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승리한 독일 제국은 유럽 내에서 안정적인 영향력을 확보한다. 그것은 어설픈 판단의 결과가 아니었다. 당시 독일 제국의 수상 비스마르크는 지나친 확장이 독일의 안보를 위협할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한 판단 하에 독일은 전쟁의 승리 후 비팽창주의 즉, “명예로운 고립”을 선언한다. 비스마르크는 국내 문제 해결을 우선시하여 내실 있는 국가 발전에 힘쓴다.
냉소적으로 보자면, 비스마르크는 제국주의 후발자로서의 팽창정책을 추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는 내부적 상황에 기인하는데, 2차 산업 혁명 이후 독일 내부에는 노동자 수가 급증했으며, 그들은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 급여, 고용 안정과 같은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했다. 이에 1880년을 전후로 하여 독일에는 사회주의 분위기가 고착화되고, 사회당(SPD)이 정치권에서 실질적인 힘을 갖게 된다. 굳이 이론화하지 않아도 국가의 내부 안정성이 확보되지 않는 이상 대외적 팽창을 꿈 꿀 수 없다. 즉, 비스마르크가 직면한 독일 내부의 불안정성 문제는 곧 유럽 내 독일의 지위 안정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벌써 100년도 더 된 비스마르크의 정책 결정 맥락을 들으니 중국의 대외 노선이 떠오른다. 덩샤오핑은 “도광양회 유소작위(韜光養晦 有所作爲, 그늘 뒤에 숨어 힘을 키우고 때를 기다린다)”라는 경구를 들어, 밖으로 뻗어나가는 중국 대신 내부의 힘을 기르는 중국을 대외적으로 천명한다. 그의 발언은 1990년에 나온 것이며, 당시 동아시아 정세를 보면 소련이 붕괴하고 일본은 버블경제 붕괴의 여파를 간신히 빠져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즉, 역내 패권을 잡을 기회를 다시 노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덩샤오핑에게 중요한 목표는 외부적 팽창과 미국과의 대등한 관계의 정립이 아니라, 직전에 있었던 1989년의 천안문 사태로 인한 민주주의의 태동이었다. 최근에야 대국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겠다는 “책임대국”, 주변국과 미국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이끄는 가운데 국가의 힘을 키워나가겠다는 “화평굴기”가 대외정책 노선으로 제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