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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흥의 도시 아바나 그리고 너와 나

유흥의 도시 아바나 그리고 너와 나

헤드

지난해 12월 17일 미국 오바마 대통령과 쿠바 라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이 양국간 외교 정상화를 선언했다. 1959년 피델 카스트로가 혁명을 일으킨 2년 후, 1961년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며 국교가 단절된 지 53년만의 일이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특별 성명을 통해 “어떤 나라를 실패한 국가로 몰아붙이는 정책보다 개혁을 지지하고 독려하는 것이 더 낫다는 교훈을 어렵게 얻었다”며 반세기 이상 유지해 온 쿠바 봉쇄정책의 실패를 시인하였다.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의 말대로 ‘이념의 시멘트’에 갇혀있던 두 나라가 드디어 마주보게 된 것이다. 미국 대사관이 세워질 쿠바의 수도 아바나의 59년 혁명 전 모습을 생생하게 나타낸 애니메이션 ‘치코와 리타’는 재즈 아티스트들의 일생을 쿠바와 미국의 급변하는 관계 속에서 담담하게 그려낸다.

사랑을 jazzy 않아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 전쟁을 치렀던 쿠바와 쿠바의 독립을 저지하면서 그들을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두고자 했던 미국의 특별한 관계는 경제적 유대관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독립 후 사실상 미국의 보호령이었던 쿠바는 17세기 말부터 사탕수수의 대규모 지배와 미국으로의 독점적 수출을 통해 미국에 종속된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양차대전과 경제대공황을 지나면서 설탕 값의 폭락과 미국 경제의 침체로 쿠바 경제 전체가 휘청이게 된다.

이후 마차도와 바티스타 정권을 거치면서 쿠바는 다시금 경제재건에 박차를 가했다. 1930년대부터 미국인들의 휴양지로 각광받던 따뜻한 섬에 미 자본을 바탕으로 한 카바레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면서, 쿠바의 수도 아바나는 미국인들의 흥과 더불어 쿠바 음악인들의 생계의 터로 변모하게 되었다. 하지만 유흥 시설과 함께 폭력과 매춘 역시 아바나를 물들이기 시작하여 40년대에 들어서는 아바나의 매춘 여성 인구가 7만 명에 이르게 된다. 더욱이 풀헨시오 바티스타가 1952년 재집권한 이후로는 미국의 대규모 도박산업을 유치하면서 아바나에만 270여개의 호텔과 300여개의 매춘가게가 들어서는 등 아바나 전체가 거대한 유흥도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 가운데, 치코와 리타가 만났다.

치코는 리타는 처음 만난 날부터 서로에게 이끌렸지만 치코에게는 이미 부인이 있었다. 부인의 존재를 뒤늦게 알게 된 리타는 냉정하게 선을 긋지만 치코는 둘을 이어주는 재즈 음악을 빌미로 리타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 둘은 치코와 치코의 오랜 동료인 라몬의 권유로 함께 출전한 경연대회에서 입상한 후 줄곧 쿠바에서 음악 활동을 함께 하면서 동료 아티스트 이상의 정을 나누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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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코와 리타」의 또 다른 볼거리는 당시 쿠바의 시대상황이 작품 내에서 자세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치코와 리타가 함께 경연대회를 나가게 되는 이 장면에서 길거리에 붙여진 선거 포스터로 인해 당시 선거가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실제 1948년 쿠바 대선에서 카를로스 프리오 소카라스Carlos Prío Socarrás가 당선되어 4년간 쿠바를 이끌었다.

 

암흑 속 재즈 한줄기

1950년대 맘보 등의 쿠바 음악이 세계적으로 유행하면서 재즈 싱어 리타에게도 기회가 찾아 왔다. 여느 때처럼 치코와 합을 맞춰 공연하는 리타를 눈여겨 본 미국의 사업가는 리타에게 미국에서 활동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한다. 자신이 리타를 스타덤에 올려줄 수 있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계약은 리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이미 치코를 사랑하게 된 리타는 치코 없이 떠나지 않겠다며 거절하지만 둘 사이를 오해한 치코는 리타를 먼저 떠나버린다. 이후 뉴욕으로 홀로 떠나게 된 리타는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50년대 미국에서는 유색인종 차별이 여전히 존재했다. 리타가 떠난 후 그리움 끝에 그녀를 뒤따라간 치코에게 인종차별은 높은 벽으로 다가왔다. 치코와 리타 일행보다 앞서 뉴욕에서 음악 활동을 하던 쿠바인 아티스트 차노 포소와 치코의 동료 라몬의 대사에서 그들이 겪었던 차별을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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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은 직원용 출입구를 이용해야 하고 버스는 뒷자리에만 앉을 수 있어. 화장실도 따로야”

치코와 리타는 뉴욕에서 재회했지만, 서로 다른 상처를 갖고 있었던 둘은 쉽사리 예전의 관계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러던 와중 라몬이 단순 노동을 통해 생계를 이어가다 리타의 후원가이자 투자자인 미 사업가의 도움으로 치코의 재즈 피아니스트 활동을 지원하면서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치코는 라몬의 회사에 소속되어 유럽 전역에서 순회 공연을 펼칠만큼 손꼽히는 재즈 피아니스트로 성장한다. 이후 치코와 리타는 몇번의 엇갈림 끝에 아바나에서의 그들보다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유명 재즈 싱어와 피아니스트의 관계는 오래 지나지 않아 미 전역에 알려지고 리타의 투자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지만, 그 둘은 크게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이미 치코와 리타는 한 해의 마지막 날, 라스베가스에서 둘의 새로운 시작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다시, 아바나

줄곧 음악 활동을 함께 하며 뉴욕으로도 같이 떠나 치코를 지원했던 라몬은 치코와 리타가 잠깐의 스캔들에 그치지 않고 결혼을 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해 듣게 된다. 라몬은 리타를 스타의 반열에 올린 미국인 사업가의 압박에, 치코의 양복 주머니에 마약을 넣어 그를 마약밀매혐의로 추방시키는 데 일조한다. 결국 치코는 리타와 한 마디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하고 쿠바로 돌아오게 된다. 그런데 치코가 마주한 아바나는 이전처럼 향락으로 가득찬 도시가 아니었다. 상심에 정처 없이 거리를 걷는 치코 뒤에는 거리로 나와 국기를 흔들고 피델 카스트로를 외치는 쿠바인들이 있었다. 아바나는 사회주의 혁명의 성지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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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카스트로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으면서 쿠바는 사회주의화했다. 쿠바의 혁명 정부는 대내적으로는 국유화와 무상교육, 의료 복지 정책을 실시하며 혁명에 박차를 가했고, 대외적으로는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국가들과 무역 블록을 형성했다. 특히 자본주의 국가의 대표격인 미국을 두고 경쟁 구도를 펼치던 쿠바와 소련은 경제적, 군사적으로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1961년 미국과 쿠바의 외교 관계가 결국 단절되고 쿠바인과 미국인은 서로의 나라에 방문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쿠바의 사회주의 혁명은 적어도 치코를 비롯한 재즈 예술가들의 삶에는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쿠바 당국이 본격적인 사회주의 개혁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재즈를 제국주의적인 ‘적들의 음악’으로 간주하고 공연을 금지한 것이다. 쿠바 당국은 재즈 공연 준비를 하는 치코에게 재즈 음악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공산당에 가입할 것을 요구한다. 실제로 쿠바의 혁명 정부는 음악의 파급력을 일찌감치 알고 이를 중요한 정치적 수단으로 여겼다. 기존의 라틴계 음악인 재즈나 살사를 제국주의 예술로 규정하여 금지하고, 스페인어로 ‘새 노래’라는 뜻의 ‘누에바 트로바(nueva trova)’라는 음악 장르를 지원한다. 물론 쿠바 음악이 발달할 수 있었던 장이었던 카바레도 금지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재즈나 살사는 본토가 아닌 미국에서 발달하게 된다.

생존의 문제

시간이 흘러 늙은 치코는 음악을 그만두고 구두닦이로 일생을 살아 간다. 치코의 시간이 흐른 만큼 쿠바의 상황도 변했다. 영화에서는 갑작스레 정전이 되었다가 다시 전기가 들어오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이웃들은 정전이 별로 놀랍지 않다는 반응을 보인다. 실제로 과거 쿠바에서는 애니메이션 속 장면처럼 전력 수급 부족으로 정전이 일상화되었다. 사회주의를 추구한 다른 나라들도 으레 그렇듯 쿠바의 경제 상황은 좋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나 1989년, 쿠바의 경제의 한 축을 담당했던 소련이 붕괴하면서부터 경제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89년 당시 전체 교역량의 80% 이상을 제2세계에 의존했던 쿠바는 식량, 석유, 기계 부품 등의 부족에 시달렸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쿠바 정부는 시장경제를 일부 도입하게 된다. 쿠바의 사회주의는 더 이상 패기와 열정으로 유지되거나 추진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회주의는 생존의 문제가 되어 사람들의 생활 속으로 스며들어왔다.

경제 상황과 함께 80년대 이후 쿠바 음악의 흐름도 조금 바뀌었다. 혁명 체제를 직간접적으로 옹호하는 누에바 트로바의 자리에는 혁명 이후 쿠바의 사회 문제를 지적하는 노비시마 트로바(novísima trova, 더 새로운 음악)가 들어선다. 앞서 언급한 전력 문제 또한 노비시마 트로바의 소재가 되었다. 1995년 이 계열의 음악가 중 한 사람인 프랭크 델가도가 노래한 Cuando se vaya la luz, mi negra(전기가 나가면, 내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Cuando se vaya la luz, mi negra,

mi abuela va a comenzar

a desatar su mal genio,

y a hablarme mal del gobierno.

Y mi abuelo que es ñángara le va a ripostar

que es culpa del imperialismo, de la OPEP, y del mercado mundial.

 

전기가 나가면, 내 사랑

내 할머니는 또 그 나쁜 성질이 나오기 시작하겠죠.

나한테 정부 욕을 시작할테고

빨갱이’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재빨리 대답하겠죠.

제국주의와 OPEP(석유수출국기구), 시장경제의 잘못이라고.

– Frank Delgado(1995), Cuando se vaya la luz, mi negra

 

한편, 과거 치코의 음악에 주목했던 한 사업가와 아티스트가 재즈 피아니스트로서의 명성을 버린채 살아가던 치코를 찾아와 그에게 음악 활동 재개를 제안한다. 재즈를 금지했던 시대적 상황과 실연의 아픔에 의해 음악을 그만 두었던 치코는 피아노를 보자 다시 음악을 시작할 용기를 얻는다. 그리고 치코는 세계 투어 공연과 더불어 그래미 상을 두 손에 쥐면서 재기에 성공하였다. 그 후 그는 다ㅣ 미국으로 돌아와 리타의 행방을 물으며 그녀를 찾아다니지만, 젊은 시절의 리타도, 라몬도, 뉴욕도 이미 변해버린 후였다. 치코과 미국을 떠난 47년간 변하지 않았던 것은 오직 라스베가스, 그리고 너와 나뿐이었다.

이 영화에는 치코와 리타의 이야기와 더불어 한 도시의 역사가 있었다. 미국의 경제적 식민지였던 향락의 도시, 재즈를 억압했던 사회주의 혁명의 중심지, 그리고 혁명의 기운이 한풀 꺾이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던 8-90년대의 도시의 모습까지. 세심하게 재현된 아바나의 모습은 애니메이션 영화에 현실감을 불어넣어주었다. 그런데 만약, 영화가 그때에서 끝나지 않고 지금 현재 아바나의 모습까지 담는다면 어땠을까? 시대적 배경 묘사에 충실한 이 영화에는 아마 60년 간 대립해 온 양 극단의 체제가 누그러지고 오바마 대통령과 함께 외교정상화를 선언하는 피델 카스트로의 모습이나 이를 알리는 신문 기사가 나왔을 지도 모르겠다.

김은경 (국민대 정치외교)

eunkyongkim31@gmail.com

황지윤 (이화여대 정치외교)

jiyoon1201@naver.com

가사 출처: http://blog.naver.com/yupanqui/30037889862

노예 12년, 그 이후 – 하편

<노예 12년>은 자유인이었지만 부당하게 납치되어 12년 간 노예로 살았던 한 미국인의 이야기다. 영화는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당시 미국 노예제의 참상을 표현한다. 특히 기적적으로 노예농장에서 탈출한 주인공 솔로몬과는 대조적으로, 비참한 상황에 남겨져야 했던 ‘팻시’처럼 ‘구원받지 못한’ 노예들은 그 뒤로도 계속해서 절망적인 삶을 살아야 했다.

-상편 읽기: https://journalprism.wordpress.com/2014/07/30/%EB%85%B8%EC%98%88-12%EB%85%84-%EA%B7%B8-%EC%9D%B4%ED%9B%84-%EC%83%81%ED%8E%B8/

 

남겨진 팻시

제목처럼 솔로몬은 12년의 노예 생활을 끝으로 자유인의 신분을 되찾고 가족들이 있는 사라토가로 귀향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그러나, 영화는 끝나도 현실은 계속된다. 솔로몬이 탈출에 성공했던 당시 흑인 납치 사건은 여전히 흔했고, 솔로몬처럼 자유를 되찾은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태어나서부터 노예로만 산 사람들의 수치는 350만 명을 넘었다. 솔로몬의 극적인 탈출은 한 인물의 기적같은 이야기였을 뿐이다.

솔로몬이 영화 마지막에 앱스의 루이지애나 농장을 떠나는 장면에서, 팻시는 마차를 타려는 솔로몬을 붙잡는다. 하지만 솔로몬은 자유의 희망에 취해 그녀를 뿌리친다. 팻시는 그녀를 정신적으로 지탱하던 솔로몬이 떠나자 결국 몸에 힘을 잃고 쓰러지고 만다. 솔로몬은 노예신분에서 탈출하지만 그의 뒤에는 버려지고 쓰러진 수많은 팻시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끔찍한 노예 생활을 마친 솔로몬이 가족들과 해후할 때는 물밀듯한 감동과 안도가 밀려온다. 하지만 남겨진 팻시를 생각하자면, 이 영화를 단순히 솔로몬 개인의 감동 스토리로 볼 수만은 없다.

영화 마지막에는 실존 인물 솔로몬 놀섭이 자유를 찾은 후의 정황을 설명한다. 놀섭은 자신을 납치해 팔았던 인신매매업자들과 그를 부렸던 모든 노예 주인들을 고소했지만 백인에 불리한 증언을 할 수 없어 모든 재판에서 패소했다. 남북전쟁 후에 남부가 제정한 흑인 단속법(Black Codes) 때문에 흑인들은 백인에 불리한 증언을 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글을 배울 수도 없었으며 직업에도 제한이 많았다. 놀섭은 대학에서 노예제에 대해 강의하고, 도망 노예들이 탈출을 위해 건설한 지하 철도 조직(Underground Railroad) 프로젝트를 돕는 등 일평생을 노예폐지론자로 활동했다. 그리고 12년의 절망적인 노예 생활을 상세하게 서술한 그의 자서전은 베스트셀러에까지 오르며 미국 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그의 자서전은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지만 사회 변혁을 끌어내기에는 불충분했다. 자서전은 발간 후 150년 이상이 지난 후에나 영화화되어 전세계에 개봉되었다. 영화를 제작한 흑인 감독 스티브 맥퀸은 그의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 수상 소감에서 “노예 제도를 견딘 사람들, 그리고 지금도 노예 제도로 고통 받는 2100만명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고 말한다. 맥퀸 감독은 1800년대부터 지금까지 남겨진 ‘팻시’들에게 수상의 영예를 돌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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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리하되 동등하게(Separate But Equal)

솔로몬이 죽은 후, 비로소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 듯했다. 1865년 드디어 미국 전역에서 노예가 ‘공식적’으로는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6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이김으로써 얻어낸 결과다. 전쟁의 종료와 동시에 의회를 통과한 수정헌법 제13조, 제14조, 제15조에 따라 흑인들은 적어도 법적으로는 백인들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게 되었다. 제13조는 노예 제도의 폐지를 선언했고, 제14조는 흑인을 포함한 모든 미국 시민이 적법한 절차에 의하지 않고서는 자유나 재산을 박탈할 수 없는 권리와 법 앞에서 동등한 보호를 받을 권리를 명시했고, 제15조는 인종, 피부색, 이전 신분과 관계 없이 동등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일부 지역에서 자행되던 흑인에 대한 물리적 테러는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흑인들에 대한 차별과 위협은 공공연히 계속되었다. 특히 남부에서는 지방 정부의 주도 하에 백인과 흑인을 분리하기 위해 ‘격리하되 동등하게’ (Separate but equal)라는 모순적인 원칙에 입각한 정책들을 내놓았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기차의 백인칸과 흑인칸을 나누는 루이지애나 주의 차량 분리 법령(Separate Car Act)이다. 1892년 백인칸에 탔다가 체포 당한 호머 플레시는 루이지애나 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차량 구분은 주의 자치권에 해당한다며 소송을 기각했다. 플래시는 주 최고법원, 연방대법원에까지 항소했으나 패소하였다. 8대 1로 루이지애나 주 지방 법원의 손을 들어준 연방대법원은 백인과 흑인은 정치적으로 동등할 뿐 현실적으로 흑인은 사회적으로 열등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고, 흑인이 백인칸에 탈 수 없는 것처럼 백인도 흑인칸에 탈 수 없으므로 엄밀한 차별은 아니라는 판결문을 내렸다. 이 판결은 미국에서 인종 격리가 기차 뿐 아니라 학교, 식당, 극장, 공중 화장실, 식수대까지 거의 모든 일상생활에까지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분리하되 차별하지 않는다는 관습에 법원의 정당성이 가미되었기 때문이다.

공공연한 차별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은 1951년 캔사스에서 흑인과 백인을 분리한 학교를 운영하던 토피카시 교육위원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13명의 학부모들이 승소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쉬운 과정은 아니었다. 13명의 학부모들은 지방법원에서 패소를 맛보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수정헌법 제14조 위반을 주장하며 항소했다. 대법원은 공교육에서 ‘격리하되 동등하게’의 정책은 설 자리가 없고, 격리된 교육은 근본적으로 동등할 수 없다는 만장일치의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미국 전역에서 많은 백인 학부모들은 흑인 학생과 백인 학생의 통합 교육에 반대했다. 백인들은 자녀들을 빼돌려 따로 백인 수업을 듣도록 주선하고 졸업식과 같은 교내행사도 따로 치렀다. 급기야 인종 격리를 지지하던 아칸소 주지사는 1957년, 리틀락 센트럴 고등학교에 등교를 하던 흑인 학생들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린 사건도 있었다. 또 1955년 앨러배마주에서는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가 버스에서 백인 승객을 위해 자리를 비우라는 운전사의 요구를 거절했다가 체포되는 사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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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의 형식적 자유는 노예 해방 후에도 100년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도 판결문의 글자들에 지나지 않았다. 흑인에 대한 억압과 착취, 인종 분리는 극에 달해있었다. 카토, 가브리엘, 터너를 비롯한 무수한 노예 반란들에도 사회는 쉽게 변하지 않았다.

 

가난을 강제한 주거 차별

흑인들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노력하여 부를 축적해도 백인들이 이유 없이 빼앗아 버리는 일은 허다했다. 소송을 제기하면 승소는커녕 공개 처형을 당하지 않는 데에 감사해야 했다. 공개처형은 영화에서 솔로몬이 당할 뻔한 것처럼, 백인들이 수시로 흑인을 납치해 폭행 후 나무 등에 목을 매달아 살해하던 것이었는데, 1960년대까지도 이어졌다. 흑인들은 인권이 보장되지 않던 남부를 떠나 비교적 상황이 나은 북부로 향하기도 했으나 무자비한 폭력만 없었을 뿐 부를 강탈 당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인종 칼럼니스트 타네히시 코츠는 그의 에세이에서 “Ghetto is a social policy.(게토는 사회 정책이다)”라고 말한다. 흑인에 대한 차별을 사회 정책으로서 정부가 뒷받침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2차 세계 대전 참전병사들에게 저렴한 모기지, 낮은 이자의 대출, 자녀 교육비, 실업 수당 등을 제공하는 내용의 군인재정착법(Servicemen Readjustment Act, 1944)은 흑인 병사들에게는 제공되지 않았다.

흑인들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집을 살 수 없었다. 고소득자가 없었으니 집 살 돈이 부족했고, 주택저당대출은 승인되지 않았다. 2차 대전 이후 주택 구매를 권장하기 위해 미국 정부는 주택저당대출에 정부 보증까지 제공하며 대출 정책을 장려했지만, 흑인 거주 지역의 경우에는 정부 보증을 철회하였다. 나중에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자산의 소유와 상속까지 금지당했다. 전부다 미국 최고의 호황기라 불렸던 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일이다. 정부는 경제적 지위나 교육 수준과는 상관 없이 오직 인종을 가지고 차별을 행했다. 이러한 정책들은 장기적 가난의 시작을 의미했다.

 

마이애미에서 퍼거슨 사태까지

지난 8월 미주리주 퍼거슨시에서 비무장 상태였던 흑인 청년이 백인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진 사건이 있었다. 경찰과의 격렬한 몸싸움 후 총을 쐈다는 경찰의 증언과는 달리 흑인 청년은 양손을 머리 위로 들고 있었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이 공개되며 경찰의 과잉 대응과 흑인 차별에 항의하는 시위가 촉발되었다. 시위대는 벽돌과 화염병을 던지고 상점들을 약탈하는 등 심각한 폭력 사태까지 이어졌고 중무장한 경찰들은 최루탄까지 쏘며 시위대를 진압했다. 비상사태 선언에 야간 통행 금지 조치에도 시위는 거세지기만 했으며 급기야 주방위군까지 동원되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휴가 중이던 오바마 대통령도 백악관으로 복귀해 긴급 회의를 열고 진상 조사를 촉구했다. 시위는 10월까지도 계속되었고 현재는 백인 경찰 대런 윌슨의 기소 여부를 결정할 세인트루이스 카운티 대배심을 기다리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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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리주 퍼거슨에서 시민들이 시위하는 모습>

인종 갈등에서 비롯된 폭력 사태는 지금까지도 미국 사회에서 꽤 흔한 일이다. 대부분 백인 경찰의 총격이나 과잉 폭력이 원인이 되어 소요 사태가 발생하는 패턴이다. 1980년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폭동, 1992년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폭동, 2001년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폭동, 2009년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 폭동 등의 대규모 폭동들은 물론, 크고 작은 인종 갈등들 역시 여전히 잦다.

 

노예 안전 지대는 없다

 앞서 수상소감에서 맥퀸 감독이 언급한 ‘고통 받는 2100만명’은 국제 노동 기구(ILO)가 발표한 세계 노예 인구수다. 지금의 노예 개념은 현대판 노예(Modern Slavery)로서 <노예 12년>의 노예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현대판 노예는 노예 제도는 물론, 노예 제도와 흡사한 관행들을 포함한다. 노예란 자유를 박탈 당하고 타인에게 재산으로서 간주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도 세계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인신매매, 성 착취, 노동 착취, 강제 결혼 등에 피해 받는 사람들을 현대판 노예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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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프리재단(WFF)이 발표한 ‘세계 노예 지수(Global Slavery Index)’로, 2013년 전세계적으로 현대판 노예가 162개국에서 3000만명을 넘어선다고 보고했다. 색깔이 진할수록 노예 인구가 많음을 의미한다>

유엔은 1949년 인신매매 및 성매매 착취 등의 노예제 관행을 금지하는 국제협약을 체결한 바 있다. 그러나 개인 소유 노예나, 빚 때문에 육신을 담보로 제공하는(debt bondage) 현대판 노예의 수는 여전히 많다.

지난 6월 가디언지는 6개월에 걸친 취재 끝에 ‘아시아 노예들이 잡은 새우가 밥상에 오르고 있다’는 제목으로 태국 새우사료잡이 어선들의 강제 노동 실태를 보도했다. 가디언지가 밝힌 태국 노예 노동의 실태는 끔찍했다. 캄보디아나 미얀마에서 팔려 태국에 유입된 노동자들은 임금은 커녕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하루 20시간씩 노동을 강제 당했다. 선장들은 그들에게 각성제까지 먹이며 노동을 강요했다. 현대판 노예들은 어선에 몇년씩 갇혀 구타와 고문, 처형을 방불케 하는 살해까지 당했다. 어선에서 탈출한 한 사람은 동료들이 손발이 묶인 채 바다로 버려지는 것을 목격했다고 했다. 2014년에 일어난 일이다. 열악한 환경에서 폭력에 노출된 채 노동을 강요 받고, 탈출을 시도하면 즉결 처형되는 모습. <노예 12년>의 노예들과 다른 점이 없다.

<노예 12년>이 저 멀리 역사의 한 페이지일 뿐이라는 생각에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태국의 경우는 수많은 현대판 노예 사례 중 하나일 뿐이다. 19세기 미국의 노예제도도 물론 경악스럽지만, 21세기에도 여전히 노예들은 세계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 흑인 차별 역시 마찬가지다. 2014년에, 소위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도 인종 차별과 갈등으로 폭력과 소요 사태가 종종 일어난다. 솔로몬 놀섭이 이야기했던 노예제와 노동 착취, 흑인 차별은 단순히 지난날의 일이 아니다. 솔로몬의 노예 12년과 1865년 노예제 철폐 당시, 그리고 오늘날까지, 당시의 폭력성은 아직 대가 끊기지 않았다.

 

김정연(이화여대 국제학부)
kimjeongyon24@gmail.com

 

평화를 꿈꾸는 새로운 방식 :Muse의 ‘United States of Eur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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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부터 시작된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 충돌로 가자에서만 2천 명 가까이 사망했다. 중국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는 7월 한달 간 2천 명이 학살됐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민간 항공기가 격추되면서 300명 가까이 사망했고, 이라크에서는 내전으로 두 달 동안 4천 명 이상 죽었다. 2014년 전반기,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 위에서 수천의 목숨이 국가간·민족간 충돌로 사라졌다. 평화는 요원하다. 이라크와 우크라이나 내전은 현재진행형이고, 중국 정부는 위구르 독립에 강경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으며,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휴전은 위태롭다.

 

독특한 멜로디, 독특한 이벤트

2009년 7월, 영국의 한 유명 락밴드가 앨범 출시를 기념하며 ‘프로젝트 유라시아’라는 거창한 이름의 이벤트를 개최했다. 이벤트 웹페이지인 ‘Ununited States of Eurasia’에는 검게 칠해진 유라시아 대륙 사진 한 장과 함께 ‘유라시아를 통합’하라는 오묘한 지령이 올라왔다. 이벤트 내용은 유라시아 대륙 내 6개 국가에 배치된 ‘스테이션’과 거기에 배치된 ‘요원’들을 찾아 암호를 받아내는, 일종의 보물찾기였다. 한 팬이 첫 번째 장소인 파리에서 요원을 찾아냈고, 암호가 담긴 USB를 받아 이벤트 페이지에 입력하자, 다음 요원의 위치와 함께 새 앨범의 수록곡 ‘United States of Eurasia’의 1/6이 공개되었다. 여섯 요원들을 성공적으로 찾아낼 경우, 앨범이 발매되기 전에 음원 한 곡이 인터넷에 무료로 공개되는 ‘보상’이 주어질 터였다. 홍콩을 마지막으로, 팬들은 6일만에 모든 요원들을 찾아냈다.


↑’United States of Eurasia’ Youtube 링크

이 이벤트를 주최한 3인조 락밴드 뮤즈(Muse)는 다섯 번째 앨범을 통해 ‘United States of Eurasia(유라시아합중국)’라는 개성 있는 곡을 발표했다. 이 곡에는 발라드와 락, 오페라의 요소가 뒤섞여있어, 앨범 발매 당시 한 평론지는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와 이 곡을 비교하기도 했다. 곡은 메인 보컬 매튜 벨라미의 잔잔한 발라드로 시작해 이윽고 드럼과 베이스, 기타가 추가되며, 간주 부분에는 ‘동양적인’ 느낌의 피아노 가락이 삽입된다. 노래의 클라이막스에서 보컬이 정열적으로 ‘유라시아’를 몇 차례 외친 후, 곡의 아웃트로인 ‘+Collateral Damage’ 부분으로 넘어간다. ‘콜래트럴 대미지’에서는 쇼팽의 녹턴이 중심 가락을 이룬 채 바이올린 반주와 보컬의 허밍,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전투기 소리 등이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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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합중국’으로 하나되는 유라시아

‘유라시아 합중국’이라는 곡의 제목에는, 유라시아 대륙 위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갈등이 해결되고 총성과 포화가 멎어, 거대한 대륙 전체가 마치 지금의 미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처럼 하나의 연합체로 화한다는 상상이 담겨있다. 가사에 따르면, 지금 유라시아 대륙 위에서 벌어지는 전쟁들은 “결코 끝날 수 없다”. 이 전쟁에 대해 “우리는 더 이상 누구를 탓해야 하는지 알 수도 없고, 신경쓰지도 않는다.” “모두들 전쟁이 계속될 거라 약속할 뿐.” “우리는 반드시 시키는 대로 할 필요가 있을까?” “하나가 될 수도 있는 공동체를 굳이 분열시키면서까지.”

아웃트로의 제목인 ‘콜래트럴 대미지(부수적 피해)’는 보통 전쟁에서 민간인·도시 등 전쟁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제3자의 피해를 가리키지만, 동시에 전쟁의 참상을 가장 압축적이고 무미건조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쇼팽의 선율이 시작될 때 볼륨을 키우면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부드러운 피아노 가락이 일상의 소음과 어울리며 듣는 이로 하여금 평화로운 나날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안정된 분위기는 곧 전투기가 하늘을 가르는 소리와 조종사들이 교전하는 소리에 파묻히게 된다. 폭발음이나 비명, 직접적인 가사 전달 없이도 일상의 평온함과 전운의 긴장감이 효과적으로, 그리고 세련되게 대비되면서, 전투기의 이륙 소리와 함께 5분 40초가 넘는 긴 곡이 끝나게 된다.

 

이상주의자와 현실주의자

뮤즈는 한 평론지와의 인터뷰에서 이 곡이 브레진스키의 <거대한 체스판>과 조지 오웰의 <1984>에 영향을 받아 쓰였다고 밝혔다. ‘프로젝트 유라시아’의 첫 미션이 발표됐을 때에는 <거대한 체스판>의 ISBN(국제표준도서번호)이 힌트 페이지에 마치 군사 암호처럼 쓰여있기도 했다.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조지 오웰로부터는 아마 세계가 앞으로 세 개의 거대한 합중국에 의해 분할될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차용한 것 같다. 다만 뮤즈는 그러한 통합이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극도로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라시아 내 평화 유지에 기여할 것이라고 봄으로써 선배 예술가의 상상력을 살짝 비틀었다.

브레진스키와 관련해서 뮤즈는 이 외교 노장의 아이디어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던 듯하다. 브레진스키는 지미 카터 시절부터 백악관 외교·안보 분야의 ‘큰 손’이었다. 그는 미국 주도의 단극체제가 세계 평화에 기여할 것이라는 전제 하에 미국의 세계적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대외정책을 구상한 인물이었다. <거대한 체스판>은 그가 후학을 위해 남긴 다소 ‘노골적인’ 국제 전략 지침서다. ‘United States of Eurasia’는 아마도, 유라시아 각지에서 미국의 패권적 영향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이 책의 중심 명제에 대한 반동으로서 처음 구상된 것 같다. 미국 주도의 단극질서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브레진스키의 ‘솔직한’ 논조는 충분히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뮤즈가 제시한 유라시아 합중국은 미국 중심의 기존 질서를 대체할 매우 이상주의적인 정치 모델이었다.

 

The Resistance

6개국 요원이 모두 발견되어 ‘프로젝트 유라시아’가 종료될 무렵, 이벤트 페이지에 새로운 지령이 떨어졌다. 유라시아는 ‘성공적으로 통합’되었고 이로써 ‘유라시아 합중국이 탄생’했지만, 아직 국가로서 정식 승인을 받지 못했으며, 따라서 기존의 월드파워인 미국에게 ‘승인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승인을 받기 위해서는 미국 내 숨어있는 요원에게 또 다른 코드를 받아 입력해야 했다. 그러나 이전 단계들과는 다르게 이번 미션은 시간제한이 있었다. 시간 내에 미션을 달성할 경우 ‘United States of Eurasia’ 전곡과 아웃트로 ‘Collateral Damage’가 모두 공개될 것이었지만, 만약 기한을 맞추지 못할 경우(즉, 국가로서 승인 받지 못할 경우), ‘저항군(The Resistance)을 동원한다’는 경고가 함께 표시되었다. 여기서 ‘저항군의 동원’은 같은 앨범의 다른 곡 ‘The Resistance’가 대신 공개됨을 의미하는 말장난이었다.

‘승인’ 이벤트는, 유라시아의 통합과 연대에 있어 미국은 ‘타자’일 뿐임을 암시한다. 또한 여기에는 유라시아 위에서 벌어지는 분쟁들에 대한 미국의 직간접적 책임과 통제 능력을 비판적으로 재고해봐야 한다는 생각 역시 깔려있다. 애초에 곡 제목을 ‘United States of the Earth’처럼 전세계를 아우르지 않고 유라시아에 한정한 것을 통해, 이 상상의 공동체가 갖는 내적 포용성과 외적 배타성을 유추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 됐든 2009년 7월 21일, 한 팬이 뉴욕에서 요원을 찾아냄으로써 ‘United States of Eurasia +Collateral Damage’ 전곡이 온라인에 무료로 공개되었고, 프로젝트 유라시아는 성공적으로 종료되었다.

 

Muse

 

결론은 평화

뮤즈와 브레진스키는 상반된 두 시각으로 국제 정세를 바라봤다. 그러나 국제 정세를 이야기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해서 그 지향점까지 다를까. 브레진스키는 지난달 22일, <포린폴리시>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은 더 이상 혼자서 세계 전반을 책임지려 하지 말아야 하고, 그럴 역량도 없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미국이 취할 수 있는 최선책은 중국을 파트너로 삼아 국제 정세에 선별적으로 관여하는 것이며, 아시아에서 중국의 우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그는 최근 가자 지구를 공습한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 문제에 관여하고 있는 러시아를 강도 높게 비난했으며, 일본의 역사 문제와 센카쿠열도(댜오위다오) 문제에 있어 미국이 일본을 지지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오랫동안 혼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동 지역에 대해서는, 미국이 ‘이란 포용’과 ‘이란·터키·이스라엘과의 연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2개 국가 체제’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과정이나 방식이야 어찌됐건, 평화를 바라보는 모순된 두 시각의 끝은 서로 닿아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김만희(고려대 국문)

manhee87011@naver.com

노예 12년, 그 이후 – 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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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인물 솔로몬 놀섭의 <노예 12년>

 

영화 <노예 12년>은 실존 인물 솔로몬 놀섭이 집필한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솔로몬은 미국 북부 뉴욕주(州)에 사는 흑인으로, 자유인 신분이었지만 납치를 당해 미국 남부에서 부당하게 12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노예 생활 12년은 미국 노예 전체의 삶을 완전히 대변할 수 없다. 솔로몬은 12년 후 자유를 되찾지만, 평생을 노예로 살며 온갖 학대를 당한 노예들이 더 많았다. 노예 해방 후에도 흑인들은 백인에게 재산으로서 예속되지만 않았을 뿐 숱하게 인권침해를 당했다. 노예 해방 이후에도 흑인들은 12년보다 훨씬 긴 세월을 노예로 살았다.

 

자유의 나라 미국
1700년대 초반부터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흑인 노예들이 미국으로 대량 유입되기 시작했다.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함이었다. 미합중국이 생겨나던 때에도 노예 문제는 건국 인사들 간에 논란이 많았다. 하지만 남부에서 대농장을 경영하던 인사들의 영향력 때문에 노예제는 존속되었다. 초대 대통령 워싱턴 이후 링컨이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전까지 약 72년 중 50년은 노예를 소유하고 있는 정치인이 대통령으로 재임하였다. 모든 사람의 평등과 자유를 추구하는 독립 선언으로 수립된 미합중국이었지만, 노예는 자유의 주체로 간주되지 않았다.

목화 농장에 사용할 노동력이 필수였던 남부와 달리 비교적 농업의 비중이 낮았던 북부에서는 빠르게 노예제도가 사라졌다. 이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자 미 북부와 남부는 일시적으로 북위 36도 30분을 기준으로 노예제를 폐지한 북쪽의 ‘자유주(州)’, 그리고 노예제를 존속한 남쪽의 ‘노예주(州)’로 나누는 내용의 미주리 협정을 1820년 체결했다. 1808년 노예 수입이 금지되고, 미 남부에 노예 인구 부족 현상이 일어나자, 미주리 협정에도 불구하고 미국 전역에서는 자유주 내 흑인을 납치해 노예주 지역으로 팔아 넘기는 흑인 납치 사건이 만연하게 되었다.

<노예 12년>은 자유주와 노예주가 나뉘어 있던 시절 흔했던 흑인 납치 사건을 다룬 영화이다. 흑인 솔로몬 놀섭은 자유인으로서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살던 유능한 바이올리니스트였다. 백인 신사 몇 명에게 공연 제의를 받고 함께 워싱턴으로 떠난 솔로몬은 사실은 인신매매단이었던 그들의 속임수에 넘어가 남부에 노예로 팔리게 된다. 솔로몬은 계속해서 자신이 자유의 몸임을 주장하지만 그럴수록 가혹한 채찍질만 돌아올 뿐이었다. 솔로몬은 ‘플랫’이라는 새 이름을 부여받아 조지아에서 도망친 노예로 12년 동안 두 명의 주인을 섬기며 노예 생활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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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이 처음 만나는 주인은 포드이다. 그는 솔로몬에게 바이올린을 선물하는 등 인간적인 면모를 보인다. 하지만 솔로몬의 본래 신분이 노예가 아님을 알게 된 후에도 포드는 그의 해방을 위해 노력하진 않는다. 오히려 솔로몬이 문제를 일으킬까 우려한 포드는 그를 루이지애나주로 팔아버린다. 솔로몬은 여기서 두 번째로 앱스라는 주인을 만나게 된다. 악덕 노예주 앱스는 루이지애나주의 목화 농장 지주로, 노예들을 마구잡이로 채찍질하는 등 잔혹하게 학대한다. 앱스는 노예 중 한 명인 ‘팻시’를 마음에 두고 그녀에게 집착하는데, 그는 팻시를 성노예로까지 부리지만 그녀에 대한 사랑을 인정하진 못하는 인물이다. 팻시를 향한 앱스의 애정에 질투를 느낀 앱스 부인은 팻시에게 가혹하게 군다. 이유 없이 얼굴에 술병을 맞고, 손톱으로 긁히고, 씻지 못하도록 비누조차 허락 받지 못한 팻시는 노예로의 삶을 견디지 못하고 솔로몬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까지 부탁하지만, 솔로몬은 단호하게 거절한다. 둘은 서로에 의지하며 힘겨운 삶을 산다. <노예 12년>에서 그리는 노예들은 주체적으로 살아갈 의지는커녕 마음대로 생을 마감할 자유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이 영화는 ‘자유의 나라’ 미국의 역사에 이토록 잔혹한 이야기가 존재했다는 것을 덤덤하게 날 것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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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n Nigger Run’과 ‘Roll Jordan Roll’

빠른 화면 전환이나 과장으로 시청자를 자극하는 헐리우드 영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영화의 만듦새가 조금은 지루할 수도 있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노예 12년>은 갈등이 지속적으로 고조되다가 대단원을 이루는 구성이 아닐뿐더러 인물의 얼굴이나 한 풍경을 오랫동안 잡는 롱테이크 기법을 자주 사용하는 느린 영화이다. 하지만 관객들은 이 영화가 충분히 충격적이라고 말한다. 영화 보기가 불편해 상영관에서 나왔다는 사람이 있었다는 정도다. 이는 영화가 노예들의 참담했던 삶을 여과 없이 그리고 효과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에서는 학대 당하는 노예를 시각적으로도 여과 없이 표현하지만 청각도 십분 이용한다. 작중 등장하는 ‘Run Nigger Run’과 ‘Roll Jordan Roll’라는 노래는 삽입된 배경음악이 아니라 씬 내에서 등장인물들이 직접 부른 것이다. ‘Run Nigger Run’과 ‘Roll Jordan Roll’ 두 곡 모두 1867년에 발간된 Slave Songs of the United States이라는 선집에 실렸는데, 이 선집은 최초로 흑인 민요를 대중화한 것이라고 한다. ‘Roll Jordan Roll’는 이 선집의 첫 번째 곡으로, 지금까지도 가스펠 음악의 표본으로 전해내려온다.

영화에서 ‘Run Nigger Run’은 솔로몬이 포드의 노예일 때 노예 관리인 티가 부르는노래다. 이 곡은 노예들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내용인데 솔로몬이 처음 노예로 팔려가서 들은 노래인 만큼 솔로몬이 자신이 노예로서 고된 노동을 시작해야 함을 자각하게 된다. 가사에는 ‘pattyroller’들이 도망치는 너희들 잡을 거라며 위협하는 내용이 있는데(Run nigger run well the pattyroller will get you / Run nigger run well you better get away) 여기서 등장하는 ‘pattyroller’는 도망 노예들을 잡아들이는 정부에 고용된 민병대이다. 빠른 템포의 이 곡은 노예들을 놀리는 듯, 위협을 즐기는 듯한 티빗이 노래가 진행될수록 본인의 노래에 심취하는 것이 재미있다.

재즈, 래그타임, 리듬 앤 블루스, 소울 등 흑인이 음악의 역사에 끼친 영향은 크다. ‘Roll Jordan Roll’은 흑인 영가(Negro Spiritual) 전통의 토대가 되는 텍스트이다. <노예 12년>의 곡은 영화를 위해 새로이 작곡한 것이며, Roll Jordan Roll의 버전은 다양하다. 영화에서 ‘Roll Jordan Roll’이 나오는 부분은 한 편의 뮤직비디오를 보는 것과 같이 흡입력 있고 강렬하다. 이 곡은 앱스의 목화 농장에서 땡볕 아래 일하던 노예가 목화를 따다 쓰러져 죽고 마는데, 노예들이 그를 묻고 부르는 노래다. 노래를 시작하는 노인의 깊게 패인 주름과 처음엔 노래를 따라 부르지 않다가 점점 온 마음을 다해 노랠 따라 부르기 시작하는 솔로몬의 눈빛이 노래의 가락에 더해져 관객의 마음을 후빈다.

 

생존하는 것, 사는 것
솔로몬이 납치되어 노예주로 이송될 때 하는 말이 있다. “I don’t want to survive. I want to live.” 살아남으려면 무조건 순응해야 한다고 조언하는 사람에게 솔로몬은, 단순히 생존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살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이다. 솔로몬은 노예로 생활하며 계속해서 갖가지 방법으로 탈출을 꿈꾼다. 심부름을 가다가 숲 속으로 도망쳐 버릴 궁리도 하고 몰래 종이를 훔치고 라즈베리즙으로 잉크를 만들어 자신의 사정을 적은 편지를 써 보내려고도 한다. 비록 이러한 노력들은 수포로 돌아가고 이 때문에 위기에도 빠지지만 솔로몬은 탈출의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결국 그는 캐나다 목수 배스의 도움으로 진실을 규명하는 편지를 자신의 친구들에게 보내게 되어 자유를 되찾게 된다.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솔로몬의 노력이 영화의 끝에서야 결실을 맺는 것이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솔로몬이 공개처형을 당하려다 겨우 살아남는 장면이다. 평소에 솔로몬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무능력한 노예 관리인 티빗이 솔로몬에게 부당하게 굴자 솔로몬은 그와 싸움에 말려들게 되는데, 솔로몬에게 폭행을 당한 티빗은 다른 백인들까지 데려와 솔로몬을 묶어 나무에 걸고 처형하려고 한다. 린칭(lynching)이라고 불렸던 공개처형은 당시 노예들에게 흔히 가해졌던 벌이다. 주인 포드의 허락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개처형은 중단되지만, 솔로몬은 발 끝만 간신히 땅에 닿은 채로 포드가 올 때까지 나무에 걸려 있게 된다. 솔로몬의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고자, 스크린은 푹푹 꺼지는 진흙 바닥을 디디고 또 디디는 솔로몬의 발을 오랫동안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이 장면은 단순히 까치발로 버티는 의지의 발만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다. 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은 당장이라도 죽을 위기에 처한 솔로몬이 존재하지도 않는 듯 무감각하게 반응하는 다른 노예들이다. 배경의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잔디밭에서 뛰어 놀고 성인 노예들은 자신의 역할을 조용히 수행해나간다. 노예의 인권이 얼마나 당연하게 짓밟혔고 노예들은 얼마나 이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 장면은 살고자 노력하지만 생존하는 것도 버겁고 어려운 솔로몬의 삶을 통해 당시 노예들의 참담한 현실을 말하고자 한다.

영화의 주인공은 솔로몬이지만 그만큼이나 주목 받는 인물이 팻시다. 팻시는 앱스의 노예들 중 가장 심한 학대를 받았다. 그녀는 미국 노예제도의 참혹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하지만 노예 해방 후에도 수많은 팻시들은 학대와 차별을 이겨내야만 했다. 국가 조차 그들에 대한 차별을 ‘분리만 할 뿐 동등’하다고 주장했고 차별을 정당화했다. 그들은 언제쯤 진정한 해방을 누릴 수 있었을까.

 

(하편에서 계속됩니다)

 

2014. 7. 30

김정연(이화여대 국제학)

jylove9926@naver.com

미중관계, Duck 때문에 덕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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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도 식후경
닉슨 대통령 방중을 계획하기 위한 회담 마지막 날, 인민대회당은 미국과 중국 양국 간의 의견 차이로 정적만이 감돌았다. 정적을 깨고 주은래 중국 총리는 미국 대표인 헨리 키신저에게 오찬을 한 뒤 계속 이어나가는 것을 제안하였다. 이날 식사에는 북경을 대표하는 북경오리를 비롯해 12가지 요리가 나왔다. 주은래 총리는 손수 밀전병에 오리고기를 키신저에게 싸주며 북경오리 먹는 법과 유래를 알려주었다. 오찬 이후 신기하게도 교착상태에 빠진 마지막 의제가 양측의 타협으로 해결되었다.

마지막 회담 마지막 의제에서 예상치 못하게 문제가 생겼다. 닉슨 대통령의 방중을 어떻게 발표할지를 놓고 양측이 팽팽한 기싸움을 하였다. 미국 측은 모택동 주석이 닉슨 대통령을 초청했으며 닉슨 대통령도 이를 수락했다는 내용으로 발표를 제안했다. 양측은 각각 초안을 교환하였으나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서로 어느 쪽이 더 관계를 개선하고 싶어 하는지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북경오리가 메인 요리였던 오찬 이후 양측 모두 타협해 “중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닉슨 대통령의 공공연한 열망을 익히 알고 있어 닉슨 대통령을 초청했고, 대통령도 이를 ‘기꺼운 마음으로’ 수락했다.”라는 표현에 동의하였다. 이로써 역사적인 닉슨 대통령의 방중이 성사되었다.

 

작전명 폴로1
1971년 7월 1일, 닉슨 미국 대통령의 외교 안보 보좌관이었던 헨리 키신저는 호찌민, 방콕, 뉴델리, 그리고 라왈핀디를 거치는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 순방길에 올랐다. 순방 중, 7월 8일 키신저는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파키스탄 대통령과의 만찬은 취소되었고, 히말라야 산자락에 위치한 산장에 머무르게 되었다. 다음날 새벽 키신저와 일행은 공항으로 이동해 파키스탄 대통령 전용기에 몸을 실었다. 이 비행기의 목적지는 당시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않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 ‘베이징’이었다. 키신저의 이번 여정은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 순방이 아닌,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 및 관계 개선 타진을 목표로 한 비밀작전이었다. 복통은 순방을 취재하기 위해 따라온 기자들을 속이기 위한 방법으로, 보안상의 유지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작전이었다.

당시 중국과 소련 관계는 국경에서 군사적 교전이 발생하는 등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그리하여 중국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전략적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적(소련)의 적인 미국을 이용하는 것은 중국의 오랜 외교 전략 중 하나인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로 오랑캐를 다스림)에도 부합하는 선택이었다. 미국의 경우, 베트남전으로 상처 입은 국제적 리더십을 재정비하는 기회가 필요했다. 중국과의 수교를 이용해, 미국은 전쟁 와중에도 장기적인 평화 설계를 위해 노력한다는 점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미국과 중국 양측 모두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였다. 당시 중국과 미국 간 연락 채널이었던, 폴란드 바르샤바 주재 미국 대사관과 중국 대사관 사이에 오가던 회담은 급물살을 탔다. 결국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였던 국가인 루마니아와 파키스탄이 다리가 되어 중국 방문을 준비하였다. 마침내 폴로 작전을 통해 키신저는 중국에 입국해 주은래 총리를 만나 닉슨 대통령의 방문을 논의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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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오리를 먹어보지 못하면 평생의 여한이 된다(不吃烤鸭真遗憾)”
북경오리에 관련된 말 중 “만리장성에 오르지 않으면 대장부가 될 수 없고, 북경오리를 먹어보지 못하면 평생의 여한이 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북경오리는 북경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자리매김하였다. 흔히들 북경오리를 생각하면 북경에서 시작된 요리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북경오리는 중국 남경에서 처음 시작된 요리이다. 14세기 초 중국의 원나라가 제위 계승을 두고 쇠락을 거듭하자, 주원장이 남경을 점령하고 1368년 명나라를 건국했다. 당시 남경에서 유행하던 오리요리 맛을 본 주원장이 오리구이 맛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그 후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오리요리도 북경으로 올라와 황제가 즐겨먹는 궁중음식이 되었다. 이후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왕조가 바뀌었지만 북경오리는 여전히 사랑받는 음식이었다. 청의 건륭제는 하루걸러 북경오리를 먹었을 정도로 사랑이 각별했다. 청 말기 최고 권력자였던 서태후 또한 무척 북경오리를 좋아했으며 바삭바삭한 껍질만 먹고 고기는 아랫사람들이 먹도록 하였다고 한다.

북경오리는 생후 2개월이 지나면 운동을 시키지 않고 강제로 사료를 먹여 특별하게 키운 오리를 사용한다. 북경오리의 맛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껍질’이다. 껍질 맛을 좋게 하기 위해 목 부분에 작은 구멍을 내고 오리 항문을 막은 후 공기를 넣을 수 있는 대롱을 꽂고 바람을 불어 넣는다. 피부와 피하지방이 분리되어 오리 껍질에 주름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마지막으로 내장을 빼내고 맥아당을 발라 매달아 놓고 장작에 구우면 완성된다. 주로 껍질과 고기를 밀전병에 오이채나 파와 함께 싸 소스를 찍어 먹는다.

 

중국 현대사의 산증인
1864년 개업한 ‘전취덕’이라는 북경오리 음식점이 있다. 닉슨 대통령이 방중 했을 당시 이 ‘전취덕’에서 북경오리를 먹었다고 한다. 이후 북경오리는 북경을 방문하는 유명인사들이 놓치지 않고 찾는 음식이 되었다. 부시 대통령, 클린턴 대통령, 헬무트 콜 총리, 반기문 사무총장 등 많은 유명인사들의 사진이 ‘전취덕’ 가게 벽면에 자리하고 있다. 중국이 세계 속으로 나오는데 있어 키신저의 복통과 더불어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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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에 갈 일이 있다면 평생 여한이 되지 않게 ‘베이징 카오야’ 이 한마디는 잊지 말자. 부시 대통령 부자도, 닉슨 대통령도,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도,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모두 북경오리 앞에서는 매료되었다. 입에서 사르르 녹는 오리 껍질 맛을 느끼며 주은래 총리와 회담하는 키신저가 되어보자.

김준석(경희대 언론정보)
rejune1112@naver.com

“2펜스면 취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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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면 나와요, 우리의 사랑이 뜨겁던 우리의 사랑을 키웠던 그 집에서 먼저 한잔 했어요” 지아의 ‘술 한잔 해요’의 노래가사다. 이외에도 소주와 관련된 이별노래가 참 많다. 노랫말처럼 연인과 헤어진 후 우리의 곁에는 늘 소주가 함께한다. 소주는 동료들과 일을 마친 후 함께하는 자리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최근 치맥의 인기로 맥주를 많이 마시기는 하지만 그래도 소주의 인기는 여전하다. 값싼 술에 기대 현실의 괴로움을 잊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화는 아니다. 과거 영국에서도 소주에 비견될 만큼 대중적인 술이 있었으니, 바로 ‘진(gin)’이다.

 

불행의 서막, 진 장려 정책

‘진은 네덜란드 사람들이 만들었고, 영국 사람이 발전시켰으며, 미국 사람이 영광을 주었다’는 말처럼 진은 네덜란드에서 시작된다. 1650년경 실비우스 박사(Franciscus Sylvius)가 신장 장애 치료제로 쓰기 위해 이뇨효과가 있는 주니퍼 열매 등을 첨가해서 진을 만들었다. 약용으로 만들었던 진은 30년 전쟁 이후 군인들이 들여오면서 영국에 소개된다. 이후 진은 네덜란드 태생 윌리엄 3세가 명예혁명 이후 왕위에 오르면서 유명해진다. 그는 영국 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하고 증류산업을 장려했다. 진의 질에 대한 규제가 없고 증류 자격증은 지원서만 있으면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누구나 진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진 장려 정책이 불러올 재앙을 모르고 있었다.

 

1페니면 마실 수 있고 2펜스면 만취할 수 있어요!

국가에서 진의 생산을 장려하여 진의 생산량은 나날이 증가했다. 1750년에는 영국 세인트 자일스 지역의 가구 중 4분의 1이 진을 파는 가게였을 정도로 당시 영국은 진의, 진에 의한, 진을 위한 사회였다. 국가 정책뿐만 아니라 진은 빈민가 사람들에게 적은 비용으로 ‘황제가 되는 기분’을 느끼게 해줬기 때문에 인기가 높았다. ‘1페니면 취할 수 있고, 2펜스면 만취할 수 있다.’ 이 문구는 그만큼 진의 가격이 저렴하고 도수가 높다는 것을 한 문장으로 잘 보여준다. 영국 빈민가 사람들이 진을 마시면서 삶의 스트레스를 푸는 것에서 그쳤으면 좋았겠지만 앞서 말한 진의 특성 때문에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가 발생했다.

18세기 진 숍이 생기고 나서 처음으로 여자들이 남자들과 나란히 앉아서 술을 마시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 때문에 여성들이 가정을 돌보지 않고 매춘을 하게 됐다고 생각했고 진을 ‘엄마의 파멸’, ‘바람난 아내를 둔 남자의 위안’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런 현상을 잘 묘사한 것이 윌리엄 호가스의 그림 ‘진 거리’이다. 이 그림에는 진에 미쳐서 피폐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림의 중앙에는 자신의 아이가 떨어지는 것도 모르는 여성이 등장하는데 당시 진에 취한 여성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실제로 주디스 뒤푸르라는 여성은 자신의 아이를 교살하고 아이의 옷을 팔아서 술을 마셨다고 한다.

처음에는 국가 경제를 위해서 진 생산을 장려했지만 사회적 문제가 심각해지자 진 법률을 시행했다. 진의 생산을 줄이기 위해서 높은 관세를 매기고 판매 가능한 주류의 양을 제한했다. 진을 생산하기 위한 조건을 까다롭게 해서 아무나 술을 제조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발이 거세서 법률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폐지됐다. 1751년에 다시 진 규제법을 실시한 후 진의 소비가 줄어들게 됐지만 사실 이것은 영국에 심각한 가뭄 때문에 곡물 가격이 상승하고 빈곤층의 임금이 하락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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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법 속에서 피어난 bathtub gin

진은 미국에서금주법 때문에 인기를 얻게 된다. 금주법은 1차 세계 대전 중 곡물을 아끼고 맥주를 주로 제조하던 독일인에 대한 반감 때문에 시행하게 됐다. 좋은 취지로 만든 법이었지만 법안을 만든 의원들이 몰래 술을 마실 정도로 처음부터 실현이 불가능한 법이었다. 민간에서는 금주법 시행 기간 동안 밀조와 밀매가 성행했다. 그 중에서도 진의 인기가 대단했는데 이는 다른 술에 비해서 제조과정이 간단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공업용 알코올에서 독성 물질을 뺀 뒤 팔았는데 이 주조 작업을 욕조에서 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진을 ‘욕조 진’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만들어진 술은 값이 싸서 주로 서민층에서 소비됐다.

좋지 않은 환경에서 공업용 알코올로 만든 진은 맛이 없어서 다른 음료와 섞어 마셔야 했다. 이것이 진을 베이스로 하는 칵테일이 많이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1933년에 금주법이 폐지되면서 진의 밀매도 끝이 나지만 1960년대에 보드카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미국에서 인기가 많았고 아직까지도 유명한 술로 남아있다.

 

신장 장애 치료제와 말라리아 치료제가 만나면? 진토닉!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밀회’에서 밀월여행을 떠난 혜원(김희애)이 자신의 옛날 이야기를 선재(유아인)에게 들려주다가 떠올리는 노래가 있다. 빌리 조엘의 ‘피아노 맨(Piano Man)’이라는 곡이다. 혜원이 선재에게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처럼 이 노래는 한 노인이 말하는 삶의 고독에 대한 내용이다. “내 옆에 앉은 노인이 진토닉과 사랑을 나누고 있어요.” 가사에서 노인이 진토닉을 마시면서 등장한다. 진토닉은 이외에도 여러 음악, 영화, 책 등에 등장하는 유명한 칵테일이다. 한국음료문화연구회가 네이버 카페<칵테일과 꿈>과 실시한 <한국인이 가장 많이 마신 칵테일 베스트 10>에서 진토닉이 2010년부터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한국에서도 인기가 대단한 칵테일이다.

오랜 역사를 가진 진과 토닉이 만나면 진토닉(Gin & Tonic)이 되는데 이 사연도 진과 마찬가지로 영국과 관련이 있다. 페루에서는 키나나무 껍질로 말라리아를 치료했다. 이 나무껍질이 유럽에 소개되고 후에 토닉워터로 발전하게 된다. 이 나무껍질을 친촌(Chinchón)지역의 백작부인 혹은 예수회 선교사가 유럽에 가져왔다는 설이 있기 때문에 유럽에서 ‘백작부인의 가루’, ‘예수회 사람의 가루’라고 불린다.

인도가 영국령일 당시 병사들이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해 영국 장교는 병사들에게 키니나무 껍질에서 추출한 키니네를 마시게 했다. 하지만 키니네의 맛이 좋지 않았고, 쓴 맛을 중화시키기 위해서 설탕, 라임, 진을 넣어서 마셨다. 이들이 생존을 위해 마셨던 것이 진토닉의 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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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칵테일의 대명사 진토닉을 만들어보자!

1. 드라이 진, 토닉워터, 라임이나 레몬 한 슬라이스를 준비한다.

2. 약 230ml 한 잔을 기준으로 45ml의 드라이 진을 넣고 적당량의 얼음을 넣는다.

3. 잔의 나머지를 모두 토닉워터로 채운다.

4. 레몬이나 라임으로 장식을 하면 좀 더 보기 좋고 향기로운 진토닉이 완성된다.

 

이정배 (이화여대 정치외교)

hijungbae@gmail.com

 

“이봐, 난 베트콩들과 아무 문제가 없어” (“Man, I ain′t got no quarrel with them Vietc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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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례의 타이틀과 프로 통산 56승(KO승 37회) 5패. 무함마드 알리는 헤비급 역대 최강자 논쟁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복싱의 전설이다. 하지만 그가 지금까지도 많은 추앙을 받고 있는 이유는 단순히 그의 실력 때문만은 아니다.

무함마드 알리의 본명은 캐시어스 클래이(Cassius Marcellus Clay, Jr)다. 아마추어 시절 그는 캐시어스 클래이로서 100승 5패를 기록하며 아마추어 미국 타이틀, 로마 올림픽 금메달 등을 거머쥐며 아마추어 복싱을 석권했다. 이후 프로 무대에서 무패 행진으로 챔피언의 자리까지 차지했다. 챔피언 벨트를 손에 넣은 후 그는 자신이 미국 내 흑인 이슬람 단체인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회원임을 밝히고 무함마드 알리라는 이름으로 개명한다. 그는 캐시어스 클래이라는 이름이 “노예의 이름”이라며 이제 자유인의 이름을 갖겠다고 말했다.

 

베트남전, 그리고 링 밖의 싸움

두 차례의 타이틀 방어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그의 복싱 인생, 나아가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찾아온다. 베트남전 징병 통보를 받은 것이다. 사실 1964년에 그는 글쓰기 능력의 부족으로 병역 비적합자 판정을 받았는데, 1966년에 징병 검사 방식 및 기준이 변경되어 그가 다시 징병대상자로 분류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그는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이봐, 난 베트콩들과 아무 문제가 없어” (“Man, I ain′t got no quarrel with them Vietcong”)

당시 그는 기자들에게 둘러 쌓여 있었기에 이 발언은 즉각 이슈가 되었다. 그는 수많은 비난을 직면해야 했다. 아직 대부분의 미디어가 베트남전을 미화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그는 징병 거부 입장을 고수했고, 반전 여론에 불을 지폈다.

베트남전 참전 거부는 그의 종교적 신념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사실 그가 영장을 받고 가장먼저 한 공식 발언은 종교적인 것이었다. 그는 “전쟁은 꾸란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며 “우리는 알라나 예언자의 명령 없이는 어떤 전쟁에도 참여하지 못한다.”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그가 단순히 종교적인 이유만으로 참전을 거부한 것이었다면 그리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분명 그의 참전 거부 명분은 인종차별에 대한 반대였고, 그는 유색인종이 억압받지 않는 평화에 대해 이야기했다.무함마드 알리는 고향 루이즈빌에서 마찬가지로 반전 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합류했다. 고향에서 행해진 어느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또 하나의 명언을 남긴다.

“왜 내가 군복을 입고 10,000마일 떨어진 곳까지 가서 베트남의 황인들에게 폭탄을 떨어뜨리고 총을 쏴야 하나? 아직도 내 고향 루이스빌에서는 깜둥이(Negro people)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개 취급을 받으며 기본적인 인권도 부정당하고 있는데? 나는 단순히 세계의 유색 인종에 대한 백인들의 지배를 지속시키기 위해 불쌍한 나라들을 불태우고 죽이는 것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이 그런 악행이 끝나야 하는 날이다. … 나는 내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잃을 것도 없다. 감옥에도 갈 것이다. 뭐 어떤가, 우리는 400년 동안 감옥에서 살아왔다.”
Muhammad Ali ou Cassius Marcellus Clay Jr

선수자격 박탈, 그리고 복권

1967년 그는 법원의 판결에 의해 타이틀을 빼앗겼다. 도전자가 아닌, 법원이 그를 챔피언의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이후 그는 복싱 선수자격도 박탈당해 더 이상 링 위에 서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그가 반전 여론에 지핀 불씨는 계속해서 타올랐다. 1969년 10월 15일, 베트남전 반대 운동의 가장 큰 상징인 베트남반전통일행동이 일어났다. 미국 전역에서 수백만명의 시위자가 거리로 나섰다. 11월, 12월에도 다시 이뤄진 이 반전 운동은 다음해 6월까지 이어졌다. 1970년에는 전국 450개 이상 대학의 학생들이 등교를 거부하였고, 4백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반전 시위에 나섰다. 1972년에는 반전 시위자들이 자유의 여신상을 점거하는 일도 발생했다. 베트남 전장에서는 미군 병사들이 장교에게 항명하는 사건이 빈번히 발생했다. 결국 이러한 여론은 미국 정부가 베트콩과 평화 교섭을 시작하고, 베트남 주둔 미군을 철수하기로 결정하는 데 공헌했다.

1970년 8월 반전 여론이 전국을 휩싸고 있을 때, 그는 애틀란타 시 체육위원회의 승인으로 다시 링 위에 설 수 있었고, 오랜 공백기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거둔다. 1971년 마침내 연방 법원은 무함마드 알리를 완전히 복권시켰고, 1974년 그는 다시 챔피언 벨트를 차지하게 된다.

 

이근호 (연세대 정치외교)

Root2@yonsei.ac.kr

부자들의 창녀, 노동자들의 성녀 -Don’t Cry For Me, Argent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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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를 막론하고 정치계에 등장하는 거물급 여성은 세간의 주목을 받기 마련이다. 재선에 성공한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그러했고, 우리나라 박근혜 대통령은 대한민국 최초 여성대통령이라는 이유로 관심을 받았다. 에바 페론(Eva Peron) 또한 모국인 아르헨티나를 넘어 전 세계가 주목한 여성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아르헨티나 전(前) 대통령인 후안 페론(Juan Peron)의 부인으로 노동 조건 개선과 임금 인상 등의 친노동자적 정치행보를 펼쳐나간 인물이다. 살아 생전에는 연극 배우로 활동한 전력과 대통령이었던 남편 후안보다 대통령 같은 행보와 영향력으로 이목이 집중되었다. 이 관심은 사후에 에바의 발자취를 따라서 영화, 오페라, 뮤지컬 등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 중 뮤지컬 에비타(Evita)에서 알려진 후 마돈나가 불러 우리에게도 익숙한 노래 ‘Don’t Cry For Me, Argentina’는 에바 페론의 삶은 물론 그의 심정을 잘 표현한 곡이다.

이 노래는 에바의 굴곡진 삶을 생애 전반에 걸쳐 그러낸 오페라 <Evita>의 주제곡이며, 유명한 앤드류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ber)와 팀 라이스(Tim Rice)의 합작품이다. 1976년에 웨버는 에바의 연설에 영감을 받아 ‘Don’t Cry For Me, Argentina’를 작곡한다. 남편인 후안 페론이 대통령 재선을 노릴 때, 러닝메이트 겸 부통령 후보로 함께 출마한 에바가 급격하게 쇠약해졌다. 결국 에바는 수백 만 지지자들이 모인 집회에서 부통령 후보에서 사임한다는 뜻을 밝힌다. 때문에 뮤지컬에서는 발코니에서 아르헨티나 국민에게 바치는 노래로 표현된다. 줄리 코빙턴(Julie Covington)이 처음으로 불렀고, 그 이외에도 사라 브라이트만(Sarah Brightman), 마돈나(Madonna), 카펜터즈(Carpenters) 등 수많은 가수들이 불러 약 150개의 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사라 브라이트만이 부른 ‘Don’t CryFor Me, Argentina’

에바 이바르구렌과 에바 두아르테

“All you’ll see is a girl you once knew, although she’s dressed up to the nines at sixes and sevens with you. I had to let it happen. I had to change.” (여러분이 보는 것은 여러분이 아는 그 소녀입니다. 비록 최고로 화려하게 차려입었지만, 혼란스러운 맘이 있네요. 저는 이래야만 했습니다. 변화해야만 했어요.)

‘Don’t Cry For Me, Argentina’ 중 에바의 어린 시절을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다. 에바는 농장 지주인 아버지와 농장 일꾼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말 한마리와 마차 값으로 팔려와 일꾼 생활을 한 어머니의 신분으로 인해 아버지의 성인 두아르테 대신 외가 성인 이바르구렌을 써야했다. 마치 홍길동처럼 지주의 자식이지만 인정받지 못하고 아르헨티나의 가난한 농사꾼의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에바에게 있어서 큰 콤플렉스가 되었는데, 첩의 자식이라는 손가락질은 물론 아버지가 자신들을 버렸다는 상처를 평생 안고 살아야했기 때문이다. 결국 에바는 영부인이 된 후 고향마을을 아예 지도에서 삭제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서류를 조작하여 에바 ‘두아르테’로 살아가며 자신이 첩의 자식이라는 것을 숨긴다.

 

하찮은 창녀가 되어도 좋다, 성공만 할 수 있다면!

Couldn’t stay all my life down at heels. looking out of the window, staying out of the sun. So I chose freedom, running around, trying everything new. But nothing impressed me at all; I never expected it to. (제 삶을 바닥에 내팽개쳐둘 수 없었거든요. 창 밖만 바라보고, 태양 빛에서 벗어나있는 제 삶을요. 그래서 저는 자유를 선택했어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새로운 것들을 경험했어요. 그러나 어떤 것도 제게 감동을 주진 못했어요. 저 역시 그렇게 기대하진 않았지만요.)

그는 가난을 벗어던지고 성공하기 위해서 홀로 시골마을을 떠나 수도인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당도한다. 20세기 초의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가장 큰 도시였으며, 제1차 세계대전의 포화를 맞은 유럽의 식량창고로 자리매김하며 경제적 부흥기를 맞고 있었다. 이 곳에서 에바는 성공하기 위해 연극과 라디오에 뛰어든다. 고작 단역으로 출연하려 해도 유명 배우나 감독들과의 동침이 필수적이었던 상황에서 그는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를 반복하면서 남자를 통해 자신의 유일한 목적인 성공을 조금씩 쟁취해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1930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민족주의 색채의 군인들에게 권력이 집중되었다. 그 중 노동자 파업을 대화를 통해 해결한 후안 페론이 실세로 등장한다. 특히 후안 페론은 파시즘과 민족주의를 결합하여 노동자들을 위한 나라의 건설을 기치로 세우며 1943년 쿠데타를 일으켜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 된다. 라디오 mc로 노동자 집회에 자주 참석하여 인기를 끌던 에바는 그곳에서 페론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24살의 나이차와 에바의 과거로 인한 군부 내외의 반대를 극복하고 결혼에 성공한다.

 

Evita Perón en Rosario

 

누군가에겐 거룩한 성녀

“Don’t cry for me, Argentina! The truth is I never left you all through my wild days, my mad existence I kept my promise; don’t keep your distance.” (아르헨티나여, 저를 위해 울지 말아요. 저는 정말로 여러분들을 버리지 않았어요. 이렇게 힘든 날에도, 미쳐버릴 것 같은 삶이었지만 여러분과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러니 제발 내 곁에서 멀리 떠나가지 말아요.)

그는 자신의 우울했던 유년시절을 부수기라도 하듯, 후안과 함께 ‘페론주의’라고 불리는 친노동자적인 정책을 앞장서서 입안하고 정책 실시 과정 전반에 깊숙하게 관여했다. 최저임금보장·유급휴가·실직 수당·일요일 휴무·노동재판소 신설 등의 정책을 펼쳐, 지주 중심이었던 아르헨티나에서 노동자의 실질적 권리를 향상시키는 데 기여한다. 또한 절대적으로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을 위해 여성 참정권 전면 도입 및 확대실시, 여성지위 향상 등에도 힘썼다. 특히 자신의 이름을 딴 ‘에바 페론 재단’을 설립하여 양로원, 학교, 병원 등을 운영했다. 때문에 에바는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아르헨티나의 아이콘이 되었다. 국민로부터 작은 에바라는 뜻의 ‘에비타’라는 애칭을 얻게 되고, 대통령 관저 안에 에바만의 사무실이 만들어졌다. 그는 ‘첩의 자식’이고 ‘창녀’였던 지난 시절과는 다르게 화려하고 어디서나 주목받게 되었다. 에바가 공식석상과 유럽 순방 중 입었던 옷은 트렌드가 되었다. 에바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것을 넘어서서 국민들의 열망을 담아내는 아르헨티나의 ‘워너비’였던 것이다.

 

버림받은 아이콘

하지만 24년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맺어진 페론 부부는 영원하지 않았다. 에바가 자궁암에 걸리자, 후안 페론이 철저하게 에바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또한 후안은 국민들 마음 속에 자신이 아닌 에바가 자리잡고 있음을 알아차렸고, 후안 스스로 그동안 에바의 후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에바에 대한 국민들의 환호는 여전했기에 에바가 죽고 한 달의 국장기간을 치른 후, 후안은 그를 미라로 만든다.

한편 실제로 세계 5대 부국 중 하나였던 아르헨티나는 과도한 재정 지출 확대와 만성화된 노동자들의 태만 및 파업으로 수렁 속에 빠져든다. 경제 상황과 상관없이 페론주의가 강화되자 아르헨티나 경제는 후퇴하기에 이른다. 이 시기의 페론주의는 후대에 의해 포퓰리즘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효과적이지 못했고, 국가경제 추락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런 까닭으로 정권에 반감을 가진 세력들에 의해 후안 페론이 숙청되면서 미라가 된 에바 역시 온전하지 못했다. 그의 시신 파손된 채 이탈리아로 추방 및 가매장되기에 이른다. 이후 1975년 후안 페론의 후처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이 되면서 그의 시신은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오게 됐으며, 현재는 대통령궁 내 지하묘지에 안장되어있다.

성공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던 에바는 역설적으로 모든 것을 던졌기에 아주 다른 평가를 받고 있다. 성공에 눈이 멀어 아르헨티나의 경제를 몰락시킨 창녀에 지나지 않다는 의견과 누구보다도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와 여성에게 헌신한 성녀라는 입장이 그것이다. 죽어서도 논쟁의 중심에 있는 그녀는 분명 뜨거운 존재임에는 틀림없다. 노래 가사처럼 아르헨티나는 물론 세계도 그녀를 떠나가지도 않았지만(don’t keep your distance) 노래 제목처럼 그녀를 위해 울지도 않았다는 점에서(don’t cry for me, Argentina).

 

박새미 (이화여대 정치외교)

saemi1116@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