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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남아시아의 두 앙숙, 인도와 파키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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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와 파키스탄은 60여 년 전 독립할 때부터 오랜 앙숙 관계였다. 양측은 국경을 맞대고는 있지만 서로 종교도 다르고 분쟁 중인 영토도 있다. 지금까지 세 번의 전쟁이 있었고, 수많은 무력 충돌과 테러가 벌어졌다. 그러나 이를 단순한 지역 분쟁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인도와 파키스탄 모두 핵보유국인데다, 이 관계에는 중국·아프간·탈레반을 비롯한 이슬람 무장단체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이번 <프리즘> 특집에서는 인도와 파키스탄 국내의 정치 상황과 양측의 갈등 양상을 살펴보고, 분쟁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카슈미르 지역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날이 갈수록 중요해지는 인도의 국제정치적 위치를 함께 조명해본다.

 

불씨는 큰 불이 된다: 인도와 파키스탄을 둘러싼 아시아의 확전

카슈미르: 60년의 분쟁, 4만 명의 무덤

Let the Sky Fall: 파키스탄의 군부 통치, 그 양날의 검

인도, 내 마음을 받아주오

인도, 내 마음을 받아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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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렌드라 모디 인도총리의 취임 이후, 인도에 대한 여러 국가들의 구애가 끊이질 않고 있다. 현재 첫 해외 순방국인 부탄을 시작으로, 브라질(BRICS 정상회담), 네팔, 일본, 미국을 순방하였고, 호주의 토니 애벗총리(9월 5일 인도방문), 중국 왕이 외교부장과 시진핑 국가주석이 인도를 방문하였다. 모디 총리의 이 같은 광폭행보는 국내 경제 상승세에 날개를 다려는 의도로 보인다. 남아시아에서 중국의 ‘진주목걸이 전략’과 일본의 ‘다이아몬드 전략’이 충돌하고 있는 가운데, 양국과의 외교에 있어서 한 쪽 편에 서는 것보다는 실리에 집중하는 모습이 이를 증명한다.

 

[중국] 오해하지마, 우리는 그런 뜻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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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년 명나라, 28년 7차에 걸쳐 이뤄진 정화의 남해원정 1차 원정이 시작되었다. 정화는 317척의 배와 2700명의 인력을 데리고 원정에 나섰었다. 7회의 원정 동안,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 말라카 해협, 스리랑카, 호르무즈 해협, 아라비아 반도 등을 거쳐 소말리아 등 아프리카 동부해안까지 원정에 나서 여러 국가들과 조공관계를 맺었었다. 2014년 현재, 중국지도부는 다시 정화의 영광을 되찾고자 한다. 2013년 10월 인도네시아 국회에서 시진핑 주석은 연설 중 ‘21세기 신(新) 해상실크로드’ 공동 건설을 제안하였다. 이는 2013년 2월 파키스탄 과다르항 운영권 인수, 방글라데시 치타공항 운영권 인수, 6월 스리랑카 함반토타항, 콜롬보항에 대한 막대한 투자 등 최근 중국의 해상 패권을 위한 노력이 단순히 구호에만 그치지 않음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인도 입장에서 자국을 둘러싸고 있는 중국의 ‘진주 목걸이’가 거슬린다. 가뜩이나 중국과 영토문제 등 앙금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중국의 인도양 진출은 좋게 보일 리가 없다. 모디 총리가 17년 만에 총리로서 네팔을 방문해 각종 투자를 약속한 점이 인도가 중국을 얼마나 신경 쓰는지 확연하게 보여준다. 네팔은 인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로 힌두교 문화를 비롯해 문화적 공통분모를 지닌 국가이다. 하지만 최근 중국 정부가 티베트 난민 단속, 인도의 군사적 움직임 감시, 히말라야 만년설에서 나오는 막대한 수자원 등 각종 이권을 위해 막대한 원조를 하면서 급속도로 중국과의 관계가 가까워졌다. 인도 입장에서는 더 이상 네팔이 친 중국화 되어가는 것을 볼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17년 만에 처음으로 국빈 방문을 해 1000억 네팔 루피(약 1조원)을 차관으로 제공하고 고속도로, 통신망, 댐 등 광범위한 지원을 약속하는 등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중국정부의 ‘진주목걸이 전략’이라 일컫는 과감한 남아시아 진출을 두고, 인도 내부에서는 “전략의 목표가 인도의 봉쇄”라는 말이 나오는 등, 인도정부는 중국정부의 남아시아 진출에 긴장하며 중국을 의식한 외교적 행보를 보였다. 중국정부는 이를 의식하고 ‘오해풀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9월 10일 류젠차오 중국 외교부 부장조리는 “중국은 군사적 수단을 비롯해 어떤 수단으로든 인도를 봉쇄할 의사가 없다”고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밝히는 등 중국은 인도를 봉쇄해야 할 경쟁자가 아니라 협력해야 할 동반자로 보고 있음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이와 맞물려 시진핑 주석은 서둘러 인도 순방에 나서서 ‘점수’를 따고자 하였다. 인도 순방에서 시진핑 주석은 모디의 정치적 고향인 구자라트주를 방문하는 등 인도에게서 점수를 따기 위해 노력했다. 인도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 시도를 공식적으로 지지하고, 200억 달러(약 20조 8000억 원)을 인도에 투자하기로 약속했다.

이번 중국과의 회담에서 인도는 중국의 투자를 얻어냈고, 또 중국, 미국, 일본 등 강대국가들에게 있어서 인도양의 ‘캐스팅 보트’임을 전세계에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민감한’ 1962년 양국 간의 전쟁 이후 국경 문제에 대해서는 원론적인 합의에 그쳤다. 심지어 이번 정상회담 기간 중에도 인도 군과 중국 군이 인도령 카슈미르 동남부 라다크에서 국경침범 문제로 대치한 점과 이례적으로 국경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강경하게 언급한 모디 총리의 말은 양국이 진정한 우방국이 되기 위해 국경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의 관계진전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일본]  나는 네가 원하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넌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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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언론들은 모디 총리가 임명되자, ‘인도의 아베’, ‘모디노믹스’ 등 수식어를 써가며 모디 총리와일본 아베 총리의 유사점을 내세웠다. 이들 둘 사이는 정책 성향뿐 만 아니라 개인적인 관계도 실제로 가깝다. 아베 내각 1기인 2007년과 자민당 총재로 재직한 2012년, 아베 총리와 모디 총리는 만남을 가진 ‘구면’인 사이로, 민족주의자인 행보나 친 기업적인 모습 등 여러 부분에서 공통점이 있다. 두 사람은 오랜 기간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인도 총선 결과가 나온 직후 아베 총리는 공개적으로 모디 총리와의 정상회담을 요구하는 등 친분을 드러냈다. 그 결과 9월 1일 정상회담이 성사되었다. 모디 총리의 첫 번째 행선지는 이례적인 수도 도쿄가 아닌 교토로, 교토에서 아베 총리가 직접 나서서 안내를 하는 등, 일본으로는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를 보였다. 이에 화답하듯, 2일 도쿄에서 열린 만찬에서 모디 총리는 2차 세계대전 후 전범들을 단죄한 극동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들의 무죄를 유일하게 주장한 일본 극우세력들이 열광하는 인도 출신의 라다비노드 팔 판사에 대해 “(그가) 도쿄 재판에서 한 역할을 누구도 잊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칭송해 아베 총리의 극우 행보에 추임새를 넣어주었다.

이 모든 아베 총리의 환대가 두 사람간의 개인적인 친분 때문일까? 답은 아니다. 현재 일본에게 있어서 인도는 너무나도 매력적이며, ‘중국’이라는 거대한 쓰나미를 막는데 있어서 매우 든든한 동반자라는 계산이 깔려있다. 2012년 12월 27일 아베 총리가 직접 기고한 “아시아의 민주적 안보 다이아몬드”에서 아베 총리의 구상이 잘 드러난다(https://www.project-sndicate.org/commentary/a-strategic-alliance-for-japan-and-india-by-shinzo-abe). 아베 총리는 이 글에서, 인도양에서부터 태평양까지 인도, 일본, 호주, 미국이 계속해서 세력을 확장하고, 인도양을 “중국의 호수”로 만들려는 중국의 팽창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리는 최근 ‘진주목걸이’ 외교로 인도의 뒷마당인 몰디브, 스리랑카, 네팔 등에 손을 뻗치는 인도의 공감을 얻게 한다. 또한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들어오는 자원을 실은 선박들은 인도양, 남중국해, 동중국해를 거쳐 일본으로 오는데, 이 자원수송로(Sea Lane)을 지키기 위해서는 첫 관문인 인도양에서 인도의 역할이 필요하다. 이렇듯, 외교, 안보 차원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인도는 일본에게 있어서 현재보다 더 가까운 관계를 가져야 할 대상이다. 대 중국관계가 악화일로를 걷는 상황에서, 12억 인구를 자랑하는 인도는 지속적으로 인구가 줄어 국내시장 규모가 작아지는 일본에게 있어서 상품시장으로서 가치가 매우 높다.

겉으로 보기엔 이번 양국 정상 간의 만남은 성공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본측은 인도 내 전력 시설과 물류 시설 정비를 비롯해 인프라 정비부문에 있어서 공격적인 투자를 약속하는 등 자신들이 제공할 수 있는 최대한을 제공하였으나, 이번 만남에서 일본측이 가장 핵심의제로 설정한 양국 외무.국방 장관 연석회담(2+2) 창설이 합의가 불발되었다.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인도 무역의 9%를 차지하고 있는 중국을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외무적, 방위적 대화를 이어나간다”라고 공동성명에서 수위를 낮춘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는 2주 뒤 있을 중국과의 회담을 계산해 중국을 지나치게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일본으로선 500억 엔(4853억 원)의 엔화 차관과 향후 5년 내에 인도에 대한 직접투자액을 2배로 올리겠다고 약속한 ‘선물’에 비해서는 인도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이를 두고 많은 일본의 언론들과 전문가들은 모디 총리가 9월 중순에 있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회담에서 일본을 이용해 중국에게서 더 많은 투자를 끌어들일 전략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는 8월 30일 일본 순방 전 일본 기자들과의 회견을 보면 잘 나타난다. 미국과 일본 중심의 아시아개발은행(Asian Development Bank: ADB)에 대항해 중국 중심으로 새로 만들고자 하는 아시아인프라개발은행(Asian Infrastructure Investment Bank: AIIB)에 참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밝히는 등, 인도는 애당초 중국에 대해 일본과 같은 톤으로 비난할 생각이 없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 중요한 건, 지금부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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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디 총리 개인적으로나, 인도 국민 전체로나 최근 몇 년간 미국과의 관계는 개선될 조짐이 보이지 않는 ‘답이 없는’ 관계였다. 미국 정부는 2002년 모디 총리가 구자라트주 주지사로 재직할 당시 발생한 반 이슬람교 집단학살을 방관하고, 심지어 학살을 조장했다는 이유로 2005년 인도 주재 미국대사관은 비자를 거부하였다. 미국 주재 인도 여성 외교관이 가사도우미에게 합당한 임금을 지불하지 않아 뉴욕검찰이 알몸수색을 하는 등 외교관의 면책특권을 두고 힘겨루기를 해 인도국민들을 들끓게 하였다. 또 미국국가안보국(NSA)가 모디 총리가 속한 현 집권당 인도국민당(BJP)를 감시한 사건과 올해 7월 만장일치여야 통과되는 세계무역기구(WTO)의 무역원활화협정(TFA)에 모디 총리가 ‘당당히’ 반대표를 던져, 인도와 미국의 관계를 ‘설상가상’이라고 표현하게끔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BJP가 총선에서 이기고 나렌드라 모디가 총리로 취임할 것이 불 보듯 뻔해지자, 미국은 서둘러 양국간의 관계에 ‘인공호흡’을 시작했다. 일단 2005년 미국 비자를 불허한 책임자이면서 올해 상반기까지 주 인도 미국대사를 지내며, 인도 정계와 사사건건 각을 세운 낸시 파월 전 대사를 사실상 ‘사직’시켰다. 모디 총리의 방미를 앞두고, 공석이 된 주 인도주재 미국대사 자리에 자신의 최 측근이자 국무부 법무 담당 차관보를 지낸 인도계 리처드 베르마를 지명하는 등 관계개선 의지가 있음을 인도정부에 보였다. 인도정부도 이에 화답하듯, 9월 30일 모디 총리는 오바마 대통령과 정상회담 및 UN 총회 참석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틀 동안 모디 총리를 세 번이나 만나고, 마틴 루터 킹 목사 기념관을 직접 안내하는 정성을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환대에도 불구하고, 정상회담의 결과는 ‘빛 좋은 개살구’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두 정상은 실로 지구상에 나타나는 모든 굵직굵직한 사안에 대해 논의하였다. “북한의 우라늄 농축 활동을 비롯해 핵무기와 탄도미사일 계발 계획을 우려한다”고 북한의 비핵화를 촉구한 점에서 현재 남한뿐 아니라 북한과도 수교하는 인도로서는 외교적으로 북한과의 관계악화를 감수하더라도 미국의 동북아 정책에 동조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또 두 정상은 이슬람 국가(IS) 등 글로벌 테러리즘 퇴치를 위해 지속적으로 공동노력을 하기로 합의했다. 이 밖에도 인도에 대한 미국의 대규모 투자 또한 약속되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사안인 무역원활화협정(TFA) 등 미국으로선 중대한 의제에 대해서 합의를 못 본 것이 미국 입장에서는 매우 아쉽다. 무역원활화협정(TFA)은 각 개별국가의 무역장벽은 낮추고 농업보조금은 축소하는 반면, 저개발 국가에 대한 지원을 늘리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인도를 비롯한 반대하는 국가들은 저개발국가의 식량안보를 위해서 정부의 식품 비축 허용을 촉구하며 반대표를 던졌다. 이는 전체인구의 30%를 차지하는 극빈계층과 전체 산업의 17%를 차지하는 농업을 고려한 결정이라고 해석이 된다.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인도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나 성과가 없었고, 내심 모디 총리와 오바마 대통령 간 정상회담 중 극적 타결을 기대하였으나 뚜렷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였다.

하지만 미국에게 있어서 이번 정상회담은 가시적인 성과는 없지만, 인도양에서 날로 세력을 확장하는 중국을 견제하는 데 있어서 인도와 공감대를 이루었고, 무엇보다도 올해 상반기만 하더라도 냉랭했던 양국관계가 정상화된 것에 의의가 있다. 모디 총리 또한 정상회담으로 ‘투자 확보’라는 목표는 달성하였고, 오바마 대통령의 극진한 대접으로 인도의 지정학적으로나 경제학적으로나 달라진 위상을 전세계에 보이는 자리였다.

 

[인도] 일단 선택은 보류할게 

인도 입장에선 중국, 일본, 미국 정상들에게 부진했던 자국 경제성장을 높일 수 있는 직접적인 투자와 경제적 지원을 약속 받아 고무적이다. 물론, 인도라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얻었다고는 할 수 없다. 특히, 일본과의 원자력협정체결 불발이 인도에게 있어서는 씁쓸하다. 원활한 전력 수급과 에너지의 안정적 공급이 경제의 ‘고질병’인 인도는 2020년까지 18기의 원전을 건설해 ‘고질병’을 치료하고자 계획하고 있다. 현재 원전을 가동해서 생산하는 전기량보다 100배 가량 높이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에 앞서서 미국, 러시아, 프랑스와 원자로를 구입하는 대신 핵무기 보유를 인정받은 것처럼 일본 또한 쉽게 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이번 협정을 통해 일본의 투자와 원전 건설을 지원받고자 하였다. 하지만, 인도가 핵을 보유하고 있으며, 핵연료에 관한 국제적 조약인 핵무기확산조약(NPT)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협정을 이끌어나가는데 여전히 걸림돌이 되었다. 일본 입장에서 협정이 체결되면, 도시바, 히타치, 미쓰비시 중공업 등 일본 내 업체들의 인도 원전 수주가 가능해져 경제적으로 큰 기회가 되지만, 피폭희생자 단체 등과 여론의 뭇매를 맞을 것이 예상돼 체결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는 인도에게 있어서 아쉬움을 남는다.

인도에게 있어서 이번 9월은 전 세계 국가들에게 있어서 강대국들의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지정학적으로 ‘캐스팅 보트’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아직 인도는 선택을 내리지 않았다. 혼돈의 미중관계, 인도양의 해양 패권, 에너지 수송로를 이용해 외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코끼리의 부흥을 예고하고 있다. 일본, 중국, 미국에게 있어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인도는 애간장을 태우는 ‘외교 밀당녀’다.

 

김준석(경희대 언론정보학)
rejune1112@naver.com

불씨는 큰 불이 된다: 인도-파키스탄을 둘러싼 아시아의 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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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특산물이 대추야자인 것처럼 남아시아의 특산물은 망고다. 인도와 파키스탄 전역에 걸쳐 생산되는 이 붉고 노란 과일의 단맛은 이들 국민에게는 자존심 대결의 대상이기도 하다. 남아시아 정치에서 망고의 단맛은 친선을 표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영국으로부터 나란히 독립한 후 파키스탄의 첫 총리인 리아콰트 알리 칸은 당시 마찬가지로 인도의 첫 총리였던 자와할랄 네루에게 망고를 보냈고, 이것이 “망고 외교”의 시작으로 여겨진다고 <인디펜던트> 지는 밝히고 있다.

정치에 망고의 단맛만 남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때로 망고는 폭력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1977년 군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해 1988년까지 파키스탄을 통치한 지아 울 하크 대통령 역시 망고 외교를 통해 인도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물론 동승한 31명까지 모두를 죽인 비행기 사고의 원인이 된 테러에서, 아직까지도 수많은 음모론을 양산하는 폭탄이 하필이면 망고 상자 안에 숨겨져 있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올해 5월,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신임 총리의 취임식에 파키스탄의 나와즈 샤리프 총리가 참석했다는 것은 보기 드문 희망의 신호였다. 그러나 매끄럽게 시작한 양국의 관계는 8월, 파키스탄 정부가 카슈미르 분리주의자들과 접촉한 것을 계기로 곤두박질쳤다. 이에 9월 UN 총회를 앞두고 샤리프 총리는 뉴델리로 망고를 보냈다. 대화의 물꼬를 다시 트자는 표시였다. 아직까지 가시적인 성과는 나오지 않았으나 이번의 망고 외교는 양국의 유서깊은 불화에서 선물과 폭탄 중 무엇이 될지 사뭇 주목해볼 만 하다.

불씨 3째문단 뒤 총구 앞

총구는 동쪽을 향해

파키스탄-인도 갈등의 핵인 카슈미르 분쟁은 영국이 식민지였던 남아시아를 인도와 파키스탄의 두 나라로 양분한 1947년까지 거슬러올라간다. 1947년과 1965년 그리고 1971년 인도와 파키스탄은 세 차례의 전쟁을 치렀다. 그러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기점으로 소련에 맞서 싸운 무자히딘 일부가 카슈미르로 유입되며 카슈미르의 폭력은 그 규모와 강도에서부터 달라지게 된다. 무자히딘의 이슬람 원리주의가 반인도 카슈미르 무장단체들과 결합한 것이다. 급진화된 이들은 파키스탄 군부의 묵인 내지는 지원 하에 카슈미르 지역 및 인도 국내에서 테러활동을 계속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1989년을 기점으로 카슈미르 분쟁이 인도령 카슈미르를 비롯한 인도 내의 테러 형태로 비화했다는 점이다. 1999년의 카길 전투는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령이 샤리프 총리의 친인도 노선에 맞서 인도령 카슈미르의 카길 지역을 침공한 결과다. 뒤이은 2001년 뉴델리 인도 의회 테러와 2008년 뭄바이 테러가 인도 내 카슈미르 분리주의자들의 테러의 대표적 예다. 1989년 이래 카슈미르 분쟁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최소 5만 명에 달한다.

파키스탄 군부가 아프가니스탄 내의 테러를 방관 및 후원했던 이유가 주적인 인도 때문이라면, 그 인도와의 국경에서 군부의 모르쇠 정책은 더욱 조직적으로 이루어진다. 인도의 공개적 비난에도 카슈미르에서 인도에 대항해 싸우는 라슈카르 타이바(Lashkar-e-Taiba)나 히즈불 무자히딘(Hizbul Mujaheedn) 등 지하드 조직의 활동은 묵인하는 것이다. 파키스탄 관료들은 <포린 어페어스>와의 인터뷰에서 “군부의 지원을 받는 이들과 싸우기는 쉽지 않다”고 증언한다. 설사 미국 및 인도의 반발에 이들 조직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불법화한다손 치더라도 파키스탄 및 그 영향권이 미치는 아프간과 카슈미르에서 이들의 행동은 크게 제약받지 않는다. 가령 2001년 뉴델리 인도 의회 테러 이후 파키스탄에 가해진 인도의 외교적, 군사적 압박에 파키스탄의 무샤라프 대통령은 테러를 자행한 라슈카르 타이바를 불법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이들 조직은 때로는 이름을 바꿔 가며, 때로는 조직을 분할해 가며 다시 수면 위로 나타났고 파키스탄 내에서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았다. 이렇듯 정부가 묵인해 준 이들의 활동은 2008년 뭄바이 테러라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목에 1천만 달러의 현상금이 달린 이들의 지도자 하피즈 사이드(Hafiz Saeed)는 여전히 카라치와 이슬라마바드에서 반인도 집회를 조직하고 자금을 모금할 수 있으며 트위터는 물론 텔레비전 방송에서도 파키스탄 군부의 열렬한 지지자임을 숨기지 않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근 알 카에다의 수장 아이만 알 자와히리는 인도에 알 카에다 지부를 설치했다고 발표했다. 이미 카슈미르는 파키스탄 군부와 인도와 파키스탄 정부 간 알력싸움으로 충분히 복잡한 지역이다. 불타는 집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다.

 

It’s Complicated

이 지역이 더욱 불안정한 이유는 확전의 가능성 때문이다. 여기에는 카슈미르를 중국, 인도, 파키스탄 3국이 공유한다는 현상적 불안정성의 요소가 가장 크다. 그러나 인-파 분쟁의 불길이 카슈미르에서 끝나지 않는다면, 통제할 수 없는 불씨라면 어떨까. 남아시아 및 중앙아시아는 인도와 파키스탄을 둘러싼 정치경제적 관계로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곳이다.

파키스탄 군부가 아프가니스탄과의 국경에 걸친 연방직할부족구역(FATA)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아프간탈레반 및 하카니 네트워크를 이용해 아프간 내 불안정을 야기한다면 이에 대한 아프간 정부의 입장이 우호적일 리 없다. 적의 적과는 친구가 될 수 있으며, 아프간 정부가 손을 뻗친 곳이 바로 파키스탄의 주적 인도다.

아프간-인도의 친밀한 관계에는 역사적 맥락이 있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간 침공을 기점으로 파키스탄은 무자히딘을 지원했지만 인도는 아프가니스탄에 수립된 친소 정권을 승인한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였다. 이후 1996년 탈레반 정권이 수립되자 인도는 이에 맞서는 반정부 조직들에게 대규모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강대한 타지크 족을 중심으로 모인 비파슈툰 무자히딘 세력인 북부동맹이다. 탈레반이 승리한 후에도 인도는 북부동맹을 지원했고, 뉴델리에서 아프간의 외교를 대표한 것은 탈레반이 아닌 북부동맹이었다. 파키스탄, 이란, 미국 등 강대국들의 파도에 반 세기 넘도록 휘말려 온 아프가니스탄에서 북부동맹이건 어느 집단이건, 꾸준한 지지는 흔치 않은 일이다. <타임>지는 인도가 이를 통해 아프가니스탄에게 신용을 입증하는 데 성공해냈다고 설명한다.

천연자원이 풍부한 중앙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과 모두 국경을 접한 아프가니스탄은 중앙아시아로 통하는 인도판 실크로드, 최적의 교통로다. 그러나 단순히 정명가도 식의 ‘교통로’로서 아프가니스탄이 중요한 것만은 아니다. <포브스>지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의 미네랄 시장은 최소 1조 달러, 최대 3조 달러의 가치를 가진 시장이기도 하다. 인도의 소프트파워 역시 주목해볼 만한 요소다. 발리우드는 아프가니스탄의 영화관과 브라운관을 장악한 지 오래다.

문제는 양국이 파키스탄을 사이에 두고 있다는 데 있다. 파키스탄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인도로 통하는 무역로, 즉 수출길은 막지 않지만 인도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의 무역은 막아 왔다. 그러나 파키스탄 없이 인도는 아프가니스탄과 연결될 수 없다. 아프간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로 뻗어나가는 인도의 통로 또한 막히는 셈이다.

이에 인도가 내세운 대안이 아프가니스탄의 또다른 이웃, 이란이다. 인도가 투자한 아프가니스탄의 칸다하르-헤라트 도로와 자란즈-데랄람 도로를 통해 인도는 파키스탄을 우회해 중앙아시아 및 이란을 거쳐 아프가니스탄과 연결될 수 있다. 육로뿐만 아니다. 인도가 1억 달러를 투자해 개발된 이란의 차바하르 항구는 아프가니스탄에게도 파키스탄 경제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는 ‘숨통’이지만 인도에게도 그 중요성은 결코 작지 않다. 물론 미국 및 이스라엘과 인도가 맺는 우호적 관계, 또 중국과의 경쟁을 고려해볼 때 인도가 노골적으로 이란과 친선을 도모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상업으로 묶인 인도와 이란의 관계는 굳건하다. 석유와 가스가 주종목인 양국 간 거래는 2010년 140억 달러에 달하는 규모를 기록했다.
불씨 6째문단 뒤 칸다하르 헤라트 도로

파키스탄의 머리를 덮은 중앙아시아는 어떨까. 전세계 네 번째 에너지 소비국인 인도에게, 중앙아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통한 에너지 수급원 다각화는 당장 나라 경제와 직결된 문제다. 인도는 러시아, 중국,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의 6개국이 모인 지역안보기구인 상하이협력기구(SCO)의 옵저버 자격을 유지하고 있으며 타지키스탄의 수력발전소에 1700만 달러를 지원했고 아프간-파키스탄을 거쳐가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관련해 투르크메니스탄과 협력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 이들의 경제동맹은 군사 분야로도 확장될 가능성을 암시하기 시작했다. 인도의 에너지 수급만이 중요한 현안이라면 타지키스탄의 파르카르에 인도군의 첫 국외 기지인 파르카르 공군 기지가 설치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이란,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에게 인도가 손을 뻗어 파키스탄을 둘러싼 형세는 인도판 봉쇄정책처럼 느껴진다.

 

“히말라야보다 높고 인도양보다 깊은”

이에 파키스탄이 찾은 대항마가 다름아닌 중국이다. 주미 파키스탄 대사를 지냈던 후세인 하카니는 CFR과의 인터뷰에서 “중국에게 파키스탄은 인도에 맞서는 값싼 대항마, 파키스탄에게 중국은 인도에 대항하는 강력한 보증인”이라 설명한 바 있다.

이 기묘한 우정의 시작은 파키스탄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한, 국제사회의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였던 1950년까지 반 세기를 훌쩍 거슬러올라간다. 1962년 중국-인도 전쟁에서 인도가 참패한 후 파키스탄은 중국에 더욱 기대기 시작했다. 파키스탄은 중국이 국제적 고립을 맞은 60년대와 70년대에도 중국의 굳건한 우방 역할을 수행했다. 대신 중국은 파키스탄에게 핵 기술 및 군사기술을 전수해 주고, 미국이 핵개발로 인한 파키스탄 제재에 시동을 건 1990년대에도 파키스탄에 대한 중국의 지원은 꾸준했다. 일각에서는 중국이, 이란의 핵 기술이 파키스탄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정치군사적 요인 외에도 파키스탄과 중국은 경제적으로도 끈끈한 관계를 자랑한다. 1963년 처음으로 양국 간 무역협정이 체결되었고 2008년에 중-파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었으며 현재 양국의 무역 규모는 연 70억 달러에 달한다.

후진타오 전 주석의 말마따나 “히말라야보다 높고 인도양보다 깊은” 중국과 파키스탄 간 우정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것은 과다르 항구다. 과다르는 단순한 항구가 아니다. 세계 원유생산량 40퍼센트가 지나가는 호르무즈 해협을 코앞에 둔 곳, 인도양과 수에즈 운하로 통하는 바닷길을 여는 곳이 바로 과다르 항구다. 중국은 이 항구 건설비용의 8할을 댄 대신 사실상의 “자유이용권”을 얻어냈다. 호르무즈 해협에 중국이 굳건하게 발을 붙이고 있는 것이 미국과 인도의 입장에서는 달가울 리 없다. 과다르 항구는 자원이 풍부한 중국 서부 신장 지역과 인도양을 잇겠다는 거대한 구상인 ‘카라코람 하이웨이(Karakoram Highway)’ 및 에너지 수급원의 확보 및 다양화라는 오래 된 목표의 실현계획인 ‘카라코람 코리도어(Karakoram Corridor)’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1300km를 상회하는 엄청난 길이의 이 도로를 짓기 위해 중국은 히말라야 산맥을 문자 그대로 뚫었으며, 자연재해와 부실한 도로 상태라는 난점이 있으나 카라코람 하이웨이는 중국과 과다르 항구를 잇는 유일한 육로다.

그러나 중-파 관계는 기본적으로 중국에게 기울어진 불균형적 관계다. 중국이 인도에 대항하기 위한 파키스탄의 유일무이한 선택지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중국과 파키스탄의 국내 불안요소가 가진 연결고리다. 아프간 국경의 연방직할부족구역(FATA)에 자리잡은 테러단체가 아프간탈레반뿐만은 아니며, FATA가 “체첸에서 위구르까지 세상의 모든 테러단체”라는 <이코노미스트>의 평처럼 신장의 위구르족 분리주의자들 역시 FATA에 은거하고 있다. 2005년 아시아서베이언론(Asian Survey Article)의 지아드 하이데르(Ziad Haider)에 의하면 위구르 무장단체들은 탈레반을 키워낸 파키스탄의 마드라사(‘신학교’)에서 무자히딘과 함께 수학했고 탈레반과 함께 소련에 맞서 싸웠으며 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도 미국에 맞서 싸웠다. 이들에 대한 파키스탄 군부의 지원 현황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중국이 파키스탄을 무턱대고 신뢰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흥미로운 것은 아프가니스탄-인도, 파키스탄-중국의 관계가 신기할 정도로 꼭 닮은 거울상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안보딜레마 현상을 보이는 이들의 동맹에는 역사적 계보가 있고, 공통의 적이 있으며 정치적 동맹이라는 한 국면에만 머물지 않고 군사 및 경제 영역으로까지 확장된다. 인도-아프가니스탄에게 차바하르 항구가 있다면 중국-파키스탄에는 과다르 항구가 있다.

 

묵은 때는 벗기기 힘들다

단선적 역사인식은 편리하지만 그 오류를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2014년에는 새로운 위협들이 나타났다. 급진 이슬람 부흥주의가 다시금 부상했고 마치 <혹성 탈출>처럼 에볼라가 대륙을 건너 발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새로운 위협 앞에서도 해묵은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은 아직도 국가를 갖지 못했고 동아시아는 아직도 공동의 역사를 알지 못한다. 실제로 위협과 갈등들은 마치 에스컬레이터처럼 순차적으로 풀리고 사라지고 나타난다기보다는 층위를 더해 축적된다는 느낌을 준다. 이런 상황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의 갈등은 특히나 위협적이다. 핵전쟁의 위협은 물론이고 아프가니스탄은 물론 중앙아시아와 중국, 이란, 이제는 알 카에다와 미국까지 연쇄적으로 줄줄이 끌려들어갈 수 있는 뇌관의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현실화된 것들의 무게를 보다 적확하게 파악한다는 의미에서 가정이란 중요하다. 그렇다면 파키스탄과 인도가 앙숙이 아니었더라면 현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탈레반과 마찬가지로 핵전쟁의 위협은 훨씬 작았을 것이고 5만 명의 무덤도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반 세기 동안 일어난 최악의 홍수로 양쪽이 고통받는 가운데서도 증오와 책임론이 앞서는 현재의 모습도 없었을 것이다. 1949년 시작되어 아직도 마무리되지 않은 인도-파키스탄 갈등에서, 파키스탄 군부와 나렌드라 모디의 충돌은 역사의 또다른 층위로 남게 될지 모른다.

 

박정민(연세대 정치외교)
jay17289@gmail.com

Let the Sky Fall: 파키스탄의 군부 통치, 그 양날의 검

무제-4

Occupy Islamabad

한반도 4배 크기, 2억 인구의 이 광대한 파키스탄에서 처음으로 한 민주정권이 다른 민주정권에게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하게끔 한 2013년 파키스탄 총선은 과연 민주주의의 시작이었을까. 실제로 선거는 꽤 공정했다. 물론 크고작은 사고들은 있었다. 파키스탄 선거관리위원회도, 선거를 감시한 국제 NGO들도, 선거에 패배한 파키스탄인민당(PPP)의 아민 파힘도 아프가니스탄에서와 같은 대규모 이의는 제기하지 않았다. 2008년 선거에 이어 2013년도 그런대로 무탈한 선거였다. 파키스탄무슬림연맹(PML)를 이끄는 나와즈 샤리프가 세 번째로 총리직에 당선되었고 그 숙적인 PPP가 야당을 차지했다. 또다시 파키스탄 정치는 PML과 PPP 양당 간 땅따먹기라는 묵은 체제의 연장일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야당 ‘정의를 이끄는 운동’(Pakistan Tehreek-e-Insaf, PTI)를 이끄는 야당대표이자 파키스탄 북서부의 강대한 키베르 파크툰크와 주 주지사인 임란 칸(Imran Khan)은 도무지 선거결과에 동의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8월 14일 독립기념일을 기해 임란 칸은 무장한 지지자들을 이끌고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대대적 연좌시위를 벌였다. 나와즈 샤리프 총리가 이끄는 현 여당 PML이 전국적, 조직적 부정선거를 계획, 자신이 이끄는 PTI의 승리를 빼앗았다는 이유였다. 총리의 무조건적 사임을 요구하는, 한 달 간 이어질 농성의 시작이었다. 뒤이은 17일 PTI의 국회의원들은 국회는 물론 파키스탄의 네 주 중 3개 주인 신드, 발로치스탄, 펀잡 주 의회에서 사임해 총리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였다(키베르 파크툰크와 주 의회에서의 사퇴 여부는 밝히지 않았다). 뒤이어 캐나다 출신 수피 성직자인 타히르 울-까드리(Tahir ul-Qadri)와 손잡고 지지자를 이끌어 이슬라마바드로 진군, 주요 도로 및 일부 정부시설을 손에 넣고 총리관저 및 국회가 위치한 파키스탄 정재계의 중심 레드 존(Red Zone) 앞까지 장악했다. 당시 칸과 함께 수도의 일부를 점거한 지지자들은 7만 명. 시위라기보다는 포위봉쇄에 가까운 형세였다.
LSF Occupy 2째문단 뒤

칸과 까드리의 명령 하에 시위대 일부가 총리관저를 침입할 정도로 사태가 악화되자 샤리프 총리는 이슬라마바드의 치안유지 및 정부시설 보호를 위해 파키스탄의 강력한 군부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군부를 이끄는 라힐 샤리프 육군참모총장(나와즈 샤리프 총리와는 인척지간이 아니다)은 임란 칸에게 24시간 내 정치혼란을 수습할 것을 통보하는 한편 칸과의 협상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한데 군부의 개입에 대한 칸의 반응은 상당히 특이하다. 샤리프 총리의 사임을 요구하면서 그는 “군부에 의해 끌려나가기 전까지 총리는 사임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실수’를 했다. 군부가 총리가 아닌 칸의 시위대를 제지하기 위해 개입했다는 사실과 아귀가 맞지 않는다. 임란 칸이 군부로부터 비밀리에 지원이라도 받은 것이 아니라면 나올 수 없는 말이다. 게다가 문제는 군부와 임란 칸의 공모라는 음모론이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군부와 총리 간 관계가 ‘냉랭하다’는 말로는 한참 부족한, 뿌리깊은 미움과 힘겨루기로 얼룩진 관계라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여기에다 PTI 고위급 인사인 자베드 하셰미가 영국의 <텔레그래프> 지와의 인터뷰에서 “임란 칸이 군부가 PTI와 공모해 반정부 시위를 계획하고 있다고 했다”고 폭로함으로서 음모론에 기름을 부었다. 군부는 이를 부정했으나 군부가 시위 진압에 소극적이었다는 사실, 총리 관저를 침입한 무장 시위대의 진압에 “무력을 쓰지 말라”고 정부에 요청한 사실은 명백하다. 파키스탄 언론 역시 이 음모론에 가세하는 듯하다. “이 군부는 중립적일 수 없다. 선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파키스탄 일간지 <돈>은 평했다.

크고작은 사고가 끊이지 않았던 총선이 과연 정부 주도의 부정선거였는지는 알 수 없다. 군부와 임란 칸의 공모라는 음모론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가장 불확실한 것은 파키스탄 민주주의의 미래다. 정부의 사임을 촉구하며 수도 일부를 점거한 시위대와 “난국의 타개”를 위해 개입한 군부. 2013년 7월의 이집트라고 해도 믿을 것만 같다.

 

닮은 사람끼리는 싸운다

1년 넘게 지속되어 온 파키스탄 군부와 총리의 알력싸움에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 “국가 내 국가”라고도 불리는 군부는 1947년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이래 때로는 쿠데타를 통한 직접 통치로, 때로는 민간 통치로 파키스탄을 통치해 왔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포린 어페어스>의 크리스틴 페어(Christine Fair)는 파키스탄 군부에게는 일종의 “쿠데타 각본”이 있다고 설명한다. 군부의 권력 장악은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 군부의 정당성을 위해 필요한 것이 정치적 난국과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민간 정부의 무능함이다. 이 정치적 난국 속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군의 합참의장은 자신을 국가수반-혹은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한다. 다음, 군부는 헌법의 효력을 중지시키고 의회를 해산하며 대법원 판사들로부터 지지를 획득한다. 그러나 군대 홀로 입헌민주주의를 채택한 파키스탄을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 때문에 이들은 “국회”를 조직하며, 여기에는 기존 당에 대한 충성과 군부가 하사하는 권력을 맞바꾼 정치인들이 모인 “여당”과 ‘어중이떠중이’ 파키스탄 이슬람주의 정당들이-마찬가지로 군부의 승인 하에-모인 “야당”이 모두 포함된다. 만일 신정부가 대중의 지지를 사지 못한다면 군부는 일정 시간 후 직접통치를 중단하며, 이렇게 되면 군부와의 협력을 거부하고 중앙권력에서 밀려났던 정당들이 다시 대중의 표심을 얻기 위해 선거활동에 돌입한다. 민주주의가 군부의 손가락 끝에서 살아남는 방식이다.

그러나 군부 독재기간 동안 이들 정당들은 가치나 경제정책보다는 무능함만을 증명했을 따름이며, 민간 통치의 복귀 후에 군부 독재에 협력한 정치인들 및 법조인들이 중앙정부에서 밀려나는 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정치권력이 길지 않다는 두려움 때문에 정부는 파키스탄의 정치경제적 발전보다는 일신의 부를 축적하는 데 더 집중한다. 실제로 90년대 민간 정부의 생명은 3년을 넘긴 적이 없었으며, 그동안 대국민적 지지를 기반으로 발전과 통합을 이끌어냈어야 할 총리직은 부패했던 PPP의 베나지르 부토와 비슷한 정도로 무능했던 PML-Z의 나와즈 샤리프가 벌이는 핑퐁 게임의 탁구공 정도로 전락했다. 이렇게 군부의 ‘정치 통제’는 직·간접적 방식으로 70년 가까이 유지될 수 있었다. 파키스탄 헌법 하에서 반역은 사형까지 언도받을 수 있는 범죄임에도 독립 이래 어떤 군 장성도 반역 혐의로 기소당한 적이 없다는 것이 지금도 이어지는 군부의 영향력의 가장 명백한 증거다. 이쯤 되면 70년 가까운 역사에서 군부 쿠데타가 세 번밖에 일어나지 않은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 지경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군부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1977년부터 1988년까지 대통령으로서 파키스탄을 통치한, 2차 군부 쿠데타를 이끌었던 지아 울 하크 대령이 파키스탄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그가 주도한 헌법개정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헌을 통해 이전까지 상징적 존재였던 대통령이 총리와 주지사, 고등법원과 대법원의 판사들 및 대법원장을 지명할 수 있는 권력의 핵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더군다나 개정된 헌법 58-2(b)조를 통해 대통령에게는 국회와 주 의회를 해산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 그 결과로 1988년, 1990년, 1993년 그리고 1996년까지 대통령령에 의해 차례로 국회가 해산된다. 쿠데타 없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일어나는 정당정치의 붕괴다. 1997년 또다시 군부는 헌법 58-2(b)조를 적용해 국회를 해산하려 들었고, 예외적으로 당시 총리는 해당 조항을 폐지하려는 무모한 시도를 감행한 끝에 국회의 해산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2년 후 군부 쿠데타로 결국 정부는 또다시 무너지고 만다.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령이 주도한 1999년의 군부 쿠데타로 실각한, 당시 두 번째 임기를 보내던 이 총리가 바로 현 총리인 나와즈 샤리프이며, 당시 무샤라프와 함께 쿠데타를 주도한 인물들이 바로 현재의 군 장성들이다. 2014년의 알력싸움은 고스란히, 20년 전 일어난 쿠데타의 연장인 것이다. 이런 군부에게 민주선거로 당선된 총리가, 군부가 전통적으로 장악한 외무부 및 국방부 직위를 빼앗아 민간인에게 넘겨주는 총리가 달가울 리 없다. 게다가 PML-Z는 의회 다수석을 차지하고 있으며 총리는 이전까지 독립성을 인정받아 온 군부에게 민간 통치를 강제하려 들고 있다. 무샤라프의 뒤를 이어 육군참모총장직을 맡은 아시파크 카야니의 후임으로, 카야니 본인이 선호하던 후보 대신 라힐 샤리프 중장을 앉힌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미 군부와 샤리프 총리는 미디어 문제로 한 차례 칼을 겨눈 바 있다. 오랜 군부 통치의 결과로 파키스탄 언론은 군부 휘하에 있는 파키스탄 정보부 ISI를 직접적으로 입에 올리지 못한다. ISI를 거론해야 할 때는 파키스탄 정보부라는 공식명칭 대신 “기관”, “지부”라고-때로는 “천사”라는 아이러니한 은어로도-부른다. 이런 분위기에서 파키스탄 내 친정부 성향의 상업방송 게오의 스타 아나운서 하미드 미르가 발루치스탄 주의 분리주의자들에 대한 파키스탄 정보부의 처우를 방송에서 공개적으로 비난한 후 의문의 총격을 받은 것이다. 샤리프 총리가 혼수상태에 빠진 미르를 방문한 것은 그 다음날의 일이다.

 

우리들만의 싸움이 아냐

대륙을 막론하고 국경은 두 주권의 분리가 일어나는 불안정한 지대다. 국경이 상정하는 것은 접경국의 존재뿐만이 아니다. 국경은 불법 이민, 밀수, 마약 밀매 등 법의 테두리를 넘어선 영역의 숙주이기도 하다. 기생식물이 강해지면 숙주가 약해지듯, 이 영역이 강해질수록 국경은 불안정해진다.
LSF 누구의 위협인가 2째문단 뒤

파키스탄은 어떨까.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과의 국경인 듀란드 라인에 걸친 영역을 차지한 것은 인신매매범도 밀수업자도 아닌 탈레반이다. <프리즘> 7호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이것이 가능한 것은 아프간-파키스탄 국경선에 걸친 연방직할부족지역(FATA)가 극도로 위험하고 험준하여 중앙정부의 통제가 미치기 힘든 지역이기 때문이다. 빼곡하게 들어찬 산맥 덕에 세계 최고의 자연요새라 불리는 FATA는 1890년대 파키스탄이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 전까지 어떠한 중앙통치도 받아 본 일이 없으며, 식민통치 중에도 세금 및 형법에서 자유로웠다. 독립과 뒤이은 파키스탄 건국 후에도 이 전통은 변하지 않았다. 파키스탄 국부 무하마드 알리 진나는 주 의회를 설치하는 대신 이들의 자치를 인정했으며 군대마저 철수시켰다. 대신 FATA를 통치하는 것은 와지리스탄을 근거지로 삼은 강력한 파슈툰족이며, 이 파슈툰족은 알 카에다 및 탈레반의 핵심 세력이다. 이들 모두가 본디 와지리스탄에 터를 잡고 살았던 것은 아니다. 이들 중 일부는 2001년 미국의 아프간 침공 후 불안정한 국경을 넘어 파키스탄으로 건너온 아프간탈레반이다. 이에 미국은 파키스탄에 대한 경제원조를 조건으로 FATA를 중심으로 한 테러단체들을 진압할 것, 또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에 대한 전쟁에 파키스탄 정부가 협조할 것을 요청했고 당시 대통령인 무샤라프는 이에 응하는, 실로 역사적이라 할 만한 방향전환을 꾀한다.

다만 문제는 파키스탄의 순응이 미국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는 데 있다. 파키스탄탈레반(TTP) 등을 비롯해 ‘파키스탄의’ 불안정의 원인이 되는 국경 내 테러단체들은 파키스탄에게 분명 탄압의 대상이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의’ 불안정이 늘 파키스탄의 불안정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파키스탄에 의해 통제될 수 있는 불안정성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카불의 탈레반 정권이 붕괴된 후 숨어든 은거지는 다름아닌 파키스탄의 퀘타(Quetta)였다. 아프간탈레반의 다른 이름인 퀘타 슈라(Quetta Shura)가 여기서 유래한다. 파키스탄의 입장에서는 유용한 무기가 손 안으로 날아든 셈이다. 이후 ‘테러와의 전쟁’에서도 파키스탄 군부는 파키스탄에 전쟁을 선포한 파키스탄탈레반(TTP) 등 단체의 진압에는 나섰으나 알 카에다의 연루단체인 하카니 네트워크와 하카니의 지원을 받는 아프간탈레반의 진압에는 소극적이었다. 파키스탄탈레반의 근거지인 남와지리스탄은 공격했으나 아프간과 파키스탄 양쪽에서 범국경적 테러를 일으키는 하카니 네트워크의 북와지리스탄은 “침공할 능력이 없어서 못 하겠다”는, 참으로 그럴듯한 이유로 방치해 두었다. 현재도 아프간 탈레반 정권의 옛 고위관료들은 언제 목에 현상금이 걸렸냐는 듯 퀘타와 카라치에서 활보한다.

아프간탈레반은 예측하기 어렵고, 통제할 수 없으며, 이들을 지원하는 것에는 국제적 정당성도 없다. 미국과의 관계를 위협한다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실제로 2011년 9월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미국 대사관이 공격받았을 때 당시 미군 합동참모본부 의장은 그 공격이 하카니 네트워크와 파키스탄 정보부의 공모 하에 이루어졌다는 증거가 있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파키스탄이 아프간탈레반을 통제해야 한다는, 얼핏 비논리적으로 보이는 군부의 믿음의 근원은 어디일까.

 

수상한 이웃집

2001년으로부터 1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프가니스탄은 NATO 철군 직후 치른 대선조차 삐걱거리는 불안정한 나라다. 당장 공용어인 파슈툰어를 쓰지 않는 우즈벡, 하자라, 타지크 족만 하더라도 인구의 절반을 넘는다.

그리고 그 불안정성은 점점 확장되고 있다. 파슈툰족이 주를 이루는, 파키스탄과의 접경지인 아프간 남동부의 ‘왕초’는 정부가 아닌 파슈툰의 아프간탈레반이며 북부에서는 타지크 족의 북부동맹이 다시 용트림을 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이 찢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다자 간 경쟁 속에서 불안정한 아프가니스탄이 다자 간 내전에 돌입할 경우 장기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은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는 아프간탈레반과 인도의 지원을 받는 북부동맹 간 접전의 장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 상황에서 하카니 네트워크, 아프간탈레반 등을 통해 파키스탄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세력을 확보할 수 있다. 즉, 파키스탄의 영향권 하에 적절한 수준으로 안정된 아프가니스탄은 다가올 인도와의 전쟁에서 전시 기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아프가니스탄은 파키스탄과 인도 간 분쟁의 연장선상에 놓이게 된다.

아프가니스탄와 인도의 노골적으로 친밀한 관계 또한 파키스탄에게는 경계의 대상이다. 에너지자원이 풍부한 중앙아시아로의 진출기지인 아프가니스탄은 인도에게는 전략적 요충지다. 2001년 이후 인도가 아프가니스탄의 재건에 쏟아부은 금액은 12억 달러를 훌쩍 상회하며, 아프가니스탄 의회 건물을 지어준 것이 바로 인도다. 2008년 인도는 아프가니스탄 내 인도 국민들 및 인도의 국경도로관리기구(Border Roads Organization, BRO)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인도군 엘리트 부대인 인도-티벳 국경수비대(Indo-Tibetan Border Police Force, ITBP)를 아프가니스탄에 배치했다. BRO의 주요 업무는 아프가니스탄을 이란의 차바하르 항구와 연결하는 것으로, <포린 어페어스>에 따르면 이는 파키스탄 육로에 대한 아프가니스탄의 의존성을 대폭 줄일 수 있다. 이를테면 숨통을 뚫어 주는 꼴이다. 이와 비슷하게 아프가니스탄 정부에게 인도는 파키스탄에게 대응하는 일종의 균형추가 될 수 있다. 인도와의 전쟁을 그 존재 이유로 삼는 파키스탄 군부가, 인도의 지원을 받는 아프간 정부의 통치 하에 안정된 아프가니스탄을 바랄 리 없다. 군부가 아프간탈레반과 하카니 네트워크를 끊어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네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러나 총리는, 군부가 아닌 민간인 출신인 샤리프 총리는 강경론자가 아니다. 그는 인도와의 전쟁을 대비해 아프간탈레반을 지원하는 것에도, 파키스탄탈레반과의 전쟁에도, 핵 보유 및 개발에 천문학적 금액을 쏟아붓는 것에도 공공연하게 반대한다. 샤리프 총리는 이상주의자가 아니며, 그의 중도론은 근거가 있는 이야기다. 인도와의 전쟁이 현실화된다면 파키스탄탈레반과 같은 국내의 강경한 반정부세력은 내부의 적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완전히 이길 수 없는 적이라면 법의 테두리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다. 또 파키스탄 인구 절반이 빈곤 상태에 살며 잦은 자연재해로 인프라는 취약하다. 교육수준을 고려하면 파키스탄의 미래는 더욱 암담하다. 세계경제포럼에 의하면 인구의 절반이 문맹상태이며 148개국 중 초등학교 취학률은 137위다. 인적 자본이 극도로 빈약한 것이다. <포린 폴리시>는 2010년 파키스탄의 “국가 실패율”을 소말리아와 콩고와 같은 수준으로 두었다. 제 국민들을 배불리 먹이지도 못하는 국가에게 테러단체의 지원은 예산 낭비라는 비난이 있을 법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불안요소의 최소화’라는 샤리프의 행보는 나렌드라 모디가 인도의 총리로 취임한 이후 더욱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샤리프 총리는 모디의 총리 취임식 초청을 받아들였고 그의 모친에게는 사리를, 모디 본인에게는 망고를 보냈다. 그런 그에게 붙은 별명은 “망고 외교”다. 군부는 샤리프 총리가 친인도 성향을 띠었다며 비난하지만 나렌드라 모디가 도하에서는 미국에게, 구자라트에서는 중국에게 큰소리치는 현재의 상황에서 샤리프 총리는 굳이 따지자면 실용주의자라 불러야 할 것이다. 결국 군부와 샤리프 총리의 대립은 단순한 권력 장악의 문제가 아니다. 탈레반과 대인도전략 두 가지로 인한 갈등은 결국 모두 인도의 부상 앞에서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방식의 견해차에서 온 갈등이라 할 수 있다.

지난 3월, 샤리프 총리는 군부의 전 수장인 무샤라프를 반역죄로 기소했다. 군부 개입으로 얼룩진 파키스탄의 지난한 정치사에서 반역죄로 기소되기는 무샤라프가 처음이다. 총리가 군부에 대해 우위를 점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상은 샤리프는 이미 진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시작된 파키스탄탈레반과의 평화협상은 올해 6월, 파키스탄탈레반의 테러를 계기로 중단되었으며 파키스탄 군부는 다시 탈레반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무샤라프 재판에서 검찰은 무샤라프를 1999년 쿠데타의 혐의가 아닌 2007년 헌법효력 정지의 혐의로 기소했다. 쿠데타 혐의를 물고 늘어지면 현 군 장성들이 줄줄이 묶여들어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임란 칸의 시위에 군부가 개입을 선언한 것은 샤리프 총리가 군부에게 굴복했다는 내용의 보도가 언론을 탄 다음날이었다.
LSF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마지막문단 위

샤리프 총리는 파키스탄을 위한 새로운 구상에서 군부를 배제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군부 역시 손이 묶여 있기는 마찬가지다. 샤리프를 대신할 만한 민간 후보자가 없기 때문이다.

 

당신들의 전쟁

임란 칸의 시위의 배후에 있는 것은 과연 군부였을까. 그랬다면 군부에게 임란 칸은 샤리프를 대신할 만한 차기 총리감이었음에 분명하다. “쓰나미”와도 같은 선거를 통해 2010년 정계에 입문했을 당시까지는 그랬다. 실제로 칸의 부상은 사법부가 이전 정부의 여당인 파키스탄인민당을 타깃으로 삼은 시기와 일치한다. 그러나 칸에게 리더십이라고는 없었으며 시위 한복판에서 군부와 공모했다고 외치는 데서는 경솔함만이 보인다. 그의 말이 거짓이라도 그럴 뿐더러, 사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칸은 제대로 된 대체재가 아니었던 셈이다.

시위대는 마침내 이슬라마바드에서 철수해 카라치로 옮겨갔으나 임란 칸은 부패와 명예훼손 혐의에 휘말렸다. 그러나 군부와 총리의 신경전 사이에 선 칸의 혐의의 진위 여부도, 이것이 총리와 군부의 싸움에 어떤 영향을 줄지도 쉽사리 예측할 수 없다. 쿠데타와 민주정치의 균형이라는 살얼음판 위에서 파키스탄 정국의 혼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박정민(연세대 정치외교)
jay17289@gmail.com

카슈미르: 60년의 분쟁, 4만 명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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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6일, 인도의 신임 총리 나렌드라 모디의 취임식장에서는 기적이 일어난 듯 보였다. 60년 갈등의 역사 위에서, 모디 총리와 나와즈 샤리프 파키스탄 총리는 손을 맞잡았다. 모디 총리는 이후 트위터를 통해 샤리프 총리와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눴다고 밝혔으며, 그 내용도 “샤리프 총리는 일주일에 한 번은 어머니를 뵈러 간다”는 등의 소소하고 평화로운 것이었다. 이 사건은 두 핵보유국의 오랜 대립을 우려 섞인 눈으로 주시하던 사람들에게 작은 희망을 주었다. 8월 중으로 양국의 정상회담이 기획되면서, 기대감은 한층 고무되었다. 회담에서는 분쟁지역인 카슈미르가 제1순위로 논의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양국 관계는 다시 냉각되기 시작했다. 7월부터는 카슈미르 지역에서 유혈 충돌이 빚어지기 시작했고, 결국 정상회담은 취소됐다.

60년의 분쟁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독립할 때부터 분쟁지역이었던 카슈미르는 2003년 양국의 합의로 정전 하에 놓이게 되었으나, 유혈 충돌은 멈추지 않았다. 무슬림이 인구의 70%인 카슈미르에서는 양국의 직접 충돌뿐 아니라 인도령 내의 이슬람 분리주의자들의 과격 행동 또한 중요한 문제로 대두돼왔다. 8월 12일, 모디 총리는 직접 카슈미르를 시찰하면서, ‘직접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는’ 파키스탄이 인도령 내 이슬람 분리주의자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인도와 ‘대리전’을 치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카슈미르 인도령(잠무-카슈미르) 내에는 현재 잠무카슈미르해방전선을 비롯해 다양한 이슬람 무장단체들이 파키스탄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으며 뿌리를 내렸으며, 이들 중 다수는 카슈미르 지역의 파키스탄 편입을, 일부는 제3국으로서의 카슈미르 독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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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정부는 모디 총리의 주장에 반발했지만, 인도의 입장은 단호했다. 인도 당국은 파키스탄 외교부 장관이 분리주의자들과 접촉할 경우 8월 25일로 예정된 양국 정상회담을 취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이에 대해 《뉴욕타임즈》는 뉴델리의 한 외교전문가를 인용하며, 파키스탄의 접견은 “도로 주행 시 흔히 겪는 일상적 흔들림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모디 총리의 전임자들 역시 이러한 ‘관례’를 일부 묵인해온 것도 사실이다( http://www.nytimes.com/2014/08/19/world/asia/india-cancels-talks-after-pakistani-envoy-meets-with-separatists.html). 그러나 지난 8월 접견이 실제로 이루어지자, 모디 행정부는 파키스탄의 “내정 간섭”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회담을 일방적으로 취소했다. 이에 대해 파키스탄은 “접견은 오랜 관행일 뿐”이라는 조심스럽지만 상투적인 반응을 보였다.

4만 명의 무덤

양국 관계는 1947년 이후 계속해서 개선과 악화를 반복해왔다. 세 번째 인-파 전쟁이 1972년 종전되었고, 1989년에는 양측의 정상회담이 이루어졌지만, 9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다시 대립이 치열해졌다. 특히 양측의 정규군 외에도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는 반군이 복잡하게 얽힌 카슈미르에서는 1999년 한 해 동안 1300명 이상이 사망했고, 1989년부터 지금까지는 4만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2003년, 휴전 협정이 조인되면서 양국 관계는 다시 회복되는 듯했다. 여기에 2005년 파키스탄령 카슈미르에서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인도 측에서 원조를 결의하면서 그러한 기대는 더욱 커졌다. 그러나 2008년, 뭄바이에서 일어난 테러로 180여 명이 사망하고, 테러의 배후로 파키스탄이 지목되면서 다시 양국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무력 충돌이 계속되면서, 양국의 민족 감정은 깊은 내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고, 이는 양국 내 강경파들이 입지를 굳힐 수 있는 토양을 마련했다.
KASHMIR
<↑카슈미르 이슬람 무장단체와 납치된 여행객들>

세속주의? 힌두 민족주의!

올해 5월 총선에서 승리한 인도인민당(BJP)은 자본주의와 기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발전이라는 서구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힌두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사회통합을 지향하는 이른바 ‘힌두트바’를 주창한다. 때문에 현 여당은 인구의 13% 이상을 차지하는 인도 내 무슬림과는 필연적으로 대립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으며, 파키스탄과의 관계 개선에 있어서도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인도인민당의 수장인 모디는 전형적인 힌두주의자 리더이면서 친기업가 성향의 총리라는 점에서,당의 정체성이 잘 요약된 듯한 인물이다. “나는 민족주의자이며, 애국주의자고, 날 때부터 힌두교도였다. 그렇기에 나는 힌두 민족주의자라고 불릴 만하다.”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모디는 직선적이고 분명한 어투로 자신에게 내려지는 평가를 긍정했다. ‘인도에는 세속적인 정치지도자가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세속주의의 정의가 무엇인가?”라고 반문하며, “내게 있어서 세속주의란 인도 우선주의”라고 주장했다. 여기에 그는 “우리 정당의 핵심 철학은 ‘모두에게 정의를, 양보는 없다’이다. 그게 우리가 생각하는 세속주의”라고 덧붙였다.

과거 구자라트 주지사 시절, 모디는 2002년 힌두교도들에 의해 자행된 수천 명의 무슬림 학살을 고의로 묵인했으며, 오히려 이를 조장하기까지 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법원은 특별 조사팀을 꾸려가며 조사를 진행했으나 특별한 혐의는 발견되지 않았다며 수사 종결을 공표했다. 《로이터》가 당시의 학살에 대한 의견을 묻자, 그는 “차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강아지(puppy)를 바퀴로 밟았다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라고 대답했다. 그의 표현은 즉각 정적들의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인도인민당에게 적대적인 정당인 사마즈와디당 당수는 “무슬림들이 강아지만도 못한 것이냐”며 의문을 제기했고, 당시 사법부 장관이었던 살만 쿠르시드 역시 뉴델리 텔레비젼(NDTV)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그 사건에 대해 별다른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고 공격했다. 이에 대해 인도인민당은 정치적 비판을 “비열한” 공격으로 규정하며, “어떤 사람이라도 슬픔을 느꼈을 것이라는 점을 설명하기 위한 표현이었을 뿐”이라고 항의했다.

모순된 정체성

‘강아지’라는 단어에 어떤 함의가 내재돼있던 간에, 힌두교도와 무슬림 간의 종교적 대립과 차별의 양상은 무장 폭동과 사원 철거 등의 형태로 꾸준히 표면화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1991년까지 무슬림들의 크고 작은 무장 폭동이 계속됐으며, 1992년에는 인도인민당을 비롯한 힌두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아요디아에 위치한 이슬람 사원이 파괴되기도 했다. 이 일로 근본주의자들 간의 무력 충돌이 심화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뭄바이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해 250여 명의 사망자를 냈다. 2002년 구자라트 학살과 2008년 재발한 뭄바이 테러는 위와 같은 오랜 종교 대립의 연장선이었다. 열악한 사회·경제적 지위와 힌두교도와의 대립으로 인해 무슬림들은 점차 무리를 이루며 게토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오히려 복지와 교육 등 지역 인프라로부터 소외되는 결과를 낳고 있다. 《뉴욕타임즈》는 높은 경제성장률을 보였던 모디 시절의 구자라트에서도 2009년과 2010년에는 무슬림의 생활수준이 오히려 악화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게토화’가 두 종교 간의 대립과 분리를 심화시킨다는 점이다.

이렇게 분리와 차별을 추동하는 중심에는 인도인민당을 비롯한 힌두민족주의자들이 있다. 인도인민당이 주장하는 중심 정책 중 하나는 카슈미르에의 힌두교도 거주이전을 제한하는 ‘370조 규약’의 폐지다. 이 규약은 무슬림 주지사 셰이크 압둘라와 좌파 총리 인디라 간디의 주도로 유일하게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하는 이 주(state)를 보호하기 위해 1974년 제정되었다. 강경파 민족주의자들은 규약 폐지를 통해 ‘하나된 인도’를 건설할 것을 촉구하고 있으나, 그 이면에는 힌두교도의 이주를 통해 유일하게 이슬람이 다수를 차지하는 이 지역을 ‘중화’시키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비록 이들은 세속화된 제도 및 행정 체계와 내셔널리즘이라는 타이틀 아래 활동하고는 있지만, 실상 힌두트바를 근본 이념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사실 종교 근본주의자들과의 구분점이 모호하다.

근대국민국가와 종교 근본주의라는 인도의 양면적 정체성은 사실 카슈미르가 인도에 병합됐을 때부터 부각되기 시작했다. 당시 이슬람 교도가 다수인 소국 카슈미르에서 힌두교도인 번왕은 파키스탄과 인도 사이에서 쉽사리 병합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이에 파키스탄 측에서 이슬람 민중 동원을 앞세워 번왕 중심의 힌두 지배 질서를 전복시키려 하자, 번왕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서둘러 인도와 카슈미르 병합 문서에 서명했다. 당시 인도 내외에서 이슬람 다수의 소국을 병합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으나, 인도는 자국이 세속국가임을 근거로, 그리고 더 나아가 다른 종교를 한 국가 안으로 끌어넣음으로써 자신들이 ‘진정한’ 세속국가의 면모를 지니게 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병합을 선택했다. 물론 그러한 선택의 기저에는 영토 확장이라는 배타적 실리 추구가 깔려있었다.

엉킨 이어폰처럼

카슈미르에서의 갈등은 병합 당시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 갈등은 지역 차원을 넘어 힌두와 이슬람의 대립, 인도와 파키스탄의 대립으로 항상 그 양상이 격화돼왔다. 분쟁에 대해 미국과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대체로 주민투표를 통한 문제 해결을 선호한다. 파키스탄 역시 주민 다수가 무슬림이라는 이점을 이용해 분쟁을 적극적으로 국제화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올해 10월, 파키스탄 정부는 카슈미르 분쟁에 대한 유엔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인도는 꾸준히 분쟁을 국제 문제가 아닌 인도와 파키스탄 양자 간의 문제로 규정하려는 노력을 통해 파키스탄의 시도를 차단해왔고, 카슈미르 분리주의자들에 대한 파키스탄의 직·간접적 지원에 대해서도 ‘내정 간섭’으로 규정하며 반발해왔다. 10월 파키스탄의 ‘어필’ 이후, 인도는 즉각 “유엔에 이 문제를 제기한 것은 양국 간 문제 해결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라 비판했다. 미국은 이미 지난 5월, 제임스 도빈스 국무부 특사를 통해 카슈미르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천명한 상태다. 일측에서는 열강들이 표면적으로는 주민투표를 지지하면서도 실제로는 개입을 꺼리는 이유로 인도와의 긴밀한 경제적 의존성을 꼽고 있다.

이러한 교착 상태에 대해 한 파키스탄 외교관계자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마치 사라예보 때처럼, 더 이상 양국만의 문제가 될 수 없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올해 9월 중순, 카슈미르에서 대규모의 홍수가 발생했을 때 사람들은 2005년의 지진을 회상하며 양국의 협력과 상호 지원을 기대했지만, 그러한 기적은 실현되지 않았다.

같은 달 9월 4일, 알카에다의 수장 아이만 알 자와리는 영상을 통해 알카에다가 카슈미르를 포함한 인도의 세 지역에 새롭게 지부를 설치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 “무슬림들의 땅이 이교도들에 의해 점령되고, 분할되었다”고 주장하며, 인도 내 무슬림들에게 “당신들의 ‘형제’는 당신들을 잊지 않았다”고 선언했다. 최근 빠르게 영향력을 확대해나가고 있는 이슬람국가(IS) 역시 인도 내에서 무슬림들을 ‘리크루팅’하고 있다. 무슬림 거주인구로는 인도네시아 다음으로 2, 3위를 다투는 인도에서, 분명한 내적 동기를 갖고 있는 무슬림들이 국제 테러단체와 연결되는 것은 꽤 용이해 보인다. 다른 한편, 인도는 카슈미르의 서북쪽에서는 파키스탄이 아닌 또 다른 국가와 분쟁 중에 있다. 1962년중국-인도 전쟁 이후 양측의 국경선은 아직까지 확정되지 않았으며, 양측은 경쟁적으로 구조물을 건설하거나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아름다운 고원과 양질의 염소털(캐시미어)로 유명한 이 지역에서, 만연한 종교 갈등과 국경 분쟁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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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희 (고려대 국어국문)
manhee87011@naver.com

[특집] 월드 파워의 대외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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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국제정세는 냉전 이후 미국 주도의 소위 ‘단극 질서’에서 미국 외의 기타 강대국도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다극 질서’로 변화하고 있다. 이번 <프리즘> 특집 “월드 파워의 대외정책”에서는 국제 사회에서 중요한 행위자로 기능하고 있는 미국, 중국, 러시아, 그리고 유럽연합의 대외정책을 하나하나 살펴본 후, 그 방향성을 나름의 시각으로 파악했다. <프리즘>과 함께 이번 특집 한 편으로 국제 정세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다져보자.

[미국] 헤어지지 못하는 중국, 떠나가지 못하는 중동

[중국] 신중하게 위대하게: ‘대국’으로의 도약을 노리는 중국의 대외정책

[러시아] 러시아, 세계의 심장부를 지배할 수 있을까

[유럽연합] 50년; 통합의 역사, 부활의 역사

2014.9.23

[특집] 신중하게 위대하게: ‘대국’으로의 도약을 노리는 중국의 대외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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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시진핑 지도부의 출범 이래 국제 문제에 대처하는 중국의 태도는 사뭇 달라졌다. 그 변화는 작지만 의미심장한 것이었고, 치밀한 계산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중국의 급격한 부상에 미·일의 초조함은 커졌지만, 중국 지도부는 미·일 양국 외에 EU 및 러시아와도 유연하고 전략적인 관계를 맺으며 점차 세계 질서를 바꿔나가고 있다.

 

도약을 위한 도움닫기

1960년대 말, 국경 분쟁과 사회주의 노선의 차이로 흐루시초프 정권과 소원해진 마오쩌둥은 미국을 끌어들여 소련을 견제하고자 했고, 이러한 발상은 1970년대 ‘핑퐁외교’와 미·중 수교의 토양이 되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사후인 1970년대 말부터 공산당 내부에서는 당의 목표를 마오쩌둥의 ‘전쟁과 혁명’에서 ‘평화와 발전’으로 새롭게 고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으며, 1981년 권력을 장악한 덩샤오핑은 이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국가의 대외정책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미국·소련으로부터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국가의 자주권을 확보하고 대외관계를 안정시키며 이를 토대로 경제성장에 주력한다는 ‘독립자주 대외정책’과 ‘비동맹원칙’이 중국 대외정책의 근간으로 확립되었다. 이 근간은 지금까지도 중국 대외정책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1990년대, 소련이 붕괴하면서 중국 대외정책에도 약간의 조정이 가해졌다.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또 하나의 ‘극점’이 되어,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를 ‘다극화’한다는 새로운 중심 목표가 설정된 것이다. 이는 세계 정세의 급변화라는 외부 요인과 자국 역량을 새롭게 평가한다는 내적 변화가 맞물린 결과였다. 그러나 미국의 막강한 경제력·군사력과 중국의 발전 정도를 비교해보았을 때 다극화는 단기간에 달성될 만한 것이 아니었고, 중국 지도부도 이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다변적인 외교를 통한 ‘평화발전’이 장기간 이루어져야 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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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중국은 연 평균 10% 안팎의 고도 경제성장을 기록해왔고, 2001년에는 세계무역기구(WTO)에도 가입함으로써 국제체제에도 성공적으로 진입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2002년 시작된 후진타오 정권의 대외정책 모토는 ‘도광양회(실력을 드러내지 않고 참고 기다림)’와 ‘화평굴기(평화롭게 우뚝 섬)’였다. 이후 중국은 국제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과 크게 대립하는 일 없이 국내 발전에 골몰했다. 그러나 중국의 조용한 부상에 대해 미국과 일본은 점차 우려와 견제를 표면화하기 시작했다.

 

‘챔피언’ 미국의 견제

세계 군사비 지출 2위와 GDP 2위를 기록 중이며 미국과는 전혀 다른 가치와 신념을 보유한 중국은 현재 미국에게 가장 신경쓰이는 존재이자, 미국이 ‘아시아로의 귀환’ 정책을 서두를 수밖에 없는 제1의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은 세계 패권을 유지하고 자국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중국의 부상을 봉쇄 혹은 미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유도하려 노력하고 있다. 특히 2008년 경제위기 이후 국방비를 지속적으로 삭감해야 하는 미국에게 일본 및 한국과의 군사동맹은 중국을 봉쇄할 수 있는 효율적인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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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중국과 지리적으로 매우 밀접하고 경제 의존도도 높기 때문에, 미국에 완전히 치우치지 않고 최소한의 균형을 맞추려는 모습을 보인다. 여기에 미국이 제안하는 한·미·일 삼각 체제는 한·일 양국 간 역사 문제와 일본의 태도로 인해 지지부진한 상황이며, 한국 내에서는 한·미·일 대 북·중·러의 대립구도 형성을 반대하는 의견도 존재한다. 반면 우익 민족주의에 기반한 아베 정권은 중국의 부상을 크게 우려하고 있으며, 불안정한 동아시아 정세를 이용해 자국의 군사적 역량을 확대하고, 정식 군대를 보유한 ‘보통국가’로 거듭나고자 한다. 이러한 연유로 일본은 현재 중국과의 갈등을 의도적으로 심화시키고 미국과의 협력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여기에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 영토 분쟁과 과거 일본의 침략 행위에 대한 당당한 태도는 중·일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촉매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 미국의 행보를 살펴보면 오바마 행정부의 ‘중국 조이기’가 점차 노골화되는 듯 보인다. 지난 4월 말, 오바마 미 대통령은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4개국을 순방했다. 이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세력을 다지려는 시도였으며, 순방 국가 목록에서 중국은 제외되었다. 오바마는 4월 25일 성명을 통해 “우리가 관심 있는 것은 중국의 평화적인 부상이지, 중국을 봉쇄하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지만, 그 의도에는 중국을 봉쇄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는 지적이 많다. 일본 방문 마지막 날인 25일, 오바마는 분쟁 지역인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 문제에서 중립을 지켜왔던 기존의 입장을 바꾸어 공동 성명을 통해 이 지역을 미·일 안보조약의 적용 대상에 포함시켰다. 이는 일본의 영유권을 간접적으로 인정한 행동이었고, 중국은 이러한 결정에 크게 반발했다.

 

복잡한 관계, 불편한 공존

중국의 입장에서 일정 수준의 미·일 동맹은 환영할 만한 것이다. 미·일 동맹은 동아시아 질서 안정에 기여하는데다 무엇보다 일본의 군사증강과 보통국가화를 막을 수 있는 주요한 명분이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의 핵무장에 매우 민감한 중국은 미국의 핵우산과 핵확산 방지에 대한 의지가 일본의 핵개발을 좌절시키는 ‘제동장치’ 역할을 한다고 여긴다. 중국 지도부는 지난 2월 26일 화춘잉 중국 외교부 대변인을 통해 “냉전시기 미국이 일본에 주었던 331킬로그램의 무기급 플루토늄을 반환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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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미·일 동맹에 대한 중국의 ‘호의’도 그것이 중국의 ‘핵심이익’과 충돌하지 않을 때에 한정된다. 중국의 핵심이익은 크게 자국의 정치제도와 국가 안보, 주권, 영토, 경제와 사회의 안정적 발전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핵심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중국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외교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하나는 평화적인 환경 속에서 경제 발전을 지속하여 ‘전면적 소강사회(먹고 살 만한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 주도의 봉쇄를 뚫고 세계적으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다.

지난 3월 4일, 시진핑 국가 주석은 조 바이든 미 부통령과의 만남에서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를 중국의 핵심이익으로 공표한 바 있다. 때문에 4월 순방에서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를 미·일 방위조약에 포함시킨 오바마 행정부에 대해 중국이 미 대사 초치라는 높은 수준의 항의를 표시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중국이 소강사회 건설을 제1목표로 둔 2020년까지, 이해관계를 둘러싼 미·중 간 갈등이 존재할 수는 있어도, 그러한 대립이 외교 단절이나 무력 충돌이라는 극한까지 치닫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두 가지 목표 충돌할 경우 주권이나 영토와 관련된 사안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소강사회 건설이 영향력 확대보다 우선시된다.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이 가진 자본·기술·시장은 중국이 제일 목표로 하는 경제 발전의 기초이며, 이를 지속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곧 소강 사회 건설의 토양이 된다. 미국 역시 환경 문제, 테러리즘, 북핵 문제, 우크라이나 사태와 같은 국제 이슈에서 중국의 ‘전략적 협력’을 필요로 하기에 당분간 중국의 영역을 극단적으로 침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멀지만 편한 관계, EU

중국은 세계 각국과 독자적인 경제 활로를 모색함으로써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에 반발하면서 경제 성장이라는 실리도 챙기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중국과 교역량이 가장 큰 지역 중 하나인 유럽에 대해, 중국은 동반자 관계를 설정하고 무역 협정을 체결하는 ‘일대일 공략’으로 관계 개선 및 유지에 힘쓰고 있다. 중국이 주창하는 ‘동반자 관계’는 안보와 이념의 테두리를 넘어 양국의 공동 이익을 장기적으로 추구하기 위한 관계이며, 무역과 투자 등 경제 교류는 관계의 중요한 골자가 된다. 시진핑은 올해 3월 23일 유럽 순방길에서 네덜란드와 ‘전면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체결했고, 26일 프랑스와도 ‘우선적 전략동반자 관계’를 맺었다. 유럽 국가들과의 동반자 관계에는 보통 대규모의 경제 교류가 뒤따르게 된다. 3월 방문에서 중국이 프랑스와 체결한 계약 금액을 모두 합하면 한화로 26조 원이 넘는다. EU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독일과의 교역도 청신호다. 독일-중국의 무역은 그 총액이 중국과 EU 전체 무역 총액의 1/3을 차지할 만큼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중국과 유럽 간 경제 교류가 이토록 활발할 수 있는 까닭은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기 때문일 뿐 아니라 서로가 정치적으로 크게 거리낄 것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양측은 중국의 근대화 이후 국제 사회에서 대립한 일이 많지 않다. 또 유럽과 중국은 모두 국제 질서가 미국 중심의 단극 체제에서 벗어나 자신들도 중요한 행위자가 될 수 있는 다극화로 옮겨가기를 희망한다. 특히 2012년 8월 30일, 중국 관영 매체 <인민일보>는 중국과 독일이 “극히 보기 드물 정도”로 친밀한 대화 채널을 갖고 있으며, “양국의 정치적 상호 신뢰가 점차 강화”되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은 EU의 리더인 독일과의 관계를 징검다리 삼아 EU 전체에 보다 쉽게 접근하려는 의도를 품고 있다.

 

거부할 수 없는 ‘큰 손’의 유혹

마찰이 전무한 것은 아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제3국의 국제 이슈에 관해서는 주로 미국과 의견을 같이한다. 때문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내에서는 보통 미국과 영국, 프랑스 대 중국과 러시아의 대결구도가 성립되곤 한다. 최근 시리아 사태에서도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이 주장하는 전면적인 군사 제재를 계속해서 반대해왔다. 그러나 ‘경제 거인’ 중국과의 교류로 얻을 수 있는 막대한 투자와 거대한 시장 때문에 유럽 각국은 ‘사적인’ 자리에서는 중국과 밀월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지난 2012년 5월, 티벳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를 비공식적으로 만나 “티벳의 독립을 지지한다”고 발언함으로써 중국과의 ‘밀월 궤도’에서 이탈한 적이 있다. 총리의 발언이 계산적이었는지 충동적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내부 민족 문제에 대한 주권을 침해받았다고 여긴 중국의 반발은 강력했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 홍레이는 “총리의 발언이 가져올 악영향을 없앨 실질적 조치를 취하고, 중·영 관계를 보존하기 위한 행동에 나서야”한다고 촉구했다. 캐머런 총리가 그러한 ‘행동’에 나선 것은 그로부터 1년이 조금 지난 뒤였다. 2013년 10월 영국 정부는 중국인 관광객에게 비자 발급 조건을 크게 완화하겠다고 발표했고, 두 달 후인 12월에는 캐머런 총리가 전격적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실린 한 칼럼은 비자 발급은 핑계일 뿐이며, “총리의 이번 방문이 작년 달라이 라마의 만남과 중국의 분노(fury)에 대한 사과를 의미”한다고 비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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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친한 걸까

중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포괄적 전략적 협력 동반자’라는 장황한 수식어로 요약된다. 러시아의 적극적인 제스처로 1980년대 후반부터 양국 관계는 급속히 회복되었고, 송유관 건설 사업과 경제 협력, 상하이협력기구 출범 등 정치와 경제 전반에 걸쳐 다양한 교류가 진행되었다. 군사적 측면에서의 협력도 증진되어 지난 2013년 7월 10일, 동해 인근에서 대규모의 중·러 해상 합동 훈련이 진행되었다. 미국 언론은 태평양 해안에서 중국의 이러한 적극적 행동을 미국의 ‘아시아로의 귀환’ 정책에의 대항으로 보고 있다. <뉴욕타임즈>는 7월 10일, “이번 훈련은 미국이 태평양 지역에 더 많은 해·공군 병력을 배치하는 것에 대응해, 중국이 이 지역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분석했다. 중·러의 해상 합동 훈련은 오는 5월 말에도 치러질 예정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소속된 양국은 시리아 내전이나 이란 핵 문제와 같은 국제 이슈에 대해서도 미국을 견제하는 또 하나의 축으로서 대체로 비슷한 행보를 보여왔다. 그러나 양국의 친분은 때로 ‘포괄적 전력적 협력’이라는 수식어만큼이나 공허하게 들리기도 한다.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해 중국 지도부는 “주권국의 내정에 대한 비개입주의 원칙을 지지하고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주권, 영토보전을 존중한다”고 밝혀 러시아의 개입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3월 초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사태의 확대를 막기 위해 모든 국가들이 침착하게 행동하고, 제재를 실행해야 한다”고 밝힘으로써 미국과 독일의 입장을 조심스레 지지했다.

미국이라는 ‘공동의 적’도 중·러 관계를 ‘친분’으로 단순화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뉴욕타임즈>는 양국이 “공통의 어젠다가 부족”하며, 심지어 동남아 지역과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는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는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과 관련해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는 러시아가 동남아 지역과의 점증하는 무기 거래량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반면 중국은 에너지 외교를 통해 전통적으로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고 있던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차츰 키워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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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으로, 양국은 국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국의 역할을 완전히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중국은 국제 문제에 있어 보다 신중한 입장을 택하며, 다른 구성원들과의 관계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주의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중국이 단순한 지역 패권국이 아니라 세계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계적 패권국으로의 부상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실제로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포린 폴리시>는 3월 5일 한 칼럼에서 “중국의 이해관계는 점차 복잡해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중국의 이웃들이 겪는 갈등에 대해서도 보다 영리하게 대처할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룰 테이커’에서 ‘룰 메이커’로

중국 지도부는 개혁 개방 정책 이래 또 하나의 ‘월드 파워’가 되겠다는 명확한 목표를 향해 빠르고도 치밀하게 다가가고 있다. 2013년 출범한 시진핑 지도부는 제일 목표인 ‘소강사회의 건설’까지 미·일 양국과의 전면 대결은 피하고 있지만, 점차 노골화되는 견제와 ‘핵심이익’의 침해에 대해서는 ‘주동작위(할 일을 주도적으로 한다)’라는 새로운 모토와 함께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다. EU 및 러시아와도 전략적·실리적 외교를 통해 국제 사회에서 영향력 확대를 꾀하는 중이며, 상하이협력기구와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력(RCEP) 등을 통해 새로운 지역 및 국제 질서를 구축하려는 모습 또한 보이고 있다.

2014년 2월 27일, 중국 관영 언론인 <인민일보>는 <파이낸셜 타임즈>를 인용하면서 “지난 5년간 중국은 ‘룰 테이커(rule taker)’에서 ‘룰 메이커(rule maker)’로 변화했다”고 선언했다. 30년 동안 ‘대국’으로의 도약을 준비해 온 중국의 발은 2014년, 이제 지면에서 떨어졌다.

 

김만희 (고려대 국어국문)
Manhee8701@naver.com

 [특집] 헤어지지 못하는 중국, 떠나가지 못하는 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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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전쟁을 끝내고 있으며 앞으로는 더욱 광범한 도전과 기회들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2012년 1월 5일 미 국방부에서 발표한 국방지침서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 21세기 미국 국방의 우선순위(Sustaining U.S. Global Leadership: Priorities for 21st Century Defense)」에서 위와 같이 밝혔다. 보고서에서 오바마는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전쟁을 끝내면서(As we end today’s wars)”라는 말을 반복하여 사용하는데, 이는 지난 10여년간 미국이 치러온 중동에서의 전쟁이 끝나가는 과정임을 의미한다. 즉, 중동에서의 전쟁이 이제는 그들의 국방 우선순위가 아닌 것이다. 이 8페이지의 짧은 분량 보고서에서 미국이 상투적으로 말하는 ‘자국과 자국의 동맹국 및 파트너들의 안정 보장’을 넘어서, 워싱턴은 이제 아시아에 초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오바마 행정부의 핵심 외교 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아시아 중시 정책Pivot to Asia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이제는 끝났다고 언급한 ‘중동에서의 전쟁’이라는 늪에서 미국의 발은 쉽게 빠지지 않는 것만 같다.

 

중동, 너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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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이후 세계는 미국 주도의 단극체제 하에서 평화를 찾아가는 듯했다. 미국은 중동에서는 긴밀한 동맹국인 이스라엘과 사우디 아라비아를 통해 해당 지역에서 패권국으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였다. 미국이 지역적 영향력 유지와 석유 자원의 확보를 위해 중동 지역에 깊숙이 개입하기 시작한 것은 걸프전(1991)이 발발하면서였다. 중동은 당시 1979년 이란 팔레비 왕조의 무너뜨린 시아파 혁명, 사회주의권 붕괴로 불안한 정세 속에 있었다. 이란-이라크 전쟁(1981~88)과 걸프전은 아랍권 내 권력의 공백 상태에서 발생한 전쟁이었고, 걸프전이 미국 및 연합군의 도움으로 종전된 이후에는 중동 지역에서 미국의 패권에 대한 두려움과 폭력적인 방법으로 석유 자원 경로를 확보하는 미국에 대한 불신과 저항 심리를 남기게 되었다. 이는 결국 역사적으로 정통 이슬람의 가치를 고수하던 국가들과 다른 곳에 비해 서구화, 개방화되어 있는 국가들, 혹은 인종 간 경쟁의식(이란-사우디아라비아)을 가진 국가들 사이에 간극을 심화시켰고, 결국 반미국가(이란, 리비아, 예멘, 알제리 등)와 친미국가(사우디 아라비아, 이집트, 카타르, 쿠웨이트 등의 GCC 국가들)로의 양분을 고착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때 중동 국가에서 생겨난 미국에 대한 불신과 저항 심리는 이후 이슬람 원리주의의 확산을 촉진시켰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슬람 원리주의 집단은 98년 케냐와 탄자니아 미 대사관 폭탄 테러뿐 아니라 2001년 9월 11일 미국 본토의 세계무역센터 빌딩과 국방부 건물에 공격을 가하면서 미국의 안보를 직접적인 위협을 주는 단체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9.11 테러를 기점으로 시작된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2003년 이라크 전쟁을 통해 미국은 자국 안보 수호와 미국적 가치(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공유하는 친미 정권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밑 빠진 중동에 돈 붓기

미국이 막대한 노력을 기울이는 가운데, 중동의 정세가 과연 미국이 뜻하는 대로 흘러갔을까? 9.11 테러가 일어나기 전 미 클린턴 행정부는 균형 예산을 유지, 후임 조지 W. 부시 정권에 재정 흑자를 남긴 채 자리를 넘겨주었으나 9.11 테러 이후 약 1년 만에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GDP대비 1.5% 수준 적자로 재정수지를 반전시킨다. 9.11 테러의 직접적 타격을 받은 세계무역센터가 위치한 뉴욕에서는 일자리 상실, 세수 감소, 사회간접자본 시설 파괴 등으로 약 1000억 달러의 경제적 손실이 발생했다. 더불어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미 국방부 예산이 전보다 4% 증액되어 5000억 달러를 웃돌았다. 미 의회 조사국에 따르면 2001년부터 이라크 전쟁이 종전된 2011년까지 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 투입된 전쟁비용만 약 1조2830억 달러 규모인 것으로 밝혀졌다.

천문학적인 액수를 들인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모든 곳에서 환영 받은 것은 아니다. 특히 시작부터 여러 중동 국가들의 반발에 마주해야 했다. 중동에서 미국의 대표적인 우방국이라 할 수 있는 사우디 아라비아 역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반발로 테러와의 전쟁에서 소극적으로 협력하는 양상을 보여왔다. 미국은 2001년 10월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통해 하미드 카르자이를 필두로 한 친미 정권을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아프간 내 고질적 정치 분열과 치안의 부재로 하미드 정권이 정국을 효과적으로 장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 머물러 있다. 더군다나 미국이 국제사회의 반발을 무릅쓰고 2003년 명목상 ‘대량 살상 무기의 발견 및 무장해제’를 위해 침공한 이라크에서는 결과적으로 대량 살상 무기를 발견하지 못하면서 이내 미국은 침공의 정당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미국-이라크 전쟁은 미국과 영국의 연합군이 침공 초반 승기를 집어 들었지만 내부의 종파분쟁과 지역 점령군의 끈질긴 저항으로 실패한 전쟁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미국의 대(對)테러 공습은 탈레반의 근거지인 파키스탄에서도 이어졌다. 영국 언론 단체 탐사보도국(BIJ)에 따르면 미국의 대테러 전략의 한 축인 드론(무인기) 공습은 2005년부터 2013년 사이 총 376회 이루어졌다. 이 무인기 공격으로 지난해 11월 파키스탄 반군 탈레반의 지도자 하키물라 메수드를 사살하였지만 이에 대한 보복 폭탄 테러가 파키스탄 내에서 계속되는 실정이다.

이 같은 테러와의 전쟁에서 미국의 외교적 ‘성과’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알 카에다의 수장인 오사마 빈 라덴의 사살이다. 하지만 오사마 빈 라덴이 9.11테러의 상징성을 가지고 하더라도 그의 사살이 미국이 말하는 중동 문제의 완벽한 ‘해결’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친미 정권 수립을 목표로 했던 미국의 ‘해결책’은 현실에서 구현되기는커녕, 여전히 그 발을 빼지 못한 채 끊이지 않는 중동 전쟁의 블랙홀로 빠져들고 있다.

 

때 맞춰 등장한 혜성

이처럼 미국이 중동에서 더 이상 발을 넣지도 빼지도 못하는 상황에 있을 때 중국은 세계 제2의 강대국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1978년 덩샤오핑 집권 이래로 중국은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에서 시작해 지금은 시장경제체제를 갖추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은 2012년 말 기준 경제규모∙교역규모∙외국인 투자 유치(FDI) 2위, 외환보유고 세계 1위에 머물고 있다. 2000년에서 2007년까지 국내총생산(GDP) 1위를 굳건히 지키던 미국(당시 미국의 GDP는 2,3,4,5위의 GDP를 모두 합친 것보다 컸다)의 입장에서는 중국의 급격한 부상이 ‘상징적’으로도 위협적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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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막강한 경제력은 국방비 증강으로 이어진다. 중국은 지난 10년간 두 자리 수 이상으로 국방비를 늘려가고 있다. 시진핑 주석은 2013년 3월 취임사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강한 군대’를 양성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만큼, 2014년 국방비 역시 지난해보다 10% 늘어난 138조 5000억원 규모로 책정하였다. 반면 미국의 경우 재정적자와 무역적자의 극복을 위해 국방예산의 감축을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영국의 국방 전문 컨설팅사인 ‘IHS 제인스’에 따르면 최근 시퀘스터(미 연방정부의 예산 자동 삭감)의 여파로 미국의 국방비가 올해 처음 상위 9개국보다 적을 것으로 예측했다.

사실 중국의 국방비 증강이 미국의 국방력을 추월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미국은 소련 붕괴 이후 20여년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국방비를 쓰는 나라였다. 미국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최대치의 국방비를 쏟아 붓던 2011년 7113억 3800만달러를 시작으로 2015년 4956억 달러까지 국방 예산을 줄여왔지만, 여전히 전 세계 군비의 33%를 차지하면서 1위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국방력이 중국에 비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중국 정부가 국방비를 정확히 어느 부분에 어떠한 용도로 쓰이는 지 투명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이 이를 불안 요소로 여길 여지가 있다.

무엇보다 아시아 지역 패권을 주도하고자 하는 중국의 야망은 미국이 위협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아시아 지역에서 중국의 영향력의 확대는 중국 주도의 국제질서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새롭게 쓰이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의 개입주의자들의 관점에서 중국의 패권 확대는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곧 미 국력의 쇠퇴를 의미하는 것이다.

미∙중 관계에 있어서 대립만이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중국과의 ‘전략적 동맹 관계’를 맺으며 긴밀한 경제협력을 지속하고 있다. 특히나 미국이 이미 중국에 경제적으로 상당히 의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미 소비자 계층은 중국의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한 중국 제품의 수입을 통해 비교적 낮은 가격으로 제품들을 소비하는 혜택을 누리고 있다. 미국의 기업 입장에서도 중국으로 생산기지를 옮기면서 얻게 되는 기업 이윤(아시아 시장의 효과적 공략과 값싼 노동력으로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으로 사실상 그들이 미국 내부의 대중강경책을 저지하는 가장 큰 계층이라는 것은 ‘워싱턴의 잘 알려진 비밀’이다.

 

모여봐 친구들아, 중국이랑은 놀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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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다른 아시아권 국가들과 다시금 동맹을 강화하면서 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미국이 추진했던 한·미·일 동맹 역시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지난 7월 1일 아베 내각은 일본과 밀접한 국가에 대한 무력 공격으로 “명백한 위협”이 존재하는 경우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보통국가’가 되었음을 선포하였다. 전범국가인 일본이 다시금 집단 자위권을 행사하는 보통국가가 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에서 미국의 지지 없이는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일본의 군사력을 동아시아에서 패권적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더불어 미국은 자국의 우방국인 우리 나라까지 함께 한·미·일 삼각동맹을 맺으며 미국의 대리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허나 우리 나라와 일본은 경제적으론 상호 의존적이지만 두 나라 모두 강한 민족주의 성향을 띠는 나라로, 최근 고조된 역사 갈등으로 미국이 기대했던 두 국가 간의 강한 동맹은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베트남, 필리핀과 같은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미국이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군사 동맹을 강화하는데 발판을 마련해준 것은 다름 아닌 중국과 다른 국가들간의 영토분쟁, 남중국해 분쟁이었다. 이 곳은 2008년 오바마 정권의 출범 이후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인해 국제적 이슈로 크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4월 28일 아시아 순방 중 전통적 우방국인 필리핀을 방문하여 상호방위조약에 대한 지원을 재확인 하고 미군의 필리핀 군사기지 접근 및 이용을 허용하는 내용의 방위협력확대협정(EDCA)를 체결하였다. 미국은 남중국해 분쟁에서 필리핀에 대한 지지를 견지하면서 1992년 전면 철수 이후 22년만에 필리핀에 복귀할 수 있게 되었다. 마틴 뎀프시 미 합참의장 역시 지난 8월 14일, 베트남을 방문하여 미국이 조만간 베트남에 대한 살상무기 금수조치를 해제할 것을 암시하였다. 당시 뎀프시 합참의장은 베트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현재 우리의 가장 큰 이해관계가 걸린 곳은 해양부문”이며 무기 금수의 해제 이후에는 “해당 분야에서부터 협력에 나서야 할 것”이라 말하며 남중국해 분쟁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다시 한번 확고히 하며, 중국을 견제하면서 우방국들과의 동맹을 강화하는 ‘야무진’ 행보를 이어갔다.

이러한 미국과 동맹국들의 움직임에 중국은 미국의 남중국해 분쟁 ‘간섭’’을 지속적으로 견제해왔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지난 8월 11일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왕이 외교부장이 남중국해에 대해 언급한 다음날, 중국 외교부는 홈페이지를 통해 왕이 외교부장의 발언을 별도의 발표문으로 게재하였다. 왕 외교부장은 “역외 국가가 이곳에 와서 함부로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에 반대한다”며 “현재 남중국해 정세는 안정되어 있고 중국과 아세안 관계 역시 양호한 발전추세”를 유지하고 있다며 남중국해의 갈등에 대한 과장된 해석을 자제해달라고 언급하였다.

이외에 미국은 경제적으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rans-Pacific Partnership, TPP)을 통해 중국을 제외한 아시아∙태평양 국가들과 FTA보다 높은 수준의 자유화를 추구하는 무역협정을 추구해왔다. 현재 TPP 협정에는 미국과 캐나다∙멕시코∙호주∙뉴질랜드∙싱가포르∙브루나이∙베트남∙브루나이∙칠레∙페루∙일본 등 12개국이 참여 중이며 협정 체결 시 국내총생산(GDP) 합계로 세계 경제의 40%를 차지하는 최대 규모의 자유무역지대가 생성될 예정이다. TPP는 미국식 FTA를 표준 모델로 삼아 2015년까지 참여국 간의 모든 무역 장벽을 철폐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미국이 주도 하는 만큼, TPP는 회원국 간 지적재산권, 투자, 서비스 등의 규정은 통일되면서 노동권과 환경을 보호하는 등 정부가 주도하는 경제 구조들 가진 중국으로써는 받아들이기 힘든 조항들이 많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TPP 12개국 중 한 국가라도 거부권을 행사하면 다른 국가가 참여하기 힘들기 때문에, 사실상 중국을 배제하는 자유무역협정이며 미국이 위의 협정을 통해 정치적∙경제적으로 중국을 압박하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하다. 결국 미국이 아시아 국가들 과의 정치∙군사적 동맹을 재확인 및 확대하는 하나의 목적은 아시아 국가들에 영향력을 미침과 동시에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려는 것이다.

 

우습지 않니?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이런 세상이

현 오바마 정부 2번의 집권 기간 동안 가장 공을 들인 외교정책이 바로 아시아 중시 정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시점에서, 미국은 공들인 탑이 견고한지 아닌지 확인 할 새도 없이 쉽게 넘을 수 있는 허들에 맞닥뜨리고 있다. 이라크와 시리아에서는 미국이 계획했던 대로 독재자들의 축출 이후 친미정권이 수립되기는커녕, 해당 지역을 기반으로 하여 급진 수니파 무장단체인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ISIL)’ 혹은 ‘이슬람국가(IS)’가 창건되었다. 지난 6월 29일 IS는 이슬람 국가의 건국을 공식 선포하였고 IS는 당시 이미 기존 이슬람 지하드(성전)의 중심세력이었던 알 카에다를 넘어서는 민병대 수준의 무장단체로써의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당시 <월스트리트 저널>은 IS의 세력이 계속해서 확장되고 이는 결국 중동 전역에 이슬람 극단주의 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이라 전망하였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지. 지난 8월 7일 미국이 이라크 아르빌과 모술 댐 공습을 ‘허용’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IS는 20일 미국 언론인 제임스 폴리를 참수하는 영상을 처음 공개한 이후 미국인, 영국인을 참수하고 네 번째 인질을 공개하면서 자신들이 서방의 무고한 시민, 아울러 미국 본토에 직접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각인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IS의 움직임에 미국과 영국은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담에서 IS에 대응하는 정치∙군사연합체를 만드는 방안을 추진하였고 지난 19일 우방국으로는 처음, 프랑스의 IS 공습이 있었다. 미국은 중동지역 국가들을 포함해 40개국 이상에 IS격퇴를 위한 군사적∙인도적 지원 요청을 보낸 상태이지만, 협력을 약속한 중동 지역 국가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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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4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 침공에도 미국과 유럽연합은 경제 제재 등을 통해 러시아를 압박하는 일관된 태도를 보여왔으나, 현재까지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간헐적으로 도발하면서 ‘그림자 전쟁’을 이어오고 있다. 오히려 서방의 가장 강력한 제재수단이었던 ‘러시아산 가스 수입 중단’은 러시아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유럽 국가들에게 경제 둔화의 역풍으로 몰아치는 상황이다. 전쟁이 확대될 것을 우려해 군사 개입을 최대한 배제해 왔던 오바마 역시 푸틴의 거침 없는 침공에 군사 개입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무거운 발걸음을 쫓는 날카로운 눈초리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정책은 미국 내에서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지난 8월 28일 갤럽(Gallup)의 조사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4년까지 오바마 행정부에 대한 지지도가 꾸준히 떨어져왔다. 미 국민을 대상으로 실시된 이 조사에서 오바마 행정부에 대해 ‘매우 지지한다’는 답변이 17%, ‘매우 반대한다’는 답변이 39%로 집계되었다. 2009년 실시된 조사에서 ‘매우 지지한다’는 답변이 32%, ‘매우 반대한다’는 답변이 30% 였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라는 상징성을 가진 찬란한 등장과 달리 지난 5년간 오바마의 국내∙외 정책은 크게 환영 받지 못한 모양이다.

더군다나 오바마 1기 행정부 국무장관을 지냈던 힐러리 클린턴은 2016년 민주당 차기 대선주자로 주목 받으면서 역대 최저 수준인 40% 대의 지지율을 기록하는 오바마 행정부와의 ‘거리두기’를 시도하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은 오바마 1기 행정부에서 외교정책을 주도했던 인물이라는 평을 받지만 지난 8월 10일 미 시사지 <애틀란틱>과의 인터뷰에서 “이슬람 급진 무장세력이 발호하도록 만든 것은 오바마 대통령 외교정책의 실패”라며 정면 비판했다. 클린턴 외에도 오바마 1기 행정부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제임스 존스 역시 <월스트리트 저널>에 실은 기고문을 통해 구체적으로 이라크 내전과 시리아 아사드 정권이 화학무기를 사용했을 때 단호히 대처하지 않은 오바마의 중동 정책을 비판하였다.

중동 정책 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오마바 행정부의 소극적인 모습 역시 비판 대상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28일 열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기자회견에서 “우크라이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하지는 않을 것”이라 말하였다. 지금 오바마 행정부는 우크라이나 사태보다 시리아와 이슬람국가(IS)에 정책적 중점을 두고 있는 상황이지만 이날 기자회견에서 IS에 대해 언급하며 “아직 전략을 마련하지 못했다”고 발언하면서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 내부에서의 비판에도 직면하게 되었다.

격동하는 국제 정세에 오바마의 발걸음이 무거운 것은 사실이다. 오바마 행정부의 건강보험개혁, 교육개혁 등 큼지막한 개혁들에 잡음이 생기면서 외교정책을 추진해 나갈 때 필요한 국내 지지에서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허나 사실 오바마 행정부가 맞닥뜨린 진퇴양난의 상황은 사실 그 오로지 현 정권의 책임만은 아니다. 특히 부시 행정부 시기에 시작된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사후 처리가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단선적인 정책 결정의 결과였다. 군사개입보다 다국적 협력을 통해 위기에 대응하겠다던 ‘오바마 독트린’은 이 가까운 선례에서 얻은 깨달음에 바탕한 것이라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 오바마는 단지 과거 행정부들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홀로 지게 되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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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관을 내려놓을 것인가

오바마 행정부의 최대 과제였던 ‘중국 견제’는 주위의 끊이지 않는 제동 장치들로 인해 조금씩 쉬어가는 모양이다. 2기 행정부 초기부터 레임덕 현상이 왔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바마의 임기는 남아 있다. 현 국제정세는 국제정치학자 로버트 길핀의 주장대로 기존 패권국의 쇠퇴로 국제질서∙협력∙제도가 지켜지지 않고 군사적 갈등이 야기되는 상황인 것일까. 미국이 나토(NATO) 및 중동 우방국들과 국제협력군을 꾸려 극단주의 수니파 무장단체 IS를 제압하려는 그 모습은 90년 걸프전의 재연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부상하는 중국과 제국의 자리를 위협받는 미국, 그리고 급변하는 국제정세에서 왕관을 쓴 자는, 무게를 견디기에 버거워 보인다.

 

김은경(국민대 정치외교)
eunkyongkim31@gmail.com

[특집] 러시아, 세계의 심장부를 지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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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그 사람 히틀러와 다를 게 뭐요

지난 5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 영토 분쟁 문제가 무력 충돌로 번지는 가운데 영국 찰스 왕세자는 캐나다 이민사박물관에서 “지금 푸틴의 행동은 아돌프 히틀러(가 했던 것)와 같다”고 발언했다.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무력 개입이 격화되자 러시아 내 방송국들이 모두 국영으로 전환되며 정부의 검열 하에 놓이게 된 것을 영국 왕세자가 강도 높은 비난한 것이었다.

 

이 남자가 사는 법

우크라이나 동부의 크림반도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지역이다. 명백한우크라이나의 속령이나 자치공화국의 지위를 지니며 주민의 약 60%가 러시아계로 구성돼 있고, 러시아어를 지역의 제2 공용어로 사용한다. 또한 과거 소련의 서기장이었던 흐루시초프가 크림반도를 소련의 연방국인 우크라이나에게 넘겨주기 전까지 러시아령으로 존재했다는 점 등을 러시아는 이곳에 개입하는 명분으로 삼고 있다. 크림반도의 부동항은 러시아의 흑해 함대가 주둔하며 정기적으로 훈련을 벌이는 군사 요충지고, 해로를 통해 러시아가 석유와 천연가스를 수출하는 자원 기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유럽과 러시아를 양 옆에 둔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역할 때문이다. 러시아에게 우크라이나와의 관계란 과거 소련 연방국들의 러시아에 대한 평판이나 충성도를 확인할 수 있는 리트머스지며, 러시아는 이를 통해 러시아의 세력을 유럽에 과시하고자 한다.

Thousands of Ukrainians are continuing to express support to european integration and protesting against decision of Ukrainian government to refuse signing of association with EU in Vilnius. 27 November 2013. Kyiv, Ukraine.

그런 우크라이나에서, 2004년 민주혁명을 통해 들어선 과도정부는 침체된 경제를 살리고자 EU 가입을 추진했다. 그러나 2010년 취임한 친러 인사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이 푸틴과의 밀월 이후 우크라이나의 EU 가입 전면 재고려 성명을 발표했고, 이를 계기로 지난 3월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 반정부 시위가 발발했다. 이 과정에서 민중 시위대와 친러 무장세력이 무력 충돌하며 우크라이나 내 반러 감정이 고조되었는데, 이는 오히려 크림자치공화국에게 독립의 명분을 제공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더욱 격화된 무력 충돌을 견인한다. 그리고 이 틈을 타 푸틴은 동부의 크림반도 지역 자치주의 독립을 지지하고 무장 세력을 지지하며 사태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이를 두고 미국을 비롯한 유럽 정상들의 비난과 경제 제대로 표현되는 국가적 ‘협박’이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크림 반도 내 무력 개입을 불사하는 데엔 CIS(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독립국가연합)로 통칭되는 구 소련의 연방국들을 여전히 러시아의 연방국으로 간주하며 이들을 러시아의 통제 하에 놓고자 하는 푸틴이 있기 때문이다.

1990년 소련연방의 해체 이후 지속적으로 이뤄진 유라시아, 중앙아시아 내 미국의 세력 확대와 유럽의 동진은 냉전 체제 이후 세계 무대에서 재기하려는 러시아에게 큰 걸림돌이다. 유럽, 미국의 연합국 내 세력 확대가 러시아로서는 자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최대 요인이며, 이 난국을 타개하고자 러시아가 취한 외교 전략이 ‘블록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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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S는 러시아가 블록을 형성하는 데 있어 우선 순위를 두는 지역이다. 소련 연방의 해제 이후 1991년 러시아 옐친 전 대통령의 주도로 결성되었으며 당시 구 소련의 연방국 중 발트3국을 제외한 11개국,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기스탄, 키르기스탄, 카자흐스탄, 몰도바가 연합해 만들었다. 각 국의 정치·경제·군사 주권과 상호 동등성을 인정하며 결성되었으나 연방의 해체 이후 우크라이나를 제외한 독립국가 대부분은 경제적 자립이 어려워 CIS 역내 관세 혜택을 통해 러시아로부터 경제적 도움은 물론 군사적 안보 지원과 에너지 개발 등의 보조를 받았다. 그리고 러시아는 이 같은 CIS 내 역학관계를 중앙아시아 및 유라시아 일대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는 주된 수단으로 삼았다.

하지만 2000년대 초 소위 ‘색깔혁명’으로 불리는 민주화 혁명이 조지아(러시아명 그루지야)와 우크라이나, 키르기스스탄에서 잇달아 일며 러시아와 CIS 국가 간 균열이 생겼고, 이는 러시아를 크게 자극했다. 2003년 조지아에서 장기 독재에 반대하며 친러 정부에 대한 민주 시위가 발생하자 러시아는 자국 군대가 주둔하던 조지아 내 분리정책 지역인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를 독립시켜 조지아를 두 동강 냈다. 우크라이나 역시 2004년 ‘오렌지 혁명’으로 불리는 민주화 혁명을 경험했으나 혁명 세력의 내부 분열로 친러 인사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이 러시아의 지원 하에 정권을 잡게 돼 우크라이나의 EU가입이 무산된다.

재기를 꿈 꾸는 거인, 그리고 증후군

2001년 9.11 당시 부시 대통령에게 제일 먼저 전화를 건 외국 정상은 블라디미르 푸틴이었다. 그는 공식 성명을 통해 미국의 아프간 전쟁을 지지하고, 러시아의 뒷마당쯤으로 간주되는 중앙아시아에서의 미군기지 건설을 허락했다. 미국은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키르기스탄에 마나스 공군기지를 건설함으로써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지원하고, 중동 지역에 파병되는 병력과 보급 물품을 지급할 수 있었다. 그 대가로 2002년 G8 정상회의에서 러시아는 2006년 G8 회의의 의장국이자 개최국으로 결정되었고, 북대서양조약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NATO) 역시 ‘나토-러시아 위원회’를 설치해 대화의 창구를 마련했다. 소련 연방의 해체 이후 발 빠르게 진행된 나토의 동진에서 빚어진 러시아와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된 것이다. 러시아 역시 미국과 유럽을 러시아의 경제 성장을 위한 전략적 파트너로 두었고, 이 시기 EU는 러시아의 최대 교역국으로 부상했다. 러시아 역시 푸틴의 집권 이후 박차를 가한 가스관 건설을 통해 EU로 향하는 천연 가스 공급을 책임졌다.

2000년대 초 러시아와 미국·유럽의 우호적 관계는 일종의 ‘딜’이었다. 러시아는 CIS 내 러시아의 영향력을 조절하는 대신, 푸틴 집권 1기 체제 동안 서방 국가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고자 했다. 이를 통해 러시아의 경제, 외교 문제를 해결하고, 궁극적으로는 러시아의 사회적 안정을 도모하고자 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미국과 EU 또한 러시아와 CIS 사이의 관계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으며, 러시아의 ‘개입 강도’라는 것 역시 지금과 달리, 국제 사회에서 우려할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NATO-러시아 위원회의 설치로 중단되었던 유럽의 동진이 2004년 NATO가 발트해3국 에스토니아와 리투아니아, 라트비아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이며 재개됐고, 2003년 이후 민주화 혁명으로 들어선 CIS 민주 정부들은 미국의 전폭적 지원 하에 NATO에 가입했다. 무엇보다 서방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재건을 꿈 꿨던 러시아를 건드린 것은 미국과 유럽의 미사일 방어(Missile Defense, MD) 프로그램이었다.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폴란드와 체코에는 각각 미사일과 레이더 기지가 설치되었다. 이 둘은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으로 2000년대 초 빠르게 부상하는 러시아에 대한 미국과 유럽의 명백한 견제였다. 이 같은 일련의 사건으로 서방 세계와 우호 관계를 맺던 푸틴 집권 1기의 실용주의 외교는 보다 강경한 노선을 걷게 된다. 2007년 2월 뮌헨 안보 컨퍼런스에서 푸틴은 미국의 일방주의 정책과 NATO 확장을 강한 어조로 비판했으며 이에 대한 강력한 대응이 있을 수 있음을 시사했다. 그리고 2008년 푸틴이 총리로 자리를 옮긴 직후, 러시아와 서방세계 간의 갈등은 조지아 전쟁으로 표출되었다.

하지만 러시아와 서방국가 간의 라이벌 의식은 분명 러시아가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거인’으로서의 잠재력이 있음을 반증한다. 이는 군사 문제에 관해 러-미 간 협력의 필요성에 따라 예외적 친선관계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2009년 오바마 정부의 ‘재설정’ 정책 기조와 대통령으로서 푸틴과 다른 정치적 카리스마스를 보여줘야했던 메드베데프 정부 내에서의 요구가 맞물리며 러시아-미국 간 군사 협력의 기반이 조성된 바 있다. 양국 정상은 전략무기감축에 대한 ‘New START’ 조약 체결에 따라 당시 2,200기에 달하는 장거리 핵탄두를 1,550기로, 지상·해상 배치 미사일은 1,600기에서 800기로 감축할 것을 약속했다. 소련 연방의 해체 이후 러시아-미국 간 맺어진 ‘전략무기감축조약(START-1)이 만료되며 새롭게 체결된 이 조약은 냉전 이후에도 세계 전체의 안정에 있어 러시아가 미국의 파트너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한 사건이었다.

러시아와 중국이 부릅니다 ‘우린 친구가 될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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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의 집권 이후 약 10년, 국제 유가 급등과 석유와 천연가스 등의 천연자원 수출로 급속히 성장한 러시아는 세계경제를 이끄는 G8의 일원이 되었고, 신흥 경제대국을 아우르는 브릭스(BRICs)의 선두 주자였다. 그러나 2000년대 말 유가 하락과 2008년 전세계에 불어 닥친 금융 위기는 천연자원에 기형적으로 의존하고 있던 러시아 경제에 치명적이었다. 그리고 이 글로벌 위기 국면에서 중국이 미국의 우선적 협력 파트너로 지목되었다. 러시아로서는 강대국으로서의 자존심에 또 한번 커다란 상처를 입는 사건이었다. 글로벌 경제위기를 겪으며 러시아는 천연자원 기반의 경제 성장과 핵무기 보유가 강대국의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단 것을 확인했고, 21세기 전과 같은 일국 독주체제의 한계와 그 현실성을 재진단했다. 그리고 절치부심한 러시아가 꺼내 든 칼은 ‘다자간 협상 외교’이다.

러시아와 중국, 우즈베키스탄과 키르키스스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등 6개국이 결성한 상하이 협력기구(Shaghai Cooperation Organization, SCO)는 중앙아시아를 넘어 유라시아로 확장해 나가기 위해 러시아가 벌린 ‘판’이다. SCO는 소련 연방의 해체 이후 중국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그 주변국의 국경문제를 해결하고자 성립된 상하이-5를 전신으로 하며, 인종 분리주의와, 종교 극단주의, 테러에 대한 회원국 공동의 대응과 척결을 공동의 목표로 둔다. 기구의 조직과 운영에 있어 대장 노릇을 하고 있는 러시아는 역내 중국과 공조하며 중앙아시아에서 미국과 유럽의 영향력을 최소화 해 서방 세계에 대항할 수 있는 블록을 형성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은 러시아와 CIS 국가 사이에서 보였던 1대1의 직접적 개입이 아닌 한층 세련된 형태의 다자간 협상이다.

하지만 서방을 견제하며 비서구 세력의 중심으로 부상하기 위한 수단 자체가 러시아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중국은 SCO 기구 내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4개국의 전통적 유대관계를 인정하고 러시아를 기구의 주도국으로 인정하나 중국의 경제 대국화와 침착한 외교 전략으로 기구 내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중국과 긴밀하게 교류하며 실제 기구 내 역학관계는 중국으로 쏠려가고 있는 모양새다. 중국 역시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SCO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자국의 이익이 분명하다. 중앙아시아와의 우호적 관계를 통해 신장 등 소수 민족과의 갈등이 잦은 서쪽 국경지대를 안정시킬 수 있으며, 보다 효율적으로 자원을 수입할 수 있다. 기존 중국이 석유를 들여오고 있는 말라카 해협은 미국이 지키고 있어 미-중간 외교 관계에 따라 자원 수급에 변동이 생기게 되지만 중앙아시아를 통과하는 육로 가스관을 이용한다면 훨씬 안정적으로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경제 위기에 크게 휘청한 러시아와 달리 2009년에서 2011년 사이에도 높은 경제 성장을 이어간 중국은 2009년 투르크메니스탄-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중국을 잇는 중앙아시아 가스관을 건설했다. 이 같은 새로운 자원 수출의 판로 개척은 그 동안 유럽으로 향하는 가스 수송관을 독점해 오던 러시아에 대한 중앙아시아국들의 불만 표현이었으며, SCO를 이용해 역내 새로운 세력과 언제든 공조할 수 있다는 제스처였다. 중국의 영향력 확대로 인해 러시아는 집단안보조약기구(Collective Security Treaty Organization, CSTO)나 유라시아경제공동체와 같은 다른 협상기구들로 루트를 다각화하며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안보·경제 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나 이들 기구에서 역시 NATO와 EU라는 경쟁자를 상대해야 한다는 어려움을 안고 있다.

경쟁과 견제라는 SCO 내 러시아와 중국의 역학관계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전략적 협력관계’라는 거창한 말로 서로를 결속하고 있다. 1996년 러시아와 중국은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설정해 미국의 일방주의에 맞서는 다극체제를 선언했다. 당시 서방 세력은 옛 공산주의 패권의 부활을 우려했으나 이 둘은 자신들의 공조가 군사적 동맹을 의미하지 않음을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2001년 선린-우호 조약 8,9조는 양국은 “상대방의 주권, 안보, 영토적 통합성을 저해할 수 있는 어떠한 동맹이나 블록에 참여하지 않을 것, 상대방을 위협하는 세력들에 영토의 사용을 허락하지 않을 것, 상대방의 평화와 안보가 위험에 처할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즉시 접촉하고 논의할 것”이라고 명시함으로써 사뭇 공고해진 둘의 관계를 밝혔다.

미국을 위시하는 서방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러시아와 중국은 서로를 동반자로 설정했지만 이 둘의 결합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이고 이해타산적인 필요에 의해서다. 이 오묘한 관계를 “전략적 동반자 관계” 이상의 그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세계의 심장을 지배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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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을 다스리는 자가 심장지역(Heart Land)을 지배하고, 심장지역을 다스리는 자가 세계의 섬을 지배하고, 세계의 섬을 다스리는 자는 세계를 지배한다. 소련의 범위와 일치하는 유라시아의 중요성을 강조한 영국의 지정학자 핼포드 맥킨더가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출간한 <민주주의의 이상과 현실>이라는 책에 기록한 내용이다. 그리고 20세기 국제정치학자 스파이크만은 “유라시아를 지배하는 자, 세계의 운명을 통제한다”고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중동 일대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그의 저서  <평화의 지정학>를 통해 재차 강조했다.

푸틴은 CIS국가 포섭을 통해 옛 소련연방국의 부활을 끔 꾸고 있다. 2010년 러시아 군사독트린은 군사 협력의 파트너로서 단일 국가로는 벨라루스를 먼저 언급한 뒤 옛 소련연방국들이 속한 CSTO, CIS를 러시아 군사 안보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로 호명했다. 러시아는 미국 중심의 일극주의 해체를 명분으로 미국에 대항하고 있지만, 러시아의 푸틴이 바라는 것 역시 세계의 질서를 이끄는 패권국으로서의 부활이다. 그리고 2018년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푸틴에게 그 실질적 방법이란 중앙아시아 및 유라시아 국가들과의 블록 형성이다. 미국과 유럽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세계 심장부의 통합을 이끌어 내고, 이 중원을 다스리는 붉은 곰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여러모로 서툴고 성급한 러시아가 믿고 있는 것은 ‘영웅’ 푸틴 뿐이다.

김주량(이화여대 사회)
jasmin5203@gmail.com

[특집] 50년; 통합의 역사, 부활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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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세계대전 이후 국제 안보는 냉전의 블록 속에서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초강대국에 의해 규정되고 운영되었으며, 유럽은 보통 두 강대국들 사이에서 비교적 중립적인 행위자로 기능했다. 냉전 당시에도 서유럽은 대외정책을 펴는 데에 있어 독자성을 갖기 어려웠고, 국제분쟁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냉전이 종식된 1990년대 이후부터 적극적 개입 정책, 특히 군사 파병에 대한 EU의 인식이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2003년 이후 EU의 태도는 변하여 점차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통해 국제무대에서 주체적으로 활동하게 됐다.

 

소극적인 아이

20세기 후반 서유럽국가들은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후 대외정책을 실현하는 데에 있어, 대체로 무력 사용을 통한 개입을 꺼렸다. 2차 대전의 종전 이후 반세기 동안 EU는 대외적인 팽창 외교정책을 펴기 보다는 각국의 국내 재건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유럽 부흥 계획’이라고도 불리는, 1947년 7월부터 시작된 마셜플랜은 미국이 유럽과 일본내의 공산주의 확장을 막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럽을 재건하는 것 또한 중심 목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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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국가 내에서 세계대전이 남긴 상처들이 차츰 치유되고 기존의 양극질서가 붕괴되는 와중인 90년대에는 발칸반도에서는 여러 차례 분쟁이 발생하였다. 1992년부터 시작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분쟁은 유교연방으로부터 독립하려는 보스니아에 대한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인들의 반발로 인하여 시작되었다. 그러나 92년 유럽의 내부에서 시작된 이 분쟁에 대하여 유럽공동체는 약 25억 유로의 경제적 원조 외에 군사조치를 포함한 어떠한 적극적인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1995년, 결국 미국의 중재로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3개국은 제네바에서 영토 분할에 대해 합의하였고, 그해 11월 미국의 데이튼에서 내전 당사국들 간의 평화 협상이 이루어졌다. 이 자리에는 비록 유럽의 주요국들이 대거 참석하였지만, 평화 협상 체결을 이끄는 주된 역할을 한 것은 미국이었다. 그리고 3년 동안의 내전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던 보스니아 내전은1995년, 유럽국들이 아닌 UN의 평화유지군 파견으로 막을 내렸다.  유럽 내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해서 당시의 유럽은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주도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

마크 에이스컨스 벨기에 전 국무총리는 “EU는 경제로는 거인, 정치로는 난쟁이, 군사적으로는 지렁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정치, 군사적으로 힘이 부족했던 유럽은 이를 보완하기 위해 무엇보다 국가들 간의 통합이 우선이라고 생각했고, 1993년 11월 1일 유럽공동체(EC)에서 유럽연합(EU)로 새롭게 변화하였다. 이로써 EU회원국들은 공동의 외교 및 안보정책을 갖게 되었다. 이는 과거 유럽국들은 유럽 내의 분쟁을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던 위치로부터 점차 탈피하기 시작했고, 국제무대에서 보다 존재감 있는 역할을 하기 위해 점차 통합·성장해 나갔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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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점차 EU 국가들이 통합되어가는 과정에서 1998년에 발생한 코소보 사태는 EU의 외교안보정책 변화에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코소보 사태 직후 1999년 쾰른에서 열린 회담에서 유럽이사회는 EU의 군사력 및 공동방위능력 향상을 위해 유럽안보방위정책(ESDP)을 수립하였는데, 이는 EU회원국들의 군비와 병력의 통합과 유럽군 창설 등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그 후 EU는 특히 군사적인 면에서 독자적으로 국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 1999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유럽 정상회담에서 ‘European Headline Goal’을 발표하였다. 이 합의의 골자는 2003년까지 6만 명 규모의 유럽연합 신속대응군(ERRF)을 창설하는 것이었다. 또한 “베를린 플러스 조약(Berlin-Plus Agreement)”이라는 유럽안보방위정책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이 설정되었다. 베를린 플러스 조약은 국제 평화유지와 위기 관리를 위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관여하지 않을 경우, 유럽연합이 NATO의 병력을 이용해, 자신의 이름 아래 주도적이고 독자적인 군사 활동을 개시 할 수 있도록 허용한 조약이었다. 신속대응군의 창설과 베를린-플러스 조약을 통해 EU는 독자적이고 통합된 군사체제를 갖출 준비를 마쳤다.

 

콘코디아’, 최초의 단독 군사작전

2003년 EU는 국제 분쟁 조정을 위한 최초의 군사작전을 수행하였다. 신속대응군의 창설과 Berlin-Plus Agreement를 통해 갖추었던 군사체제를 이용한 외교정책을 처음으로 실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작전명 ‘콘코디아’ (Concordia)로 일컬어지는 불리는 마케도니아 평화유지 임무는 350명이라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파견 병력으로 마케도니아에서 벌어진 소수 알바니아인과 정부군간 분쟁을 조정하는 것이었다. 이 작전을 통해 유럽은 EU라는 주체로서 첫 군사행동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실질적으로 EU만이 직접 독자적인 군을 파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NATO의 병력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미국과의 합의는 선결조건이었고, 작전 중에도 미국이 보유한 정찰기와 전략수송기를 이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마케도니아 평화유지 임무를 NATO로부터 인수해 사상 첫 군사작전을 수행함으로써 EU는 점차 적극적이고 독자적인 군사정책 구조를 설립할 발판을 마련했다.

같은 해, EU는 미국과 NATO의 지휘 없이 또 다른 국제 분쟁 해결을 위해 독자적으로 군사 행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콩고의 소수민족인 해마족으로 이루어진 콩고애국자동맹(UPC)과 다수민족인 렌두 부족 민병대연합 등 2개의 반군단체 간 충돌로 이투리 지역에서는 지난 99년 이래  5만 여 명이 목숨을 잃고, 50만명의 난민이 발생하였다. EU는 이러한 콩고 분쟁의 중단을 위해 평화유지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고 프랑스가 주축이 되어 약 1,700명의 군사들이 NATO로 부터가 아닌 EU로 부터 직접 파견되었다. 이는 EU가 처음으로 유럽 외의 국가에게 군사를 지원했던 사례이기도 하다.

 

생각도, 마음도 하나될 있도록

90년대 말 부터 시작된 독자적 군사운영체제를 통해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EU도 군사작전을 통한 국제 문제 해결에 실질적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국제 무대에서 조금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EU가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펴는 과정에서, 현실적으로 모든 회원국들이 통일된 주장을 내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단일 국가 내에서의 의견 통합도 어려운 실정에서 다양한 국가들이 한 목소리를 내기에는 아직 경험도 부족했고 이해관계의 불일치도 컸다. 2003년 일어난 이라크 전쟁은 EU가 통합되어가는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하나된 목소리를 내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EU는 이라크에 무력을 사용하려는 미국에게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표출하였지만, 무력 사용여부에 대한 EU 회원국들 간의 의견 충돌이 있었다. <뉴욕타임즈> 에 따르면 시라크 프랑스 전 대통령은 “어떤 상황이 올지라도 프랑스는 무력사용 및 이라크 파병에 대한 거부권을 표명할 것”이라고 언급했으며, “전쟁 발발의 주 원인이 될 수 있는 이와 같은 행동에 대하여 찬성할 수 없다”는 의견을 밝혔다. EU 설립의 주축이었던 독일 역시 같은 입장이었지만, 두 국가들과 반대로 영국과 스페인은 미국의 의견에 동의하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라크 파병에 대한 회원국들간의 갈등이 고조되자 스페인의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전총리와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전총리는 “EU 회원국들이 모두 한 마음으로 공공의 위협(이라크)에 맞서자”는, 미국을 지원하기 위한 서명안을 내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EU의 대표국이었던 그리스의 아포 스톨 장관은 “이라크 전쟁은 EU의 통합 과정에 피해를 주고 있다”며 “만약 우리가 국제사회에서 유럽국으로써 영향력을 가지고 싶다면 통일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로가 공통된 외교 안보 정책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전쟁 당시 EU국가들은 하나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사춘기를 지나, ‘EU’만의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국제 무대에 나서기는 했지만, EU회원국들이 의견을 통합하는 데 겪었던 어려움은 시리아 사태를 계기로 점차 극복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2011년 3월 시리아의 독재자 알아시드의 퇴출에 대한 반정부시위로 시작된 시리아 사태는 2012년 내전으로 치닫기 시작하였다. 시리아 사태를 중단하기 위해 EU는 수 차례의 적극적인 제재 조치를 취하였는데, 이라크 전쟁 때와는 다르게 EU의 ‘주요 3국’인 영국, 프랑스, 독일이 비록 그 방법에 있어서 차이를 드러냈지만, 제재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데는 의견의 일치를 보였다. 다른 국가들 또한 세 국가의 의견을 지지하는 구도였다. 시리아 사태에 대해 EU는 적극적이지만 비군사적인 제재를 선호했다. 매년 미국과 유럽에서 실시되는 설문조사인 ‘범 대서양 경향(Transatlantic Trends)’ 에 따르면, 유럽 국민들의 71%가 EU가 세계 무대에서 리더가 되는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지만, 그 중 70%이상이 비폭력적인 제재 방법을 원한다고 밝혔다.

<뉴욕타임즈>는 시리아가 경제, 무역, 여행등의 분야에서 미국보다 EU와 더 친밀한 교류를 해왔다고 보도했다. 특히 EU는 시리아 전체 인산염 수출량의 40%를 수입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시리아에 대한 EU의 경제 제재 조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그 외에도 제재안에는 시리아 중앙은행의 자산동결, 다이아몬드·금과 같은 시리아산 귀금속 수입 금지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EU는 무력 개입보다는 이러한 경제 조치와 외교적인 접근을 통해 사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캐서린 에쉬턴 EU 고위 대표는 ‘시리아는 무력진압을 중단하고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고 공식적인 목소리를 내었으며, EU는 비샤르 알-아시드 시리아 대통령 정권에 대한 반정부 시위대의 유혈 사태와 관련해 2011년부터 2012년까지 수 차례에 걸쳐 제재 조치를 취하였다.

 

 러시아의 ‘활약’에 숨 고르는 미국, 대타로 나서는 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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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의 가까운 동쪽에서 발생한 일련의 충돌과 위기들은 EU의 적극성을 보다 심화시켰다. 우크라이나 반정부 시위 이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무력 점거하고 크림자치공화국의 합병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 미국과 서방국가들, 특히 EU는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이러한 러시아의 행보가 나타났던 초기에는 미국이 서방국가들을 대표하여 공식으로 선언했지만, 곧 오바마 대통령이 독일의 메르켈 총리에게 러시아 제재 주도권을 넘긴 이후 독일을 위시한 EU는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여기에는 더 이상 모든 것을 혼자 떠안을 수 없다는 미국의 자기고백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독일과 러시아의 경제적 동맹관계는 EU가 더 일찍 강력한 조치를 취하는데 어려움을 주었기 때문에, EU는 초기에 러시아와 비자 면제 협상을 중단하는 등의 가벼운 제재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협상에 진전이 없자 메르켈 총리는 러시아의 은행 계좌 동결과 여행규제 등과 같이 제재의 수위를 높일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올해 3월 19일, 독일의 경제부총리 지그마르 가브리엘은 “독일 정부가 독일의 군사산업 기업인 라인메탈이 러시에서 진행하는 가상 전투 훈련장 건설을 중단시켰다”고 발표했다. 독일과 러시아가 2011년 체결한 ‘라인메탈 프로젝트’는 라인메탈이 러시아 볼가 지역의  뮬리노 시험장에 가상 전투 훈련 센터를 건설하는 프로젝트이며, 훈련장 건설은 러시아군의 연료 절약 및 장비 노후화의 감소 덕분에 몇 년 내에 그 진가를 발휘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었다. 시리아 사태 이후 EU는 군사조치를 제외한 경제적인 조치만을 취해왔었으며, 우크라이나 사태가 교착 국면에 접어들자, 차츰 제재 수위를 높여갔다.

우크라이나 사태 초기의 여러 제채 조치 이후, 러시아를 제재하기 위해 강경한 조치를 취해야한다고 하나된 목소리를 내었던 미국과 EU는 최근까지 조금의 의견 차이를 보였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사태를 더 심화 시킨 러시아에게 이전 보다 강력한 제재 조치를 취해야한다고 주장하던 반면, 프랑스와 독일은 미국이 주도하는 경제 재제에 대하여 이제는 직접적인 제재 보다는 대화를 통한 협상을 해야한다는 의견을 내새웠다. 미국은 러시아 정부가 대주주로 있는 8개의 기업들에 대해 미국 금융시장 접근을 차단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지만, 유럽은 유럽투자은행(EIB)과 유럽건설은행(EBRD)의 러시아 신규투자를 당분간 중단시키기로 하는 추가 조치만 취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결정적으로 유럽과 러시아 사이의 경제 투자 정도와 그 분야는 미국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고 다양한 것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7월 17일 우크라이나 남동부에서의 말레이시아 항공 추락은 또 다시 러시아 제재에 대한 EU의 입장을 혼란에 빠뜨려놓았다. 말레이시아 항공 MH17의 사망자 298명 중 193명이 네덜란드 국적이며, 이에 더하여 영국, 독일, 벨기에 국적을 합하게 되면 211명으로 전체의 71%가 유럽인이었던 것이다. 러시아와 우르라이나의 친러 세력이 개입된 것으로 추측되는 이번 항공기 추락 사고는 러시아에 대한 EU의 분노를 다시 한번 키울 수 밖에 없었다.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외무장관은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반군 간의 충돌을 줄이는 데 충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말했고, 7월 22일 결국 프란스 티메르만스 네덜란드 외무장관은, EU 장관들이 러시아 관리들에 대해 비자 금지와 자산 동결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고 발표하였다. 또한 <FOX NEWS>에 따르면 EU 집행위원회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물러서지 않을 경우 무기와 에너지, 금융 분야를 포함한 전면적인 제재에 나설 예정이라고 밝혔다. EU는 더 이상 과거의 소극적인 대외정책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또한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를 둘러싼 강력한 경제적 제재들은 러시아와 EU 사이를 예전과 같지 않게 만들었다.

 

EU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경제 거인”?, 중국과의 동반 성장 노린다

올해 3월 22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제3회 핵 안보정상회의 참석과 더불어 유네스코 본부와 EU 본부를 방문하였다. 중국 매체인 <신화통신>은 “시진핑 주석이 EU 브뤼셀 본부를 방문하여 중국과 유럽이 평화ㆍ성장ㆍ개혁ㆍ문명의 4대 파트너 관계를 구축할 것을 제안했다” 고 보도했다. 이에 대하여 EU의 반롬푀이 의장 또한 “시진핑 주석의 EU 본부 방문은 중국-유럽간 전략적 파트너관계의 탄탄함을 보여준다”고 보도하였다. EU가 국제정치적으로 발전하고 변화함과 함께 중국 또한 지속적이고 빠른 경제성장으로 국제적인 주요 행위자로 부상하며 EU와 가까운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이후 EU와 중국은 각종 국제현안 및 문제들에 대하여 서로의 입장을 공유하는 ‘전략적 동반자’적인 관계를 형성하였다. EU의 회원국들 가운데 독일과 네덜란드는 중국의 제1, 제2 무역파트너이고, 프랑스는 신중국과 대사급 외교관계를 처음으로 맺게된 서방국가이다. 중국과 유럽 국가들은 역사적으로 근본적인 이해충돌이 없고, 양측 모두 세계정치의 다극화를 주장하고 있다.

올해는 중국과 유럽이 <중국-EU 협력 2020전략계획>을 시작하는 해이다. <중국경제일보>는 이번 전략 계획은 “중-EU의 평화, 안전, 번영을 위해 지속가능한 발전, 인적자원 및 문화 등의 협력강화를 공동목표로 설정하였다”고 밝혔다. 이러한 전략계획은 경제, 정치 분야의 발전과 개혁의 시기에 놓인 중국과 유럽의 경제동맹관계를 더 가까워 질 수 있도록 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최근 몇 년간 중국과 EU 회원국들 간의 상호 교류도 빈번히 진행되어 왔으며, 20년간의 양국 무역 교류는 서로에게 큰 변화와 발전을 가져 왔다. 중국-EU의 호의적인 정치관계는 양자간 경제무역협력의 발전을 촉진하여 최근 몇 년간 중국-EU의 무역액은 해마다 20%이상씩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다. 만약 중국과 함께 경제 활력을 잃지 않고 지속 성장을 꾀할 수 있다면, EU의 결속력과 대외 발언권을 유지 및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근간이 마련될 것이다.

 

앞으로도 잘 해낼 수 있을까?

EU의 결성과 통합에는, 국제 문제에의 적극적 개입이 큰 영향을 주었다. 콘코디아 작전을 비롯한 1990년대 초 군사 작전은 EU가 기존의 소극적 성향에서 보다 적극적인 대외정책으로 탈바꿈하는 전환점이었으며, 동시에 대외정책과 안보 분야에 있어서 EU의 통합을 가속화하는 촉매로 작용하기도 했다.

EU의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대외정책의 방향에는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어느 정도 자율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빼놓을 수 없다. 이스라엘을 지지해오던 미국과는 달리, 2013년 EU가 이스라엘의 ‘그린라인’을 벗어난 지역과 정착촌내의 지역과는 경제적 교류를 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면서 이후 EU는 이스라엘과의 무역협정에서 여러 경제 제재 조치를 내놓았었다. (링크, 47쪽)

최근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공격에 대해서도 유럽 국가들은 하마스의 입장을 어느 정도 옹호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유엔인권이사회(UNHRC)는 “이스라엘내 군사작전으로 발생하고 있는 인권 침해를 강력하게 규탄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발표하였는데, 이 결의안에 대해 미국만 반대표를 던졌다. 또한 파리, 베를린, 빈, 암스테르담 등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는 반 이스라엘 및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가 진행되고 있다. 반면, 7월 18일부터 20일까지 실시된 CNN/ORC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57%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군사작전이 정당하다는 반응을 보였고, 10%만이 이스라엘의 무력 사용이 과도하다는 응답을 보인 바 있다.  양차대전 이후 EU와 미국은 대부분의 국제문제에 대해 서로 비슷한 입장을 취해왔지만, 미국 주도의 단극질서가 붕괴되기 시작하고, 미국이 동맹국들의 적극적인 ‘협력’을 요청하면서 EU의 자율성은 상대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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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세계의 강대국으로 불리우던 유럽의 몇몇 국가들과 더 많은 유럽국들이 합쳐져 현재 28개의 국가들로 구성된 EU는 현재까지 비교적 성공적인 국가 통합 기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장밋빛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2008년 그리스부터 시작된 경제위기와 여기서 비롯된 EU 내부의 갈등과 격차는 EU의 통합에 극복해야 할 장벽을 여실히 드러내주었다. 또 세계적인 경기 침체가 계속되면서, EU는 비록 중국과 접촉하는 등 개별적으로 활로를 모색하고는 있으나 내부에서는 통합에 대한 반발감 역시 커지는 듯하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최근 극우 정당들의 행보가 돋보이는 것도 이러한 국민 감정이 반영되는 까닭으로 보인다. 지난 50년 통합의 궤적 위에서, 과연 EU는 하나의 강력한 주체로서 다시금 국제 사회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힐 수 있을까?

 

표혜수(연세대 국제학)
sarahpyo8@gmail.com

김만희 (고려대 국어국문)
manhee8701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