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 2015 2월

펼쳐든 우산 뒤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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펼쳐든 우산 뒤편에서

 

90년대 후반 홍콩을 둘러싼 영국과 중국 간 줄다리기에서 덩샤오핑이 내놓은 ‘일국양제’ 구상은 당시엔 성공적인 중재안이었다. 일국양제에 따라 홍콩이 자본주의 체제를 이어갈 수 있게 되며 홍콩은 중국의 일부분이면서도 완전한 중국은 아니게 될 수 있었다. 홍콩에 막대한 투자를 했던 영국은 그간 쌓아온 모든 것을 잃을 것이란 걱정을 비로소 떨쳐냈고, 그럼으로써 중국으로의 홍콩 반환이 비로소 성사되었다. 그러나 십여 년이 지난 2014, 중국 입장에서 이렇듯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냈던 일국양제는 위험에 봉착한다. 안정적으로 운영된다고 여겨졌던 홍콩 내부에서, 시민들의 불만이 거리 위에 표출된 것이다.

 

끝나버린 혁명

불만은 2017년 홍콩 행정장관 선거안으로부터 비롯되었다. 2014 8,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는 후보 추천 위원의 과반수 이상의 지지를 얻어야만 홍콩 행정장관에 입후보할 수 있도록 규정하는 선거안을 새로이 내놓는다.전국인민대표대회측의 지지가 그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친중파 후보만을 허용하겠다는 논리였다. 그러자 홍콩 시민들은 민주주의가 훼손되었다는 위기의식을 느끼며 거리로 나섰다. 입후보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구호가 내세워졌고, 구호 이면엔 중국과 쉽게 섞일 수 없는 홍콩 시민들의 반중 감정도 있었다. 홍콩 시민들로서는 97년 홍콩 반환 이후 홍콩 내 청년들의 일자리가 줄고, 도심의 집값이 폭등한 상황이 중국 자본의 유입과 정부의 개입 때문이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실제로 홍콩 시민들의 삶은 과거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홍콩 통계청의 조사에 따르면 소득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지니 계수는 97년 이후 지속적으로 악화되어 2011년에는 0.537의 수치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삶의 질을 비롯한 다른 지표에서도 홍콩은 과거보다 못한 상황을 겪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 인사들을 필두로 한 정치인들과 홍콩 시민들, 특히 젊은 청년층은 ‘중국의 일부’로 남지 않고자, 자신들의 생활 영역을 더 이상 침범 당하지 않고자 하는 욕구를 가져왔고, 이는 완전한 직선제를 외치는 우산혁명이 나타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9 22일 홍콩 내 주요 대학들은 동맹 파업을 일으켰다. 이어 26일에는 학생들이 거리로 나왔고, 경찰은 이들에게 최루탄을 쏘며 강경하게 대처했다. 이 때 경찰의 최루탄을 막고자 우산을 펼쳐 든 시위대의 모습이 매스컴을 통해 전세계의 이목을 끌었고, 이를 통해 시위는 ‘우산혁명’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특히 비폭력적인 시위 현장과 참여자들의 질서정연한 모습은 세계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시위는 홍콩 내부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인기를 얻으며 연일 대중의 관심사에 올랐지만 12 15, 홍콩 경찰이 시위대의 마지막 시위 캠프를 철거하면서 끝내 70여일 간의 행보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끝나버린 혁명은 곧 실패한 혁명으로 남았다. 결국 2017년 홍콩 행정장관 선거의 완전한 민주 직선제를 이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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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루탄을 막고자 우산을 편 시위자들의 모습으로, 시위에 붙은 이름은 ‘우산 혁명’이었다.

 

물론 새로운 세대의 목소리를 통해 중국과 다른 문화와 의식은 물론 3만여 달러의 국민소득을 가진 ‘남다른’ 홍콩이 ‘원차이나’의 그림에 순순히 끼워 맞춰지지 않을 것이란 점이 분명히 나타났다는 점은 우산혁명의 의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의가 곧 우산혁명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 시위가 시작된 목적을 생각하면 우산혁명은 어쨌거나 실패로 끝이 난 혁명으로 남았다. 사실 시위는 처음부터 ‘성공한 혁명’으로 발전하기에 조금 찝찝한 구석들이 있었다. 시위를 지켜보는 중국의 입장이 굉장히 강경했다는 점과 시위가 자체의 동력을 유지∙확산할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국제사회의 헤게모니 속에서 과연 전폭적인 지지가 가능할 지와 같이 성공을 의심할 만한 지점들을 충분히 포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홍콩을 주목하는 세계의 눈은 연일 확장되는 시위에서 포착되는 긍정적인 측면에만 집중했다.

 

바위를 깨뜨리는 달걀?

중국에게 홍콩은 더 이상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97년 홍콩 반환 당시만 해도 홍콩 경제는 중국 GDP의 약 18%를 차지했지만 십여 년이 흐른 지금 홍콩이 차지하는 비율은 3% 정도에 불과하다. 반대로 홍콩 경제에 중국이 기여하는 정도는 날로 증대해왔다. 우선 중국으로 이전하는 홍콩 제조업이 증가하여 홍콩 GDP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줄어든 반면 서비스업은 증가하여 자연스레 홍콩의 제조업을 중국이 역할 분담하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또한 무관세 도입, 대륙 시장 진입시 제공되는 홍콩 기업에 대한 인센티브 등을 통해 중국과 홍콩의 경제 결합은 더욱 끈끈해졌다. 현재 홍콩의 대중국 수출액은 홍콩 수출의 약 55%를 차지하며 압도적인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홍콩 관광객의 절반 이상이 중국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실을 봤을 때 과거 중국과 홍콩이 가졌던 경제적 위치에서의 갑을 관계는 역전되었다. 그간 중국 경제가 홍콩을 차근차근 잠식해옴에 따라 중국이 홍콩에 굽힐 명분이 줄어든 것이다.

 

결국 과거와 달라진 현실 속에서 ‘달걀로 바위치기’라는 속담 한마디가 우산혁명의 양상을 그대로 보여줬다. 시진핑 주석의 중국은 시작부터 종료에 이르기까지 우산혁명에 대해 타협할 수 없다는 태도를 강경하게 유지했다이러한 중국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10만여 명의 홍콩 시민들이 시위에 나선 10 1일에 시진핑은 신중국 건국 65주년 행사에서 “흔들림 없이 ‘일국양제’와 홍콩의 기본법을 유지할 것”이라 분명히 밝혔다. “일국양제를 추진하는 것은 중국의 근본 이익과 홍콩, 마카오의 장기적 이익에 들어맞는다.”는 시진핑의 발언이 곧 우산혁명을 바라보는 중국의 시각이었던 것이다. 시위가 확산되어 가던 초기 국면에 중국이 시위 진압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 이유는 단지 홍콩이 가지는 국제적 위상을 고려해야 했고, 강경 대응으로 인해 급격한 지지 확신을 경험한 결과 신중하게 대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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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콩 시위에 대한 강경한 대응을 천명한 시진핑 주석

이런 상황에서 시위대는 화제의 대상이 된 ‘신사적인 시위 방식’을 이어나갔다. 사실 홍콩의 위상이나 국제 사회의 이목을 고려했을 때 중국 입장에서는 시위가 격화되지 않고, 얌전하게 진행되는 양상이 적절한 수준에서 개입할 때를 기다릴 수 있게 하는 기회였다. 시위가 급속히 확산될 때도, 세계가 우산혁명을 찬미할 때도 중국은 비록 겉으로 강압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뿐 쉽사리 흔들리지 않는 바위와도 같이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왜 달걀이 될 수밖에 없었나?

중국이라는 바위를 깨뜨리기 위해서 시위는 더 단단한 무언가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시위는 끝내 깨지기 쉬운 달걀로 남았다. 처음 우산혁명은 마치 ‘아랍의 봄’을 연상시키듯 SNS를 통해 급격하게 확산되었다. 시위대의 메시지가 실시간으로 홍콩 전역에 퍼지자 시위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는 시위 초기의 동력을 견인하는 가장 큰 요소였다. 하지만 이러한 우산혁명의 특징은 장점이자 곧 약점이기도 했다. 명확한 주도 세력과 지도자가 없이도 확보된 시위의 동력은 중국 입장에선 ‘깨뜨릴 대상’이 없다는 점에서 와해시키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그 자체로 스스로 무너질 위험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비록 ‘센트럴을 점령하라’로 알려진 시민단체와 대학생 조직인 ‘홍콩전상학생연회’, 조슈아 웡이라는 우산 혁명의 아이콘을 낳은 중고등학생 조직 ‘학민사조’ 세 단체가 주도 세력이긴 했으나 어느 하나가 명확한 구심체로 발전하거나 세 단체가 적절히 힘을 모은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우산혁명의 후반부에는 조슈아 웡을 필두로 하는 학생 시위대 지도부가 무기한 단식 투쟁을 선언한 바로 다음날 시민단체 지도부인 ‘센트럴을 점령하라’의 대표자들이 기자회견에서 자수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또한 “10년 후 초등학생들이 홍콩 민주화를 위해 시위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던 조슈아 웡은 우산혁명의 아이콘으로 부상하긴 했으나 여전히 전체 시위를 이끄는 지도자라 하기는 애매했다. 그의 목소리는 눈에 띄는 목소리였을 뿐 시위대 전체의 목소리를 대변할 정도는 아니었다. 조슈아 웡의 단식투쟁 결정은 시위대 전체가 아닌 학민사조 구성원에게조차 “상징적인 의미에 불과한 투쟁”이라는 불만에 맞닦뜨리기도 했다. 그 역시 ‘우산’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심볼에 가까웠다.

 

결국 명확한 조직적 구심체와 지도자가 부재한 시위는 강력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힘든 구조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시위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상대에 맞서 행정장관 직선제를 촉구하는 급진적인 변화를 목표로 했지만 그만한 목표를 실제로 이끌어나갈 만한 동력을 이어가기엔 너무 느슨한 구조에 머물렀고, 바위를 깨뜨리기엔 너무나 ‘깨지기 쉬운 달걀’이 되고 말았다.

 

반쪽짜리 지지

이러한 우산혁명이 그나마 더 큰 성과를 이루기 위해서는 대내외적으로 굳건한 지지가 필요했다. 이를 통해 시위가 지속적으로 결속력을 갖추고, 실제로 중국을 조금이나마 더 움직이려는 과정에서 쉽사리 깨지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내적으로든, 대외적으로든 우산혁명은 완전한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이는 분명 우산혁명이 장밋빛 미래를 그리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처음 홍콩 내에서 급격히 타올랐던 시위의 열기가 채 두 달이 가지 못해 스스로 식어버리고 만 것은 홍콩 내부에서의 지지가 튼튼하지 못한 결과였다. 완전한 직선제를 얻고자 뭉쳤던 홍콩 시민들의 정치적 의사는 ‘경제적 손실’, ‘대외적 신뢰 하락’이라는 반대측의 구호 아래 너무나 쉽게 와해되고 말았다. 이러한 사태를 막을만한 조직적 구심체나 지도자가 없기도 했고, 그런 상황에서 워낙 강경하게 거부 의사를 유지한 중국과 협상 테이블이 마련되기 어려웠다는 점이 결국 우산혁명에 대한 대내적인 지지기반을 와해시키는 원인이었다. 시위대의 숫자가 수백명 단위로 줄어버리고, 절반 혹은 그 이상의 홍콩 시민들이 시위를 반대하게 된 후반부의 상황을 직접 확인하기 이전에도 우산혁명이 홍콩 내부에서 그다지 강력한 지지를 얻지 못하고 흐트러지는 모습은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시위 전면에 나섰던 학생 세력에 비해 ‘잃을 것이 많은’ 일부 시민들, 특히 친중 성향을 가진 상류층 시민들은 차츰 시위 현장을 정리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친중단체에 의해 동원된 폭력조직이 시위대에 테러를 가하기도 했다. 기껏해야 끝까지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세력들과 이에 동조하는 시민들 일부의 지지만이 확실한 지지로 남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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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달걀이 될 수밖에 없었나?

동시에 우산혁명은 국제사회로부터도 완전한 지지를 얻지 못했다. 세계 각지에서 우산혁명을 지지하는 차원에서 동조시위들이 벌어졌고, 유명인사들의 격려도 이어지긴 했다. 게다가 조시 어니스트 미 백악관 대변인이 정례 브리핑에서 우산혁명에 대한 지지를 직접적으로 언급했고, 존 케리 국무장관도 중국 외교부장 왕이와의 회동에서 “홍콩의 보편적인 참정권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닉 클레그 영국 부총리 또한 트위터를 통해 지지 의사를 밝혔다. 얼핏 보면 국제사회로부터 열광적인 지지가 이어져나간 셈이었다. 하지만 정작 우산혁명에 필요한 것은 말뿐만이 아닌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준의 지지여야 했다. 중국이 본토 국민들이 홍콩으로 이동하는 것을 금지시킨 것이나 우산혁명과 관련된 SNS나 언론 보도를 통제한 것처럼 국제사회 또한 중국에 실질적인 압박을 행했어야 우산혁명이 힘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것은 이루어지기 힘든 상황일 수밖에 없었다. 증대해가는 중국의 힘을 고려했을 때 서구사회가 중국에 직접적인 제재를 실행하기는 무리였고, 글로벌 금융 도시로서의 홍콩의 특별한 위치는 곧 섣부른 개입으로 인한 국제 금융 시장의 변동을 염려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정작 중국이 홍콩에 폭압적인 대처를 행하고 있지 않는 상황에서 국내문제에 불간섭하는 국제사회의 관습규칙을 어기는 것도 무리였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우산혁명은 국제사회로부터 언행이 일치하는 완전한 지지가 아니라 반쪽짜리 지지만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시위가 남긴 것들

시위가 실패로 끝난 지금에서야 결국 우산혁명은 홍콩만의, 아니 그마저도 홍콩 내 일부 시민들만의 레이스였음이 드러났다. 비록 수많은 관중들이 응원했지만 시위대는 끝내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진 못했다. 그러나 단순히 실패를 이유로 우산혁명의 의의를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렵다. 우산혁명의 발발은 곧 홍콩 신세대의 적극적인 정치적 의사 표출이자 ‘홍콩 시민’으로의 정체성 확립 과정이었다. 중국의 부상으로 별다른 혜택은커녕 오히려 많은 불안을 안게 된 젊은 세대가 반중 감정을 앞세워 스스로 홍콩인으로의 정체성을 굳건히 다졌다는 것은 중국이 그려온 일국양제 자체가 흔들리는 것을 의미한다. 비교적 친중적 성향을 띠는 구세대와 달리 향후 홍콩을 이끌 신세대가 이러한 인식을 갖는다는 것은 곧 중국의 원차이나가 방향을 달리 해야 할 국면에 도달했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위의 한 참가자가 “우리는 국제적인 관심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성공했다”라고 밝힌 바와 같이 우산 혁명의 파급력이 홍콩 내부에만 그치지 않았다는 점도 중요하다. 실제로 우산혁명을 지켜본 대만 유권자들은 저성장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친중 성향을 유지해온 국민당에 등을 돌렸다. 11 29일 대만 지방선거에서 국민당은 불과 6곳에서 승리하여 기존의 15곳보다 입지가 줄었고, 향후 총통 선거에 있어서도 승리가 불투명해졌다. <뉴욕타임스>는 이러한 참패의 원인을 “우산혁명을 통해 대만 젊은층의 반중 정서가 증폭되었다”는 점으로 분석했다. 이런 상황과 마찬가지로 티베트나 신장 위구르 지역에 또다시 불씨가 지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중국이 우산혁명에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던 이유도 시위대의 요구에 한 발 물러나게 되면 분리 독립 의지를 가지는 다른 지역에 좋지 않은 선례가 될 것이 마땅했기 때문이었다.

 

우산혁명은 막을 내렸지만 그로 인한 ‘반중’의 불씨는 여전히 꺼지지 않았다. 차기 행정장관 선거방식이 미결로 남은 상태에서 시위대는 “언제든지 우리는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공언했다. 이로 인해 줄기차게 개혁의 바람을 이끌어온 시진핑은 딜레마에 빠졌다. 굳이 홍콩뿐만이 아니라도 중국이 꿈꾸는 원차이나의 어느 곳에서나 우산이 펼쳐질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제 시진핑과 향후 중국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현실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해 새로운 세대가 펼쳐들 우산을 어떻게 접게 할 것인가에 대해 고심해야 한다.

 

전성민(고려대 사회)

jb_wmwp@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