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 2015 1월

IS의 일본인 인질 살해 영상 온라인 유포

2%부족한 일본외교. IS의 일본인 인질 몸값 요구 동영상 유포

20일 IS(Islamic State)는 일본 정부에 일본인 인질 두 명의 몸값 2억 달러를 72시간 내로 보낼 것을 요구하는 동영상을 온라인에 유포했다. 인질들은 각각 사설보안업체 근무자인 유카와 하루나와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인 고토 겐지로 밝혀졌다. 유카와는 8월14일에 시리아에서 납치 되었고, 친구인 고토 겐지는 유카와를 찾으러 간 후 10월에 납치된 것으로 알려졌다. IS가 아시아인을 인질로 잡고 직접적으로 돈을 요구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같은 시각 일본의 아베총리는 6일에 걸쳐 중동지역 순회 일정 중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있었다. 아베 총리는 IS의 확장을 막고, 국경지역의 수비와 난민 보호를 지원하고자 중동 국가들에 2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했다. 동영상은 아베 총리의 발표 바로 후에 유포되었으며, IS가 요구한 몸값은 아베총리가 중동지역에 지원하기로 한 금액과 일치한다. 동영상이 확인되자 아베 총리는 “인질들의 목숨이 최우선”, “인질을 구출하기 위해 어떤 수단이든 동원할 것이며, 테러리스트에게 절대로 굴복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였다. 일본 내각관방 스가 요시히데는 기자회견에서, “IS가 지원금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다”고 말했으며 “국제사회에 공헌하여 테러리즘과 싸우겠다는 입장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25일 IS는 유카와를 살해한 영상을 온라인에 유포했다. 이로 인해 일본 내에서는 정부의 무능한 외교력에 비난 여론이 형성되고 있다. 시리아 내전이 심화됨에 따라 현재 중동지역 내 일본 외교관들이 모두 철수했고, 그로인해 IS 관련 단체와 접촉하는 것부터 난항을 겪고 있다. 일본의 중동 외교력은 매우 취약한 상태로 평가되며 미국의 외교전략 기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또한 <아사히 신문>에 따르면, 일본이 G7국가의 눈치를 보며 인질 구조에 적극적인 조치를 하지 않고 있다는 시민들의 우려가 형성되고 있다. 아베 총리의 성급한 외교 전략에도 문제가 제기된다. <뉴욕타임즈>는 두 일본인이 중동지역에서 실종된 것이 알려진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대테러 정책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것에 대해서는 아베 총리가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남지윤(연세대 정치외교)

demian8590@gmail.com

벨기에서 IS 연관 테러 모의 적발

벨기에서 IS 연관 테러 모의 적발 ‥ 2명 사살·1명 체포

지난 15일 목요일 벨기에 동부에 위치한 도시 베르비에(Vervier)에서 벨기에 경찰이 테러를 모의하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은신처를 급습, 총격전 끝에 두 명을 사살하고 한 명을 체포했다. 벨기에 검찰은 테러 조직은 수일 내의 테러를 계획하고 있었으며, 조직원 중 일부는 시리아에서 귀국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고 발표하였다.

<가디언>지의 보도에 따르면 벨기에 경찰은 최근 시리아에서 귀국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집과 차를 2주간 도청한 뒤, 경찰서를 대상으로 한 대규모 테러가 임박했다는 판단 하 선제공격을 실행했다. 이 과정에서 사살된 용의자 두 명은 벨기에 국적의 91년생 칼리드.B와 벨기에, 모로코 이중 국적의 88년생 소피앙.A로 밝혀졌으며 벨기에 당국은 이번 사건의 용의자 13명을 체포, 프랑스에서의 추가로 2명의 관련 용의자 송환을 기다리고 있다.

본 사건 약 일주일 전 자행된 샤를리 엡도 테러로 유럽 내 테러에 대한 경각심이 고조된 가운데 벨기에 연방 경찰 반 데르 시프는 파리 테러와의 관련성에 대해 “테러 조직에 관한 수사는 파리 테러 이전부터 시행되고 있었으며, 이번 사건과 파리 테러가 유사한 부분이 존재하나 연관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언급했다.

일각에서는 벨기에가 미군의 IS 공습 가담 이후 이슬람 자하디스트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벨기에는 전년 9월 27일부터 영국, 네덜란드, 호주 등과 함께 IS 격퇴를 위한 미군 주도의 이라크 공습에 동참하고 있다. 늘어가는 테러 위협에 벨기에 당국은 테러 경보수준을 두 번째 높은 수준으로 격상하였으며, 수도인 브뤼셀과 제2의 대도시 앤트워프에 300명 이상의 군사를 배치하여 또 다른 테러에 대비해 경계 태세를 갖춰나가고 있다.

한지현(연세대 불어불문)

jihyunee0907@gmail.com

[끝나지 않는 사막의 겨울 4] 왕좌의 게임 : 거인들의 용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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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실업률, 빈부격차, 왕가의 장기집권, 변화가 가로막힌 사회. 그럼에도 어째서 사우디아라비아에는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까. 지난 12월, 공무원 월급 삭감 계획을 정부가 세우고 있다는 루머에 트위터를 중심으로 항의가 빗발치자 사우디 정부는 월급을 삭감할 계획이 없다고 발표했다. 이는 청년층의 불만과 그 배출구인 SNS, 그리고 혁명의 불씨를 끄고자 하는 4년간의 정부의 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단기적으로 정치적 불안정을 페트로달러로 완화하는 것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으나, 장기적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과연 혁명의 불이 지펴질 수는 있는지, 그리고 그 주체는 누구인지다.

시작과 끝의 접점, 시민사회

이러한 관점에서 혁명의 가능성이 희박한 것은 민주화 이행을 가능케 할 구조의 변화가 생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왕가에 쏠린 힘이 다른 쪽으로 전이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후견주의다. 통합이 이루어지기 전 왕가에 의해 후견주의를 통해 사회조직들과 주요 부족들이 포섭된 사우디아라비아에는 시민사회라 할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권 단체까지도 왕가의 후원을 받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경제에서 사적 부문이 발달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다. 후견주의는 발목을 잡았지만 동시에 왕가를 유지시키는 요인이기도 하다. 요컨대 사우디아라비아의 정체와 안정이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왕가의 개혁과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많을지언정 이 목소리들이 지도자와 비전,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조직화할 가능성은 낮다. 설령 소수의 부족이 왕권 타도를 외친다 해도 서로 부족 및 경제, 정치 싸움에 분열된 나지드와 헤자즈, 하싸, 앗시르 등 사우디아라비아의 방대한 영토를 모두 장악, 통합할 수 없는 세력은 없다. 또 분열의 정도가 심하니 공통의 문화와 가치라 할 만한 것은 없으며, 있다 해도 북아프리카와 레반트, 예멘의 불이 아라비아 반도로 옮겨붙기를 바랄 리는 없다. 따라서 사우디아라비아의 변화는 지배층이 변화할 때에만 온다. 이 관점에서 흥미로운 비교대상은 안정된 발전을 구가하는 카타르와 UAE다.

사우디 지배층은 조직화되어 왕가에 저항할 수 있는 집단에는 포섭과 탄압을 병행한다. 대표적인 것이 사우디무슬림형제단인 사흐와, 그리고 동부를 중심으로 거주하는 시아 파다. 50, 60년대 나세르와 파이잘 국왕 간 소냉전의 과정에서 이집트에서 추방당한 무슬림형제단 중 다수를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가 받아들였고, 교육수준이 대단히 높았던 이들은 무슬림형제단의 사상을 파이잘 국왕의 정통성 강화에 이용하며 사우디아라비아의 교육계와 종교계에 포섭되어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그러나 문제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안보가 미국의 손에 맡겨져 있었다는 데 있었다. 시앙스포의 스테판 라크루와(Stephane Lacroix)는 걸프전과 이라크전을 기점으로 무슬림형제단의 이슬람적 색채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친미적 성향이 충돌했고 아랍의 봄을 거치며 사흐와가 친무르시적 입장을 표방하자 사우디 왕가가 사흐와를 탄압했다고 분석한다. 또 동부의 유전지대인 하싸 지역을 중심으로 거주하는 시아 파의 경우 이란의 위협 때문에 오랫동안 왕국 내에서 탄압받아 왔으며, 올해 처음으로 시아 파 출신의 장관이 임명된 것은 시아 파의 분개를 가라앉히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왕정에 도전할 만한 세력이 성장할 여지가 부족한 것이다.

한데 카타르와 UAE에서는 후견주의가 발목을 잡고 있지 않다. 물론 이들 국가들도 시민사회가 없기는 마찬가지이며, 각 국가의 중산층과 지배층 역시 왕가를 중심으로 포섭되어 있다. 그러나 늘 그렇듯 사우디아라비아와 달리 갖는 이점은 부의 차이에 비해 훨씬 작은 크기다. 인구는 폭등하지 않고 시민권은 엄격하게 통제되는데, 카타르의 경우 외국인과 결혼할 시 카타르 시민권을 상실하는 것이 대표적 예다. 이런 정책과 규모로 인해 통치가 훨씬 효율적이고 용이하며, 그만큼 포섭 역시 용이하다. 왕권에 대항할 수 있는 정치적 이슬람에 대해 카타르와 UAE는 정반대의 정책을 폈다. UAE는 알 나흐얀 왕가를 중심으로 이들을 엄격하게 찍어눌렀지만 카타르의 경우 이들을 완전하게 포섭했다. 이는 정치적 이슬람이 주요 정치 행위자로 등장한 계기가 된 아랍의 봄과 맞물리며 카타르의 영향력 확보의 수단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내부적 요소다. 60년대에 카타르로 유입된 무슬림형제단은 탄압받지 않았으며 이들은 지배층의 최상단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 이는 와하비즘의 유입으로 보수화되는 카타르의 종교계를 견제하려 들었던 90년대의 하미드 국왕 통치 시기 정점에 달했다. 무르시를 지원하고 북아프리카와 레반트의 이슬람 부흥주의를 지원하는 것 역시 카타르 지배층에 포섭, 포함된 무슬림형제단의 영향력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Quo Vadis, Riyal?

아랍의 봄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혁명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사우디 왕가는 다른 걸프 산유국의 왕가와 마찬가지로 가장 잘 하는 일을 했다 – 돈을 푼 것이다. 압둘라 국왕은 1200억 달러의 공공 재원을 건설 프로젝트와 직업 창출, 공무원의 월급 상승 등에 풀었다. 가계의 입을 틀어막은 것이다. 그러고도 국고가 동이 나지 않은 것은 사우디 중앙은행이 보유한, 7300억 달러를 상회하는 국부로 인해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이는 해답이 아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매장량이 동이 난다는 70년 후를 바라볼 필요도 없다. 2008년 이후 미국의 석유 생산은 70퍼센트 증가했으며 OPEC으로부터 미국의 석유 수입은 절반으로 줄었다. 80년대와 90년대의 유가 하락 이후 세 번째로 유가는 급락했고, 2015년 편성한 적자 예산안은 유가 하락으로 인한 880억 달러의 예상 손해 비용을 반영하고 있다. 시장에서의 지분을 유지하기 위해 사우디는 반토막난 유가 하락을 수용하고 있지만 이는 사우디 경제에도 해가 된다는 점에서 양날의 검이다. 유가 하락으로 휘청이는 러시아 경제가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셰일유 및 대체에너지의 생산이 급증함에 따라 사우디아라비아가 가진 전략적 가치도 줄어든다. 그런데 사우디아라비아가 가진 패는 없다.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고 굳어 버린 몸을 다시 움직이려면 사우디 정치와 경제는 군살을 빼야 한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정부 지출의 감소, 특히 밀과 귀리, 에너지 부문에 들어가는 보조금의 삭감이다. 그러나 이를 시행하지 못하는 것은 보조금이 수행하는 정치안정 기능 때문이다. 단작 구조 타파의 대안 중 하나라 여겨지는 사우디아라비아 제조업이 낮은 연료 가격에 의존한다. 인플레이션에 직면한, 사회에 불만족한 수십만의 청년층 실업자들은 모든 정권의 악몽이며, 사우디 왕정은 가솔린 가격을 현실화시킨 무르시가 쿠데타를 통해 축출되는 것을 보았다. 인도네시아의 조코위 총리가 최근 가솔린 가격을 현실화시켰으나 시위에 직면하지 않은 것은 이것이 조코위의 총선 공약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사우디의 경우 대중과 동떨어진 지배층이 그런 전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또한 학자들은 사우디아라비아에게 필요한 것이 경제적 다각화 및 자유화라고 말한다. 이는 석유 의존도를 줄이고 자본과 기업의 자율성을 늘려 제조업 및 금융업 등을 발전시켜 실업 문제를 장기적으로 해결할 가장 중요한 정치경제적 해답이라 할 수 있다. 삼바의 수석경제학자인 브래드 불랜드(Brad Bourland)는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석유에만 의존하는 단작 구조는 실업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사우디 경제가 “140만이 넘는 인력을 고용하는 월마트보다는 9만 명을 고용하는 엑손모빌에 더 가까운 경제”라 분석한다. 더군다나 민주화라는 난제가 있다. 루치아니(Giacomo Luciani)는 국가로부터 쟁취한 경제적 자율성이 정치 영역으로까지 확대, 경제적 자유화가 정치적 자유화로 이어질 가능성을 제기한다. 시민사회가 부재하고 국가적 통합이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에서 위로부터의 정치 변혁만이 변화를 일으킨다는 논리다. 그러나 현재의 비대한 공공 부문과 권력의 중심에 선 왕가, 또 후견주의를 통해 왕가에 포섭된 사적 부문에 그럴 만한 잠재력이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부자는 망해도 3대를 간다

실제로 걸프 산유국들은 정부 차원에서 경제적 다각화를 추구하고 있다. 바레인은 2008년 <Vision 2030>이라는 경제 다각화 계획을 입안, 사적 부문을 경제발전의 동력으로 내세웠고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다. 쿠웨이트 역시 <State Vision Kuwait 2035>라는 경제계획을 입안해 쿠웨이트를 걸프 북부의 상업 및 금융 허브로 만들 야심찬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카타르와 UAE다. 1995년 무혈 쿠데타를 통해 아버지를 축출해 왕위에 오른 셰이크 하마드는 카타르의 광대한 천연가스 및 액상화 기술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는 바레인과 같은 이름인 <Vision 2030>이라는 계획을 입안했는데 주목할 점은 그 구체성이다. 노동시장 개혁과 지역통합의 전망을 제시하는 이 계획안에서 카타르는 ‘경제적 다각화는 펜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며 교육 시스템을 통해 창업과 혁신을 익혀야 한다’며 교육 시스템에 주목한다. 실제로 알 사니 왕가에는 이를 시행할 만한 의지도 두툼한 지갑도 있다. 하미드 알 사니 전 국왕의 두 번째 아내인 모자(Mousa) 왕비의 주도로 카타르는 조지타운, 뉴욕주립대, 카네기 멜론 등 미국 명문대의 분교를 수도 도하에 대거 건설했다.

카타르 국왕 둘째 아내가 개혁 주도

카타르의 변혁을 주도하고 있다고 칭송받는 모자 왕비(우)

UAE의 아부다비는 금융의, 두바이는 물류의 허브다. 세금을 걷지 않는다는 UAE의 정책은 1890년대로 거슬러올라가며 에미레이트와 에티하드가 모두 UAE의 소유다. 이에 따라 제조업 역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는데, 보잉기의 비행기 부품이 아부다비에서 제조되기 시작한 것이 대표적 예다. <이코노미스트>에 의하면 세계적인 물류기업인 DHL은 세계화 정도를 측정하는 글로벌 연대 지수(Global Connectedness Index)에서 UAE를 12위로 꼽았다. 홍콩보다 한 자리 낮지만 프랑스와 이탈리아보다 높은 위치다.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며 메릴린치와 모건 스탠리를 비롯한 상업은행들에 대한 산유국의 영향력은 급증했다. 이런 변화를 가능케 한 것은 배럴당 1백 달러를 호가하던 높은 유가다. 2002년부터 2006년까지 페르시아 만 걸프 국가들이 벌어들인 석유수익은 1.5조 달러로 전간기의 두 배에 달하며, 이 돈은 산유국들의 자금줄이 됐다.

Skyscrapers in Dubai

두바이의 야경

‘늦깍이’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이 대열에 합류했다. 1999년 연간 GDP의 120퍼센트에 해당하던 사우디아라비아의 빚은 20퍼센트 미만으로 줄었다. 정부는 경제적 다각화를 목적으로 사우디투자청을 신설했고 관세를 깎고 제조업 산업단지를 건설함과 동시에 2005년에 WTO에 가입했다. 제다에는 사우디판 상해가 되고자 하는 압둘라 국왕 경제도시(King Abdullah Economic City)가 들어섰으며, 이는 압둘라 국왕이 700억 달러를 들여 문자 그대로 벽돌부터 지어올리는 6개의 도시 중 하나에 불과하다.
경제적 자유화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70년대, 80년대에 외국 자본과 자국 간 브로커 역할에만 머물렀던 GCC의 상인들은 이제 공장과 은행, 학교와 호텔을 가진 기업가로 성장했다. 이미 사우디아라비아는 플라스틱 및 석유화학 분야의 강국이다. 제조업 분야를 두고 UAE와 경쟁하고 있으며 IT 회사가 제다에 대거 들어섰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사적 부문은 1990년대 경제의 20퍼센트를 차지했던 데 반해 이제는 4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자국에 투자되는 사우디의 사적 자본은 두 배로 늘었다. 루치아니는 이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경제적 자유화가 진행되었으며 여기에는 역사적 연원까지 있다고 주장한다.

문화 면에서도 이들은 뒤지지 않는다. 미국의 듀크 대학과 컬럼비아 대학에서 공부한 카타르의 마야사 공주는, <이코노미스트>의 평에 의하면 서른의 나이에 “예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이다. 크리스티 임직원을 대거 고용해 왕가 주도로 미술품 구매에 투입되는 예산은 연 10억 달러에 달하며, 이렇게 전세계로부터 사들인 컬렉션을 전시한 이슬람박물관(Islamic Museum)은 전세계 최고의 박물관 6개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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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의 이슬람박물관

UAE의 야심도 비슷하다. 알 나흐얀 왕가가 건설 중인 싸디얏 섬 문화지구의 크기는 파리 시의 4분의 1에 달하며 올해 말에 개장할 루브르 아부다비는 이 문화지구의 중심이 될 세 개의 박물관 중 하나다. 이 외에 자예드 국립박물관이 2016년에, 중동 현대미술의 중심이 될 구겐하임 아부 다비가 2017년에 개장한다. 이는 아부다비의 단작 구조 경제를 2030년까지 타파, 국제적인 문화 허브로 만들기 위한 아부다비의 노력이다.

실업률 문제의 해결은 상당히 극단적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2013년 한 해 동안 90만 명의 외국인 노동자를 추방했고 사우디제이션Saudization이라는 고용보호 정책을 통해 기업들에게 자국민 고용 쿼터를 강제했다. 카타르의 카타리제이션Qatarization이라는 정책도 유사하다. UAE 역시 추방 및 외국인 고용제한 정책을 펼치고 있으며 쿠웨이트 역시 10년 안에 100만 명의 외국인 노동자를 감축할 계획을 발표했다. 이와 함께 후견주의의 사슬을 타고 자국민들에게는 엄청난 복지혜택이 주어진다. 걸프 부르주아가 정치적 자유화에 무관심한 이유 중 하나는 국가로부터 요구하기 전에 국가가 베풀기 때문이다. 지역 단위로 추구되는 변화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7500억 달러가 투자된 걸프 산유국 국부 펀드(Sovereign Wealth Funds, SWFs)다.

갑은 철밥통

그러나 이 지역의 변화는 아직도 충분히 빠르지 못한 것처럼 여겨진다. 먼저 사적 부문은 지대수입 및 보조금에 의존하는 다각화, 공적 부문과 사적 부문 간 월급 격차, 자유화의 실패 가능성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 기업들의 활동 영역은 경제적 다각화를 추구할지언정 자유화는 이루어지지 않고 기업의 생산은 조금 복잡한 지대 재활용 수준에 머물러 있다. 낮은 에너지 가격에 의존하는 제조업이 대표적인 예다. 또한 사적 부문은 분명히 전체 직업의 80퍼센트를 제공할 정도로 빠르게 발달했지만 이것이 국부 창출 및 분배의 활성화로 이어지지 못하며, 무엇보다 아직도 창출되는 직업의 대다수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주어진다. 공무원 선호 패턴도 그대로다. 사적 부문의 월급은 사우디아라비아 GDP의 7퍼센트를, UAE GDP의 11퍼센트를 차지한다. 선진국 경제에서 사적 부문의 월급이 GDP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것과 현격하게 대비된다. 결국 이는 장기적으로 자국민들의 능력 및 생산성의 증진에 기여하지 못하기 때문에 단, 장기적으로도 실업률을 타파하지 못해 노동자를 수입하는 악순환을 이어간다. 정치적 관점에서도 이렇듯 자생력 없는 사적 자본이 정치적 자유화는커녕 경제적 자유화 및 독자적 경제발전도 이끌어낼 것 같지는 않다. 더군다나 이들 비즈니스 계층은 주로 왕족 및 기존의 지배층인 경우가 다수다. 루치아니는 지대추구국가에서 정치경제적 개혁을 이끌어낼 수 있는 주체는 부르주아라고 주장하며 여기서 핵심 변수는 국가로부터의 자율성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후견주의를 통해 포섭된 이들이 과연 국가로부터 독립해 경제적 자유화를 이룰 수 있는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 헤르토그는 “GCC의 기업활동 다수가 근본적으로는 정부지출에 의존한다”고 설명한다.

국가 주도의 변화도 비효율적인 경우가 다수다. 경제도시를 비롯한 새로운 건설 프로젝트에는 수백억 달러가 쓰이지만 다른 도시에서는 항구가 부족하다. 사우디아라비아 제 2의 도시인 제다의 중심은 중세적 슬럼이 되어 가고 있으며 불량 하수도 시스템을 고치려 드는 정부기관은 없다.

에너지 의존적 산업의 비중을 줄이려 드는 기업들은 역으로 국유 기업이며, 이는 2007년 GE 플라스틱을 인수하는 등 기술 중심의 생산(technology-intensive production)에 가장 애쓰는 사우디 기업이 국영 석유화학 기업인 SABIC이라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지역의 경제가 동아시아와 같은 “지식 경제”로 접어들 날은 요원해 보인다.

지정학적 위치 및 구조에서 오는 본질적 한계도 있다. 사우디 왕가가 안은 모순은 왕가의 종교적 정통성의 뿌리인 와하비즘이 수니 급진 이슬람 부흥주의와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이라크전을 전후로 2003년에서 2005년까지 리야드에서는 알 카에다가 주도한 테러가 일어났다. 사우디 종교계는 관용적이라기보다는 이분법적이다. 국왕의 명령이 있기 전까지 ISIS나 알 카에다를 비난하기를 꺼려했을 정도다. 이는 온건 개혁파였던 고 압둘라 왕의 재임 하 진행된 다수의 사회적 개혁과 충돌했다. 압둘라 국왕은 대학을 늘렸고 종교에만 집중하던 기존의 교육 영역을 과학과 기술, 의학, 수학 부문으로 확대했다. 이뿐만 아니라 공주들의 주도로 여권은 유례없이 빠르게 신장되었다. 2010년 여성이 처음으로 투표권을 인정받은 데 이어 4년 만에 선거에 출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종교계에서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뉴욕타임즈>의 니콜라이 우루소프는 이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한다. 압둘라 왕 주도로 만들어진 사우디 최초의 공학 대학원인 압둘라국왕과학기술대학교가 처음 문을 열었을 때 퍼진 남녀가 어울려 춤추는 유튜브 동영상은 종교적 보수파의 분노를 샀다. 사우디의 셰이크인 사아드 알 샤트리가 대학교를 공개적으로 비판했을 때 압둘라 왕은 그를 해고했지만 이 사건은 사우디 왕가가 맞이한 내부로부터의 또다른 도전을 의미한다. 1960년대를 거쳐 1979년을 정점으로 보수화된 종교계, “텔레비전부터 여성 교육까지 반대하는” 이 종교계는 사우디 사회의 큰 부분을 차지하며, 사흐와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한 부분을 만족시키기 위한 개혁과 변화는 다른 부분의 공분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다. 종교라는 불완전한 수단을 통합의 기제로 삼았던 사우드 왕가가 직면한 모순이다. 뉴욕타임즈의 니콜라이 우루소프는 이를 “위험천만한 게임”이라 분석한다. 나머지 걸프 산유국들이 안은 지정학적 한계도 있다. 이들 왕국은 작은 크기로 인해 내수가 발달할 여지가 적으며 특히나 카타르와 바레인 등 섬나라는 사우디아라비아를 통해서만 육로를 이용할 수 있다는 지정학적 한계를 갖고 있다.
불을 뿜는 어린 거인들

아직까지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걸프 산유국의 정치경제적 변화를 논하기 조심스러운 이유는 용트림이 이제 막 시작된 단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반 세기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이들 국가들은 기적이라 할 만한 변화를 일궈냈다. 그리고 이제 지식경제와 유가 폭락의 시대에 또다른 변곡점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가장 큰 난점은 여러 가지 실을 한꺼번에 풀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나라의 제도적, 구조적 기반을 건드리지 않고 왕가에 집중된 후견주의의 폐단을 잘라내야 한다. 그와 함께 왕가의 권력을 유지하면서도 경제적 자유화 및 다각화를 시행해야 한다. 경제적 자유화가 실제로 정치적 자유화로 이어진다면 과연 왕가가 이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 이것을 과연 권력의 이동이라 볼 수 있을지, 또 과연 그 시점이 왔을 때 왕가가 이를 통제할 수 있을지도 지켜봐야 할 일이다. 건국자의 아들이자 6대 국왕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 국왕은 1월 말 사망했다. 왕위를 형제상속해 온 형제들은 거의 죽었고 왕위를 이어받은 살만 왕세제가 81세, 가장 어린 동생이 70세라는 것을 고려해 보면 곧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처음으로 지배층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게 된다. 강력한 수데이리 가문의 왕자들을 비롯한 수백 명의 왕자들이 왕좌의 게임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지배층의 불안정은 곧 그에 매달린 수많은 후견주의 사슬들의 불안정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그런 상황에서 분열된 지배층이 어느 정도까지의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체제의 안정성과 민주화라는 측면에서 걸프 산유국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정치경제적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국가의 안정과 번영 측면에서 과연 후견주의가 제도화된 민주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가? 경제적 다각화는 사실 쿠웨이트에서 가장 먼저 시도되었다. 그러나 타국에 비해 의회민주주의의 정치문화가 뿌리박혀 있었고 의회는 경제적 변혁은커녕 지대추구 행위를 촉진하는 ‘속터지는’ 기능을 수행했다. 결과적으로 쿠웨이트는 오히려 카타르와 UAE에 밀려났다. 이는 대단히 상징적인 일이다. 요컨대 왕정이 국가 전체의 번영을 위해 수행하는 기능적 장점이 현재까지 유지된다는 것이다.

걸프 산유국들이 맞이한 새로운 과제는 석유수입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과제다. 그러나 그 성패와 무관하게 엉킨 실타래가 풀리는 과정에는 주목해볼 가치가 있다. 중동의 거인들이 다시 움직이고 있다.

박정민(연세대 정치외교)
jay17289@gmail.com

[끝나지 않는 사막의 겨울 3] 왕좌의 게임 : 석유와 후견주의의 사슬

1986년, 당시 사우디 최고의 국영 석유정제기업이던 페트로민(Petromin)의 지사 압둘하디 타헤르는 큰 수치심을 느꼈을 것이다. 페트로민은 1962년 파이잘 국왕의 후원 하에 석유부 장관 자키 야마니(Zaki Yamani)가 회장직을 맡으며 세워진 기업으로, 타헤르는 이 시기부터 야마니의 오른팔이었다. 한데 ‘야마니 라인’의 ‘후배’였던 히샴 나제르(Hisham Nazer)가 축출당한 야마니의 공석을 채운 것이다. UCLA에서 국제관계를 전공한 젊고 똑똑했던 나제르는 페트로민 설립 초기부터 직위 문제로 타헤르와 충돌해 왔고, 온건 개혁파였던 파이잘 국왕이 1968년 산업화 계획의 일환으로 중앙계획기구(Central Planning Organisation, CPO)를 설립해 그 수장에 나제르를 임명하며 페트로민과 CPO, 혹은 타헤르와 나제르의 경쟁 구도는 명확했던 터였다.

야마니와 타헤르의 추락, 그리고 페트로민의 몰락은 지극히 정치적인 문제였다. 1975년 파이잘 국왕이 조카에게 암살당하며 파이잘 국왕의 산업화 계획은 폐기되고 관련 인물들은 페트로민을 중심으로 모두 축출된 것이다. 그 빈자리를 메꾼 것은 1982년 왕위에 오른 파흐드 국왕의 측근들로, 파흐드 국왕은 사우디아라비아 왕조를 개창한 압둘아지즈 이븐 알 사우드의 서른 명을 넘는 아내가 낳은 수많은 아들들 중 하나였다. 압둘아지즈가 가장 사랑했던 아내인 하사 수데이리가 낳은 7명의 아들들, 사우디 권력의 정점이라 불리는 ‘수데이리 일곱’ 중 장자가 바로 파흐드였다. 타헤르를 이기려 했던 나제르와 야마니를 견제하려 했던 파흐드 국왕 간에는 후견 관계가 형성됐으며, 파이잘 국왕의 사망과 함께 페트로민을 제치고 사우디 최고의 석유회사가 된 것이 바로 사우디 아람코(Saudi ARAMCO)다. 열악한 인프라와 고급인력의 부족이라는 현실 등의 요인으로 비효율적이었던 페트로민과 달리 본디 미국 국적의 회사였던 아람코는 중동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운영되는 기업 중 하나였으며, 1988년 아람코의 첫 사우디인 회장이 된 나제르는 아람코를 효율적이고 비정치적인 기업으로 유지했다.

런던정경대학 헤르토그(Steffan Hertog) 교수가 전하는, 흡사 ‘왕좌의 게임’에서 피터와 바리스의 경쟁을 방불케 하는 이 이야기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제도화 과정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1938년 처음으로 석유가 발견된 이래 80년 가까이 지난 현재까지, 정치제도, 외교관계, 지배층, 산업구조 등 대내, 대외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의 정치경제적 위치를 규정하는 요소들 중 석유의 축복이 손을 뻗치지 않은 분야는 없다. 1950년대와 60년대 사우디아라비아는 막대한 석유수입을 통해 급속한 제도화를 일궈냈고, 이 중심에 선 것은 알 사우드 왕가였다. 리사 앤더슨은 제도적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은 초기 민족국가 형성 과정에서는 분명 전제 왕정의 기능적 장점이 존재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60년 전의 이야기다.

모두가 누군가의 ‘빽’이요 ‘고객님’

그렇다면 정착된 제도의 실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급격한 산업화와 현대화라는 점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급격한 성장은 일견, 남미나 아시아의 개발도상국들의 성장을 대단히 빠른 시간 동안 압축해 진행한 정도라고 인식될 수 있다. 지대추구국가(rentier state)로서의 성격 역시 유지됐다. 그러나 헤르토그의 지적처럼, 실제 권력구조 및 사회적 관계를 분석하는 데 있어 거시적, 미시적 차원의 분리는 필요하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지대추구국가라는 한 가지 특징으로만 규정지어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사실 사우디아라비아는 단일한 국가라고도 말할 수 없다. 사우디의 예시가 편리한 것은 다른 걸프 산유국 국가들과 좋은 비교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석유가 나기 이전부터, 강력한 중앙집권국가 대신 부족정치가 아라비아 반도에 뿌리내린 시절부터 이어진 전통은 후견주의다. “사회적 희소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는 ‘정치’의 정의를 적용하자면 후견주의는 배분이 정치적 후원자(political patron)와 그 고객(client) 간 개인적 유대에 기반하는 구조를 지칭한다. 모든 걸프 왕국과 마찬가지로 사우디아라비아의 후견체계에서 가장 강력한 후원자는 왕가이며, 그 정점에 선 것, 부족장으로서의 정통성을 지닌 이가 국왕이다. 아라비아 반도의 통합을 위해 사우디아라비아를 건국한 압둘아지즈가 와하비 종교계로부터 정통성을 빌려오기 위해 받아들인 와하비즘은 결코 부족들의 통합과 단일한 정체성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아라비아 반도에 깊숙히 뿌리내린 부족들의 전통과 개별성은 와하비즘과 현대화라는 흐름에 여과되거나 희석되지 않은 채 석유라는 성장 동력에 힘입어 50년대와 60년대 제도에 그대로 반영됐다. 사우디의 정치제도는 실로 기묘하다. 노조도 정당도 국회도 없다. 자문 기구만 있을 뿐이다. 이 점에서는 대단히 중앙집권적, 수직적이면서도 동시에 수평적이다. 부자세습이 아닌 형제세습을 유지하는 왕정을 중심으로 관료제가 짜여졌고, 주로 왕자들이 장관직을 겸하는 정부 부처 밑으로 각 왕자의 후견을 받는 개별의 위계질서가 기묘하게도 수평적으로 공존하는, 분절된 제도가 형성됐다. 가령 국방부는 술탄 왕자에게, 내무부는 사망한 나예프 왕자에게 맡겨진 전담 분야였다. 한 왕이 사망하면 그 혈족관계 및 후견 관계에 따라 관료들이 새로운 왕의 동복형제들로 교체되고 부서가 폐지되거나 신설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파이잘 국왕의 후원을 받았던 야마니와 타헤르의 추락, 그리고 페트로민의 몰락과 사우디 아람코의 부상이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헤르토그에 따르면 사우디아람코를 비롯한 몇몇 자율적 기관들 중에는 대단히 효율적으로 운영되는 “제도적 섬”(institutional islands)이 형성되었으나, 관료제의 나머지는 비효율적이었다. 외부 행위자들은 물론 각 기관들 간 의사소통의 부족에 따라 관료제는 신뢰받지 못했고 후견주의라는 사슬에 포섭된 관료들은 위험회피적이었다.

게다가 비효율적 관료제가 채우지 못하는 부분에는 비공식적 네트워크와 브로커라는 또다른 전통이 개입됐다고 헤르토그는 지적한다. 사슬의 각 고리가 또다른 사슬의 시작이 된다. 제다의 전통적 부유층, 오일 붐을 탄 신흥부유층, 종교계, 기술관료 등 왕국의 모든 지배계급과 부족은 각 왕자들의 후원을 받으며, 이들은 또 누군가를 후원하고, 그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를 후원한다.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후견주의로 왕국의 엘리트과 부족들 모두가 왕가에 ‘포섭’된다. 이 거대한 사슬의 그물은 걸프 산유국 전역에서 발견되며, 이 중에서도 사우디아라비아의 후견주의를 ‘할라캇’이라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공정성이나 청렴, 효율성을 추구할 수는 없다. 영국 왕립 국제문제연구소는 “(사우디아라비아의)일관성 없는 대외정책은 사우디 정부의 파편화된 성격에서 비롯한다. 강력한 중앙의 대외정책 기구가 없으며 내부 균열 및 혈족 간 경쟁으로 모순적 성격을 보인다”고 지적했다.

40년대에 낙타를 타던 사우디아라비아의 세대는 석유의 축복을 받아 70년대에는 캐딜락을 탔다. 50년대의 UAE와 카타르의 어부들은 80년대에는 건물주가 되었다. 한계가 있다면 지대추구라는, 내재적 한계를 가진 특성을 그대로 떠안고 갔다는 점이다. 오일 붐을 통해 성장한 경제는 단작 구조를 타파하지 못했고, 유가에 경제가 송두리째 달린 기형적 구조가 고착화됐다. 이 위험성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 80년대다. 유가 폭락으로 지대수입이 감소하며 제도의 변화 및 확장은 둔화되었으며, 이미 형성된 사회구조가 제도의 발목을 잡았다. 왕가는 분명 왕국의 중심에 있었으나 후견주의라는 묵직한 사슬이 뒤따르는 왕가의 변화는 빠르지 못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제도의 변화가 사실상 50, 60년대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셈이다. 문제는 사우디아라비아는, 그리고 걸프 산유국은 변화가 절실한 시점에 도달했다는 데 있다.

안정성이라는 비극

통제만 가능하다면 위기는 긍정적 역할을 수행한다. 약점을 보완하고 강점은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걸프 산유국은 카타르라는 ‘삑사리’에도 불구하고 아랍의 봄에 능동적으로 반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규모로 공공 재원을 풀었고 군을 파견해 바레인의 시아 파의 시위를 진압했으며 이집트와 리비아에 개입했고 시리아. 산유국 수니 파 왕정들의 연합인 걸프협력회의(Gulf Cooperation Council, GCC)에 마찬가지로 혁명으로부터 위협받는 보수 왕정인 요르단과 모로코를 포함시키려고 시도했다. 또 이란을 견제하며 테헤란의 핵에 맞서 사우디아라비아 독자적으로 핵을 개발할 뜻을 드러냈으며 튀니지와 예멘의 독재자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산유국에게 핵심적인 위협이 대외적 위기는 아니다. 아랍의 봄은 이들 정권에게 독특한 위기 역할을 했다. 기존 정책의 수정이 아니라 심화를 유도함으로써 특정 정책을 이끌어낼 수밖에 없게끔 하는 기존의 구조가 가진 본질적 한계를 드러낸다. 이 경우에 산유국이 안고 있던 종양은 국가 그 자체였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맞이한 가장 큰 위협은 안에서부터 온다. 정부관료들은 이것이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하싸 지역에 거주하는 시아 파라 주장하겠지만 실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정부정책 및 지배층이 인구성장과 실업률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다는 점이 더 큰 위협이 아닐까 싶다.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사우디아라비아를 ‘부유한’ 나라라 할 수는 없다. 1인당 GDP는 2만5천 달러 정도로 카타르의 9만4천 달러에 비해 현격히 낮은 것은 물론 한국보다도 낮은 수준이다. 사우디의 국내 상황이 “안정되어 있다”는 세간의 믿음과는 정반대로, 놀랍게도 혁명이 일어난 튀니지와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 내 개혁파의 요구사항은 크게 다르지 않다. 실업 문제 해결, 부패의 척결, 권위주의 타파 등이다. 3천만의 인구 중 사우디아라비아 국적을 가진 이들은 2천만 명, 2천만 사우디아라비아인 중 67퍼센트가 30세 미만이며, 인구성장률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그러나 변화가 틀어막힌 사우디의 제도와 경제는 인구의 급격한 변화를 수용하지도 일자리를 제공하지도 못했다. 25세 미만 청년들의 실업률은 30퍼센트를 상회한다. 요르단이나 이집트와 비슷한 수준이다. 이것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현상인 이유는 UAE와 카타르의 인구 중 ‘시민권을 가진 인구’가 매우 적기 때문이다. UAE의 인구 920만 중 단지 140만 명만이 UAE 시민이며, 카타르의 인구 300만 중 25만 명만이 카타르 시민이다. 나머지의 대다수는 값싼 외국인 노동자다.

UAE의 외국인 노동자들

UAE의 외국인 노동자들

두 번째 문제는 비대한 공공 부문이다. 지대수입이 동력이 된 정부 주도의 제도화, 그리고 경제성장과 후견주의는 공공 부문을 살찌웠지만 사적 부문의 발달은 미약하다. 먼저 보조금의 문제가 있다. 75년부터 85년까지의 오일 붐 당시 연간 35퍼센트에 달했던 인플레이션율을 낮추기 위해 사우디 정부는 당시 1천억 달러를 상회하는 막대한 양의 지대수입을 이용해 보조금을 지출했다. 당시 정부지출은 1969년의 40배로 늘었고. 보조금 지원으로 인해 식료품, 전기와 물의 가격은 정가의 절반 정도에 유지됐다. 타 걸프 산유국도 마찬가지였다. 현재까지도 유지되는 보조금 경제의 시작이었다. 한편 이집트나 알제리 등 사회주의 국가와 같은 국영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GCC 국가들은 국가가 깊숙히 개입한 자본주의 국가로 남았으나 사적 부문의 발달은 더뎠다. IMF에 의하면 현재도 직업을 가진 사우디 인들의 3분의 2는 공무원이며 관료들에게 지급하는 월급은 정부지출의 절반을 차지한다. 이는 다른 걸프 산유국 역시 마찬가지다. UAE의 2015년 정부 예산에 해당하는 1300억 달러는 사실상 “월급 예산”이며 아부다비 언론 <The National>에 의하면 연방 기관들의 예산의 8할이 공무원들의 예산에 투입된다. 더 큰 문제는 사적 부문의 미발달이다. 공적 부문에 비해 사적 부문의 월급이 지나치게 낮기 때문에 낮은 교육수준에도 불구하고 자국민들이 사적 부문에서 일할 유인이 없으며, 따라서 사적 부문에서 고용된 대다수는 외국인이다. 설령 사적 부문이 발달하더라도 먼저 풀어야 하는 고리는 세금의 문제다. 헤르토그는 걸프 기업들이 세금을 거의 내지 않기 때문에 “국가능력의 유지에 기여하는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고 잘라 말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석유에만 의존하는 단작 구조의 문제다. 1980년대 유가가 폭락했던 당시는 외국 자산을 팔아 정부지출을 충당하고 보조금과 지대 의존도를 줄여야 했던 고된 시기였다. 그리고 10년 후 또 한 차례 경제위기가 왔다. 1990년대 후반의 유가 추락, 그리고 OPEC의 유가 결정력 상실로 석유에만 의존하는 단작 구조의 경제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지가 또 한번 증명됐다. 몸집이 작은 산유국은 변화를 꾀했으나 정부수입의 9할과 경제의 4할이 석유수입으로 지탱되는 사우디아라비아와 마찬가지로 단작 구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문제는 경제뿐만이 아니다. 사회 전반적으로 구조의 최상부를 제외한 나머지의 분열은 심각하다. 이란의 이슬람혁명과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그리고 메카의 그랜드 모스크 점거 사건이 일어난 1979년을 기점으로 사회적, 종교적 보수성은 심화됐다. 그러나 동시에 정반대의 흐름이 나란히 자라났다. 현재 16만의 사우디인들이 외국에서 공부하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인터넷 중독률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한다. 그러나 상부가 이미 30년도 전에 굳어 버렸기 때문에 하부의 흐름은 틀어막혀 있다. 몇몇 왕자들과 고문들에게만 귀를 기울이는 고 압둘라 왕은 91세의 나이로 서거했고, 뒤를 이은 왕세제 살만은 81세다. 경제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정부의 주도 하에 대규모의 건설계획과 개발이 이루어지지만 돈이 쓰여야 할 곳에 일반 국민들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는다.

Winter is Coming

“우리는 끔찍한 입장에 처해 있다 ··· 변해야 하는데 변할 수 없다.” 파흐드 국왕이 임종시 남겼다는 이 말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처한 난국을 여실히 드러낸다. 정권의 안정을 보장하는 석유와 후견주의가 도리어 국가성장을 옭아매는 사슬이 된 것이다.
아랍 예외주의는 냉전의 종식도 걸프전도 이라크전도 살아남았다. 그러나 아랍의 봄과 뒤이은 유가 폭락이라는 두 위기 앞에서도 정권의 안정성이 유지될지는, 그리고 위기를 떨쳐 일어날 동력을 갖추고 있는지는 또다른 이야기다. 사막에 혹한의 겨울이 오고 있다.

박정민(연세대 정치외교)

jay17289@gmail.com

[끝나지 않는 사막의 겨울 2] 경직, 회귀, 분열 : 아랍의 봄 이후 알제리, 이집트, 리비아

제목사진

‘아랍의 봄’이 처음 시작됐던 튀니지에서는 민주주의가 아슬아슬하게 외줄을 타며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그러나 튀니지와 이웃한 국가들, 남서쪽 국경을 맞댄 알제리부터 남동쪽의 리비아, 이집트에서는 2015년 새해를 맞이한 지금까지도 정치적 자유가 요원하다. 북아프리카의 이 네 나라는 역사적으로 비슷한 경로를 밟아왔다. 유럽의 식민지였고(이집트만은 예외로 영국의 보호국이었다), 냉전 시기에 사회주의를 도입했으며, 군부의 쿠데타와 이어지는 강력한 독재 체제를 경험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튀니지와는 달리, 이집트, 리비아, 그리고 알제리는 내전이 거론될 정도로 혼란스럽거나, 이미 내전이 진행 중이거나, 잔혹한 내전을 겪은 뒤 크게 경직돼 있다. 튀니지에서 빛을 발했던 ‘협의의 정치’, ‘대화의 정치’라는 소중한 자산은 세 나라에서는 축적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 자산을 대신한 것은 이슬람 원리주의와 세속주의, 혹은 이슬람 원리주의와 군부 간의 고질적인 갈등이었다.
비록 이슬람이 근대화 이전부터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가장 널리 신봉되는 종교인 것은 맞지만, 그것이 필연적으로 이슬람의 정치화, 특히 급진적•원리주의적 정치화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여타 중동 국가들과는 달리, 알제리와 리비아, 이집트는 독립을 전후해 서구의 영향을 크게 받은 데다 오랜 사회주의 체제 하에 있었기 때문에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여 생각하는 세속주의적 경향이 상당 부분 남아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군부 독재가 끝날 무렵 등장했던 급진적인 이슬람주의 정치세력들은 민간의 종교가 자연스럽게 정치의 표면에 드러난 것이 아니라, 사회의 저변에서 정치의 표면으로 유도됐다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 변화를 유도했는가?

자생하는 이슬람주의에 드리우는 군부의 그림자

알제리는 1970년대만 해도 소위 ‘잘 나가는 나라’였다. 사막이 대부분이어서 생산성이 없다고 여겨졌던 땅에서는 석유가 났고, 마침 아랍-이스라엘 전쟁으로 석유값이 뛰면서 알제리는 ‘제3세계의 리더’ 소리를 들으며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던 우아리 부메디엔 하의 사회주의 독재 체제에서 정치 탄압은 가혹했다. 이슬람주의는 물론이고 다른 어떠한 이데올로기나 정치집단도 대안으로서 정치에 발을 붙이기 어려웠다. 사회 전체에서 이슬람이 배제되었던 것은 아니다. 알제리 사회 내에서는 식민지 경험과 서구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이미 이슬람주의와 아랍 민족주의가 자생하고 있었고, 알제리민족해방군 출신이었던 부메디엔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의 ‘허락’은 교육과 언어, 문화의 영역에 한정되었다. 이슬람주의는 부메디엔 정권에 대항해 정치적 실세로 자라나지 못하도록 철저히 억압되었다.
억압된 정치적 자유와 경제 정책의 실패로 인해 누적되는 불만을 자양분으로 삼으며, 알제리의 이슬람주의는 점진적 개혁을 통해 소위 근대화와 이슬람주의의 양립을 꾀하는 온건파와, 무력을 통해서라도 신정국가를 수립하겠다는 급진파로 나뉘어 발전해갔다. 이 당시에만 해도 이슬람주의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유지하고 있었다. 압바스 마다니가 이슬람주의자들을 끌어모아 이슬람구국전선(FIS)을 창당했을 때 정당 내 일각에서는 마다니와 같은 온건파가, 다른 일각에서는 알리 벨하즈와 같은 극단주의자가 양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 균형추가 한쪽으로 급격히 기운 것은 1992년, 군부가 이슬람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서면서였다.

선거에선 졌지만 나라는 못 내주겠다

1990년, 투표소를 나서면서 알제리인들은 일말의 희망을 가졌다. 알제리를 비롯한 북아프리카를 휩쓴 1980년대 대규모 폭동의 결과로 드디어 오랜 군부독재가 종결을 고하는 듯했다. 부메디엔은 이미 10여년 전에 세상을 떠났고, 석유수출에 가려져있던 계획경제의 비효율성과 지도부의 무능이 유가 폭락과 함께 민낯을 드러낸 참이었다. 후임자 샤들리 벤제디드는 1989년, 국민 앞에서 다당제를 허용하고 의회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약속했다. 군부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30년 동안의 강압 통치 하에서 이슬람주의가 얼만큼 성장했는지, 그리고 군부 자신들에 대해 대중이 얼마나 큰 반감을 갖고 있는지 미처 알지 못했다. 당시 한 알제리인은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복수를 위해 이슬람구국전선에 투표했다”고 밝혔다. 대학 교육을 받은 24세의(혹은 <뉴욕타임즈>의 표현을 빌면 “이슬람 원리주의가 장래에 직접적인 위협이 될”) 알제리 여성조차도 “이슬람구국전선이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경제를 재건할 것을 기대한다”며 “이슬람구국전선에 투표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군부에의 반감과 이슬람주의의 시너지는 그 효과가 대단했다. 이슬람구국전선은 1990년 치러진 지방의회선거에서 과반의 득표율을 보이며 승리를 거뒀고, 이에 군부는 크게 당황했다. 중앙 의회 선거마저 이슬람구국전선의 승리가 확실시되자, 의회민주주의를 실현하겠다던 군부는 약속을 져버렸다. 군부는 전국에 군대를 배치하고 야당 인사들을 체포하기 시작했고, 이슬람주의자들과 군부의 충돌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그러나 이슬람주의자들은 어렵게 얻은 기회를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이슬람구국전선은 지하화•무장화되었고, 이슬람무장운동(MIA)•이슬람무장단체(GIA) 등 다양한 무장단체들도 연이어 반격에 나서면서 충돌은 곧 내전으로 발전했다. 요나 슐호퍼-불에 따르면, 특히 GIA와 같은 극단적 성향의 무장단체들은 이 내전을 ‘총력전’으로 받아들였으며, 단순한 정권 창출과 군부 퇴출 외에도 적대세력의 사회기반(민간인의 생명과 재산을 포함하는)까지 완전히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렇게 대립이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애초 온건 개혁을 통한 근대화를 주창했던 온건파는 설 자리를 잃었고, 어떠한 제3의 세력도 내전으로 빨려 들어가는 양측을 저지하지 못했다. 15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소위 ‘암흑의 10년’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집트, 무슬림형제단의 돌풍

오늘날 알제리의 이웃인 이집트와 리비아의 정치 상황은 ‘암흑의 10년’의 도돌이표라 할 만큼 20여 년 전 알제리의 그것과 유사하다. 특히 2013년 이집트의 쿠데타 이후, ‘이집트는 알제리의 반복’이라는 말은 이미 흔한 표현이 됐다. 2011년 2월,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전 대통령은 ‘자스민 혁명’의 영향으로 퇴진을 결정했고, 스스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면서 이집트 군 최고위원회(SCAF)에 권한을 이양했다. 차기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그의 선언을 들으면서 많은 사람들은 알제리의 벤제디드를 떠올렸다. 그럼에도 수천의 사람들이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에 모여 30년 독재의 종말에 기뻐했고, 오바마 미 대통령은 “이집트는 절대로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며 축하의 말을 전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헌법에 의하면 대통령의 권한을 임시 이양받아야 할 주체는 군부가 아니라 국회의장’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기쁨의 순간에도, 비극은 제 꼬리를 다 숨기지 못하고 복선을 흘리고 있었다.

무바라크 퇴진 이후 의회 선거가 실시되면서 정계의 표면으로 급부상한 것은 단연 무슬림형제단이었다. 1920년대 말 조직된 이 단체는 주로 지역사회에 뿌리내린 채 각지의 모스크를 중심으로 세력을 유지해왔다. 또 여타 이슬람 무장단체와는 달리, 무슬림형제단은 폭력적인 수단 외에도 의료와 교육, 복지 등으로 지역주민들의 필요를 직접적으로 충족시키면서 빠르게 영향력을 넓힐 수 있었다. 그러나 우수한 조직력과 비교적 탄탄한 사회적 기반을 갖췄음에도, 이들의 정권 창출은 요원했다. 가장 큰 장애물은 역시 정치권력을 독점한 채 버티고 있는 군부였다. 1950년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가말 압델 나세르는 외부로는 아랍 민족주의를 표방했지만, 내부로는 사회주의 독재 체제를 고수하며 여타의 정치세력들을 억압하고 있었으며, 무슬림형제단도 나세르의 암살을 기도했다는 죄목으로 1954년에는 아예 불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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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와르 사다트(중심)와 그 뒤를 이은 무바라크(오른쪽 2번째)

나세르 사후 정권을 잡은 안와르 알 사다트는 전임자의 ‘나세리즘’으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린 채 ‘인피타’로 불리는 ‘자유화’를 추진했다. 정권 초기, 무슬림형제단은 나세리즘에 반대한다는 사다트의 단순한 정치적 필요에 편승해 다시 정계의 양지로 나오는가 싶더니, 사다트가 이스라엘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자 다시 정권으로부터 등을 돌렸다(사다트는 이후 이슬람주의자들에 의해 암살됐다).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는 정권에 대한 대중의 불만도 축적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사다트의 ‘자유화’가 정치 영역에서는 제한적인 수준에 머문 데다, 경제적으로는 식량보조금 삭감과 대규모 인플레이션 및 부정부패 등을 야기했기 때문이다. 특히 식량보조금 삭감은 식량 가격을 단번에 50%나 급등시켜, 1977년 이집트 ‘빵 폭동’을 초래할 정도로 대중의 비난을 받았다. 사다트의 부통령이었던 무바라크는 사다트의 정치 및 경제 체제를 거의 그대로 계승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무바라크 말기, 정권의 외면적인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실시됐던 선거는 비록 여당의 의석이 절대 다수로 보장된 ‘정치 쇼’였지만, 그 틈바구니에서도 무슬림형제단은 2005년 88석을 획득하는 성과를 보였다. 이러한 결과에는 60년 가까이 지속된 독재 정권에 대한 이집트 국민들의 회의와 무슬림형제단에 대한 기대가 함께 담겨 있었다.

기회가 왔다

2011년, 튀니지로부터 ‘아랍의 봄’이 불어왔을 때 무슬림형제단은 반정부 시위의 한복판에 있었다. 무슬림형제단의 리더 모하메드 무르시는 <가디언>에의 기고에서 “비록 우리는 이슬람주의에 기반하고 있지만, 특정 이데올로기를 이집트 국민들에게 강요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거부한다”고 밝히는 등 의도적으로 중도 노선을 취했는데, 이는 무슬림형제단을 반(反)무바라크 세력의 구심점으로 삼고자 하는 시도였다. 전략은 크게 성공했다. 2011년 11월 시작된 총선에서 무슬림형제단 계열의 자유정의당(FJP)은 47%의 의석을 차지하며 제1당을 차지할 수 있었다. 23%로 2위를 차지한 이슬람 원리주의 정당 알-누르와 온건 이슬람주의 정당 알-와사트 등을 모두 합치면 이슬람주의 정당이 70%에 육박하는 의석수를 확보한 셈이었다. 반면 알-와프드나 ‘이집트 블록(Egyptian Bloc)’과 같은 세속주의 세력들은 모두 합해도 20%를 넘지 못했다.

독재의 억압 하에서 60년을 보낸 무슬림형제단은 이제 정권 창출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이대로 대선까지 밀고 나간다면, 그리하여 만약 무르시가 대통령으로 당선이라도 된다면, 군부와의 오랜 대립에서 결국 웃는 것은 무슬림형제단이 될 터였다. 그러나 군부 역시 만만치 않았다. 무바라크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은 군 최고위원회는 헌법재판소에 영향력을 행사해 선거로 구성된 의회를 강제로 해산시켜 버림으로써 반격에 나섰다. 그나마도 행정권과 내각 임명권을 군 최고위가 독점하고 있어 사실상 이빨이 빠져있는 의회였다. 이제 무슬림형제단의 손에 남은 카드는 대선 하나뿐이었다.

조급한 무르시

대선은 압승에 가까웠던 총선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무르시는 결선 투표에서 무바라크 시절 총리를 지냈던 친군부 인사 아메드 샤피크를 52 대 48로 비교적 힘겹게 누르고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이슬람 극단주의를 경계한 온건파와 세속주의자들의 이탈이 그 원인으로 추측된다. 타렉 마수드 하버드 정책대학원 부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겉보기에는 그럴싸했던 정치적 이슬람주의에의 지지가 그 민낯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군부는 약속대로 모든 권한을 새 대통령에게 넘기고 정계의 표면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무르시는 아직 불안했다. 여전히 군부는 정치 및 경제 분야에서 많은 실권을 장악한 ‘실세’였다. 무슬림형제단과 무르시는 조바심을 내며 총선 이전에 표방했던 중도 노선에서 급격히 이탈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온건파와 세속주의자들의 우려는 현실화되었다.

2012년 11월 22일, 무르시는 대통령의 결정이 “최종적이며, 구속력 있고, 다른 존재나 어떠한 방식에 의해서든 항소될 수 없다”는 법안을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아랍의 봄’으로부터 2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무르시와 무슬림형제단의 태도 변화는 극적일 정도였다. 강력한 법을 기반으로, 무르시는 새로이 결성된 제헌의회를 좌지우지하며 이슬람의 율법 ‘샤리아’를 헌법에 녹여내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에 자유민주주의자들과 소수 콥트 기독교인들이 항의의 표시로 제헌의회에서 이탈해버렸고, 제헌의회 내에서 보수적•비타협적 이슬람주의 노선을 견지하는 살라피스트들을 견제할 세력은 사라졌다. 국제 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는 이 헌법 초안이 “표현과 종교의 자유를 보호하는 데 실패했다”고 평했고, 카이로 곳곳에서는 무르시의 강압적 행동에 대한 반대시위가 열렸다. 혁명에 가담했던 이집트 국민들은 새로운 대통령이 이전의 독재자들을 닮아가는 것을 우려했다.

리비아, 이집트의 반복

그 비슷한 일이 옆 나라인 리비아에서 그대로 재현됐다. 군부의 붕괴와 이슬람주의 세력의 득세, 그리고 이들의 정치 독점까지, 튀니지로부터의 서풍과 함께 격변기를 맞이한 두 나라는 1년의 시간차를 두고 비슷한 전철을 밟았다. 무아마르 알 카다피 축출 이후 합법적 국민선거로 구성된 임시 의회(GNC)는 원내 다수인 이슬람주의자들을 주축으로 하여 샤리아의 성문화를 시도했다. GNC 내 서열 2위면서 우수한 조직력을 가진 ‘정의와 건설’은 무슬림형제단 계파 정당이었으며, 노골적으로 샤리아의 성문화를 주장했다. 최대 정당인 ‘국민연합’은 비교적 온건한 편이었지만, 역시 “샤리아가 입법의 주요한 정신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슬람주의 정당의 색깔을 유지하고 있었다. GNC의 겨냥도를 고려했을 때, 향후 리비아 헌법이 극단적 이슬람주의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은 불가능해보였다. 2013년 12월, 헌법 구성 투표를 마치면서 GNC는 “이슬람 율법은 리비아에서 행해지는 모든 입법의 근간”이 되며, “모든 기관은 이에 순응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듬해 1월, 임기 만료를 앞두고 GNC는 일방적으로 스스로의 임기를 연장하기로 결의했다. 과거 이슬람주의 세력과 손을 잡고 카다피 축출에 힘썼던 세속주의 세력이 느끼는 배신감은 컸다.
칼리파 하프타 장군의 주도로 ‘작전명 디그니티’가 개시된 것은 그로부터 넉 달 뒤인 2014년 5월 16일이었다. 카다피 시절 장교로 복무했으나 정권에 반기를 들면서 미국에서 오랜 망명생활을 한 하프타는 카다피 축출 당시 세속주의 세력의 주요 군 지도자 중 하나였다. 그는 일종의 쿠데타였던 작전명 디그니티를 통해 벵가지의 이슬람 무장 단체들을 공격하고 GNC를 해산시키고자 했다. 이에 대해 이슬람주의 세력은 ‘작전명 리비아의 여명’으로 반격에 나섰다. 리비아 내 이슬람주의 세력들은 카다피 군사 독재 하에서의 탄압과 그 반작용으로서의 급진화라는, 알제리와 이집트 내 이슬람주의 세력들과 매우 유사한 경로를 밟아왔다. 거기에 더해 리비아 내 이슬람주의 세력은 이미 카다피를 상대로 군사행동을 벌인 경험이 있었고, 당시의 군대는 그대로 온존되었기 때문에 빠르고 조직적인 반격이 가능했다. 둘의 갈등은 단번에 무력 충돌로까지 발전했다. 새로운 내전의 발발이었다.

도돌이표는 아니고 변주곡쯤?

리비아의 갈등 양상은 알제리•이집트와는 조금 다른 양상을 띠기도 했는데, 그 주요한 요인으로 두 가지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독재 체제의 전복이 무력에 의해, 그것도 서방 세력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는 정치세력의 무장화와 급진화에 큰 영향을 주었고, 내전 기간 동안 심지어 지방의 군소 집단들조차도 투표용지가 아닌 총을 들고 반대세력에 맞서게 됐다. 이 당시의 경험과 조직은 카다피 사후 그대로 보존되어 두 번째 내전을 재연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뉴욕타임즈>는 2014년 11월의 기고문에서 “외부로부터 무기와 돈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와, 더 이상 무장단체들에게 전쟁을 멈추게 할만큼의 충분한 인센티브를 제공할 수 없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하나는 ‘부족’이라는, 리비아 정치•사회가 갖는 전근대적 정치 질서다. 알제리•이집트와는 달리, 카다피는 사회주의와 직접민주주의 등을 표방하면서도, 식민지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부족 단위의 정치구조에 여전히 의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수혜자는 카다피 자신의 일족과 그에게 충성을 바친 몇몇의 ‘선택된’ 부족들뿐이었다. 카다피는 근본적인 구조 변화는 제쳐두고 ‘자마히리야(직접민주주의)’와 같은 실험적인 정치 제도 등을 도입했으나 모두 실패했고, 끝내 리비아를 하나의 국민국가 단위로 용해시켜내지 못했다. 변화의 바람이 닥쳤을 때 이집트나 알제리에서 몇 개의 중앙 정당을 중심으로 정치갈등이 표출됐던 것과는 달리, 리비아에서는 천여 개에 달하는 지방조직들이 비교적 느슨한 연합을 이루며 분산적으로 출몰했는데, 이러한 차이도 카다피의 유산인 부족 중심의 정치질서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미진한 정치적 통합은 카다피 시절 내내 억눌려있던 연방주의자들의 재등장을 초래하면서 분열을 악화시키고 있다. 원래 세 지역(트리폴리타니아, 시레나이카, 페잔)의 연방이었던 리비아는 쿠데타 이후 카다피를 중심으로 하는 단일한 정치체제로 봉합됐으나, 카다피가 죽고 중앙정치권력에 공백이 생기면서, 그리고 그 공백을 GNC가 독점하면서 만년 ‘주변부’의 지위에 있던 시레나이카와 페잔이 과거 연방주의로의 회귀를 주창하고 있다. 특히 시레나이카는 2013년, 아예 독립된 정부를 세우며 스스로 총리를 임명하고 내각을 꾸려버렸다. 시레나이카의 정부수립으로 리비아에는 무려 세 개의 정부가 들어서게 됐다. 하나는 GNC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트리폴리에 위치한 이슬람주의자들의 정부이고, 다른 하나는 하프타 장군과 세속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토브룩의 정부이며, 다른 하나는 키레나이카에 만들어진 소위 ‘그림자 정부’다.

경직, 분열, 회귀

아랍의 봄은 실패했다. 북아프리카에서 독재 정권들이 연이어 무너질 때 표출됐던 막연한 기대감은 4년이 지난 지금, 완전한 회의로 바뀌었다. 리비아에서는 정부만 세 개가 들어서고 여기에 수많은 지역세력들이 엉키면서 나라는 완전히 분열됐으며, 정치상황은 수습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이집트는 어찌 되었는가? “또 다른 독재자일 뿐”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하던 무르시는 결국 군부의 쿠데타에 의해 전복되고, 무슬림형제단의 ‘2년 천하’도 허무하게 끝났다. 정권을 잡은 압델 파타 엘 시시는 무슬림형제단을 비롯한 이슬람주의 세력을 강경하게 탄압하며 “화해는 없다”고 못박고 나섰고, 이집트는 2011년 이전의 군부 중심 체제로 회귀했다.

친무르시 시위

카이로에서 열린 친무르시 시위.

알제리의 정치는 이미 20년 전에 이러한 분열과 혼돈의 시기를 오롯이 겪고 지금은 완전한 정체기에 들어서있다. 2003년을 전후로 GIA를 비롯한 굵직한 이슬람주의 무장단체들은 대부분 무너졌고, 내전은 군부의 승리로 일단락되었다. 2004년에 마다니와 벨하즈를 비롯한 과거 FIS 지도자들이 석방됐으나, 이들이 알제리 사회에 미친 영향력은 미미했다. 이후 10년간, 알제리의 정계에 큰 지각변동은 없었다. 군부와 여당은 작년 치러진 대선에서도 정치조직망과 자금력, 그리고 오랜 내전에서 비롯된 이슬람주의에의 피로감에 기반해 압승을 거뒀다. 고령에다 이미 몸져누워 유세 현장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하던 ‘얼굴마담’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가 80%가 넘는 득표율을 보이며 4선에 성공한 것은 알제리의 정치 상황이 얼마나 경직돼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집트과 리비아에게 있어 아랍의 봄은 군부 독재가 수십 년 간 키워 온 모순을 폭발시킨 촉매제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군부의 대안으로 정계의 표면에 고개를 내민 이슬람주의는 독재 체제 하의 오랜 억압에 대한 반발감과 새로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조급함을 양분 삼아 급진화된 뒤였다. 세속주의 성향이 비교적 강한 북아프리카에서 원리주의화된 이들은 전국민적인 지지를 받기 어려웠다. 애초에 그들이 정치의 표면에 등장할 수 있었던 주된 원동력도 종교 자체라기보단 오랜 독재에 대한 대중의 회의감이었다.

이슬람주의의 급진화는 독재의 산물이며, 따라서 이 두 나라에서 나타난 오늘날의 정치적 혼란이 필연적 결과라는 분석은 지나치게 가혹하다. 이슬람주의 세력에게도 분명히 선택지는 주어졌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무르시는 자유민주주의자들과 콥트 기독교 등을 포섭하면서 군부 대 반군부의 대결 구도를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었고, 그렇다면 군부를 물리칠 승산이 있었다. 리비아의 GNC 역시 세속주의 및 연방주의자들과 권력을 분담하면서 정부를 구성했다면 지금과 같이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들은 이웃인 알제리가 20년 동안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곱씹어 볼 여유를 갖지 못했다. 이렇게 이슬람주의와 세속주의, 혹은 이슬람주의와 군부의 극단적 대립은 알제리에게는 정치의 경직을, 이집트에게는 과거로의 회귀를, 리비아에게는 국가 전체의 분열을 가져왔다. 그리고 적어도 당분간은, 이 세 나라에 장밋빛 미래를 기대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김만희(고려대 국어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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