마르가 불복했다는 것은 상징적인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튀니지가 성공적으로 피한 것은 ‘과도한’ 역사청산으로 나라 운영의 기틀 자체를 뿌리뽑은 리비아의 행보다. 2013년 리비아가 제정한 정치제한법(Political Isolation Law)는 카다피 정권에 협력했던 인사의 공직 출마를 제한했다. 이는 다시 말해 카다피의 통치 하에 정부에 고용된 사람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것으로, 1969년 이후로 정부와 나라를 경영했던 실무자들을, 리비아를 굴러가게 할 줄 아는 유일한 이들을 내쳤다는 것이다. 비슷한 선례는 2003년에 이미 있었다. 사담과 그 정치기반을 뿌리뽑기 위해 미국은 10만 명의 바트당원의 공직 출마를 제한했고, 이는 이라크의 국가 경영 자체를 마비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현재 리비아에는 통일된 정부도 없으며, 카다피의 공백을 틈타 하나씩 종파와 부족 간 갈등이 머리를 들고 있다.

그러나 튀니지는 다른 경로를 택했고, 성공했다. 에셉시와 간누치의 협상을 통해 엔나흐다는 벤 알리 정부 인사들의 선거 출마를 금지하는 법안의 상정을 철회했다. 첫 입법선거에서는 벤 알리 정권 당시 인사들의 출마를 불허했으나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올해 10월 튀니지는 벤 알리 정권 당시 관료들까지 끌어안은 총선을 성공적으로 치러냈고, 11월 말에는 대선이 치러진다. 이번 대선에 출마하는 벤 알리 정권 당시 장관급 인사만 세 명이며, 단일화에 실패한 이들은 아마 에셉시에게 자리를 양보할 공산이 크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튀니지의 재건사업은 혁명의 여파에 몸살을 앓는 타 아랍 국가들과 비해 절대적으로 우월한 조건에서 시작했다. 인구 8천만의 이집트와 달리 튀니지의 인구는 고작 1100만 명이며 그 98%는 수니 무슬림이다. 이 중 급진 살라피 무슬림의 비율은 낮으며, 튀니지는 이슬람 법학파 중 가장 진보적이라 여겨지는 말리키 법학파의 본산이기도 하다. 산유국도 아니고 지정학적 요충지를 차지하지도 않은 덕에 외세의 개입도 적었다.

그럼에도 1990년대의 문제는 여전히 지속된다. 진정한 경제적 자유화를 판단하기에는 시기상조이며 유럽에 대한 높은 대외의존도, 보조금 경제를 중심으로 한 비대한 공공 지출, 청년실업의 문제가 있다. 따라서 실제로 필요한 것은 내수의 증진과 대외의존도의 감소, 공공 지출의 감소, 물가 안정, 그리고 일자리 창출이다. 《포린 폴리시》의 오사마 롬다니에 의하면 2010년과 2013년 사이 튀니지의 보조금 지출은 무려 270퍼센트나 증가했다. 대외 부채는 해결되지 않고 있으며 튀니지는 유럽과 일본, 걸프 국가들로부터 재정적 보조를 얻어내려 하고 있으나 경제위기에서 막 회복하려 드는 유럽, 소비세의 증가로 경제가 주저앉은 일본, 국내 돈 풀기에도 바쁜 걸프 국가들의 상황을 생각해 볼 때 대외 원조를 통한 튀니지의 경제 안정은 먼 이야기다. 게다가 튀니지 경제는 내적 모순을 안고 있다. 외국인 투자와 기업 유치를 통해 일자리를 창출해야 하지만 국내 기업들의 경쟁력은 위협받게 된다. “유럽과의 경제교류를 진척시키겠다”고 에셉시는 말하지만 이것이 과연 튀니지가 나아갈 방향인지는 불확실하다. 정부는 일자리 창출을 위한 어떤 방향성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투자는 물론 국내 안정과도 직결되는 안보 문제도 있다. 알제리와 리비아의 불안정을 틈타 무장 단체들은 튀니지로 계속 유입되며, 이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 정치경제적 발전을 논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그러나 안보 문제에는 개선의 여지가 적다. 리비아의 불안정이 더욱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튀니지 국경으로부터 고작 20마일 떨어진 리비아 서부에는 튀니지 반정부 무장단체를 위한 훈련 캠프가 마련되어 있을 정도로 튀니지의 안보는 아슬아슬하다. 알제리의 미래를 생각해 보면 튀니지의 안보는 제자리걸음만 해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올해 81세를 맞이한 부테플리카 대통령이 임기 중 사망할 경우 알제리의 권력공백이 어떠한 불안정으로 이어질 지 알 수 없다.

“우리의 젊은 민주주의는 고난과 시험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고, 튀니지의 알리 라라예드 전 총리는 퇴임 연설에서 말했다. “우리가 일궈낸 것을 자랑스러워해야 하며, 신의 가호와 함께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자신감을 가지고 같은 길을 걸어야 한다”. 이 연설에는 쿠데타나 내전 없이 평화적으로 정권이 이양된 데에 대한 튀니지 관료의 자부심이 담뿍 묻어났다. 그 말대로 튀니지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살아 있다. 종파갈등으로 불안이 상존하는 중동에서, 튀니지는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는 귀하디 귀한 선례다.

 

박정민(연세대 정치외교)
jay17289@gmail.com

노예 12년, 그 이후 – 하편

<노예 12년>은 자유인이었지만 부당하게 납치되어 12년 간 노예로 살았던 한 미국인의 이야기다. 영화는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당시 미국 노예제의 참상을 표현한다. 특히 기적적으로 노예농장에서 탈출한 주인공 솔로몬과는 대조적으로, 비참한 상황에 남겨져야 했던 ‘팻시’처럼 ‘구원받지 못한’ 노예들은 그 뒤로도 계속해서 절망적인 삶을 살아야 했다.

-상편 읽기: https://journalprism.wordpress.com/2014/07/30/%EB%85%B8%EC%98%88-12%EB%85%84-%EA%B7%B8-%EC%9D%B4%ED%9B%84-%EC%83%81%ED%8E%B8/

 

남겨진 팻시

제목처럼 솔로몬은 12년의 노예 생활을 끝으로 자유인의 신분을 되찾고 가족들이 있는 사라토가로 귀향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그러나, 영화는 끝나도 현실은 계속된다. 솔로몬이 탈출에 성공했던 당시 흑인 납치 사건은 여전히 흔했고, 솔로몬처럼 자유를 되찾은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태어나서부터 노예로만 산 사람들의 수치는 350만 명을 넘었다. 솔로몬의 극적인 탈출은 한 인물의 기적같은 이야기였을 뿐이다.

솔로몬이 영화 마지막에 앱스의 루이지애나 농장을 떠나는 장면에서, 팻시는 마차를 타려는 솔로몬을 붙잡는다. 하지만 솔로몬은 자유의 희망에 취해 그녀를 뿌리친다. 팻시는 그녀를 정신적으로 지탱하던 솔로몬이 떠나자 결국 몸에 힘을 잃고 쓰러지고 만다. 솔로몬은 노예신분에서 탈출하지만 그의 뒤에는 버려지고 쓰러진 수많은 팻시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끔찍한 노예 생활을 마친 솔로몬이 가족들과 해후할 때는 물밀듯한 감동과 안도가 밀려온다. 하지만 남겨진 팻시를 생각하자면, 이 영화를 단순히 솔로몬 개인의 감동 스토리로 볼 수만은 없다.

영화 마지막에는 실존 인물 솔로몬 놀섭이 자유를 찾은 후의 정황을 설명한다. 놀섭은 자신을 납치해 팔았던 인신매매업자들과 그를 부렸던 모든 노예 주인들을 고소했지만 백인에 불리한 증언을 할 수 없어 모든 재판에서 패소했다. 남북전쟁 후에 남부가 제정한 흑인 단속법(Black Codes) 때문에 흑인들은 백인에 불리한 증언을 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글을 배울 수도 없었으며 직업에도 제한이 많았다. 놀섭은 대학에서 노예제에 대해 강의하고, 도망 노예들이 탈출을 위해 건설한 지하 철도 조직(Underground Railroad) 프로젝트를 돕는 등 일평생을 노예폐지론자로 활동했다. 그리고 12년의 절망적인 노예 생활을 상세하게 서술한 그의 자서전은 베스트셀러에까지 오르며 미국 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그의 자서전은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지만 사회 변혁을 끌어내기에는 불충분했다. 자서전은 발간 후 150년 이상이 지난 후에나 영화화되어 전세계에 개봉되었다. 영화를 제작한 흑인 감독 스티브 맥퀸은 그의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 수상 소감에서 “노예 제도를 견딘 사람들, 그리고 지금도 노예 제도로 고통 받는 2100만명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고 말한다. 맥퀸 감독은 1800년대부터 지금까지 남겨진 ‘팻시’들에게 수상의 영예를 돌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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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리하되 동등하게(Separate But Equal)

솔로몬이 죽은 후, 비로소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 듯했다. 1865년 드디어 미국 전역에서 노예가 ‘공식적’으로는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6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이김으로써 얻어낸 결과다. 전쟁의 종료와 동시에 의회를 통과한 수정헌법 제13조, 제14조, 제15조에 따라 흑인들은 적어도 법적으로는 백인들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게 되었다. 제13조는 노예 제도의 폐지를 선언했고, 제14조는 흑인을 포함한 모든 미국 시민이 적법한 절차에 의하지 않고서는 자유나 재산을 박탈할 수 없는 권리와 법 앞에서 동등한 보호를 받을 권리를 명시했고, 제15조는 인종, 피부색, 이전 신분과 관계 없이 동등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일부 지역에서 자행되던 흑인에 대한 물리적 테러는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흑인들에 대한 차별과 위협은 공공연히 계속되었다. 특히 남부에서는 지방 정부의 주도 하에 백인과 흑인을 분리하기 위해 ‘격리하되 동등하게’ (Separate but equal)라는 모순적인 원칙에 입각한 정책들을 내놓았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기차의 백인칸과 흑인칸을 나누는 루이지애나 주의 차량 분리 법령(Separate Car Act)이다. 1892년 백인칸에 탔다가 체포 당한 호머 플레시는 루이지애나 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차량 구분은 주의 자치권에 해당한다며 소송을 기각했다. 플래시는 주 최고법원, 연방대법원에까지 항소했으나 패소하였다. 8대 1로 루이지애나 주 지방 법원의 손을 들어준 연방대법원은 백인과 흑인은 정치적으로 동등할 뿐 현실적으로 흑인은 사회적으로 열등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고, 흑인이 백인칸에 탈 수 없는 것처럼 백인도 흑인칸에 탈 수 없으므로 엄밀한 차별은 아니라는 판결문을 내렸다. 이 판결은 미국에서 인종 격리가 기차 뿐 아니라 학교, 식당, 극장, 공중 화장실, 식수대까지 거의 모든 일상생활에까지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분리하되 차별하지 않는다는 관습에 법원의 정당성이 가미되었기 때문이다.

공공연한 차별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은 1951년 캔사스에서 흑인과 백인을 분리한 학교를 운영하던 토피카시 교육위원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13명의 학부모들이 승소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쉬운 과정은 아니었다. 13명의 학부모들은 지방법원에서 패소를 맛보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수정헌법 제14조 위반을 주장하며 항소했다. 대법원은 공교육에서 ‘격리하되 동등하게’의 정책은 설 자리가 없고, 격리된 교육은 근본적으로 동등할 수 없다는 만장일치의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미국 전역에서 많은 백인 학부모들은 흑인 학생과 백인 학생의 통합 교육에 반대했다. 백인들은 자녀들을 빼돌려 따로 백인 수업을 듣도록 주선하고 졸업식과 같은 교내행사도 따로 치렀다. 급기야 인종 격리를 지지하던 아칸소 주지사는 1957년, 리틀락 센트럴 고등학교에 등교를 하던 흑인 학생들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린 사건도 있었다. 또 1955년 앨러배마주에서는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가 버스에서 백인 승객을 위해 자리를 비우라는 운전사의 요구를 거절했다가 체포되는 사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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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의 형식적 자유는 노예 해방 후에도 100년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도 판결문의 글자들에 지나지 않았다. 흑인에 대한 억압과 착취, 인종 분리는 극에 달해있었다. 카토, 가브리엘, 터너를 비롯한 무수한 노예 반란들에도 사회는 쉽게 변하지 않았다.

 

가난을 강제한 주거 차별

흑인들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노력하여 부를 축적해도 백인들이 이유 없이 빼앗아 버리는 일은 허다했다. 소송을 제기하면 승소는커녕 공개 처형을 당하지 않는 데에 감사해야 했다. 공개처형은 영화에서 솔로몬이 당할 뻔한 것처럼, 백인들이 수시로 흑인을 납치해 폭행 후 나무 등에 목을 매달아 살해하던 것이었는데, 1960년대까지도 이어졌다. 흑인들은 인권이 보장되지 않던 남부를 떠나 비교적 상황이 나은 북부로 향하기도 했으나 무자비한 폭력만 없었을 뿐 부를 강탈 당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인종 칼럼니스트 타네히시 코츠는 그의 에세이에서 “Ghetto is a social policy.(게토는 사회 정책이다)”라고 말한다. 흑인에 대한 차별을 사회 정책으로서 정부가 뒷받침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2차 세계 대전 참전병사들에게 저렴한 모기지, 낮은 이자의 대출, 자녀 교육비, 실업 수당 등을 제공하는 내용의 군인재정착법(Servicemen Readjustment Act, 1944)은 흑인 병사들에게는 제공되지 않았다.

흑인들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집을 살 수 없었다. 고소득자가 없었으니 집 살 돈이 부족했고, 주택저당대출은 승인되지 않았다. 2차 대전 이후 주택 구매를 권장하기 위해 미국 정부는 주택저당대출에 정부 보증까지 제공하며 대출 정책을 장려했지만, 흑인 거주 지역의 경우에는 정부 보증을 철회하였다. 나중에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자산의 소유와 상속까지 금지당했다. 전부다 미국 최고의 호황기라 불렸던 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일이다. 정부는 경제적 지위나 교육 수준과는 상관 없이 오직 인종을 가지고 차별을 행했다. 이러한 정책들은 장기적 가난의 시작을 의미했다.

 

마이애미에서 퍼거슨 사태까지

지난 8월 미주리주 퍼거슨시에서 비무장 상태였던 흑인 청년이 백인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진 사건이 있었다. 경찰과의 격렬한 몸싸움 후 총을 쐈다는 경찰의 증언과는 달리 흑인 청년은 양손을 머리 위로 들고 있었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이 공개되며 경찰의 과잉 대응과 흑인 차별에 항의하는 시위가 촉발되었다. 시위대는 벽돌과 화염병을 던지고 상점들을 약탈하는 등 심각한 폭력 사태까지 이어졌고 중무장한 경찰들은 최루탄까지 쏘며 시위대를 진압했다. 비상사태 선언에 야간 통행 금지 조치에도 시위는 거세지기만 했으며 급기야 주방위군까지 동원되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휴가 중이던 오바마 대통령도 백악관으로 복귀해 긴급 회의를 열고 진상 조사를 촉구했다. 시위는 10월까지도 계속되었고 현재는 백인 경찰 대런 윌슨의 기소 여부를 결정할 세인트루이스 카운티 대배심을 기다리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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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리주 퍼거슨에서 시민들이 시위하는 모습>

인종 갈등에서 비롯된 폭력 사태는 지금까지도 미국 사회에서 꽤 흔한 일이다. 대부분 백인 경찰의 총격이나 과잉 폭력이 원인이 되어 소요 사태가 발생하는 패턴이다. 1980년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폭동, 1992년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폭동, 2001년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폭동, 2009년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 폭동 등의 대규모 폭동들은 물론, 크고 작은 인종 갈등들 역시 여전히 잦다.

 

노예 안전 지대는 없다

 앞서 수상소감에서 맥퀸 감독이 언급한 ‘고통 받는 2100만명’은 국제 노동 기구(ILO)가 발표한 세계 노예 인구수다. 지금의 노예 개념은 현대판 노예(Modern Slavery)로서 <노예 12년>의 노예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현대판 노예는 노예 제도는 물론, 노예 제도와 흡사한 관행들을 포함한다. 노예란 자유를 박탈 당하고 타인에게 재산으로서 간주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도 세계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인신매매, 성 착취, 노동 착취, 강제 결혼 등에 피해 받는 사람들을 현대판 노예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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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프리재단(WFF)이 발표한 ‘세계 노예 지수(Global Slavery Index)’로, 2013년 전세계적으로 현대판 노예가 162개국에서 3000만명을 넘어선다고 보고했다. 색깔이 진할수록 노예 인구가 많음을 의미한다>

유엔은 1949년 인신매매 및 성매매 착취 등의 노예제 관행을 금지하는 국제협약을 체결한 바 있다. 그러나 개인 소유 노예나, 빚 때문에 육신을 담보로 제공하는(debt bondage) 현대판 노예의 수는 여전히 많다.

지난 6월 가디언지는 6개월에 걸친 취재 끝에 ‘아시아 노예들이 잡은 새우가 밥상에 오르고 있다’는 제목으로 태국 새우사료잡이 어선들의 강제 노동 실태를 보도했다. 가디언지가 밝힌 태국 노예 노동의 실태는 끔찍했다. 캄보디아나 미얀마에서 팔려 태국에 유입된 노동자들은 임금은 커녕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하루 20시간씩 노동을 강제 당했다. 선장들은 그들에게 각성제까지 먹이며 노동을 강요했다. 현대판 노예들은 어선에 몇년씩 갇혀 구타와 고문, 처형을 방불케 하는 살해까지 당했다. 어선에서 탈출한 한 사람은 동료들이 손발이 묶인 채 바다로 버려지는 것을 목격했다고 했다. 2014년에 일어난 일이다. 열악한 환경에서 폭력에 노출된 채 노동을 강요 받고, 탈출을 시도하면 즉결 처형되는 모습. <노예 12년>의 노예들과 다른 점이 없다.

<노예 12년>이 저 멀리 역사의 한 페이지일 뿐이라는 생각에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태국의 경우는 수많은 현대판 노예 사례 중 하나일 뿐이다. 19세기 미국의 노예제도도 물론 경악스럽지만, 21세기에도 여전히 노예들은 세계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 흑인 차별 역시 마찬가지다. 2014년에, 소위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도 인종 차별과 갈등으로 폭력과 소요 사태가 종종 일어난다. 솔로몬 놀섭이 이야기했던 노예제와 노동 착취, 흑인 차별은 단순히 지난날의 일이 아니다. 솔로몬의 노예 12년과 1865년 노예제 철폐 당시, 그리고 오늘날까지, 당시의 폭력성은 아직 대가 끊기지 않았다.

 

김정연(이화여대 국제학부)
kimjeongyon24@gmail.com

 

휴전 이후: 우크라이나 근황 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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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은 유명무실해졌다. 9월 5일, 우크라이나 정부와 반군, 러시아가 모여 교전 중지를 선포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추가 사망자는 300명을 넘어섰다. 셋 중 어느 누구도 휴전을 공식적으로 무효화하지는 않았지만, 교전은 계속되었고 모두 상대방의 조약 불이행을 비난했다. 10월 26일, 세계가 IS와 에볼라 바이러스로 시끄러운 사이, 우크라이나 내에서는 총선이 치러지고 친유럽 성향의 여당이 과반석을 차지했다. 물론 분리주의자들이 장악한 동부 일부 지역과 크림 자치공화국은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페트로 포로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추진력을 얻었다고 기뻐했지만, 사태는 쉽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미운 아이에게 떡 안 준다

미국은 총선 결과를 환영했다. 동시에, 동부 지역에서의 총선을 막은 분리주의자들을 비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미국은 이 문제에 대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9월 24일, 유엔 총회에서 오바마 미 대통령은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괴롭혀서는 안 되고, 작은 나라는 스스로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며 러시아를 강도 높게 비난했다. 경제 제재도 잇따랐다. 올해 4월부터 러시아의 관료들과 민간 기업들이 제재 반열에 올랐다. 일각에선 미국의 제재가 “너무 늦고 너무 약해”서 “손목을 찰싹 때리는 정도”라고 비웃기도 했으나(http://www.haaretz.com/news/world/1.587764), 워싱턴은 차츰 제재 수위를 높여 7월에는 일부 에너지 기업과 은행까지 그 대상에 포함시켰다. 여기에 EU, 일본, 캐나다, 호주 등도 제재에 나서면서 효과는 제법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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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는 제재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EU는 7월에 접어들면서 이미 에너지와 군수 산업 등에 대규모의 자산 동결을 감행했으며, 9월 11일에는 미국이 여기에 동참을 선언했다. 경제 제재는 양날의 검이다. 제재 대상 국가와의 경제 의존도가 높으면 자국 경제도 큰 피해를 입게 되며, 이때 자국의 피해는 최소화하고 제재국의 피해를 극대화하는 것이 제재의 성공을 판가름한다. 10월 29일 <월스트리트 저널>에 따르면 대 러시아 경제제재는 상당히 효과적이어서, “러시아는 올해 0.6%, 내년에 1.1%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며, 이는 제재 시행 전보다 0.5~0.9% 가량 감소한 수치다. 이에 반해 “EU가 경제성장률에 입는 타격은 0.2~0.3% 정도에 그칠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비록 서방 국가들의 경제 제재가 러시아 경제에 큰 타격을 준 것은 확실하지만, 아직까지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정책을 바꿀 만큼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다. 러시아 정부는 기준금리를 올리고 정부 원조를 쏟아부으며 가파른 환율 하락을 버티는 중이다. 여기에 제재의 핸들을 쥐고 있는 EU 역시 관광업, 제조업과 농업 분야의 수출 등에 지속적인 피해를 입는 등 제재의 역효과가 누적되고 있으며, 이는 디플레이션으로 이미 위기를 겪고 있는 EU에게도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10월 29일 <파이낸셜 타임즈>에 따르면 특히 독일의 대 러시아 수출은 8월 한달 간 26% 급감했다. 여기에 EU는 천연가스 사용량의 1/3을 러시아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 중 절반 가량이 우크라이나를 경유하는 파이프라인을 통해 수입된다. 비록 10월 31일, 러시아가 EU와 우크라이나로의 천연가스 수출 재개에 동의하면서 급한 불은 꺼졌지만(EU의 에너지 국장은 “이번 겨울의 공급량을 보장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가 언제 다시 발목을 잡을 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에 대해 <포린폴리시>는 “러시아와 유럽의 높은 상호 의존성이 양측의 (제재에 대한) 지정학적 판단을 제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미 유럽은 2006년과 2009년 러시아의 ‘가스 어택’으로 천연가스 공급에 차질을 빚은 바 있다.

EU의 제재 시한은 내년 3월 15일까지다. 제재 연장을 위해선 회원국들의 동의가 필요하지만, 내부 소식통에 따르면 핀란드,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불가리아, 그리스 등은 제재 역효과로 인해 시한 연장에 반대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개입은 나토를 타고

경제 제재가 결정적인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면서 미국 내부에서는 무력 사용이라는 ‘확실한’ 카드를 쓰지 않는 오바마 행정부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져왔다. 오바마는 이미 우크라이나 내에서의 군사 행동은 물론 우크라이나 정부군에 대한 직접적인 무기 지원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박은 바 있다. 이후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의 지원도 경제적·인도적 수준에 그쳤다. 이에 대해 포로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9월 18일, “담요와 야간투시경도 중요하지만, 담요만으로는 전쟁을 이길 수 없다”며 직접적인 무기 지원을 요청했다. 미국은 즉각적으로 ‘무기’를 제외한 방탄복, 헬멧, 수송용 차량 등을 대거 추가로 지원했고, 우크라이나는 만족스럽다는 표시로 화답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가 미국 내 강경파들까지 만족시켜주진 못한 듯하다. 브루킹스 연구소장 스트로브 탤벗은 CNN에의 기고를 통해 “러시아의 추가적인 침략을 막기 위해선 우크라이나에게 방어용 무기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고, 론 존슨 미 상원의원은 세 번이나 우크라이나를 방문하며 푸틴의 팽창주의를 경고하고 무기 지원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이미 선을 그은 오바마의 입장에서 말을 번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장기적인 경기 침체로 국방비를 축소해야 하는 미국에게 군사 작전 및 무기 지원은 현실적으로도 가능하지 않아보인다. 대신 미국은 ‘동맹국에게 더 많은 역할을 요청한다’는 외교·안보 방침에 맞춰 무력사용에 대한 부담을 유럽국가들과 분산하려 했다. 이러한 배경 위에 등장한 카드가 바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다. 8월 26일,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영토 내로 진입하자, 당시 나토 사무총장 앤더스 라스무센은 약 4천 명 규모의 신속대응군을 창설해 동유럽 지역에 배치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이는 러시아에 대한 직접적·군사적 압력인 동시에, 나토군이 구소련의 영토에 처음으로 주둔하게 된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더해 우크라이나 역시 같은 달 29일 아르세니 야체뉵 총리를 통해 “나토 가입을 추진하겠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빅토리아 뉼런드 미 국무부 차관보는 비록 “우크라이나 헌법은 비동맹 지위를 규정하고 있으나, 자신들의 국가 안보를 위해 어떤 조치가 필요한지는 우크라이나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이라며 헌법 개정과 나토 가입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예민한 기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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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민감하게 대응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나토가 많은 국가들을 동맹으로 끌어들여 러시아 국경 쪽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 밝혔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정부와 나토가 이번 분쟁을 기회로 삼아 동쪽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고 있으며, 그러한 구상의 중심에는 미국이 있다는 주장을 계속해서 반복해왔다. EU와 나토의 동진은 러시아가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부분이다. 과거 2001년, 부시 행정부가 터키와 폴란드에 미사일 방어 체제를 구축하려 했을 때도, 러시아는 격렬하게 반발한 적이 있다.

미국 역시 서방 대 러시아의 대결구도라는 프레임 안에서 사태를 바라보고 있다. 오바마 미 대통령은 9월 24일 유엔 총회에서 “우크라이나에서의 러시아의 행동은 전후 질서에 대한 도전”이라고 언급하며, 러시아의 ‘팽창’을 강력히 비난했다. 세력권의 경계 확정을 두고 팽팽히 맞서는 양측의 모습이 냉전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포린폴리시>의 한 미국인 기고가는 아예 러시아의 최근 행동을 ‘냉전 이후의 질서에 대한 모욕’이라고 규정했다(http://thecable.foreignpolicy.com/posts/2014/09/26/russia_putin_UN_Obama_Ukraine_NATO_sanctions_war_Poroshenko).

나토가 서방 측에 결정적 우위를 가져다 줄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지난 5년 간 나토 회원국들의 전체 국방비는 약 20% 감소했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나토 부총장은 “각 회원국이 국방비를 늘리겠다는 약속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에 따라 동맹의 신뢰성이 좌우된다”며, 군사비 지출에 대한 유럽 각국의 미온적인 태도를 직접적으로 비판했다. 척 헤이글 미국 국방부 장관도 유럽 각국은 ‘안보에 대한 립서비스를 그만두고 지출을 늘려야 할 것’이라며 불만을 표시한 바 있다. 그러나 지속되는 경기 침체 속에서 미국과 나토가 유럽 각국의 정치적 합의를 이끌어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나아질 기미는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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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문제는 서방 국가 대 러시아의 대결구도로 그 프레임이 확장되면서, 그리고 그 구도 속에서 어느 누구도 강력한 우위를 점하는 데 실패하면서 교착 상태에 빠졌다. 두 세력권의 구분선 위에 놓인 우크라이나에서는 휴전 협정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사상자가 나오고 있다. 11월 7일,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 군대가 또 다시 우크라이나 동부 국경선을 넘었다고 주장했고, 러시아 측은 이를 부인하며 오히려 “우크라이나 정부군이 휴전 협정을 노골적으로 위반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설상가상으로 11월 2일, 동부의 분리주의자들은 자체 주민선거를 실시해 자신들만의 정부를 구성해버렸다. 이로써 우크라이나 동부에는 도네츠크인민공화국과 루간스크인민공화국이 각각 수립됐고, 서방 측에서는 이들을 휴전 협정을 위반한 ‘불법’으로 규정했다. 제도화를 거치면서, 분리는 그 골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피해는 총과 폭탄에 의해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빈 국제경제연구소는 올해 우크라이나의 실질 GDP성장률이 마이너스 10%가 될 것으로 예측했다. 국제통화기금은 지난 4월 우크라이나의 경제 개혁을 조건으로 170억 달러의 긴급 원조를 약속했지만, 이것이 경제 회생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http://www.foreignpolicy.com/articles/2014/09/10/ukraine_cant_afford_the_imfs_shock_therapy). 포로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9월 25일, 휴전이 체결된 지 한 달도 안 돼 “전쟁의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시기는 지났다”며, “평화를 위한 내 계획이 먹힐 것을 의심치 않는다”며 호언장담했다. 또 그는 ‘2020년까지 유럽연합에 가입하고 400억 달러의 외자를 유치할 것’이라는 당찬 포부도 늘어놓았다. 동부에서 분리주의자들의 독자적인 선거가 치러지는 등 사태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는 점에서, 포로셴코의 장밋빛 공약은 9월의 휴전협정만큼이나 유명무실해 보인다.

김만희(고려대 국어국문)
manhee87011@naver.com

말레이시아 ‘개 만지기’ 캠페인, 종교 갈등 촉발

10월 19일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프에서 ‘I Want to Touch a Dog’ 캠페인을 주최한 시드 아즈미가 이슬람 보수세력으로부터 크게 비판받고 있다. 약사이자 사회운동가인 시드 아즈미는 하루 동안 ‘개를 만지는(Touch Dog)’ 캠페인을 열었고, 수백 명의 애견가와 반려견이 함께 참여했다. 하지만 이벤트에서 행복한 표정으로 개를 안고 있는 한 무슬림 여성의 사진이 페이스북에 돌기 시작하자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이에 분노하며 행사가 끝난 일주일 동안, 시드 아즈미에게 약 3000여 건의 항의전화를 했다. 캠페인이 개최된 지 일주일이 지난 26일, 아즈미는 이번 캠페인이 국가종교당국으로부터 승인을 받은 행사였으며, ‘개를 만진 후의 정화의식까지 프로그램 내에 포함돼 있어 교육적 의도를 지닌 행사였다’고 해명했다.

한편, 말레이시아의 무슬림 지도자들은 ‘개는 부정하고 정결치 못한 동물’이라는 이슬람 경전을 인용하며 행사에 대한 분노를 표명했고, 연방이슬람개발부서 단체장도 이 행사를 ‘종교지도자들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고 비난했다. 또한 2주 후, 말레이시아의 무슬림 지도부는 할로윈을 “이슬람에 대한 계획적 공격”, 그리고 독일의 옥토페스트를 이와 유사한 “집단적으로 촉발된 배신(간통)행위”로 규정하며 비난하였다. 다인종 국가인 말레이시아에서 개와의 접촉을 포함한 외래문화에 대한 논쟁은 대다수를 차지하는 말레이계 인종(무슬림)과  소수인 중국, 인도계 인종(기독교, 불교, 힌두, 시크)간 단층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한편, 지난 2009년, 말레이시아 주민들은 길거리를 배회하는 약 300마리 가량의 개들을 포획하여 맹그로브섬에 유기한 전례가 있었다. 셀랑고르주 동물보호협회는 주민들에게 개들을 더 이상 외딴 곳에 유기하지 말고 개들이 서로 잡아먹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줄 것을 촉구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목승훈(경희대 국어국문)
ahrtmd18@naver.com

[특집] 남아시아의 두 앙숙, 인도와 파키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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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와 파키스탄은 60여 년 전 독립할 때부터 오랜 앙숙 관계였다. 양측은 국경을 맞대고는 있지만 서로 종교도 다르고 분쟁 중인 영토도 있다. 지금까지 세 번의 전쟁이 있었고, 수많은 무력 충돌과 테러가 벌어졌다. 그러나 이를 단순한 지역 분쟁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인도와 파키스탄 모두 핵보유국인데다, 이 관계에는 중국·아프간·탈레반을 비롯한 이슬람 무장단체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이번 <프리즘> 특집에서는 인도와 파키스탄 국내의 정치 상황과 양측의 갈등 양상을 살펴보고, 분쟁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카슈미르 지역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날이 갈수록 중요해지는 인도의 국제정치적 위치를 함께 조명해본다.

 

불씨는 큰 불이 된다: 인도와 파키스탄을 둘러싼 아시아의 확전

카슈미르: 60년의 분쟁, 4만 명의 무덤

Let the Sky Fall: 파키스탄의 군부 통치, 그 양날의 검

인도, 내 마음을 받아주오

인도, 내 마음을 받아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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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렌드라 모디 인도총리의 취임 이후, 인도에 대한 여러 국가들의 구애가 끊이질 않고 있다. 현재 첫 해외 순방국인 부탄을 시작으로, 브라질(BRICS 정상회담), 네팔, 일본, 미국을 순방하였고, 호주의 토니 애벗총리(9월 5일 인도방문), 중국 왕이 외교부장과 시진핑 국가주석이 인도를 방문하였다. 모디 총리의 이 같은 광폭행보는 국내 경제 상승세에 날개를 다려는 의도로 보인다. 남아시아에서 중국의 ‘진주목걸이 전략’과 일본의 ‘다이아몬드 전략’이 충돌하고 있는 가운데, 양국과의 외교에 있어서 한 쪽 편에 서는 것보다는 실리에 집중하는 모습이 이를 증명한다.

 

[중국] 오해하지마, 우리는 그런 뜻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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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년 명나라, 28년 7차에 걸쳐 이뤄진 정화의 남해원정 1차 원정이 시작되었다. 정화는 317척의 배와 2700명의 인력을 데리고 원정에 나섰었다. 7회의 원정 동안,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 말라카 해협, 스리랑카, 호르무즈 해협, 아라비아 반도 등을 거쳐 소말리아 등 아프리카 동부해안까지 원정에 나서 여러 국가들과 조공관계를 맺었었다. 2014년 현재, 중국지도부는 다시 정화의 영광을 되찾고자 한다. 2013년 10월 인도네시아 국회에서 시진핑 주석은 연설 중 ‘21세기 신(新) 해상실크로드’ 공동 건설을 제안하였다. 이는 2013년 2월 파키스탄 과다르항 운영권 인수, 방글라데시 치타공항 운영권 인수, 6월 스리랑카 함반토타항, 콜롬보항에 대한 막대한 투자 등 최근 중국의 해상 패권을 위한 노력이 단순히 구호에만 그치지 않음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인도 입장에서 자국을 둘러싸고 있는 중국의 ‘진주 목걸이’가 거슬린다. 가뜩이나 중국과 영토문제 등 앙금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중국의 인도양 진출은 좋게 보일 리가 없다. 모디 총리가 17년 만에 총리로서 네팔을 방문해 각종 투자를 약속한 점이 인도가 중국을 얼마나 신경 쓰는지 확연하게 보여준다. 네팔은 인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로 힌두교 문화를 비롯해 문화적 공통분모를 지닌 국가이다. 하지만 최근 중국 정부가 티베트 난민 단속, 인도의 군사적 움직임 감시, 히말라야 만년설에서 나오는 막대한 수자원 등 각종 이권을 위해 막대한 원조를 하면서 급속도로 중국과의 관계가 가까워졌다. 인도 입장에서는 더 이상 네팔이 친 중국화 되어가는 것을 볼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17년 만에 처음으로 국빈 방문을 해 1000억 네팔 루피(약 1조원)을 차관으로 제공하고 고속도로, 통신망, 댐 등 광범위한 지원을 약속하는 등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중국정부의 ‘진주목걸이 전략’이라 일컫는 과감한 남아시아 진출을 두고, 인도 내부에서는 “전략의 목표가 인도의 봉쇄”라는 말이 나오는 등, 인도정부는 중국정부의 남아시아 진출에 긴장하며 중국을 의식한 외교적 행보를 보였다. 중국정부는 이를 의식하고 ‘오해풀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9월 10일 류젠차오 중국 외교부 부장조리는 “중국은 군사적 수단을 비롯해 어떤 수단으로든 인도를 봉쇄할 의사가 없다”고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밝히는 등 중국은 인도를 봉쇄해야 할 경쟁자가 아니라 협력해야 할 동반자로 보고 있음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이와 맞물려 시진핑 주석은 서둘러 인도 순방에 나서서 ‘점수’를 따고자 하였다. 인도 순방에서 시진핑 주석은 모디의 정치적 고향인 구자라트주를 방문하는 등 인도에게서 점수를 따기 위해 노력했다. 인도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 시도를 공식적으로 지지하고, 200억 달러(약 20조 8000억 원)을 인도에 투자하기로 약속했다.

이번 중국과의 회담에서 인도는 중국의 투자를 얻어냈고, 또 중국, 미국, 일본 등 강대국가들에게 있어서 인도양의 ‘캐스팅 보트’임을 전세계에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민감한’ 1962년 양국 간의 전쟁 이후 국경 문제에 대해서는 원론적인 합의에 그쳤다. 심지어 이번 정상회담 기간 중에도 인도 군과 중국 군이 인도령 카슈미르 동남부 라다크에서 국경침범 문제로 대치한 점과 이례적으로 국경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강경하게 언급한 모디 총리의 말은 양국이 진정한 우방국이 되기 위해 국경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의 관계진전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일본]  나는 네가 원하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넌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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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언론들은 모디 총리가 임명되자, ‘인도의 아베’, ‘모디노믹스’ 등 수식어를 써가며 모디 총리와일본 아베 총리의 유사점을 내세웠다. 이들 둘 사이는 정책 성향뿐 만 아니라 개인적인 관계도 실제로 가깝다. 아베 내각 1기인 2007년과 자민당 총재로 재직한 2012년, 아베 총리와 모디 총리는 만남을 가진 ‘구면’인 사이로, 민족주의자인 행보나 친 기업적인 모습 등 여러 부분에서 공통점이 있다. 두 사람은 오랜 기간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인도 총선 결과가 나온 직후 아베 총리는 공개적으로 모디 총리와의 정상회담을 요구하는 등 친분을 드러냈다. 그 결과 9월 1일 정상회담이 성사되었다. 모디 총리의 첫 번째 행선지는 이례적인 수도 도쿄가 아닌 교토로, 교토에서 아베 총리가 직접 나서서 안내를 하는 등, 일본으로는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를 보였다. 이에 화답하듯, 2일 도쿄에서 열린 만찬에서 모디 총리는 2차 세계대전 후 전범들을 단죄한 극동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들의 무죄를 유일하게 주장한 일본 극우세력들이 열광하는 인도 출신의 라다비노드 팔 판사에 대해 “(그가) 도쿄 재판에서 한 역할을 누구도 잊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칭송해 아베 총리의 극우 행보에 추임새를 넣어주었다.

이 모든 아베 총리의 환대가 두 사람간의 개인적인 친분 때문일까? 답은 아니다. 현재 일본에게 있어서 인도는 너무나도 매력적이며, ‘중국’이라는 거대한 쓰나미를 막는데 있어서 매우 든든한 동반자라는 계산이 깔려있다. 2012년 12월 27일 아베 총리가 직접 기고한 “아시아의 민주적 안보 다이아몬드”에서 아베 총리의 구상이 잘 드러난다(https://www.project-sndicate.org/commentary/a-strategic-alliance-for-japan-and-india-by-shinzo-abe). 아베 총리는 이 글에서, 인도양에서부터 태평양까지 인도, 일본, 호주, 미국이 계속해서 세력을 확장하고, 인도양을 “중국의 호수”로 만들려는 중국의 팽창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리는 최근 ‘진주목걸이’ 외교로 인도의 뒷마당인 몰디브, 스리랑카, 네팔 등에 손을 뻗치는 인도의 공감을 얻게 한다. 또한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들어오는 자원을 실은 선박들은 인도양, 남중국해, 동중국해를 거쳐 일본으로 오는데, 이 자원수송로(Sea Lane)을 지키기 위해서는 첫 관문인 인도양에서 인도의 역할이 필요하다. 이렇듯, 외교, 안보 차원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인도는 일본에게 있어서 현재보다 더 가까운 관계를 가져야 할 대상이다. 대 중국관계가 악화일로를 걷는 상황에서, 12억 인구를 자랑하는 인도는 지속적으로 인구가 줄어 국내시장 규모가 작아지는 일본에게 있어서 상품시장으로서 가치가 매우 높다.

겉으로 보기엔 이번 양국 정상 간의 만남은 성공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본측은 인도 내 전력 시설과 물류 시설 정비를 비롯해 인프라 정비부문에 있어서 공격적인 투자를 약속하는 등 자신들이 제공할 수 있는 최대한을 제공하였으나, 이번 만남에서 일본측이 가장 핵심의제로 설정한 양국 외무.국방 장관 연석회담(2+2) 창설이 합의가 불발되었다.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인도 무역의 9%를 차지하고 있는 중국을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외무적, 방위적 대화를 이어나간다”라고 공동성명에서 수위를 낮춘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는 2주 뒤 있을 중국과의 회담을 계산해 중국을 지나치게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일본으로선 500억 엔(4853억 원)의 엔화 차관과 향후 5년 내에 인도에 대한 직접투자액을 2배로 올리겠다고 약속한 ‘선물’에 비해서는 인도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이를 두고 많은 일본의 언론들과 전문가들은 모디 총리가 9월 중순에 있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회담에서 일본을 이용해 중국에게서 더 많은 투자를 끌어들일 전략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는 8월 30일 일본 순방 전 일본 기자들과의 회견을 보면 잘 나타난다. 미국과 일본 중심의 아시아개발은행(Asian Development Bank: ADB)에 대항해 중국 중심으로 새로 만들고자 하는 아시아인프라개발은행(Asian Infrastructure Investment Bank: AIIB)에 참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밝히는 등, 인도는 애당초 중국에 대해 일본과 같은 톤으로 비난할 생각이 없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 중요한 건, 지금부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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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디 총리 개인적으로나, 인도 국민 전체로나 최근 몇 년간 미국과의 관계는 개선될 조짐이 보이지 않는 ‘답이 없는’ 관계였다. 미국 정부는 2002년 모디 총리가 구자라트주 주지사로 재직할 당시 발생한 반 이슬람교 집단학살을 방관하고, 심지어 학살을 조장했다는 이유로 2005년 인도 주재 미국대사관은 비자를 거부하였다. 미국 주재 인도 여성 외교관이 가사도우미에게 합당한 임금을 지불하지 않아 뉴욕검찰이 알몸수색을 하는 등 외교관의 면책특권을 두고 힘겨루기를 해 인도국민들을 들끓게 하였다. 또 미국국가안보국(NSA)가 모디 총리가 속한 현 집권당 인도국민당(BJP)를 감시한 사건과 올해 7월 만장일치여야 통과되는 세계무역기구(WTO)의 무역원활화협정(TFA)에 모디 총리가 ‘당당히’ 반대표를 던져, 인도와 미국의 관계를 ‘설상가상’이라고 표현하게끔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BJP가 총선에서 이기고 나렌드라 모디가 총리로 취임할 것이 불 보듯 뻔해지자, 미국은 서둘러 양국간의 관계에 ‘인공호흡’을 시작했다. 일단 2005년 미국 비자를 불허한 책임자이면서 올해 상반기까지 주 인도 미국대사를 지내며, 인도 정계와 사사건건 각을 세운 낸시 파월 전 대사를 사실상 ‘사직’시켰다. 모디 총리의 방미를 앞두고, 공석이 된 주 인도주재 미국대사 자리에 자신의 최 측근이자 국무부 법무 담당 차관보를 지낸 인도계 리처드 베르마를 지명하는 등 관계개선 의지가 있음을 인도정부에 보였다. 인도정부도 이에 화답하듯, 9월 30일 모디 총리는 오바마 대통령과 정상회담 및 UN 총회 참석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틀 동안 모디 총리를 세 번이나 만나고, 마틴 루터 킹 목사 기념관을 직접 안내하는 정성을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환대에도 불구하고, 정상회담의 결과는 ‘빛 좋은 개살구’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두 정상은 실로 지구상에 나타나는 모든 굵직굵직한 사안에 대해 논의하였다. “북한의 우라늄 농축 활동을 비롯해 핵무기와 탄도미사일 계발 계획을 우려한다”고 북한의 비핵화를 촉구한 점에서 현재 남한뿐 아니라 북한과도 수교하는 인도로서는 외교적으로 북한과의 관계악화를 감수하더라도 미국의 동북아 정책에 동조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또 두 정상은 이슬람 국가(IS) 등 글로벌 테러리즘 퇴치를 위해 지속적으로 공동노력을 하기로 합의했다. 이 밖에도 인도에 대한 미국의 대규모 투자 또한 약속되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사안인 무역원활화협정(TFA) 등 미국으로선 중대한 의제에 대해서 합의를 못 본 것이 미국 입장에서는 매우 아쉽다. 무역원활화협정(TFA)은 각 개별국가의 무역장벽은 낮추고 농업보조금은 축소하는 반면, 저개발 국가에 대한 지원을 늘리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인도를 비롯한 반대하는 국가들은 저개발국가의 식량안보를 위해서 정부의 식품 비축 허용을 촉구하며 반대표를 던졌다. 이는 전체인구의 30%를 차지하는 극빈계층과 전체 산업의 17%를 차지하는 농업을 고려한 결정이라고 해석이 된다.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인도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나 성과가 없었고, 내심 모디 총리와 오바마 대통령 간 정상회담 중 극적 타결을 기대하였으나 뚜렷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였다.

하지만 미국에게 있어서 이번 정상회담은 가시적인 성과는 없지만, 인도양에서 날로 세력을 확장하는 중국을 견제하는 데 있어서 인도와 공감대를 이루었고, 무엇보다도 올해 상반기만 하더라도 냉랭했던 양국관계가 정상화된 것에 의의가 있다. 모디 총리 또한 정상회담으로 ‘투자 확보’라는 목표는 달성하였고, 오바마 대통령의 극진한 대접으로 인도의 지정학적으로나 경제학적으로나 달라진 위상을 전세계에 보이는 자리였다.

 

[인도] 일단 선택은 보류할게 

인도 입장에선 중국, 일본, 미국 정상들에게 부진했던 자국 경제성장을 높일 수 있는 직접적인 투자와 경제적 지원을 약속 받아 고무적이다. 물론, 인도라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얻었다고는 할 수 없다. 특히, 일본과의 원자력협정체결 불발이 인도에게 있어서는 씁쓸하다. 원활한 전력 수급과 에너지의 안정적 공급이 경제의 ‘고질병’인 인도는 2020년까지 18기의 원전을 건설해 ‘고질병’을 치료하고자 계획하고 있다. 현재 원전을 가동해서 생산하는 전기량보다 100배 가량 높이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에 앞서서 미국, 러시아, 프랑스와 원자로를 구입하는 대신 핵무기 보유를 인정받은 것처럼 일본 또한 쉽게 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이번 협정을 통해 일본의 투자와 원전 건설을 지원받고자 하였다. 하지만, 인도가 핵을 보유하고 있으며, 핵연료에 관한 국제적 조약인 핵무기확산조약(NPT)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협정을 이끌어나가는데 여전히 걸림돌이 되었다. 일본 입장에서 협정이 체결되면, 도시바, 히타치, 미쓰비시 중공업 등 일본 내 업체들의 인도 원전 수주가 가능해져 경제적으로 큰 기회가 되지만, 피폭희생자 단체 등과 여론의 뭇매를 맞을 것이 예상돼 체결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는 인도에게 있어서 아쉬움을 남는다.

인도에게 있어서 이번 9월은 전 세계 국가들에게 있어서 강대국들의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지정학적으로 ‘캐스팅 보트’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아직 인도는 선택을 내리지 않았다. 혼돈의 미중관계, 인도양의 해양 패권, 에너지 수송로를 이용해 외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코끼리의 부흥을 예고하고 있다. 일본, 중국, 미국에게 있어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인도는 애간장을 태우는 ‘외교 밀당녀’다.

 

김준석(경희대 언론정보학)
rejune1112@naver.com

불씨는 큰 불이 된다: 인도-파키스탄을 둘러싼 아시아의 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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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특산물이 대추야자인 것처럼 남아시아의 특산물은 망고다. 인도와 파키스탄 전역에 걸쳐 생산되는 이 붉고 노란 과일의 단맛은 이들 국민에게는 자존심 대결의 대상이기도 하다. 남아시아 정치에서 망고의 단맛은 친선을 표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영국으로부터 나란히 독립한 후 파키스탄의 첫 총리인 리아콰트 알리 칸은 당시 마찬가지로 인도의 첫 총리였던 자와할랄 네루에게 망고를 보냈고, 이것이 “망고 외교”의 시작으로 여겨진다고 <인디펜던트> 지는 밝히고 있다.

정치에 망고의 단맛만 남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때로 망고는 폭력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1977년 군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해 1988년까지 파키스탄을 통치한 지아 울 하크 대통령 역시 망고 외교를 통해 인도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물론 동승한 31명까지 모두를 죽인 비행기 사고의 원인이 된 테러에서, 아직까지도 수많은 음모론을 양산하는 폭탄이 하필이면 망고 상자 안에 숨겨져 있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올해 5월,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신임 총리의 취임식에 파키스탄의 나와즈 샤리프 총리가 참석했다는 것은 보기 드문 희망의 신호였다. 그러나 매끄럽게 시작한 양국의 관계는 8월, 파키스탄 정부가 카슈미르 분리주의자들과 접촉한 것을 계기로 곤두박질쳤다. 이에 9월 UN 총회를 앞두고 샤리프 총리는 뉴델리로 망고를 보냈다. 대화의 물꼬를 다시 트자는 표시였다. 아직까지 가시적인 성과는 나오지 않았으나 이번의 망고 외교는 양국의 유서깊은 불화에서 선물과 폭탄 중 무엇이 될지 사뭇 주목해볼 만 하다.

불씨 3째문단 뒤 총구 앞

총구는 동쪽을 향해

파키스탄-인도 갈등의 핵인 카슈미르 분쟁은 영국이 식민지였던 남아시아를 인도와 파키스탄의 두 나라로 양분한 1947년까지 거슬러올라간다. 1947년과 1965년 그리고 1971년 인도와 파키스탄은 세 차례의 전쟁을 치렀다. 그러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기점으로 소련에 맞서 싸운 무자히딘 일부가 카슈미르로 유입되며 카슈미르의 폭력은 그 규모와 강도에서부터 달라지게 된다. 무자히딘의 이슬람 원리주의가 반인도 카슈미르 무장단체들과 결합한 것이다. 급진화된 이들은 파키스탄 군부의 묵인 내지는 지원 하에 카슈미르 지역 및 인도 국내에서 테러활동을 계속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1989년을 기점으로 카슈미르 분쟁이 인도령 카슈미르를 비롯한 인도 내의 테러 형태로 비화했다는 점이다. 1999년의 카길 전투는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령이 샤리프 총리의 친인도 노선에 맞서 인도령 카슈미르의 카길 지역을 침공한 결과다. 뒤이은 2001년 뉴델리 인도 의회 테러와 2008년 뭄바이 테러가 인도 내 카슈미르 분리주의자들의 테러의 대표적 예다. 1989년 이래 카슈미르 분쟁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최소 5만 명에 달한다.

파키스탄 군부가 아프가니스탄 내의 테러를 방관 및 후원했던 이유가 주적인 인도 때문이라면, 그 인도와의 국경에서 군부의 모르쇠 정책은 더욱 조직적으로 이루어진다. 인도의 공개적 비난에도 카슈미르에서 인도에 대항해 싸우는 라슈카르 타이바(Lashkar-e-Taiba)나 히즈불 무자히딘(Hizbul Mujaheedn) 등 지하드 조직의 활동은 묵인하는 것이다. 파키스탄 관료들은 <포린 어페어스>와의 인터뷰에서 “군부의 지원을 받는 이들과 싸우기는 쉽지 않다”고 증언한다. 설사 미국 및 인도의 반발에 이들 조직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불법화한다손 치더라도 파키스탄 및 그 영향권이 미치는 아프간과 카슈미르에서 이들의 행동은 크게 제약받지 않는다. 가령 2001년 뉴델리 인도 의회 테러 이후 파키스탄에 가해진 인도의 외교적, 군사적 압박에 파키스탄의 무샤라프 대통령은 테러를 자행한 라슈카르 타이바를 불법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이들 조직은 때로는 이름을 바꿔 가며, 때로는 조직을 분할해 가며 다시 수면 위로 나타났고 파키스탄 내에서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았다. 이렇듯 정부가 묵인해 준 이들의 활동은 2008년 뭄바이 테러라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목에 1천만 달러의 현상금이 달린 이들의 지도자 하피즈 사이드(Hafiz Saeed)는 여전히 카라치와 이슬라마바드에서 반인도 집회를 조직하고 자금을 모금할 수 있으며 트위터는 물론 텔레비전 방송에서도 파키스탄 군부의 열렬한 지지자임을 숨기지 않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근 알 카에다의 수장 아이만 알 자와히리는 인도에 알 카에다 지부를 설치했다고 발표했다. 이미 카슈미르는 파키스탄 군부와 인도와 파키스탄 정부 간 알력싸움으로 충분히 복잡한 지역이다. 불타는 집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다.

 

It’s Complicated

이 지역이 더욱 불안정한 이유는 확전의 가능성 때문이다. 여기에는 카슈미르를 중국, 인도, 파키스탄 3국이 공유한다는 현상적 불안정성의 요소가 가장 크다. 그러나 인-파 분쟁의 불길이 카슈미르에서 끝나지 않는다면, 통제할 수 없는 불씨라면 어떨까. 남아시아 및 중앙아시아는 인도와 파키스탄을 둘러싼 정치경제적 관계로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곳이다.

파키스탄 군부가 아프가니스탄과의 국경에 걸친 연방직할부족구역(FATA)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아프간탈레반 및 하카니 네트워크를 이용해 아프간 내 불안정을 야기한다면 이에 대한 아프간 정부의 입장이 우호적일 리 없다. 적의 적과는 친구가 될 수 있으며, 아프간 정부가 손을 뻗친 곳이 바로 파키스탄의 주적 인도다.

아프간-인도의 친밀한 관계에는 역사적 맥락이 있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간 침공을 기점으로 파키스탄은 무자히딘을 지원했지만 인도는 아프가니스탄에 수립된 친소 정권을 승인한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였다. 이후 1996년 탈레반 정권이 수립되자 인도는 이에 맞서는 반정부 조직들에게 대규모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강대한 타지크 족을 중심으로 모인 비파슈툰 무자히딘 세력인 북부동맹이다. 탈레반이 승리한 후에도 인도는 북부동맹을 지원했고, 뉴델리에서 아프간의 외교를 대표한 것은 탈레반이 아닌 북부동맹이었다. 파키스탄, 이란, 미국 등 강대국들의 파도에 반 세기 넘도록 휘말려 온 아프가니스탄에서 북부동맹이건 어느 집단이건, 꾸준한 지지는 흔치 않은 일이다. <타임>지는 인도가 이를 통해 아프가니스탄에게 신용을 입증하는 데 성공해냈다고 설명한다.

천연자원이 풍부한 중앙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과 모두 국경을 접한 아프가니스탄은 중앙아시아로 통하는 인도판 실크로드, 최적의 교통로다. 그러나 단순히 정명가도 식의 ‘교통로’로서 아프가니스탄이 중요한 것만은 아니다. <포브스>지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의 미네랄 시장은 최소 1조 달러, 최대 3조 달러의 가치를 가진 시장이기도 하다. 인도의 소프트파워 역시 주목해볼 만한 요소다. 발리우드는 아프가니스탄의 영화관과 브라운관을 장악한 지 오래다.

문제는 양국이 파키스탄을 사이에 두고 있다는 데 있다. 파키스탄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인도로 통하는 무역로, 즉 수출길은 막지 않지만 인도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의 무역은 막아 왔다. 그러나 파키스탄 없이 인도는 아프가니스탄과 연결될 수 없다. 아프간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로 뻗어나가는 인도의 통로 또한 막히는 셈이다.

이에 인도가 내세운 대안이 아프가니스탄의 또다른 이웃, 이란이다. 인도가 투자한 아프가니스탄의 칸다하르-헤라트 도로와 자란즈-데랄람 도로를 통해 인도는 파키스탄을 우회해 중앙아시아 및 이란을 거쳐 아프가니스탄과 연결될 수 있다. 육로뿐만 아니다. 인도가 1억 달러를 투자해 개발된 이란의 차바하르 항구는 아프가니스탄에게도 파키스탄 경제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는 ‘숨통’이지만 인도에게도 그 중요성은 결코 작지 않다. 물론 미국 및 이스라엘과 인도가 맺는 우호적 관계, 또 중국과의 경쟁을 고려해볼 때 인도가 노골적으로 이란과 친선을 도모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상업으로 묶인 인도와 이란의 관계는 굳건하다. 석유와 가스가 주종목인 양국 간 거래는 2010년 140억 달러에 달하는 규모를 기록했다.
불씨 6째문단 뒤 칸다하르 헤라트 도로

파키스탄의 머리를 덮은 중앙아시아는 어떨까. 전세계 네 번째 에너지 소비국인 인도에게, 중앙아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통한 에너지 수급원 다각화는 당장 나라 경제와 직결된 문제다. 인도는 러시아, 중국,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의 6개국이 모인 지역안보기구인 상하이협력기구(SCO)의 옵저버 자격을 유지하고 있으며 타지키스탄의 수력발전소에 1700만 달러를 지원했고 아프간-파키스탄을 거쳐가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관련해 투르크메니스탄과 협력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 이들의 경제동맹은 군사 분야로도 확장될 가능성을 암시하기 시작했다. 인도의 에너지 수급만이 중요한 현안이라면 타지키스탄의 파르카르에 인도군의 첫 국외 기지인 파르카르 공군 기지가 설치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이란,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에게 인도가 손을 뻗어 파키스탄을 둘러싼 형세는 인도판 봉쇄정책처럼 느껴진다.

 

“히말라야보다 높고 인도양보다 깊은”

이에 파키스탄이 찾은 대항마가 다름아닌 중국이다. 주미 파키스탄 대사를 지냈던 후세인 하카니는 CFR과의 인터뷰에서 “중국에게 파키스탄은 인도에 맞서는 값싼 대항마, 파키스탄에게 중국은 인도에 대항하는 강력한 보증인”이라 설명한 바 있다.

이 기묘한 우정의 시작은 파키스탄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한, 국제사회의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였던 1950년까지 반 세기를 훌쩍 거슬러올라간다. 1962년 중국-인도 전쟁에서 인도가 참패한 후 파키스탄은 중국에 더욱 기대기 시작했다. 파키스탄은 중국이 국제적 고립을 맞은 60년대와 70년대에도 중국의 굳건한 우방 역할을 수행했다. 대신 중국은 파키스탄에게 핵 기술 및 군사기술을 전수해 주고, 미국이 핵개발로 인한 파키스탄 제재에 시동을 건 1990년대에도 파키스탄에 대한 중국의 지원은 꾸준했다. 일각에서는 중국이, 이란의 핵 기술이 파키스탄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정치군사적 요인 외에도 파키스탄과 중국은 경제적으로도 끈끈한 관계를 자랑한다. 1963년 처음으로 양국 간 무역협정이 체결되었고 2008년에 중-파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었으며 현재 양국의 무역 규모는 연 70억 달러에 달한다.

후진타오 전 주석의 말마따나 “히말라야보다 높고 인도양보다 깊은” 중국과 파키스탄 간 우정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것은 과다르 항구다. 과다르는 단순한 항구가 아니다. 세계 원유생산량 40퍼센트가 지나가는 호르무즈 해협을 코앞에 둔 곳, 인도양과 수에즈 운하로 통하는 바닷길을 여는 곳이 바로 과다르 항구다. 중국은 이 항구 건설비용의 8할을 댄 대신 사실상의 “자유이용권”을 얻어냈다. 호르무즈 해협에 중국이 굳건하게 발을 붙이고 있는 것이 미국과 인도의 입장에서는 달가울 리 없다. 과다르 항구는 자원이 풍부한 중국 서부 신장 지역과 인도양을 잇겠다는 거대한 구상인 ‘카라코람 하이웨이(Karakoram Highway)’ 및 에너지 수급원의 확보 및 다양화라는 오래 된 목표의 실현계획인 ‘카라코람 코리도어(Karakoram Corridor)’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1300km를 상회하는 엄청난 길이의 이 도로를 짓기 위해 중국은 히말라야 산맥을 문자 그대로 뚫었으며, 자연재해와 부실한 도로 상태라는 난점이 있으나 카라코람 하이웨이는 중국과 과다르 항구를 잇는 유일한 육로다.

그러나 중-파 관계는 기본적으로 중국에게 기울어진 불균형적 관계다. 중국이 인도에 대항하기 위한 파키스탄의 유일무이한 선택지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중국과 파키스탄의 국내 불안요소가 가진 연결고리다. 아프간 국경의 연방직할부족구역(FATA)에 자리잡은 테러단체가 아프간탈레반뿐만은 아니며, FATA가 “체첸에서 위구르까지 세상의 모든 테러단체”라는 <이코노미스트>의 평처럼 신장의 위구르족 분리주의자들 역시 FATA에 은거하고 있다. 2005년 아시아서베이언론(Asian Survey Article)의 지아드 하이데르(Ziad Haider)에 의하면 위구르 무장단체들은 탈레반을 키워낸 파키스탄의 마드라사(‘신학교’)에서 무자히딘과 함께 수학했고 탈레반과 함께 소련에 맞서 싸웠으며 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도 미국에 맞서 싸웠다. 이들에 대한 파키스탄 군부의 지원 현황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중국이 파키스탄을 무턱대고 신뢰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흥미로운 것은 아프가니스탄-인도, 파키스탄-중국의 관계가 신기할 정도로 꼭 닮은 거울상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안보딜레마 현상을 보이는 이들의 동맹에는 역사적 계보가 있고, 공통의 적이 있으며 정치적 동맹이라는 한 국면에만 머물지 않고 군사 및 경제 영역으로까지 확장된다. 인도-아프가니스탄에게 차바하르 항구가 있다면 중국-파키스탄에는 과다르 항구가 있다.

 

묵은 때는 벗기기 힘들다

단선적 역사인식은 편리하지만 그 오류를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2014년에는 새로운 위협들이 나타났다. 급진 이슬람 부흥주의가 다시금 부상했고 마치 <혹성 탈출>처럼 에볼라가 대륙을 건너 발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새로운 위협 앞에서도 해묵은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은 아직도 국가를 갖지 못했고 동아시아는 아직도 공동의 역사를 알지 못한다. 실제로 위협과 갈등들은 마치 에스컬레이터처럼 순차적으로 풀리고 사라지고 나타난다기보다는 층위를 더해 축적된다는 느낌을 준다. 이런 상황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의 갈등은 특히나 위협적이다. 핵전쟁의 위협은 물론이고 아프가니스탄은 물론 중앙아시아와 중국, 이란, 이제는 알 카에다와 미국까지 연쇄적으로 줄줄이 끌려들어갈 수 있는 뇌관의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현실화된 것들의 무게를 보다 적확하게 파악한다는 의미에서 가정이란 중요하다. 그렇다면 파키스탄과 인도가 앙숙이 아니었더라면 현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탈레반과 마찬가지로 핵전쟁의 위협은 훨씬 작았을 것이고 5만 명의 무덤도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반 세기 동안 일어난 최악의 홍수로 양쪽이 고통받는 가운데서도 증오와 책임론이 앞서는 현재의 모습도 없었을 것이다. 1949년 시작되어 아직도 마무리되지 않은 인도-파키스탄 갈등에서, 파키스탄 군부와 나렌드라 모디의 충돌은 역사의 또다른 층위로 남게 될지 모른다.

 

박정민(연세대 정치외교)
jay17289@gmail.com

Let the Sky Fall: 파키스탄의 군부 통치, 그 양날의 검

무제-4

Occupy Islamabad

한반도 4배 크기, 2억 인구의 이 광대한 파키스탄에서 처음으로 한 민주정권이 다른 민주정권에게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하게끔 한 2013년 파키스탄 총선은 과연 민주주의의 시작이었을까. 실제로 선거는 꽤 공정했다. 물론 크고작은 사고들은 있었다. 파키스탄 선거관리위원회도, 선거를 감시한 국제 NGO들도, 선거에 패배한 파키스탄인민당(PPP)의 아민 파힘도 아프가니스탄에서와 같은 대규모 이의는 제기하지 않았다. 2008년 선거에 이어 2013년도 그런대로 무탈한 선거였다. 파키스탄무슬림연맹(PML)를 이끄는 나와즈 샤리프가 세 번째로 총리직에 당선되었고 그 숙적인 PPP가 야당을 차지했다. 또다시 파키스탄 정치는 PML과 PPP 양당 간 땅따먹기라는 묵은 체제의 연장일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야당 ‘정의를 이끄는 운동’(Pakistan Tehreek-e-Insaf, PTI)를 이끄는 야당대표이자 파키스탄 북서부의 강대한 키베르 파크툰크와 주 주지사인 임란 칸(Imran Khan)은 도무지 선거결과에 동의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8월 14일 독립기념일을 기해 임란 칸은 무장한 지지자들을 이끌고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대대적 연좌시위를 벌였다. 나와즈 샤리프 총리가 이끄는 현 여당 PML이 전국적, 조직적 부정선거를 계획, 자신이 이끄는 PTI의 승리를 빼앗았다는 이유였다. 총리의 무조건적 사임을 요구하는, 한 달 간 이어질 농성의 시작이었다. 뒤이은 17일 PTI의 국회의원들은 국회는 물론 파키스탄의 네 주 중 3개 주인 신드, 발로치스탄, 펀잡 주 의회에서 사임해 총리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였다(키베르 파크툰크와 주 의회에서의 사퇴 여부는 밝히지 않았다). 뒤이어 캐나다 출신 수피 성직자인 타히르 울-까드리(Tahir ul-Qadri)와 손잡고 지지자를 이끌어 이슬라마바드로 진군, 주요 도로 및 일부 정부시설을 손에 넣고 총리관저 및 국회가 위치한 파키스탄 정재계의 중심 레드 존(Red Zone) 앞까지 장악했다. 당시 칸과 함께 수도의 일부를 점거한 지지자들은 7만 명. 시위라기보다는 포위봉쇄에 가까운 형세였다.
LSF Occupy 2째문단 뒤

칸과 까드리의 명령 하에 시위대 일부가 총리관저를 침입할 정도로 사태가 악화되자 샤리프 총리는 이슬라마바드의 치안유지 및 정부시설 보호를 위해 파키스탄의 강력한 군부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군부를 이끄는 라힐 샤리프 육군참모총장(나와즈 샤리프 총리와는 인척지간이 아니다)은 임란 칸에게 24시간 내 정치혼란을 수습할 것을 통보하는 한편 칸과의 협상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한데 군부의 개입에 대한 칸의 반응은 상당히 특이하다. 샤리프 총리의 사임을 요구하면서 그는 “군부에 의해 끌려나가기 전까지 총리는 사임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실수’를 했다. 군부가 총리가 아닌 칸의 시위대를 제지하기 위해 개입했다는 사실과 아귀가 맞지 않는다. 임란 칸이 군부로부터 비밀리에 지원이라도 받은 것이 아니라면 나올 수 없는 말이다. 게다가 문제는 군부와 임란 칸의 공모라는 음모론이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군부와 총리 간 관계가 ‘냉랭하다’는 말로는 한참 부족한, 뿌리깊은 미움과 힘겨루기로 얼룩진 관계라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여기에다 PTI 고위급 인사인 자베드 하셰미가 영국의 <텔레그래프> 지와의 인터뷰에서 “임란 칸이 군부가 PTI와 공모해 반정부 시위를 계획하고 있다고 했다”고 폭로함으로서 음모론에 기름을 부었다. 군부는 이를 부정했으나 군부가 시위 진압에 소극적이었다는 사실, 총리 관저를 침입한 무장 시위대의 진압에 “무력을 쓰지 말라”고 정부에 요청한 사실은 명백하다. 파키스탄 언론 역시 이 음모론에 가세하는 듯하다. “이 군부는 중립적일 수 없다. 선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파키스탄 일간지 <돈>은 평했다.

크고작은 사고가 끊이지 않았던 총선이 과연 정부 주도의 부정선거였는지는 알 수 없다. 군부와 임란 칸의 공모라는 음모론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가장 불확실한 것은 파키스탄 민주주의의 미래다. 정부의 사임을 촉구하며 수도 일부를 점거한 시위대와 “난국의 타개”를 위해 개입한 군부. 2013년 7월의 이집트라고 해도 믿을 것만 같다.

 

닮은 사람끼리는 싸운다

1년 넘게 지속되어 온 파키스탄 군부와 총리의 알력싸움에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 “국가 내 국가”라고도 불리는 군부는 1947년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이래 때로는 쿠데타를 통한 직접 통치로, 때로는 민간 통치로 파키스탄을 통치해 왔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포린 어페어스>의 크리스틴 페어(Christine Fair)는 파키스탄 군부에게는 일종의 “쿠데타 각본”이 있다고 설명한다. 군부의 권력 장악은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 군부의 정당성을 위해 필요한 것이 정치적 난국과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민간 정부의 무능함이다. 이 정치적 난국 속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군의 합참의장은 자신을 국가수반-혹은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한다. 다음, 군부는 헌법의 효력을 중지시키고 의회를 해산하며 대법원 판사들로부터 지지를 획득한다. 그러나 군대 홀로 입헌민주주의를 채택한 파키스탄을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 때문에 이들은 “국회”를 조직하며, 여기에는 기존 당에 대한 충성과 군부가 하사하는 권력을 맞바꾼 정치인들이 모인 “여당”과 ‘어중이떠중이’ 파키스탄 이슬람주의 정당들이-마찬가지로 군부의 승인 하에-모인 “야당”이 모두 포함된다. 만일 신정부가 대중의 지지를 사지 못한다면 군부는 일정 시간 후 직접통치를 중단하며, 이렇게 되면 군부와의 협력을 거부하고 중앙권력에서 밀려났던 정당들이 다시 대중의 표심을 얻기 위해 선거활동에 돌입한다. 민주주의가 군부의 손가락 끝에서 살아남는 방식이다.

그러나 군부 독재기간 동안 이들 정당들은 가치나 경제정책보다는 무능함만을 증명했을 따름이며, 민간 통치의 복귀 후에 군부 독재에 협력한 정치인들 및 법조인들이 중앙정부에서 밀려나는 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정치권력이 길지 않다는 두려움 때문에 정부는 파키스탄의 정치경제적 발전보다는 일신의 부를 축적하는 데 더 집중한다. 실제로 90년대 민간 정부의 생명은 3년을 넘긴 적이 없었으며, 그동안 대국민적 지지를 기반으로 발전과 통합을 이끌어냈어야 할 총리직은 부패했던 PPP의 베나지르 부토와 비슷한 정도로 무능했던 PML-Z의 나와즈 샤리프가 벌이는 핑퐁 게임의 탁구공 정도로 전락했다. 이렇게 군부의 ‘정치 통제’는 직·간접적 방식으로 70년 가까이 유지될 수 있었다. 파키스탄 헌법 하에서 반역은 사형까지 언도받을 수 있는 범죄임에도 독립 이래 어떤 군 장성도 반역 혐의로 기소당한 적이 없다는 것이 지금도 이어지는 군부의 영향력의 가장 명백한 증거다. 이쯤 되면 70년 가까운 역사에서 군부 쿠데타가 세 번밖에 일어나지 않은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 지경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군부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1977년부터 1988년까지 대통령으로서 파키스탄을 통치한, 2차 군부 쿠데타를 이끌었던 지아 울 하크 대령이 파키스탄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그가 주도한 헌법개정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헌을 통해 이전까지 상징적 존재였던 대통령이 총리와 주지사, 고등법원과 대법원의 판사들 및 대법원장을 지명할 수 있는 권력의 핵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더군다나 개정된 헌법 58-2(b)조를 통해 대통령에게는 국회와 주 의회를 해산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 그 결과로 1988년, 1990년, 1993년 그리고 1996년까지 대통령령에 의해 차례로 국회가 해산된다. 쿠데타 없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일어나는 정당정치의 붕괴다. 1997년 또다시 군부는 헌법 58-2(b)조를 적용해 국회를 해산하려 들었고, 예외적으로 당시 총리는 해당 조항을 폐지하려는 무모한 시도를 감행한 끝에 국회의 해산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2년 후 군부 쿠데타로 결국 정부는 또다시 무너지고 만다.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령이 주도한 1999년의 군부 쿠데타로 실각한, 당시 두 번째 임기를 보내던 이 총리가 바로 현 총리인 나와즈 샤리프이며, 당시 무샤라프와 함께 쿠데타를 주도한 인물들이 바로 현재의 군 장성들이다. 2014년의 알력싸움은 고스란히, 20년 전 일어난 쿠데타의 연장인 것이다. 이런 군부에게 민주선거로 당선된 총리가, 군부가 전통적으로 장악한 외무부 및 국방부 직위를 빼앗아 민간인에게 넘겨주는 총리가 달가울 리 없다. 게다가 PML-Z는 의회 다수석을 차지하고 있으며 총리는 이전까지 독립성을 인정받아 온 군부에게 민간 통치를 강제하려 들고 있다. 무샤라프의 뒤를 이어 육군참모총장직을 맡은 아시파크 카야니의 후임으로, 카야니 본인이 선호하던 후보 대신 라힐 샤리프 중장을 앉힌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미 군부와 샤리프 총리는 미디어 문제로 한 차례 칼을 겨눈 바 있다. 오랜 군부 통치의 결과로 파키스탄 언론은 군부 휘하에 있는 파키스탄 정보부 ISI를 직접적으로 입에 올리지 못한다. ISI를 거론해야 할 때는 파키스탄 정보부라는 공식명칭 대신 “기관”, “지부”라고-때로는 “천사”라는 아이러니한 은어로도-부른다. 이런 분위기에서 파키스탄 내 친정부 성향의 상업방송 게오의 스타 아나운서 하미드 미르가 발루치스탄 주의 분리주의자들에 대한 파키스탄 정보부의 처우를 방송에서 공개적으로 비난한 후 의문의 총격을 받은 것이다. 샤리프 총리가 혼수상태에 빠진 미르를 방문한 것은 그 다음날의 일이다.

 

우리들만의 싸움이 아냐

대륙을 막론하고 국경은 두 주권의 분리가 일어나는 불안정한 지대다. 국경이 상정하는 것은 접경국의 존재뿐만이 아니다. 국경은 불법 이민, 밀수, 마약 밀매 등 법의 테두리를 넘어선 영역의 숙주이기도 하다. 기생식물이 강해지면 숙주가 약해지듯, 이 영역이 강해질수록 국경은 불안정해진다.
LSF 누구의 위협인가 2째문단 뒤

파키스탄은 어떨까.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과의 국경인 듀란드 라인에 걸친 영역을 차지한 것은 인신매매범도 밀수업자도 아닌 탈레반이다. <프리즘> 7호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이것이 가능한 것은 아프간-파키스탄 국경선에 걸친 연방직할부족지역(FATA)가 극도로 위험하고 험준하여 중앙정부의 통제가 미치기 힘든 지역이기 때문이다. 빼곡하게 들어찬 산맥 덕에 세계 최고의 자연요새라 불리는 FATA는 1890년대 파키스탄이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 전까지 어떠한 중앙통치도 받아 본 일이 없으며, 식민통치 중에도 세금 및 형법에서 자유로웠다. 독립과 뒤이은 파키스탄 건국 후에도 이 전통은 변하지 않았다. 파키스탄 국부 무하마드 알리 진나는 주 의회를 설치하는 대신 이들의 자치를 인정했으며 군대마저 철수시켰다. 대신 FATA를 통치하는 것은 와지리스탄을 근거지로 삼은 강력한 파슈툰족이며, 이 파슈툰족은 알 카에다 및 탈레반의 핵심 세력이다. 이들 모두가 본디 와지리스탄에 터를 잡고 살았던 것은 아니다. 이들 중 일부는 2001년 미국의 아프간 침공 후 불안정한 국경을 넘어 파키스탄으로 건너온 아프간탈레반이다. 이에 미국은 파키스탄에 대한 경제원조를 조건으로 FATA를 중심으로 한 테러단체들을 진압할 것, 또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에 대한 전쟁에 파키스탄 정부가 협조할 것을 요청했고 당시 대통령인 무샤라프는 이에 응하는, 실로 역사적이라 할 만한 방향전환을 꾀한다.

다만 문제는 파키스탄의 순응이 미국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는 데 있다. 파키스탄탈레반(TTP) 등을 비롯해 ‘파키스탄의’ 불안정의 원인이 되는 국경 내 테러단체들은 파키스탄에게 분명 탄압의 대상이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의’ 불안정이 늘 파키스탄의 불안정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파키스탄에 의해 통제될 수 있는 불안정성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카불의 탈레반 정권이 붕괴된 후 숨어든 은거지는 다름아닌 파키스탄의 퀘타(Quetta)였다. 아프간탈레반의 다른 이름인 퀘타 슈라(Quetta Shura)가 여기서 유래한다. 파키스탄의 입장에서는 유용한 무기가 손 안으로 날아든 셈이다. 이후 ‘테러와의 전쟁’에서도 파키스탄 군부는 파키스탄에 전쟁을 선포한 파키스탄탈레반(TTP) 등 단체의 진압에는 나섰으나 알 카에다의 연루단체인 하카니 네트워크와 하카니의 지원을 받는 아프간탈레반의 진압에는 소극적이었다. 파키스탄탈레반의 근거지인 남와지리스탄은 공격했으나 아프간과 파키스탄 양쪽에서 범국경적 테러를 일으키는 하카니 네트워크의 북와지리스탄은 “침공할 능력이 없어서 못 하겠다”는, 참으로 그럴듯한 이유로 방치해 두었다. 현재도 아프간 탈레반 정권의 옛 고위관료들은 언제 목에 현상금이 걸렸냐는 듯 퀘타와 카라치에서 활보한다.

아프간탈레반은 예측하기 어렵고, 통제할 수 없으며, 이들을 지원하는 것에는 국제적 정당성도 없다. 미국과의 관계를 위협한다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실제로 2011년 9월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미국 대사관이 공격받았을 때 당시 미군 합동참모본부 의장은 그 공격이 하카니 네트워크와 파키스탄 정보부의 공모 하에 이루어졌다는 증거가 있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파키스탄이 아프간탈레반을 통제해야 한다는, 얼핏 비논리적으로 보이는 군부의 믿음의 근원은 어디일까.

 

수상한 이웃집

2001년으로부터 1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프가니스탄은 NATO 철군 직후 치른 대선조차 삐걱거리는 불안정한 나라다. 당장 공용어인 파슈툰어를 쓰지 않는 우즈벡, 하자라, 타지크 족만 하더라도 인구의 절반을 넘는다.

그리고 그 불안정성은 점점 확장되고 있다. 파슈툰족이 주를 이루는, 파키스탄과의 접경지인 아프간 남동부의 ‘왕초’는 정부가 아닌 파슈툰의 아프간탈레반이며 북부에서는 타지크 족의 북부동맹이 다시 용트림을 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이 찢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다자 간 경쟁 속에서 불안정한 아프가니스탄이 다자 간 내전에 돌입할 경우 장기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은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는 아프간탈레반과 인도의 지원을 받는 북부동맹 간 접전의 장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 상황에서 하카니 네트워크, 아프간탈레반 등을 통해 파키스탄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세력을 확보할 수 있다. 즉, 파키스탄의 영향권 하에 적절한 수준으로 안정된 아프가니스탄은 다가올 인도와의 전쟁에서 전시 기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아프가니스탄은 파키스탄과 인도 간 분쟁의 연장선상에 놓이게 된다.

아프가니스탄와 인도의 노골적으로 친밀한 관계 또한 파키스탄에게는 경계의 대상이다. 에너지자원이 풍부한 중앙아시아로의 진출기지인 아프가니스탄은 인도에게는 전략적 요충지다. 2001년 이후 인도가 아프가니스탄의 재건에 쏟아부은 금액은 12억 달러를 훌쩍 상회하며, 아프가니스탄 의회 건물을 지어준 것이 바로 인도다. 2008년 인도는 아프가니스탄 내 인도 국민들 및 인도의 국경도로관리기구(Border Roads Organization, BRO)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인도군 엘리트 부대인 인도-티벳 국경수비대(Indo-Tibetan Border Police Force, ITBP)를 아프가니스탄에 배치했다. BRO의 주요 업무는 아프가니스탄을 이란의 차바하르 항구와 연결하는 것으로, <포린 어페어스>에 따르면 이는 파키스탄 육로에 대한 아프가니스탄의 의존성을 대폭 줄일 수 있다. 이를테면 숨통을 뚫어 주는 꼴이다. 이와 비슷하게 아프가니스탄 정부에게 인도는 파키스탄에게 대응하는 일종의 균형추가 될 수 있다. 인도와의 전쟁을 그 존재 이유로 삼는 파키스탄 군부가, 인도의 지원을 받는 아프간 정부의 통치 하에 안정된 아프가니스탄을 바랄 리 없다. 군부가 아프간탈레반과 하카니 네트워크를 끊어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네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러나 총리는, 군부가 아닌 민간인 출신인 샤리프 총리는 강경론자가 아니다. 그는 인도와의 전쟁을 대비해 아프간탈레반을 지원하는 것에도, 파키스탄탈레반과의 전쟁에도, 핵 보유 및 개발에 천문학적 금액을 쏟아붓는 것에도 공공연하게 반대한다. 샤리프 총리는 이상주의자가 아니며, 그의 중도론은 근거가 있는 이야기다. 인도와의 전쟁이 현실화된다면 파키스탄탈레반과 같은 국내의 강경한 반정부세력은 내부의 적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완전히 이길 수 없는 적이라면 법의 테두리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다. 또 파키스탄 인구 절반이 빈곤 상태에 살며 잦은 자연재해로 인프라는 취약하다. 교육수준을 고려하면 파키스탄의 미래는 더욱 암담하다. 세계경제포럼에 의하면 인구의 절반이 문맹상태이며 148개국 중 초등학교 취학률은 137위다. 인적 자본이 극도로 빈약한 것이다. <포린 폴리시>는 2010년 파키스탄의 “국가 실패율”을 소말리아와 콩고와 같은 수준으로 두었다. 제 국민들을 배불리 먹이지도 못하는 국가에게 테러단체의 지원은 예산 낭비라는 비난이 있을 법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불안요소의 최소화’라는 샤리프의 행보는 나렌드라 모디가 인도의 총리로 취임한 이후 더욱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샤리프 총리는 모디의 총리 취임식 초청을 받아들였고 그의 모친에게는 사리를, 모디 본인에게는 망고를 보냈다. 그런 그에게 붙은 별명은 “망고 외교”다. 군부는 샤리프 총리가 친인도 성향을 띠었다며 비난하지만 나렌드라 모디가 도하에서는 미국에게, 구자라트에서는 중국에게 큰소리치는 현재의 상황에서 샤리프 총리는 굳이 따지자면 실용주의자라 불러야 할 것이다. 결국 군부와 샤리프 총리의 대립은 단순한 권력 장악의 문제가 아니다. 탈레반과 대인도전략 두 가지로 인한 갈등은 결국 모두 인도의 부상 앞에서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방식의 견해차에서 온 갈등이라 할 수 있다.

지난 3월, 샤리프 총리는 군부의 전 수장인 무샤라프를 반역죄로 기소했다. 군부 개입으로 얼룩진 파키스탄의 지난한 정치사에서 반역죄로 기소되기는 무샤라프가 처음이다. 총리가 군부에 대해 우위를 점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상은 샤리프는 이미 진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시작된 파키스탄탈레반과의 평화협상은 올해 6월, 파키스탄탈레반의 테러를 계기로 중단되었으며 파키스탄 군부는 다시 탈레반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무샤라프 재판에서 검찰은 무샤라프를 1999년 쿠데타의 혐의가 아닌 2007년 헌법효력 정지의 혐의로 기소했다. 쿠데타 혐의를 물고 늘어지면 현 군 장성들이 줄줄이 묶여들어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임란 칸의 시위에 군부가 개입을 선언한 것은 샤리프 총리가 군부에게 굴복했다는 내용의 보도가 언론을 탄 다음날이었다.
LSF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마지막문단 위

샤리프 총리는 파키스탄을 위한 새로운 구상에서 군부를 배제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군부 역시 손이 묶여 있기는 마찬가지다. 샤리프를 대신할 만한 민간 후보자가 없기 때문이다.

 

당신들의 전쟁

임란 칸의 시위의 배후에 있는 것은 과연 군부였을까. 그랬다면 군부에게 임란 칸은 샤리프를 대신할 만한 차기 총리감이었음에 분명하다. “쓰나미”와도 같은 선거를 통해 2010년 정계에 입문했을 당시까지는 그랬다. 실제로 칸의 부상은 사법부가 이전 정부의 여당인 파키스탄인민당을 타깃으로 삼은 시기와 일치한다. 그러나 칸에게 리더십이라고는 없었으며 시위 한복판에서 군부와 공모했다고 외치는 데서는 경솔함만이 보인다. 그의 말이 거짓이라도 그럴 뿐더러, 사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칸은 제대로 된 대체재가 아니었던 셈이다.

시위대는 마침내 이슬라마바드에서 철수해 카라치로 옮겨갔으나 임란 칸은 부패와 명예훼손 혐의에 휘말렸다. 그러나 군부와 총리의 신경전 사이에 선 칸의 혐의의 진위 여부도, 이것이 총리와 군부의 싸움에 어떤 영향을 줄지도 쉽사리 예측할 수 없다. 쿠데타와 민주정치의 균형이라는 살얼음판 위에서 파키스탄 정국의 혼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박정민(연세대 정치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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