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부터 시작된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 충돌로 가자에서만 2천 명 가까이 사망했다. 중국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는 7월 한달 간 2천 명이 학살됐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민간 항공기가 격추되면서 300명 가까이 사망했고, 이라크에서는 내전으로 두 달 동안 4천 명 이상 죽었다. 2014년 전반기,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 위에서 수천의 목숨이 국가간·민족간 충돌로 사라졌다. 평화는 요원하다. 이라크와 우크라이나 내전은 현재진행형이고, 중국 정부는 위구르 독립에 강경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으며,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휴전은 위태롭다.
독특한 멜로디, 독특한 이벤트
2009년 7월, 영국의 한 유명 락밴드가 앨범 출시를 기념하며 ‘프로젝트 유라시아’라는 거창한 이름의 이벤트를 개최했다. 이벤트 웹페이지인 ‘Ununited States of Eurasia’에는 검게 칠해진 유라시아 대륙 사진 한 장과 함께 ‘유라시아를 통합’하라는 오묘한 지령이 올라왔다. 이벤트 내용은 유라시아 대륙 내 6개 국가에 배치된 ‘스테이션’과 거기에 배치된 ‘요원’들을 찾아 암호를 받아내는, 일종의 보물찾기였다. 한 팬이 첫 번째 장소인 파리에서 요원을 찾아냈고, 암호가 담긴 USB를 받아 이벤트 페이지에 입력하자, 다음 요원의 위치와 함께 새 앨범의 수록곡 ‘United States of Eurasia’의 1/6이 공개되었다. 여섯 요원들을 성공적으로 찾아낼 경우, 앨범이 발매되기 전에 음원 한 곡이 인터넷에 무료로 공개되는 ‘보상’이 주어질 터였다. 홍콩을 마지막으로, 팬들은 6일만에 모든 요원들을 찾아냈다.
↑’United States of Eurasia’ Youtube 링크
이 이벤트를 주최한 3인조 락밴드 뮤즈(Muse)는 다섯 번째 앨범을 통해 ‘United States of Eurasia(유라시아합중국)’라는 개성 있는 곡을 발표했다. 이 곡에는 발라드와 락, 오페라의 요소가 뒤섞여있어, 앨범 발매 당시 한 평론지는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와 이 곡을 비교하기도 했다. 곡은 메인 보컬 매튜 벨라미의 잔잔한 발라드로 시작해 이윽고 드럼과 베이스, 기타가 추가되며, 간주 부분에는 ‘동양적인’ 느낌의 피아노 가락이 삽입된다. 노래의 클라이막스에서 보컬이 정열적으로 ‘유라시아’를 몇 차례 외친 후, 곡의 아웃트로인 ‘+Collateral Damage’ 부분으로 넘어간다. ‘콜래트럴 대미지’에서는 쇼팽의 녹턴이 중심 가락을 이룬 채 바이올린 반주와 보컬의 허밍,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전투기 소리 등이 추가되었다.
‘유라시아 합중국’으로 하나되는 유라시아
‘유라시아 합중국’이라는 곡의 제목에는, 유라시아 대륙 위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갈등이 해결되고 총성과 포화가 멎어, 거대한 대륙 전체가 마치 지금의 미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처럼 하나의 연합체로 화한다는 상상이 담겨있다. 가사에 따르면, 지금 유라시아 대륙 위에서 벌어지는 전쟁들은 “결코 끝날 수 없다”. 이 전쟁에 대해 “우리는 더 이상 누구를 탓해야 하는지 알 수도 없고, 신경쓰지도 않는다.” “모두들 전쟁이 계속될 거라 약속할 뿐.” “우리는 반드시 시키는 대로 할 필요가 있을까?” “하나가 될 수도 있는 공동체를 굳이 분열시키면서까지.”
아웃트로의 제목인 ‘콜래트럴 대미지(부수적 피해)’는 보통 전쟁에서 민간인·도시 등 전쟁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제3자의 피해를 가리키지만, 동시에 전쟁의 참상을 가장 압축적이고 무미건조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쇼팽의 선율이 시작될 때 볼륨을 키우면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부드러운 피아노 가락이 일상의 소음과 어울리며 듣는 이로 하여금 평화로운 나날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안정된 분위기는 곧 전투기가 하늘을 가르는 소리와 조종사들이 교전하는 소리에 파묻히게 된다. 폭발음이나 비명, 직접적인 가사 전달 없이도 일상의 평온함과 전운의 긴장감이 효과적으로, 그리고 세련되게 대비되면서, 전투기의 이륙 소리와 함께 5분 40초가 넘는 긴 곡이 끝나게 된다.
이상주의자와 현실주의자
뮤즈는 한 평론지와의 인터뷰에서 이 곡이 브레진스키의 <거대한 체스판>과 조지 오웰의 <1984>에 영향을 받아 쓰였다고 밝혔다. ‘프로젝트 유라시아’의 첫 미션이 발표됐을 때에는 <거대한 체스판>의 ISBN(국제표준도서번호)이 힌트 페이지에 마치 군사 암호처럼 쓰여있기도 했다.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조지 오웰로부터는 아마 세계가 앞으로 세 개의 거대한 합중국에 의해 분할될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차용한 것 같다. 다만 뮤즈는 그러한 통합이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극도로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라시아 내 평화 유지에 기여할 것이라고 봄으로써 선배 예술가의 상상력을 살짝 비틀었다.
브레진스키와 관련해서 뮤즈는 이 외교 노장의 아이디어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던 듯하다. 브레진스키는 지미 카터 시절부터 백악관 외교·안보 분야의 ‘큰 손’이었다. 그는 미국 주도의 단극체제가 세계 평화에 기여할 것이라는 전제 하에 미국의 세계적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대외정책을 구상한 인물이었다. <거대한 체스판>은 그가 후학을 위해 남긴 다소 ‘노골적인’ 국제 전략 지침서다. ‘United States of Eurasia’는 아마도, 유라시아 각지에서 미국의 패권적 영향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이 책의 중심 명제에 대한 반동으로서 처음 구상된 것 같다. 미국 주도의 단극질서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브레진스키의 ‘솔직한’ 논조는 충분히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뮤즈가 제시한 유라시아 합중국은 미국 중심의 기존 질서를 대체할 매우 이상주의적인 정치 모델이었다.
The Resistance
6개국 요원이 모두 발견되어 ‘프로젝트 유라시아’가 종료될 무렵, 이벤트 페이지에 새로운 지령이 떨어졌다. 유라시아는 ‘성공적으로 통합’되었고 이로써 ‘유라시아 합중국이 탄생’했지만, 아직 국가로서 정식 승인을 받지 못했으며, 따라서 기존의 월드파워인 미국에게 ‘승인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승인을 받기 위해서는 미국 내 숨어있는 요원에게 또 다른 코드를 받아 입력해야 했다. 그러나 이전 단계들과는 다르게 이번 미션은 시간제한이 있었다. 시간 내에 미션을 달성할 경우 ‘United States of Eurasia’ 전곡과 아웃트로 ‘Collateral Damage’가 모두 공개될 것이었지만, 만약 기한을 맞추지 못할 경우(즉, 국가로서 승인 받지 못할 경우), ‘저항군(The Resistance)을 동원한다’는 경고가 함께 표시되었다. 여기서 ‘저항군의 동원’은 같은 앨범의 다른 곡 ‘The Resistance’가 대신 공개됨을 의미하는 말장난이었다.
‘승인’ 이벤트는, 유라시아의 통합과 연대에 있어 미국은 ‘타자’일 뿐임을 암시한다. 또한 여기에는 유라시아 위에서 벌어지는 분쟁들에 대한 미국의 직간접적 책임과 통제 능력을 비판적으로 재고해봐야 한다는 생각 역시 깔려있다. 애초에 곡 제목을 ‘United States of the Earth’처럼 전세계를 아우르지 않고 유라시아에 한정한 것을 통해, 이 상상의 공동체가 갖는 내적 포용성과 외적 배타성을 유추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 됐든 2009년 7월 21일, 한 팬이 뉴욕에서 요원을 찾아냄으로써 ‘United States of Eurasia +Collateral Damage’ 전곡이 온라인에 무료로 공개되었고, 프로젝트 유라시아는 성공적으로 종료되었다.
결론은 평화
뮤즈와 브레진스키는 상반된 두 시각으로 국제 정세를 바라봤다. 그러나 국제 정세를 이야기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해서 그 지향점까지 다를까. 브레진스키는 지난달 22일, <포린폴리시>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은 더 이상 혼자서 세계 전반을 책임지려 하지 말아야 하고, 그럴 역량도 없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미국이 취할 수 있는 최선책은 중국을 파트너로 삼아 국제 정세에 선별적으로 관여하는 것이며, 아시아에서 중국의 우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그는 최근 가자 지구를 공습한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 문제에 관여하고 있는 러시아를 강도 높게 비난했으며, 일본의 역사 문제와 센카쿠열도(댜오위다오) 문제에 있어 미국이 일본을 지지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오랫동안 혼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동 지역에 대해서는, 미국이 ‘이란 포용’과 ‘이란·터키·이스라엘과의 연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2개 국가 체제’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과정이나 방식이야 어찌됐건, 평화를 바라보는 모순된 두 시각의 끝은 서로 닿아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김만희(고려대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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