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의 봄’이 처음 시작됐던 튀니지에서는 민주주의가 아슬아슬하게 외줄을 타며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그러나 튀니지와 이웃한 국가들, 남서쪽 국경을 맞댄 알제리부터 남동쪽의 리비아, 이집트에서는 2015년 새해를 맞이한 지금까지도 정치적 자유가 요원하다. 북아프리카의 이 네 나라는 역사적으로 비슷한 경로를 밟아왔다. 유럽의 식민지였고(이집트만은 예외로 영국의 보호국이었다), 냉전 시기에 사회주의를 도입했으며, 군부의 쿠데타와 이어지는 강력한 독재 체제를 경험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튀니지와는 달리, 이집트, 리비아, 그리고 알제리는 내전이 거론될 정도로 혼란스럽거나, 이미 내전이 진행 중이거나, 잔혹한 내전을 겪은 뒤 크게 경직돼 있다. 튀니지에서 빛을 발했던 ‘협의의 정치’, ‘대화의 정치’라는 소중한 자산은 세 나라에서는 축적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 자산을 대신한 것은 이슬람 원리주의와 세속주의, 혹은 이슬람 원리주의와 군부 간의 고질적인 갈등이었다.
비록 이슬람이 근대화 이전부터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가장 널리 신봉되는 종교인 것은 맞지만, 그것이 필연적으로 이슬람의 정치화, 특히 급진적•원리주의적 정치화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여타 중동 국가들과는 달리, 알제리와 리비아, 이집트는 독립을 전후해 서구의 영향을 크게 받은 데다 오랜 사회주의 체제 하에 있었기 때문에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여 생각하는 세속주의적 경향이 상당 부분 남아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군부 독재가 끝날 무렵 등장했던 급진적인 이슬람주의 정치세력들은 민간의 종교가 자연스럽게 정치의 표면에 드러난 것이 아니라, 사회의 저변에서 정치의 표면으로 유도됐다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 변화를 유도했는가?
자생하는 이슬람주의에 드리우는 군부의 그림자
알제리는 1970년대만 해도 소위 ‘잘 나가는 나라’였다. 사막이 대부분이어서 생산성이 없다고 여겨졌던 땅에서는 석유가 났고, 마침 아랍-이스라엘 전쟁으로 석유값이 뛰면서 알제리는 ‘제3세계의 리더’ 소리를 들으며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던 우아리 부메디엔 하의 사회주의 독재 체제에서 정치 탄압은 가혹했다. 이슬람주의는 물론이고 다른 어떠한 이데올로기나 정치집단도 대안으로서 정치에 발을 붙이기 어려웠다. 사회 전체에서 이슬람이 배제되었던 것은 아니다. 알제리 사회 내에서는 식민지 경험과 서구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이미 이슬람주의와 아랍 민족주의가 자생하고 있었고, 알제리민족해방군 출신이었던 부메디엔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의 ‘허락’은 교육과 언어, 문화의 영역에 한정되었다. 이슬람주의는 부메디엔 정권에 대항해 정치적 실세로 자라나지 못하도록 철저히 억압되었다.
억압된 정치적 자유와 경제 정책의 실패로 인해 누적되는 불만을 자양분으로 삼으며, 알제리의 이슬람주의는 점진적 개혁을 통해 소위 근대화와 이슬람주의의 양립을 꾀하는 온건파와, 무력을 통해서라도 신정국가를 수립하겠다는 급진파로 나뉘어 발전해갔다. 이 당시에만 해도 이슬람주의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유지하고 있었다. 압바스 마다니가 이슬람주의자들을 끌어모아 이슬람구국전선(FIS)을 창당했을 때 정당 내 일각에서는 마다니와 같은 온건파가, 다른 일각에서는 알리 벨하즈와 같은 극단주의자가 양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 균형추가 한쪽으로 급격히 기운 것은 1992년, 군부가 이슬람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서면서였다.
선거에선 졌지만 나라는 못 내주겠다
1990년, 투표소를 나서면서 알제리인들은 일말의 희망을 가졌다. 알제리를 비롯한 북아프리카를 휩쓴 1980년대 대규모 폭동의 결과로 드디어 오랜 군부독재가 종결을 고하는 듯했다. 부메디엔은 이미 10여년 전에 세상을 떠났고, 석유수출에 가려져있던 계획경제의 비효율성과 지도부의 무능이 유가 폭락과 함께 민낯을 드러낸 참이었다. 후임자 샤들리 벤제디드는 1989년, 국민 앞에서 다당제를 허용하고 의회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약속했다. 군부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30년 동안의 강압 통치 하에서 이슬람주의가 얼만큼 성장했는지, 그리고 군부 자신들에 대해 대중이 얼마나 큰 반감을 갖고 있는지 미처 알지 못했다. 당시 한 알제리인은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복수를 위해 이슬람구국전선에 투표했다”고 밝혔다. 대학 교육을 받은 24세의(혹은 <뉴욕타임즈>의 표현을 빌면 “이슬람 원리주의가 장래에 직접적인 위협이 될”) 알제리 여성조차도 “이슬람구국전선이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경제를 재건할 것을 기대한다”며 “이슬람구국전선에 투표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군부에의 반감과 이슬람주의의 시너지는 그 효과가 대단했다. 이슬람구국전선은 1990년 치러진 지방의회선거에서 과반의 득표율을 보이며 승리를 거뒀고, 이에 군부는 크게 당황했다. 중앙 의회 선거마저 이슬람구국전선의 승리가 확실시되자, 의회민주주의를 실현하겠다던 군부는 약속을 져버렸다. 군부는 전국에 군대를 배치하고 야당 인사들을 체포하기 시작했고, 이슬람주의자들과 군부의 충돌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그러나 이슬람주의자들은 어렵게 얻은 기회를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이슬람구국전선은 지하화•무장화되었고, 이슬람무장운동(MIA)•이슬람무장단체(GIA) 등 다양한 무장단체들도 연이어 반격에 나서면서 충돌은 곧 내전으로 발전했다. 요나 슐호퍼-불에 따르면, 특히 GIA와 같은 극단적 성향의 무장단체들은 이 내전을 ‘총력전’으로 받아들였으며, 단순한 정권 창출과 군부 퇴출 외에도 적대세력의 사회기반(민간인의 생명과 재산을 포함하는)까지 완전히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렇게 대립이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애초 온건 개혁을 통한 근대화를 주창했던 온건파는 설 자리를 잃었고, 어떠한 제3의 세력도 내전으로 빨려 들어가는 양측을 저지하지 못했다. 15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소위 ‘암흑의 10년’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집트, 무슬림형제단의 돌풍
오늘날 알제리의 이웃인 이집트와 리비아의 정치 상황은 ‘암흑의 10년’의 도돌이표라 할 만큼 20여 년 전 알제리의 그것과 유사하다. 특히 2013년 이집트의 쿠데타 이후, ‘이집트는 알제리의 반복’이라는 말은 이미 흔한 표현이 됐다. 2011년 2월,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전 대통령은 ‘자스민 혁명’의 영향으로 퇴진을 결정했고, 스스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면서 이집트 군 최고위원회(SCAF)에 권한을 이양했다. 차기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그의 선언을 들으면서 많은 사람들은 알제리의 벤제디드를 떠올렸다. 그럼에도 수천의 사람들이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에 모여 30년 독재의 종말에 기뻐했고, 오바마 미 대통령은 “이집트는 절대로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며 축하의 말을 전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헌법에 의하면 대통령의 권한을 임시 이양받아야 할 주체는 군부가 아니라 국회의장’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기쁨의 순간에도, 비극은 제 꼬리를 다 숨기지 못하고 복선을 흘리고 있었다.
무바라크 퇴진 이후 의회 선거가 실시되면서 정계의 표면으로 급부상한 것은 단연 무슬림형제단이었다. 1920년대 말 조직된 이 단체는 주로 지역사회에 뿌리내린 채 각지의 모스크를 중심으로 세력을 유지해왔다. 또 여타 이슬람 무장단체와는 달리, 무슬림형제단은 폭력적인 수단 외에도 의료와 교육, 복지 등으로 지역주민들의 필요를 직접적으로 충족시키면서 빠르게 영향력을 넓힐 수 있었다. 그러나 우수한 조직력과 비교적 탄탄한 사회적 기반을 갖췄음에도, 이들의 정권 창출은 요원했다. 가장 큰 장애물은 역시 정치권력을 독점한 채 버티고 있는 군부였다. 1950년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가말 압델 나세르는 외부로는 아랍 민족주의를 표방했지만, 내부로는 사회주의 독재 체제를 고수하며 여타의 정치세력들을 억압하고 있었으며, 무슬림형제단도 나세르의 암살을 기도했다는 죄목으로 1954년에는 아예 불법화되었다.
안와르 사다트(중심)와 그 뒤를 이은 무바라크(오른쪽 2번째)
나세르 사후 정권을 잡은 안와르 알 사다트는 전임자의 ‘나세리즘’으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린 채 ‘인피타’로 불리는 ‘자유화’를 추진했다. 정권 초기, 무슬림형제단은 나세리즘에 반대한다는 사다트의 단순한 정치적 필요에 편승해 다시 정계의 양지로 나오는가 싶더니, 사다트가 이스라엘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자 다시 정권으로부터 등을 돌렸다(사다트는 이후 이슬람주의자들에 의해 암살됐다).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는 정권에 대한 대중의 불만도 축적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사다트의 ‘자유화’가 정치 영역에서는 제한적인 수준에 머문 데다, 경제적으로는 식량보조금 삭감과 대규모 인플레이션 및 부정부패 등을 야기했기 때문이다. 특히 식량보조금 삭감은 식량 가격을 단번에 50%나 급등시켜, 1977년 이집트 ‘빵 폭동’을 초래할 정도로 대중의 비난을 받았다. 사다트의 부통령이었던 무바라크는 사다트의 정치 및 경제 체제를 거의 그대로 계승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무바라크 말기, 정권의 외면적인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실시됐던 선거는 비록 여당의 의석이 절대 다수로 보장된 ‘정치 쇼’였지만, 그 틈바구니에서도 무슬림형제단은 2005년 88석을 획득하는 성과를 보였다. 이러한 결과에는 60년 가까이 지속된 독재 정권에 대한 이집트 국민들의 회의와 무슬림형제단에 대한 기대가 함께 담겨 있었다.
기회가 왔다
2011년, 튀니지로부터 ‘아랍의 봄’이 불어왔을 때 무슬림형제단은 반정부 시위의 한복판에 있었다. 무슬림형제단의 리더 모하메드 무르시는 <가디언>에의 기고에서 “비록 우리는 이슬람주의에 기반하고 있지만, 특정 이데올로기를 이집트 국민들에게 강요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거부한다”고 밝히는 등 의도적으로 중도 노선을 취했는데, 이는 무슬림형제단을 반(反)무바라크 세력의 구심점으로 삼고자 하는 시도였다. 전략은 크게 성공했다. 2011년 11월 시작된 총선에서 무슬림형제단 계열의 자유정의당(FJP)은 47%의 의석을 차지하며 제1당을 차지할 수 있었다. 23%로 2위를 차지한 이슬람 원리주의 정당 알-누르와 온건 이슬람주의 정당 알-와사트 등을 모두 합치면 이슬람주의 정당이 70%에 육박하는 의석수를 확보한 셈이었다. 반면 알-와프드나 ‘이집트 블록(Egyptian Bloc)’과 같은 세속주의 세력들은 모두 합해도 20%를 넘지 못했다.
독재의 억압 하에서 60년을 보낸 무슬림형제단은 이제 정권 창출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이대로 대선까지 밀고 나간다면, 그리하여 만약 무르시가 대통령으로 당선이라도 된다면, 군부와의 오랜 대립에서 결국 웃는 것은 무슬림형제단이 될 터였다. 그러나 군부 역시 만만치 않았다. 무바라크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은 군 최고위원회는 헌법재판소에 영향력을 행사해 선거로 구성된 의회를 강제로 해산시켜 버림으로써 반격에 나섰다. 그나마도 행정권과 내각 임명권을 군 최고위가 독점하고 있어 사실상 이빨이 빠져있는 의회였다. 이제 무슬림형제단의 손에 남은 카드는 대선 하나뿐이었다.
조급한 무르시
대선은 압승에 가까웠던 총선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무르시는 결선 투표에서 무바라크 시절 총리를 지냈던 친군부 인사 아메드 샤피크를 52 대 48로 비교적 힘겹게 누르고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이슬람 극단주의를 경계한 온건파와 세속주의자들의 이탈이 그 원인으로 추측된다. 타렉 마수드 하버드 정책대학원 부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겉보기에는 그럴싸했던 정치적 이슬람주의에의 지지가 그 민낯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군부는 약속대로 모든 권한을 새 대통령에게 넘기고 정계의 표면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무르시는 아직 불안했다. 여전히 군부는 정치 및 경제 분야에서 많은 실권을 장악한 ‘실세’였다. 무슬림형제단과 무르시는 조바심을 내며 총선 이전에 표방했던 중도 노선에서 급격히 이탈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온건파와 세속주의자들의 우려는 현실화되었다.
2012년 11월 22일, 무르시는 대통령의 결정이 “최종적이며, 구속력 있고, 다른 존재나 어떠한 방식에 의해서든 항소될 수 없다”는 법안을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아랍의 봄’으로부터 2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무르시와 무슬림형제단의 태도 변화는 극적일 정도였다. 강력한 법을 기반으로, 무르시는 새로이 결성된 제헌의회를 좌지우지하며 이슬람의 율법 ‘샤리아’를 헌법에 녹여내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에 자유민주주의자들과 소수 콥트 기독교인들이 항의의 표시로 제헌의회에서 이탈해버렸고, 제헌의회 내에서 보수적•비타협적 이슬람주의 노선을 견지하는 살라피스트들을 견제할 세력은 사라졌다. 국제 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는 이 헌법 초안이 “표현과 종교의 자유를 보호하는 데 실패했다”고 평했고, 카이로 곳곳에서는 무르시의 강압적 행동에 대한 반대시위가 열렸다. 혁명에 가담했던 이집트 국민들은 새로운 대통령이 이전의 독재자들을 닮아가는 것을 우려했다.
리비아, 이집트의 반복
그 비슷한 일이 옆 나라인 리비아에서 그대로 재현됐다. 군부의 붕괴와 이슬람주의 세력의 득세, 그리고 이들의 정치 독점까지, 튀니지로부터의 서풍과 함께 격변기를 맞이한 두 나라는 1년의 시간차를 두고 비슷한 전철을 밟았다. 무아마르 알 카다피 축출 이후 합법적 국민선거로 구성된 임시 의회(GNC)는 원내 다수인 이슬람주의자들을 주축으로 하여 샤리아의 성문화를 시도했다. GNC 내 서열 2위면서 우수한 조직력을 가진 ‘정의와 건설’은 무슬림형제단 계파 정당이었으며, 노골적으로 샤리아의 성문화를 주장했다. 최대 정당인 ‘국민연합’은 비교적 온건한 편이었지만, 역시 “샤리아가 입법의 주요한 정신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슬람주의 정당의 색깔을 유지하고 있었다. GNC의 겨냥도를 고려했을 때, 향후 리비아 헌법이 극단적 이슬람주의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은 불가능해보였다. 2013년 12월, 헌법 구성 투표를 마치면서 GNC는 “이슬람 율법은 리비아에서 행해지는 모든 입법의 근간”이 되며, “모든 기관은 이에 순응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듬해 1월, 임기 만료를 앞두고 GNC는 일방적으로 스스로의 임기를 연장하기로 결의했다. 과거 이슬람주의 세력과 손을 잡고 카다피 축출에 힘썼던 세속주의 세력이 느끼는 배신감은 컸다.
칼리파 하프타 장군의 주도로 ‘작전명 디그니티’가 개시된 것은 그로부터 넉 달 뒤인 2014년 5월 16일이었다. 카다피 시절 장교로 복무했으나 정권에 반기를 들면서 미국에서 오랜 망명생활을 한 하프타는 카다피 축출 당시 세속주의 세력의 주요 군 지도자 중 하나였다. 그는 일종의 쿠데타였던 작전명 디그니티를 통해 벵가지의 이슬람 무장 단체들을 공격하고 GNC를 해산시키고자 했다. 이에 대해 이슬람주의 세력은 ‘작전명 리비아의 여명’으로 반격에 나섰다. 리비아 내 이슬람주의 세력들은 카다피 군사 독재 하에서의 탄압과 그 반작용으로서의 급진화라는, 알제리와 이집트 내 이슬람주의 세력들과 매우 유사한 경로를 밟아왔다. 거기에 더해 리비아 내 이슬람주의 세력은 이미 카다피를 상대로 군사행동을 벌인 경험이 있었고, 당시의 군대는 그대로 온존되었기 때문에 빠르고 조직적인 반격이 가능했다. 둘의 갈등은 단번에 무력 충돌로까지 발전했다. 새로운 내전의 발발이었다.
도돌이표는 아니고 변주곡쯤?
리비아의 갈등 양상은 알제리•이집트와는 조금 다른 양상을 띠기도 했는데, 그 주요한 요인으로 두 가지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독재 체제의 전복이 무력에 의해, 그것도 서방 세력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는 정치세력의 무장화와 급진화에 큰 영향을 주었고, 내전 기간 동안 심지어 지방의 군소 집단들조차도 투표용지가 아닌 총을 들고 반대세력에 맞서게 됐다. 이 당시의 경험과 조직은 카다피 사후 그대로 보존되어 두 번째 내전을 재연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뉴욕타임즈>는 2014년 11월의 기고문에서 “외부로부터 무기와 돈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와, 더 이상 무장단체들에게 전쟁을 멈추게 할만큼의 충분한 인센티브를 제공할 수 없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하나는 ‘부족’이라는, 리비아 정치•사회가 갖는 전근대적 정치 질서다. 알제리•이집트와는 달리, 카다피는 사회주의와 직접민주주의 등을 표방하면서도, 식민지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부족 단위의 정치구조에 여전히 의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수혜자는 카다피 자신의 일족과 그에게 충성을 바친 몇몇의 ‘선택된’ 부족들뿐이었다. 카다피는 근본적인 구조 변화는 제쳐두고 ‘자마히리야(직접민주주의)’와 같은 실험적인 정치 제도 등을 도입했으나 모두 실패했고, 끝내 리비아를 하나의 국민국가 단위로 용해시켜내지 못했다. 변화의 바람이 닥쳤을 때 이집트나 알제리에서 몇 개의 중앙 정당을 중심으로 정치갈등이 표출됐던 것과는 달리, 리비아에서는 천여 개에 달하는 지방조직들이 비교적 느슨한 연합을 이루며 분산적으로 출몰했는데, 이러한 차이도 카다피의 유산인 부족 중심의 정치질서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미진한 정치적 통합은 카다피 시절 내내 억눌려있던 연방주의자들의 재등장을 초래하면서 분열을 악화시키고 있다. 원래 세 지역(트리폴리타니아, 시레나이카, 페잔)의 연방이었던 리비아는 쿠데타 이후 카다피를 중심으로 하는 단일한 정치체제로 봉합됐으나, 카다피가 죽고 중앙정치권력에 공백이 생기면서, 그리고 그 공백을 GNC가 독점하면서 만년 ‘주변부’의 지위에 있던 시레나이카와 페잔이 과거 연방주의로의 회귀를 주창하고 있다. 특히 시레나이카는 2013년, 아예 독립된 정부를 세우며 스스로 총리를 임명하고 내각을 꾸려버렸다. 시레나이카의 정부수립으로 리비아에는 무려 세 개의 정부가 들어서게 됐다. 하나는 GNC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트리폴리에 위치한 이슬람주의자들의 정부이고, 다른 하나는 하프타 장군과 세속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토브룩의 정부이며, 다른 하나는 키레나이카에 만들어진 소위 ‘그림자 정부’다.
경직, 분열, 회귀
아랍의 봄은 실패했다. 북아프리카에서 독재 정권들이 연이어 무너질 때 표출됐던 막연한 기대감은 4년이 지난 지금, 완전한 회의로 바뀌었다. 리비아에서는 정부만 세 개가 들어서고 여기에 수많은 지역세력들이 엉키면서 나라는 완전히 분열됐으며, 정치상황은 수습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이집트는 어찌 되었는가? “또 다른 독재자일 뿐”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하던 무르시는 결국 군부의 쿠데타에 의해 전복되고, 무슬림형제단의 ‘2년 천하’도 허무하게 끝났다. 정권을 잡은 압델 파타 엘 시시는 무슬림형제단을 비롯한 이슬람주의 세력을 강경하게 탄압하며 “화해는 없다”고 못박고 나섰고, 이집트는 2011년 이전의 군부 중심 체제로 회귀했다.
카이로에서 열린 친무르시 시위.
알제리의 정치는 이미 20년 전에 이러한 분열과 혼돈의 시기를 오롯이 겪고 지금은 완전한 정체기에 들어서있다. 2003년을 전후로 GIA를 비롯한 굵직한 이슬람주의 무장단체들은 대부분 무너졌고, 내전은 군부의 승리로 일단락되었다. 2004년에 마다니와 벨하즈를 비롯한 과거 FIS 지도자들이 석방됐으나, 이들이 알제리 사회에 미친 영향력은 미미했다. 이후 10년간, 알제리의 정계에 큰 지각변동은 없었다. 군부와 여당은 작년 치러진 대선에서도 정치조직망과 자금력, 그리고 오랜 내전에서 비롯된 이슬람주의에의 피로감에 기반해 압승을 거뒀다. 고령에다 이미 몸져누워 유세 현장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하던 ‘얼굴마담’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가 80%가 넘는 득표율을 보이며 4선에 성공한 것은 알제리의 정치 상황이 얼마나 경직돼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집트과 리비아에게 있어 아랍의 봄은 군부 독재가 수십 년 간 키워 온 모순을 폭발시킨 촉매제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군부의 대안으로 정계의 표면에 고개를 내민 이슬람주의는 독재 체제 하의 오랜 억압에 대한 반발감과 새로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조급함을 양분 삼아 급진화된 뒤였다. 세속주의 성향이 비교적 강한 북아프리카에서 원리주의화된 이들은 전국민적인 지지를 받기 어려웠다. 애초에 그들이 정치의 표면에 등장할 수 있었던 주된 원동력도 종교 자체라기보단 오랜 독재에 대한 대중의 회의감이었다.
이슬람주의의 급진화는 독재의 산물이며, 따라서 이 두 나라에서 나타난 오늘날의 정치적 혼란이 필연적 결과라는 분석은 지나치게 가혹하다. 이슬람주의 세력에게도 분명히 선택지는 주어졌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무르시는 자유민주주의자들과 콥트 기독교 등을 포섭하면서 군부 대 반군부의 대결 구도를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었고, 그렇다면 군부를 물리칠 승산이 있었다. 리비아의 GNC 역시 세속주의 및 연방주의자들과 권력을 분담하면서 정부를 구성했다면 지금과 같이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들은 이웃인 알제리가 20년 동안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곱씹어 볼 여유를 갖지 못했다. 이렇게 이슬람주의와 세속주의, 혹은 이슬람주의와 군부의 극단적 대립은 알제리에게는 정치의 경직을, 이집트에게는 과거로의 회귀를, 리비아에게는 국가 전체의 분열을 가져왔다. 그리고 적어도 당분간은, 이 세 나라에 장밋빛 미래를 기대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김만희(고려대 국어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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