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세계대전 이후 국제 안보는 냉전의 블록 속에서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초강대국에 의해 규정되고 운영되었으며, 유럽은 보통 두 강대국들 사이에서 비교적 중립적인 행위자로 기능했다. 냉전 당시에도 서유럽은 대외정책을 펴는 데에 있어 독자성을 갖기 어려웠고, 국제분쟁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냉전이 종식된 1990년대 이후부터 적극적 개입 정책, 특히 군사 파병에 대한 EU의 인식이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2003년 이후 EU의 태도는 변하여 점차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통해 국제무대에서 주체적으로 활동하게 됐다.
소극적인 아이
20세기 후반 서유럽국가들은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후 대외정책을 실현하는 데에 있어, 대체로 무력 사용을 통한 개입을 꺼렸다. 2차 대전의 종전 이후 반세기 동안 EU는 대외적인 팽창 외교정책을 펴기 보다는 각국의 국내 재건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유럽 부흥 계획’이라고도 불리는, 1947년 7월부터 시작된 마셜플랜은 미국이 유럽과 일본내의 공산주의 확장을 막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럽을 재건하는 것 또한 중심 목표였다.
유럽 국가 내에서 세계대전이 남긴 상처들이 차츰 치유되고 기존의 양극질서가 붕괴되는 와중인 90년대에는 발칸반도에서는 여러 차례 분쟁이 발생하였다. 1992년부터 시작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분쟁은 유교연방으로부터 독립하려는 보스니아에 대한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인들의 반발로 인하여 시작되었다. 그러나 92년 유럽의 내부에서 시작된 이 분쟁에 대하여 유럽공동체는 약 25억 유로의 경제적 원조 외에 군사조치를 포함한 어떠한 적극적인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1995년, 결국 미국의 중재로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3개국은 제네바에서 영토 분할에 대해 합의하였고, 그해 11월 미국의 데이튼에서 내전 당사국들 간의 평화 협상이 이루어졌다. 이 자리에는 비록 유럽의 주요국들이 대거 참석하였지만, 평화 협상 체결을 이끄는 주된 역할을 한 것은 미국이었다. 그리고 3년 동안의 내전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던 보스니아 내전은1995년, 유럽국들이 아닌 UN의 평화유지군 파견으로 막을 내렸다. 유럽 내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해서 당시의 유럽은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더 주도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
마크 에이스컨스 벨기에 전 국무총리는 “EU는 경제로는 거인, 정치로는 난쟁이, 군사적으로는 지렁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정치, 군사적으로 힘이 부족했던 유럽은 이를 보완하기 위해 무엇보다 국가들 간의 통합이 우선이라고 생각했고, 1993년 11월 1일 유럽공동체(EC)에서 유럽연합(EU)로 새롭게 변화하였다. 이로써 EU회원국들은 공동의 외교 및 안보정책을 갖게 되었다. 이는 과거 유럽국들은 유럽 내의 분쟁을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던 위치로부터 점차 탈피하기 시작했고, 국제무대에서 보다 존재감 있는 역할을 하기 위해 점차 통합·성장해 나갔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점차 EU 국가들이 통합되어가는 과정에서 1998년에 발생한 코소보 사태는 EU의 외교안보정책 변화에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코소보 사태 직후 1999년 쾰른에서 열린 회담에서 유럽이사회는 EU의 군사력 및 공동방위능력 향상을 위해 유럽안보방위정책(ESDP)을 수립하였는데, 이는 EU회원국들의 군비와 병력의 통합과 유럽군 창설 등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그 후 EU는 특히 군사적인 면에서 독자적으로 국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 1999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유럽 정상회담에서 ‘European Headline Goal’을 발표하였다. 이 합의의 골자는 2003년까지 6만 명 규모의 유럽연합 신속대응군(ERRF)을 창설하는 것이었다. 또한 “베를린 플러스 조약(Berlin-Plus Agreement)”이라는 유럽안보방위정책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이 설정되었다. 베를린 플러스 조약은 국제 평화유지와 위기 관리를 위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관여하지 않을 경우, 유럽연합이 NATO의 병력을 이용해, 자신의 이름 아래 주도적이고 독자적인 군사 활동을 개시 할 수 있도록 허용한 조약이었다. 신속대응군의 창설과 베를린-플러스 조약을 통해 EU는 독자적이고 통합된 군사체제를 갖출 준비를 마쳤다.
‘콘코디아’, 최초의 단독 군사작전
2003년 EU는 국제 분쟁 조정을 위한 최초의 군사작전을 수행하였다. 신속대응군의 창설과 Berlin-Plus Agreement를 통해 갖추었던 군사체제를 이용한 외교정책을 처음으로 실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작전명 ‘콘코디아’ (Concordia)로 일컬어지는 불리는 마케도니아 평화유지 임무는 350명이라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파견 병력으로 마케도니아에서 벌어진 소수 알바니아인과 정부군간 분쟁을 조정하는 것이었다. 이 작전을 통해 유럽은 EU라는 주체로서 첫 군사행동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실질적으로 EU만이 직접 독자적인 군을 파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NATO의 병력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미국과의 합의는 선결조건이었고, 작전 중에도 미국이 보유한 정찰기와 전략수송기를 이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마케도니아 평화유지 임무를 NATO로부터 인수해 사상 첫 군사작전을 수행함으로써 EU는 점차 적극적이고 독자적인 군사정책 구조를 설립할 발판을 마련했다.
같은 해, EU는 미국과 NATO의 지휘 없이 또 다른 국제 분쟁 해결을 위해 독자적으로 군사 행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콩고의 소수민족인 해마족으로 이루어진 콩고애국자동맹(UPC)과 다수민족인 렌두 부족 민병대연합 등 2개의 반군단체 간 충돌로 이투리 지역에서는 지난 99년 이래 5만 여 명이 목숨을 잃고, 50만명의 난민이 발생하였다. EU는 이러한 콩고 분쟁의 중단을 위해 평화유지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고 프랑스가 주축이 되어 약 1,700명의 군사들이 NATO로 부터가 아닌 EU로 부터 직접 파견되었다. 이는 EU가 처음으로 유럽 외의 국가에게 군사를 지원했던 사례이기도 하다.
생각도, 마음도 하나될 수 있도록
90년대 말 부터 시작된 독자적 군사운영체제를 통해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EU도 군사작전을 통한 국제 문제 해결에 실질적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국제 무대에서 조금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EU가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펴는 과정에서, 현실적으로 모든 회원국들이 통일된 주장을 내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단일 국가 내에서의 의견 통합도 어려운 실정에서 다양한 국가들이 한 목소리를 내기에는 아직 경험도 부족했고 이해관계의 불일치도 컸다. 2003년 일어난 이라크 전쟁은 EU가 통합되어가는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하나된 목소리를 내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EU는 이라크에 무력을 사용하려는 미국에게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표출하였지만, 무력 사용여부에 대한 EU 회원국들 간의 의견 충돌이 있었다. <뉴욕타임즈> 에 따르면 시라크 프랑스 전 대통령은 “어떤 상황이 올지라도 프랑스는 무력사용 및 이라크 파병에 대한 거부권을 표명할 것”이라고 언급했으며, “전쟁 발발의 주 원인이 될 수 있는 이와 같은 행동에 대하여 찬성할 수 없다”는 의견을 밝혔다. EU 설립의 주축이었던 독일 역시 같은 입장이었지만, 두 국가들과 반대로 영국과 스페인은 미국의 의견에 동의하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라크 파병에 대한 회원국들간의 갈등이 고조되자 스페인의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전총리와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전총리는 “EU 회원국들이 모두 한 마음으로 공공의 위협(이라크)에 맞서자”는, 미국을 지원하기 위한 서명안을 내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EU의 대표국이었던 그리스의 아포 스톨 장관은 “이라크 전쟁은 EU의 통합 과정에 피해를 주고 있다”며 “만약 우리가 국제사회에서 유럽국으로써 영향력을 가지고 싶다면 통일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로가 공통된 외교 안보 정책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전쟁 당시 EU국가들은 하나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사춘기를 지나, ‘EU’만의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국제 무대에 나서기는 했지만, EU회원국들이 의견을 통합하는 데 겪었던 어려움은 시리아 사태를 계기로 점차 극복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2011년 3월 시리아의 독재자 알아시드의 퇴출에 대한 반정부시위로 시작된 시리아 사태는 2012년 내전으로 치닫기 시작하였다. 시리아 사태를 중단하기 위해 EU는 수 차례의 적극적인 제재 조치를 취하였는데, 이라크 전쟁 때와는 다르게 EU의 ‘주요 3국’인 영국, 프랑스, 독일이 비록 그 방법에 있어서 차이를 드러냈지만, 제재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데는 의견의 일치를 보였다. 다른 국가들 또한 세 국가의 의견을 지지하는 구도였다. 시리아 사태에 대해 EU는 적극적이지만 비군사적인 제재를 선호했다. 매년 미국과 유럽에서 실시되는 설문조사인 ‘범 대서양 경향(Transatlantic Trends)’ 에 따르면, 유럽 국민들의 71%가 EU가 세계 무대에서 리더가 되는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지만, 그 중 70%이상이 비폭력적인 제재 방법을 원한다고 밝혔다.
<뉴욕타임즈>는 시리아가 경제, 무역, 여행등의 분야에서 미국보다 EU와 더 친밀한 교류를 해왔다고 보도했다. 특히 EU는 시리아 전체 인산염 수출량의 40%를 수입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시리아에 대한 EU의 경제 제재 조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그 외에도 제재안에는 시리아 중앙은행의 자산동결, 다이아몬드·금과 같은 시리아산 귀금속 수입 금지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EU는 무력 개입보다는 이러한 경제 조치와 외교적인 접근을 통해 사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캐서린 에쉬턴 EU 고위 대표는 ‘시리아는 무력진압을 중단하고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고 공식적인 목소리를 내었으며, EU는 비샤르 알-아시드 시리아 대통령 정권에 대한 반정부 시위대의 유혈 사태와 관련해 2011년부터 2012년까지 수 차례에 걸쳐 제재 조치를 취하였다.
러시아의 ‘활약’에 숨 고르는 미국, 대타로 나서는 EU
EU의 가까운 동쪽에서 발생한 일련의 충돌과 위기들은 EU의 적극성을 보다 심화시켰다. 우크라이나 반정부 시위 이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무력 점거하고 크림자치공화국의 합병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 미국과 서방국가들, 특히 EU는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이러한 러시아의 행보가 나타났던 초기에는 미국이 서방국가들을 대표하여 공식으로 선언했지만, 곧 오바마 대통령이 독일의 메르켈 총리에게 러시아 제재 주도권을 넘긴 이후 독일을 위시한 EU는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여기에는 더 이상 모든 것을 혼자 떠안을 수 없다는 미국의 자기고백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독일과 러시아의 경제적 동맹관계는 EU가 더 일찍 강력한 조치를 취하는데 어려움을 주었기 때문에, EU는 초기에 러시아와 비자 면제 협상을 중단하는 등의 가벼운 제재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협상에 진전이 없자 메르켈 총리는 러시아의 은행 계좌 동결과 여행규제 등과 같이 제재의 수위를 높일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올해 3월 19일, 독일의 경제부총리 지그마르 가브리엘은 “독일 정부가 독일의 군사산업 기업인 라인메탈이 러시에서 진행하는 가상 전투 훈련장 건설을 중단시켰다”고 발표했다. 독일과 러시아가 2011년 체결한 ‘라인메탈 프로젝트’는 라인메탈이 러시아 볼가 지역의 뮬리노 시험장에 가상 전투 훈련 센터를 건설하는 프로젝트이며, 훈련장 건설은 러시아군의 연료 절약 및 장비 노후화의 감소 덕분에 몇 년 내에 그 진가를 발휘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었다. 시리아 사태 이후 EU는 군사조치를 제외한 경제적인 조치만을 취해왔었으며, 우크라이나 사태가 교착 국면에 접어들자, 차츰 제재 수위를 높여갔다.
우크라이나 사태 초기의 여러 제채 조치 이후, 러시아를 제재하기 위해 강경한 조치를 취해야한다고 하나된 목소리를 내었던 미국과 EU는 최근까지 조금의 의견 차이를 보였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사태를 더 심화 시킨 러시아에게 이전 보다 강력한 제재 조치를 취해야한다고 주장하던 반면, 프랑스와 독일은 미국이 주도하는 경제 재제에 대하여 이제는 직접적인 제재 보다는 대화를 통한 협상을 해야한다는 의견을 내새웠다. 미국은 러시아 정부가 대주주로 있는 8개의 기업들에 대해 미국 금융시장 접근을 차단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지만, 유럽은 유럽투자은행(EIB)과 유럽건설은행(EBRD)의 러시아 신규투자를 당분간 중단시키기로 하는 추가 조치만 취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결정적으로 유럽과 러시아 사이의 경제 투자 정도와 그 분야는 미국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고 다양한 것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7월 17일 우크라이나 남동부에서의 말레이시아 항공 추락은 또 다시 러시아 제재에 대한 EU의 입장을 혼란에 빠뜨려놓았다. 말레이시아 항공 MH17의 사망자 298명 중 193명이 네덜란드 국적이며, 이에 더하여 영국, 독일, 벨기에 국적을 합하게 되면 211명으로 전체의 71%가 유럽인이었던 것이다. 러시아와 우르라이나의 친러 세력이 개입된 것으로 추측되는 이번 항공기 추락 사고는 러시아에 대한 EU의 분노를 다시 한번 키울 수 밖에 없었다.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외무장관은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반군 간의 충돌을 줄이는 데 충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말했고, 7월 22일 결국 프란스 티메르만스 네덜란드 외무장관은, EU 장관들이 러시아 관리들에 대해 비자 금지와 자산 동결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고 발표하였다. 또한 <FOX NEWS>에 따르면 EU 집행위원회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물러서지 않을 경우 무기와 에너지, 금융 분야를 포함한 전면적인 제재에 나설 예정이라고 밝혔다. EU는 더 이상 과거의 소극적인 대외정책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또한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를 둘러싼 강력한 경제적 제재들은 러시아와 EU 사이를 예전과 같지 않게 만들었다.
EU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경제 거인”?, 중국과의 동반 성장 노린다
올해 3월 22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제3회 핵 안보정상회의 참석과 더불어 유네스코 본부와 EU 본부를 방문하였다. 중국 매체인 <신화통신>은 “시진핑 주석이 EU 브뤼셀 본부를 방문하여 중국과 유럽이 평화ㆍ성장ㆍ개혁ㆍ문명의 4대 파트너 관계를 구축할 것을 제안했다” 고 보도했다. 이에 대하여 EU의 반롬푀이 의장 또한 “시진핑 주석의 EU 본부 방문은 중국-유럽간 전략적 파트너관계의 탄탄함을 보여준다”고 보도하였다. EU가 국제정치적으로 발전하고 변화함과 함께 중국 또한 지속적이고 빠른 경제성장으로 국제적인 주요 행위자로 부상하며 EU와 가까운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이후 EU와 중국은 각종 국제현안 및 문제들에 대하여 서로의 입장을 공유하는 ‘전략적 동반자’적인 관계를 형성하였다. EU의 회원국들 가운데 독일과 네덜란드는 중국의 제1, 제2 무역파트너이고, 프랑스는 신중국과 대사급 외교관계를 처음으로 맺게된 서방국가이다. 중국과 유럽 국가들은 역사적으로 근본적인 이해충돌이 없고, 양측 모두 세계정치의 다극화를 주장하고 있다.
올해는 중국과 유럽이 <중국-EU 협력 2020전략계획>을 시작하는 해이다. <중국경제일보>는 이번 전략 계획은 “중-EU의 평화, 안전, 번영을 위해 지속가능한 발전, 인적자원 및 문화 등의 협력강화를 공동목표로 설정하였다”고 밝혔다. 이러한 전략계획은 경제, 정치 분야의 발전과 개혁의 시기에 놓인 중국과 유럽의 경제동맹관계를 더 가까워 질 수 있도록 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최근 몇 년간 중국과 EU 회원국들 간의 상호 교류도 빈번히 진행되어 왔으며, 20년간의 양국 무역 교류는 서로에게 큰 변화와 발전을 가져 왔다. 중국-EU의 호의적인 정치관계는 양자간 경제무역협력의 발전을 촉진하여 최근 몇 년간 중국-EU의 무역액은 해마다 20%이상씩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다. 만약 중국과 함께 경제 활력을 잃지 않고 지속 성장을 꾀할 수 있다면, EU의 결속력과 대외 발언권을 유지 및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근간이 마련될 것이다.
앞으로도 잘 해낼 수 있을까?
EU의 결성과 통합에는, 국제 문제에의 적극적 개입이 큰 영향을 주었다. 콘코디아 작전을 비롯한 1990년대 초 군사 작전은 EU가 기존의 소극적 성향에서 보다 적극적인 대외정책으로 탈바꿈하는 전환점이었으며, 동시에 대외정책과 안보 분야에 있어서 EU의 통합을 가속화하는 촉매로 작용하기도 했다.
EU의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대외정책의 방향에는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어느 정도 자율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빼놓을 수 없다. 이스라엘을 지지해오던 미국과는 달리, 2013년 EU가 이스라엘의 ‘그린라인’을 벗어난 지역과 정착촌내의 지역과는 경제적 교류를 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면서 이후 EU는 이스라엘과의 무역협정에서 여러 경제 제재 조치를 내놓았었다. (링크, 47쪽)
최근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공격에 대해서도 유럽 국가들은 하마스의 입장을 어느 정도 옹호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유엔인권이사회(UNHRC)는 “이스라엘내 군사작전으로 발생하고 있는 인권 침해를 강력하게 규탄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발표하였는데, 이 결의안에 대해 미국만 반대표를 던졌다. 또한 파리, 베를린, 빈, 암스테르담 등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는 반 이스라엘 및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가 진행되고 있다. 반면, 7월 18일부터 20일까지 실시된 CNN/ORC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57%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군사작전이 정당하다는 반응을 보였고, 10%만이 이스라엘의 무력 사용이 과도하다는 응답을 보인 바 있다. 양차대전 이후 EU와 미국은 대부분의 국제문제에 대해 서로 비슷한 입장을 취해왔지만, 미국 주도의 단극질서가 붕괴되기 시작하고, 미국이 동맹국들의 적극적인 ‘협력’을 요청하면서 EU의 자율성은 상대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한 때 세계의 강대국으로 불리우던 유럽의 몇몇 국가들과 더 많은 유럽국들이 합쳐져 현재 28개의 국가들로 구성된 EU는 현재까지 비교적 성공적인 국가 통합 기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장밋빛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2008년 그리스부터 시작된 경제위기와 여기서 비롯된 EU 내부의 갈등과 격차는 EU의 통합에 극복해야 할 장벽을 여실히 드러내주었다. 또 세계적인 경기 침체가 계속되면서, EU는 비록 중국과 접촉하는 등 개별적으로 활로를 모색하고는 있으나 내부에서는 통합에 대한 반발감 역시 커지는 듯하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최근 극우 정당들의 행보가 돋보이는 것도 이러한 국민 감정이 반영되는 까닭으로 보인다. 지난 50년 통합의 궤적 위에서, 과연 EU는 하나의 강력한 주체로서 다시금 국제 사회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힐 수 있을까?
표혜수(연세대 국제학)
sarahpyo8@gmail.com
김만희 (고려대 국어국문)
manhee8701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