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흥의 도시 아바나 그리고 너와 나
지난해 12월 17일 미국 오바마 대통령과 쿠바 라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이 양국간 외교 정상화를 선언했다. 1959년 피델 카스트로가 혁명을 일으킨 2년 후, 1961년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며 국교가 단절된 지 53년만의 일이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특별 성명을 통해 “어떤 나라를 실패한 국가로 몰아붙이는 정책보다 개혁을 지지하고 독려하는 것이 더 낫다는 교훈을 어렵게 얻었다”며 반세기 이상 유지해 온 쿠바 봉쇄정책의 실패를 시인하였다.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의 말대로 ‘이념의 시멘트’에 갇혀있던 두 나라가 드디어 마주보게 된 것이다. 미국 대사관이 세워질 쿠바의 수도 아바나의 59년 혁명 전 모습을 생생하게 나타낸 애니메이션 ‘치코와 리타’는 재즈 아티스트들의 일생을 쿠바와 미국의 급변하는 관계 속에서 담담하게 그려낸다.
사랑을 jazzy 않아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 전쟁을 치렀던 쿠바와 쿠바의 독립을 저지하면서 그들을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두고자 했던 미국의 특별한 관계는 경제적 유대관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독립 후 사실상 미국의 보호령이었던 쿠바는 17세기 말부터 사탕수수의 대규모 지배와 미국으로의 독점적 수출을 통해 미국에 종속된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양차대전과 경제대공황을 지나면서 설탕 값의 폭락과 미국 경제의 침체로 쿠바 경제 전체가 휘청이게 된다.
이후 마차도와 바티스타 정권을 거치면서 쿠바는 다시금 경제재건에 박차를 가했다. 1930년대부터 미국인들의 휴양지로 각광받던 따뜻한 섬에 미 자본을 바탕으로 한 카바레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면서, 쿠바의 수도 아바나는 미국인들의 흥과 더불어 쿠바 음악인들의 생계의 터로 변모하게 되었다. 하지만 유흥 시설과 함께 폭력과 매춘 역시 아바나를 물들이기 시작하여 40년대에 들어서는 아바나의 매춘 여성 인구가 7만 명에 이르게 된다. 더욱이 풀헨시오 바티스타가 1952년 재집권한 이후로는 미국의 대규모 도박산업을 유치하면서 아바나에만 270여개의 호텔과 300여개의 매춘가게가 들어서는 등 아바나 전체가 거대한 유흥도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 가운데, 치코와 리타가 만났다.
치코는 리타는 처음 만난 날부터 서로에게 이끌렸지만 치코에게는 이미 부인이 있었다. 부인의 존재를 뒤늦게 알게 된 리타는 냉정하게 선을 긋지만 치코는 둘을 이어주는 재즈 음악을 빌미로 리타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 둘은 치코와 치코의 오랜 동료인 라몬의 권유로 함께 출전한 경연대회에서 입상한 후 줄곧 쿠바에서 음악 활동을 함께 하면서 동료 아티스트 이상의 정을 나누게 된다.
「치코와 리타」의 또 다른 볼거리는 당시 쿠바의 시대상황이 작품 내에서 자세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치코와 리타가 함께 경연대회를 나가게 되는 이 장면에서 길거리에 붙여진 선거 포스터로 인해 당시 선거가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실제 1948년 쿠바 대선에서 카를로스 프리오 소카라스Carlos Prío Socarrás가 당선되어 4년간 쿠바를 이끌었다.
암흑 속 재즈 한줄기
1950년대 맘보 등의 쿠바 음악이 세계적으로 유행하면서 재즈 싱어 리타에게도 기회가 찾아 왔다. 여느 때처럼 치코와 합을 맞춰 공연하는 리타를 눈여겨 본 미국의 사업가는 리타에게 미국에서 활동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한다. 자신이 리타를 스타덤에 올려줄 수 있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계약은 리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이미 치코를 사랑하게 된 리타는 치코 없이 떠나지 않겠다며 거절하지만 둘 사이를 오해한 치코는 리타를 먼저 떠나버린다. 이후 뉴욕으로 홀로 떠나게 된 리타는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50년대 미국에서는 유색인종 차별이 여전히 존재했다. 리타가 떠난 후 그리움 끝에 그녀를 뒤따라간 치코에게 인종차별은 높은 벽으로 다가왔다. 치코와 리타 일행보다 앞서 뉴욕에서 음악 활동을 하던 쿠바인 아티스트 차노 포소와 치코의 동료 라몬의 대사에서 그들이 겪었던 차별을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호텔은 직원용 출입구를 이용해야 하고 버스는 뒷자리에만 앉을 수 있어. 화장실도 따로야”
치코와 리타는 뉴욕에서 재회했지만, 서로 다른 상처를 갖고 있었던 둘은 쉽사리 예전의 관계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러던 와중 라몬이 단순 노동을 통해 생계를 이어가다 리타의 후원가이자 투자자인 미 사업가의 도움으로 치코의 재즈 피아니스트 활동을 지원하면서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치코는 라몬의 회사에 소속되어 유럽 전역에서 순회 공연을 펼칠만큼 손꼽히는 재즈 피아니스트로 성장한다. 이후 치코와 리타는 몇번의 엇갈림 끝에 아바나에서의 그들보다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유명 재즈 싱어와 피아니스트의 관계는 오래 지나지 않아 미 전역에 알려지고 리타의 투자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지만, 그 둘은 크게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이미 치코와 리타는 한 해의 마지막 날, 라스베가스에서 둘의 새로운 시작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다시, 아바나
줄곧 음악 활동을 함께 하며 뉴욕으로도 같이 떠나 치코를 지원했던 라몬은 치코와 리타가 잠깐의 스캔들에 그치지 않고 결혼을 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해 듣게 된다. 라몬은 리타를 스타의 반열에 올린 미국인 사업가의 압박에, 치코의 양복 주머니에 마약을 넣어 그를 마약밀매혐의로 추방시키는 데 일조한다. 결국 치코는 리타와 한 마디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하고 쿠바로 돌아오게 된다. 그런데 치코가 마주한 아바나는 이전처럼 향락으로 가득찬 도시가 아니었다. 상심에 정처 없이 거리를 걷는 치코 뒤에는 거리로 나와 국기를 흔들고 피델 카스트로를 외치는 쿠바인들이 있었다. 아바나는 사회주의 혁명의 성지가 되어 있었다.
1959년 카스트로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으면서 쿠바는 사회주의화했다. 쿠바의 혁명 정부는 대내적으로는 국유화와 무상교육, 의료 복지 정책을 실시하며 혁명에 박차를 가했고, 대외적으로는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국가들과 무역 블록을 형성했다. 특히 자본주의 국가의 대표격인 미국을 두고 경쟁 구도를 펼치던 쿠바와 소련은 경제적, 군사적으로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1961년 미국과 쿠바의 외교 관계가 결국 단절되고 쿠바인과 미국인은 서로의 나라에 방문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쿠바의 사회주의 혁명은 적어도 치코를 비롯한 재즈 예술가들의 삶에는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쿠바 당국이 본격적인 사회주의 개혁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재즈를 제국주의적인 ‘적들의 음악’으로 간주하고 공연을 금지한 것이다. 쿠바 당국은 재즈 공연 준비를 하는 치코에게 재즈 음악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공산당에 가입할 것을 요구한다. 실제로 쿠바의 혁명 정부는 음악의 파급력을 일찌감치 알고 이를 중요한 정치적 수단으로 여겼다. 기존의 라틴계 음악인 재즈나 살사를 제국주의 예술로 규정하여 금지하고, 스페인어로 ‘새 노래’라는 뜻의 ‘누에바 트로바(nueva trova)’라는 음악 장르를 지원한다. 물론 쿠바 음악이 발달할 수 있었던 장이었던 카바레도 금지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재즈나 살사는 본토가 아닌 미국에서 발달하게 된다.
생존의 문제
시간이 흘러 늙은 치코는 음악을 그만두고 구두닦이로 일생을 살아 간다. 치코의 시간이 흐른 만큼 쿠바의 상황도 변했다. 영화에서는 갑작스레 정전이 되었다가 다시 전기가 들어오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이웃들은 정전이 별로 놀랍지 않다는 반응을 보인다. 실제로 과거 쿠바에서는 애니메이션 속 장면처럼 전력 수급 부족으로 정전이 일상화되었다. 사회주의를 추구한 다른 나라들도 으레 그렇듯 쿠바의 경제 상황은 좋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나 1989년, 쿠바의 경제의 한 축을 담당했던 소련이 붕괴하면서부터 경제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89년 당시 전체 교역량의 80% 이상을 제2세계에 의존했던 쿠바는 식량, 석유, 기계 부품 등의 부족에 시달렸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쿠바 정부는 시장경제를 일부 도입하게 된다. 쿠바의 사회주의는 더 이상 패기와 열정으로 유지되거나 추진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회주의는 생존의 문제가 되어 사람들의 생활 속으로 스며들어왔다.
경제 상황과 함께 80년대 이후 쿠바 음악의 흐름도 조금 바뀌었다. 혁명 체제를 직간접적으로 옹호하는 누에바 트로바의 자리에는 혁명 이후 쿠바의 사회 문제를 지적하는 노비시마 트로바(novísima trova, 더 새로운 음악)가 들어선다. 앞서 언급한 전력 문제 또한 노비시마 트로바의 소재가 되었다. 1995년 이 계열의 음악가 중 한 사람인 프랭크 델가도가 노래한 Cuando se vaya la luz, mi negra(전기가 나가면, 내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Cuando se vaya la luz, mi negra,
mi abuela va a comenzar
a desatar su mal genio,
y a hablarme mal del gobierno.
Y mi abuelo que es ñángara le va a ripostar
que es culpa del imperialismo, de la OPEP, y del mercado mundial.
전기가 나가면, 내 사랑
내 할머니는 또 그 나쁜 성질이 나오기 시작하겠죠.
나한테 정부 욕을 시작할테고
‘빨갱이’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재빨리 대답하겠죠.
제국주의와 OPEP(석유수출국기구), 시장경제의 잘못이라고.
– Frank Delgado(1995), Cuando se vaya la luz, mi negra
한편, 과거 치코의 음악에 주목했던 한 사업가와 아티스트가 재즈 피아니스트로서의 명성을 버린채 살아가던 치코를 찾아와 그에게 음악 활동 재개를 제안한다. 재즈를 금지했던 시대적 상황과 실연의 아픔에 의해 음악을 그만 두었던 치코는 피아노를 보자 다시 음악을 시작할 용기를 얻는다. 그리고 치코는 세계 투어 공연과 더불어 그래미 상을 두 손에 쥐면서 재기에 성공하였다. 그 후 그는 다ㅣ 미국으로 돌아와 리타의 행방을 물으며 그녀를 찾아다니지만, 젊은 시절의 리타도, 라몬도, 뉴욕도 이미 변해버린 후였다. 치코과 미국을 떠난 47년간 변하지 않았던 것은 오직 라스베가스, 그리고 너와 나뿐이었다.
이 영화에는 치코와 리타의 이야기와 더불어 한 도시의 역사가 있었다. 미국의 경제적 식민지였던 향락의 도시, 재즈를 억압했던 사회주의 혁명의 중심지, 그리고 혁명의 기운이 한풀 꺾이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던 8-90년대의 도시의 모습까지. 세심하게 재현된 아바나의 모습은 애니메이션 영화에 현실감을 불어넣어주었다. 그런데 만약, 영화가 그때에서 끝나지 않고 지금 현재 아바나의 모습까지 담는다면 어땠을까? 시대적 배경 묘사에 충실한 이 영화에는 아마 60년 간 대립해 온 양 극단의 체제가 누그러지고 오바마 대통령과 함께 외교정상화를 선언하는 피델 카스트로의 모습이나 이를 알리는 신문 기사가 나왔을 지도 모르겠다.
김은경 (국민대 정치외교)
황지윤 (이화여대 정치외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