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 2016 8월

사드, 과연 중국을 겨냥하는 칼끝인가?

안보 트릴레마와 사드

트릴레마(Trillema)란 두 국가 사이의 군비 경쟁이 제 3국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의미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지난 7월 8일, 점증하는 북한의 핵무기 및 탄도미사일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카드로 한반도 사드(THAAD) 배치라는 옵션을 선택했다. 그런데 한반도 사드 배치 결정이 발표된 이후 가장 강력한 반감을 드러낸 국가는 다름아닌 중국이었다. 중국의 왕이 외교부장은 한반도 사드 배치가 자신들의 전략적 이익을 침해하는 행위이며, 미국이 북한의 위협을 핑계로 다른 나라의 정당한 안보 이익을 훼손해서는 안된다는 강도 높은 비난을 가했다. 이렇듯, 최소한 명목상의 이유로는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주한미군과 한국을 방어할 목적으로 사드 체계를 배치하는 행위가 제 3국인 중국에게 부정적인 영향력을 미친다는 점에서, 한반도 사드 배치 논쟁은 전형적인 안보 트릴레마의 사례로 보아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사드 레이더 논란과 중국의 반발

그렇다면 중국 정부가 이토록 강하게 반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핵심적인 원인은 사드 체계의 ‘눈’에 해당하는 AN/TPY-2 레이더의 탐지 거리에 있다. X밴드 대역의 주파수를 사용하는 AN/TPY-2 레이더는 매우 유연하고 강력한 탐지 능력을 자랑하는데, 중국은 바로 이 레이더가 중국 영토의 일부분을 감시권 안에 포함하기에 자신들의 안보 이익에 위해를 가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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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AN/TPY-2 레이더는 두 가지 모드로 활용이 가능하다. 우선 종말요격모드(TM)의 경우 사드 미사일 포대의 전술작전센터(TOC)와 연동되어 사격통제 기능을 수행하며, 탐지거리는 600km 정도로 알려져 있다. 전진배치모드(FBM)는 사드 미사일 포대와는 독립되어 배치되어 MD의 지휘통제체제인 C2BMC에 수집된 데이터를 전달하는데, 미 의회 예산국(CBO)의 정책보고서 “Options for Deploying Missile Defenses in Europe”이나, 미 육군의 “AN/TPY-2 Forward Based Mode(FBM) Operations” 운용 교범에는 이 모드의 탐지 거리가 1000km정도로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레이더의 탐지 거리는 피탐체의 레이더 반사 면적(RCS)에 따라 달라지는데, 앞서 언급한 자료들은 AN/TPY-2 레이더가 어느 정도의 RCS 값을 가진 물체를 상대로 1000km의 탐지 거리를 갖는다는 것인지 명확하게 제시하고있지 않다.

제작사인 레이시온(Raytheon)사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이 레이더는 FBM으로 운용될 경우 레이더 반사 면적(RCS) 0.01 m2의 물체를 기준으로 600~700km 의 탐지 거리를 갖는다. 물론 피탐체의 RCS 값이 크면 클수록 탐지 거리는 보다 길어진다. 예를 들어 종말 단계(Terminal Phase)에서 탄도미사일의 추진체로부터 분리된 탄두의 전면 부분의 RCS는 0.014 m2 정도인 반면, 상승 단계에 있는-아직 추진체가 분리되지 않은-탄도미사일의 측면 혹은 후면의 RCS는 이보다 훨씬 클 수밖에 없다. 레이더 방정식에 의하면 RCS가 100배 차이 나면 탐지거리는 약 3.16배, RCS가 20배 차이 나면 탐지거리는 약 2.1배가 차이나는 만큼 표적의 RCS는 레이더 탐지거리 및 탐지확률을 결정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1  중국의 동북부에 배치된 ICBM이 미국 본토를 향해 향해 발사될 경우, 한반도에 배치될 사드 레이더가 바라보는 이 미사일의 측후면 RCS 값의 평균치가 대략 0.1~1 m2 사이에서 형성된다. 사드 레이더가 FBM으로 운용된다는 가정 하에, 앞서 언급된 계산법에 의하면 이 미사일들은 레이더의 배치 지점으로부터 약 1000~2000km 정도의 거리에서 탐지될 수 있다. 중국 정부는 표면적으로는 이러한 이유로 한반도 사드 배치를 반대해왔다.

 

과연 사드는 정말 중국의 안보에 위협적일까?

반면 미국과 한국 정부는 사드 레이더가 TM으로 운용될 예정이기 때문에 중국의 안보 이익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이론상으로는 초기에 TM으로 세팅된 레이더를 8시간에 걸쳐 FBM으로 변환해 운용할 수는 있지만, 이럴 경우 한반도 사드 배치의 목적인 북한의 탄도미사일에 대한 방어능력은 상실되기 때문이다. 사드 미사일 포대의 전술작전센터(TOC)와 연동된 사격통제 기능은 이 레이더를 TM으로 운용할 경우에만 유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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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주한미군이 북한의 탄도미사일에 대한 방어능력을 상실해가면서까지 사드 레이더를 본래 배치 목적에 어긋난 FBM으로 운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미국은 굳이 그런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한반도에 배치된 사드 레이더를 FBM으로 운용하지 않더라도, 이미 중국의 탄도미사일에 대한 조기경보능력을 제공하는 다양한 센서들을 보유하고 있다. 일본에 배치된 2기의 AN/TPY-2 FBM 레이더, 서태평양 전구의 해상 배치 X-밴드 레이더, 대만에 배치된 PAVE-PAW OTH(Over-the-Horizen) 레이더, 태평양 함대 소속의 이지스 구축함, 우주에 배치된 DSP/SBIRS/STSS 정찰위성들이 바로 그런 센서들에 해당한다.

특히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에 대한 미국의 본토 방어 전략에서는 우주 기반 자산들과 알래스카에 배치될 신형 장거리 레이더가 핵심 센서로 기능한다. ICBM의 초기 상승 단계(Boost Phase)에서 DST 위성이나 SBIRS 위성이 열과 가스 변화를 감지해 조기 경보 기능을 수행하고, STSS 위성과 알래스카의 장거리 레이더가 중간 단계(Midcourse Phase)에서 종말 단계(Terminal Phase)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미사일의 궤적을 추적하는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감시/정찰 자산들로부터 수집된 정보를 토대로 GBI(Ground Base Interceptor)가 ICBM의 요격을 담당하게 된다. 그리고 탄도미사일의 기만탄 분리 작업이나 다탄두(MRV) 분리 작업은 중간 단계 이후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중국 동북부에서 상승 단계에 있는 탄도미사일에 대한 제한된 정보만을 전달 가능한 AN/TPY-2 레이더의 대(對) 중국 효용 가치는 생각보다 높지 않다.

 

사드 () 안보 트릴레마의 본질

그런데 미국이나 한국 정부가 생각하는 합리성이나 중국 지도부가 생각하는 합리성은 다를 수도 있다는게 바로 이 안보 트릴레마의 본질이다. 기본적으로 안보 딜레마 혹은 트릴레마는 상대방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는 한계 때문에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의 국제 정치에서는 한 국가가 순수하게 방어적인 의도로 배치한 무기체계가 상대국, 혹은 제 3국에게는 공격적인 의도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이 종종 일어날 수 있다.

아마 중국의 표면적인 반응의 이면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첫째, 중국 지도부는 실제로 한반도에 배치될 사드 레이더가 TM이 아닌 FBM으로 운용될 것이라 믿고 있을 수 있다. 미국과 한국의 의도에 대한 중국 지도부의 신뢰 부족이 한반도 사드 배치에 대한 오인식(Misperception)을 유발하는 시나리오이다. 둘째, 실제로 그렇게 믿지는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사드 체계 배치를 통해 잠정적으로 미국과의 전략적 제휴관계가 강화될 가능성을 우려해 일종의 “떼를 쓰는 것”일지도 모른다. 중국 지도부는 자신들의 A2/AD(Anti Access/Area Denial) 전략과 미국의 Pivot to Asia 전략이 충돌하는 서태평양-동아시아 지역에서, 한반도 사드 배치가 중국을 견제하는 한-미-일 삼각 동맹의 형성을 가속화되는 기제로 작용할 가능성을 우려할 수 있다. 어쨌거나 두 가지 경우 모두 한반도 사드 배치가 대북 견제 수단이라는 미국과 한국 정부의 주장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첨언하자면, 중국 정부는 예전부터 미군의 자산이 한국에 배치되는 것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겨왔다. 일례로 한-중 수교 2년 후인 1994년, 당시 대한민국이 패트리어트(Patriot) 체계를 배치하려 했을 때도 “중국은 군사훈련이나 미사일 배치 등 한반도의 평화유지와 긴장완화에 해로운 어떠한 행동이나 조치도 지지하지 않는다.”며 반대 의사를 표명했었다. 1991년 걸프 전쟁에서 이라크 군의 스커드 미사일을 요격함으로써 유명세를 얻은 패트리어트 미사일은,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사드와는 달리 레이더의 범위가 중국 영토를 포함할 우려가 전혀 없는 무기체계였다.

신뢰의 부재는 갈등을 유발한다. 한반도의 사드 기지를 유사시 우선 타격 목표로 삼겠다느니, 한국이 독립을 잃을 수도 있다느니 하는 중국의 노골적인 협박성 언사가 바로 신뢰의 부재가 빚어낸 갈등이 무엇인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은 어떠한 형태로든 중국과의 관계에서 정치적 비용을 수반할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안보를 위해 이미 사드 배치 결정을 내린 상황에서도, 사드 발(發) 안보 트릴레마의 비용을 최소화하는 차원에서 중국 정부를 설득하려는 노력이 아예 배제되어서는 안된다.

 

중국을 향해 던지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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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반대로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다. 과연 중국은 한국에게 신뢰할만한 존재인가? 한국이 사드 배치를 하든 하지 않든 중국은 이미 유사시 한국에 대한 공격 계획을 갖고 있다. 수 년 전 동북 3성에 전진 배치된 중화인민해방군 제 2포병 820여단의 DF-15 단거리 탄도미사일이 바로 그 증거이다. DF-15의 사거리는 800km 이하로, 지린성 퉁화에 배치된 이 미사일의 현실적인 타격 목표는 한국 외에는 없다. 한국을 향해 핵탄두까지 탑재 가능한 공격용 무기를 겨냥하고 있는 국가가, 한국이 자국의 안보 수요를 위해 방어용 무기를 배치하겠다는 결정에 대해 비난을 가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또한 지난 달 인도의 한 언론에서 파키스탄과 중국 정부가 북한이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원자재를 들여오는 과정에 동조하고 있다는 보도를 내보낸 적이 있었는데, 중국이 북한의 핵개발을 의도적으로 묵인한다는 의심이 들지는 않는가? 더불어 북한이 공개한 신형 방사포와 신형 방공미사일의 형태가 중국이 운용하는 동급 무기체계와 매우 유사해 보이는 것은 순전히 우연의 일치인가? 이 모든 의문점들을 한 가지 질문으로 좁혀 보자면, 지금까지의 선례에 비추어 봤을 때 중국 지도부에게 한국의 안보를 보장해줄 의지가 존재하긴 하는가?

아마 그렇지 않다면, 한반도 사드 배치는 비록 최선의 선택지는 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최소한 현실적으로 점증하는 북한의 위협에 대응해 한국의 안보를 보장하기 위한 몇 안되는 카드들 중 하나가 아닐까?

사드는 동급의 미사일 방어 시스템인 러시아의 S-400, 중국의 HQ-19, 이스라엘의 Arrow-3와 비교했을 때 가장 신뢰성 있고 검증된 무기체계이다. 사드 체계가 경상북도에 배치된다면, 유사시 미군의 증원과 한국의 지속적인 전쟁수행능력 확보에 필수적인 남부권의 공항과 항만 및 병참 시설을 북한의 탄도미사일 공격으로부터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일각에서는 북한 탄도미사일의 공중회전(Tumbling) 현상이나 가짜 탄두의 사용 때문에 사드로 요격이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김성걸 한국국방연구원(KIDA) 연구원은 지난해와 올해 발사된 북한 미사일 가운데 공중회전을 보인 미사일은 없었으며, 가짜 탄두의 역할을 하는 추진체의 잔해는 실제 탄두와 상당한 정도로 거리를 두고 비행하기에 레이더 식별에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이러한 반론을 일축하였다. 즉, 미국이 제시한 사드 배치 카드가 한국에 제공하는 군사적 효용은 가시적이다.

반면 중국이 한국이 북한의 핵무기와 탄도미사일이 결합된 최악의 시나리오로부터 느끼는 안보 위협을 상쇄하기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더 나아가 한국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중국이 의도적으로 북한의 행위를 묵인하고 심지어 후원한다는 의심할 만한 정황까지 존재한다. 북한의 핵무기 및 탄도미사일 위협의 증대는 한국의 사활적 안보 이익과 밀접하게 관련된 문제이다. 한반도 사드 배치가 중국의 핵심 이익을 일정부분 침해할지도 모르는 ‘잠재적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한국을 겨눈 북한의 칼끝은 한국의 사활적 이익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현존하고 명백한 위협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의 역할이 사드 배치보다 더 확실하고 효과적인 대안이 되지 못한다면 한국은 한-미 동맹의 방어능력 강화라는 옵션을 택할 수밖에 없다.


박태용∙임재성, 레이더 위치에 따른 탄도미사일의 RCS 특성, The Journal of Korean Institute of Communications and Information Sciences 15-01 Vol. 40 No.01 p. 215


 

두 얼굴의 정치인, 아베 신조(安倍 晋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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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한 아베 신조(출처: 연합뉴스)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야누스(Janus)’란 이름의 신이 등장한다. 그는 두 얼굴을 가진 신으로 성과 집의 문을 지키는 수호신이자 처음과 끝, 전쟁과 평화를 상징한다. 그로부터 나온 말이 바로 ‘야누스의 얼굴’. 이는 두 얼굴을 지닌 신의 모습에 빗대어 이중적인 사람,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지칭할 때 주로 쓰이는 표현이다.

그리고 여기, 야누스의 얼굴을 가진 일본의 한 정치인이 있다. 그의 이름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현 일본의 총리다. 그는 1993년 ‘보수 왕국’이라 불리는 야마구치 현에서 중의원에 당선되어 그의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安倍 晋太郎)의 선거구를 계승하며 정계에 첫 발을 디뎠고, 2006년에는 최연소 전후(戰後) 세대 첫 총리라는 화려한 타이틀로 총리직에 올랐다. 그는 전후 일본 정치사를 통틀어 두 번 총리직에 오른 두 번째 인물이다. 일본 최고의 정치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뛰어난 소통 능력과 외교 실력, 과감한 인재 중용으로 노련하게 일본 정국을 이끌어가고 있다는 평을 받지만, 한편으로는 끊임없는 극우적 망발과 수정주의적 역사관 표출로 인해 이웃나라인 한국과 중국과의 불편한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불편한 관계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아베 내각은 지난 달 27일 G7 정상회의 개최와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함으로써 다가오는 7월의 참의원 선거에서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 게다가 민생 현안과 직결되는 최대 현안인 소비세율 인상 방침을 2019년 10월로 연기함으로써 그의 지지율은 지난 달보다 7% 상승한 55.3%를 기록했다. 아베 총리의 장기집권이 예상되는 현 상황에서, 한국의 현명한 대일 정책 구상을 위해서는 지피지기가 절실히 요구된다. 아베는 누구인가? 그의 극우주의적 역사관을 구성하는 뿌리는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그 종착지는 어디가 될 것인가? 오늘날의 아베를 가능케 한 세 가지 형성 요인을 파헤쳐 본다.

 

아베의 사상적 배경: 요시다 쇼인과 야마구치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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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조슈(야마구치현) 출신의 메이지유신 주역들을 다수 배출한 일본의 사상가 요시다 쇼인(1830~1859)

우) 요시다 쇼인의 사설학당인 쇼카손주쿠 내부 모습. 메이지 유신과 한일 합병의 주역들이 보인다(출처: 제이누리).

 

아베 신조는 1954년 9월 21일 도쿄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적은 야마구치 현 오쓰 군으로, 오랜 세월 동안 그의 가족의 정치적 텃밭이 되어 준 ‘보수 왕국’의 중심지이다. 야마구치 현은 또한 일본 근대사 태동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근대화의 성공 원동력인 메이지 유신(1868년)이 바로 이 곳, 야마구치 현의 하기시 조슈번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곳은 동시에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의 출발점이자 수많은 과격파 사무라이들의 본거지였으며, 정한론을 기반으로 한 한일 병합 야욕이 등장한 곳이기도 하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얼룩진 기괴한 역사가 서린 바로 이 곳에, 아베의 사상적 배경이 된 요시다 쇼인이 있었다.

쇼인은 하기의 하급 사무라이 출신으로, 28살의 어린 나이에 사설 학당인 쇼카손주쿠(松下村塾)를 열고 제자를 양성했다. 그는 당대 엄격한 계급 사회에서 출신을 따지지 않고 문하생을 받아들임으로써 기존 질서를 파격적으로 배격했고 국민적 역량을 최대한으로 끌어냈다. 이는 곧 문하생들의 신분 상승 의지로 이어졌으며, 권력을 향한 야욕과 탐욕을 키우는 데도 한 몫을 했다. 그는 ‘일군만민론(나라는 군-천황-이 지배하며 백성은 군 아래서 평등하다)’을 내세워 막부 타도를 외쳤으며 훗날 일본 군국주의와 침략주의의 기틀을 다진 <유수록>을 썼다.

.무력 준비를 서둘러 군함과 포대를 갖추고, 즉시 홋카이도를 개척해 제후를 봉건하여 캄차카와 오호츠크를 빼앗고, 오키나와와 조선을 정벌해 북으로는 만주를 점령하고, 남으로는 타이완과 필리핀 루손 일대의 섬들을 노획해 옛날의 영화를 되찾기 위한 진취적인 기세를 드러내야 한다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조선과 만주, 그리고 중국의 영토를 점령하여 강국(유럽)과의 교역에서 잃은 것은 약자에 대한 착취로 메우는 것이 상책이다

<유수록>의 내용 중 일부

당시 이 책을 접한 많은 일본인들은 책에 담긴 국가전략에 열광했고, 이는 곧 군국주의 침략의 토대가 된 대동아공영론과 정한론을 탄생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그렇다면 요시다 쇼인의 제자는 누구였는가? 그의 사설 학당인 쇼카손주쿠 안 강의실에는 그의 밑에서 국가 전략을 공부한 12인의 문하생들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세 인물은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그리고 야마가타 아리모토다. 이 중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인 이토 히로부미는 초대 조선 통감으로, 을사늑약 체결의 장본인이다. 야마가타 아리모토는 조슈 군벌의 총수로, ‘일본 군국주의의 아버지’로 불리운다. 그는 조선 침략의 발판이 되는 군사력과 인력을 가동시킨 대표적 인물이다.

흥미로운 점은 쇼인의 직계 제자뿐 아니라 그 뒤를 이은 추종자들인데, 이들은 상당수가 조선 침략의 원흉을 제공한, 한국인들의 입장에서는 ‘악질 중 악질’들이란 것이다. 예컨대 이노우에 가오루(한일수호조약 체결, 을미사변 직전 조선공사), 가쓰라 다로(가쓰라-태프트 밀약 체결, 을사늑약·한일병합 당시 총리), 데라우치 마사다케(초대 조선총독), 미우라 고로(을미사변 당시 조선공사, 명성황후 시해 지휘) 등이 있다. 이들은 조슈 출신의 ‘번벌’을 조직적으로 형성하여 한반도를 식민지화하여 쇼인의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힘썼다. 한일병합 과정에 관여한 10여명 정도의 핵심 세력들 모두가 야마구치 현 출신이라는 사실 또한 이를 뒷받침해준다.

요시다 쇼인의 섬뜩할 정도로 과격한 대국을 향한 야심, 그리고 그런 그의 가르침을 평생 따랐던 추종자들은 일본 내 정계에서 그 맥을 계속 이었고, 그 연장선의 말미에는 바로 현 일본 총리인 아베 신조가 자리잡고 있다. 아베는 1기 내각 시절, 2006년 의회 발언에서 “쇼인 선생은 3년간(감옥 강의 포함) 교육으로 유능한 인재를 많이 배출했다. 작은 쇼카손주쿠가 메이지 유신 태동지가 됐다”고 했다. 조선 정벌의 야욕을 담은 쇼인의 책 <유혼록>과, 후루카와 카오루의 저서 <유혼록의 세계>는 아베가 직접 밝힌 그의 애독서이다. 그는 심지어 2013년 8월 ‘쇼인 신사’를 찾아가 참배하면서 “중의원 입후보의 뜻을 굳혔을 때도 참배했다, (앞으로) 올바른 판단을 할 것을 맹세한다”고 말했다. 그의 ‘올바른 판단’이란 과연 무엇일까? 아무도 그 속 뜻을 정확히 짚어낼 수는 없겠지만, 다만 그의 쇼인에 대한 참배와 그 앞에서의 굳은 다짐의 행동을 미루어 보아 그의 과거 화려했던 제국주의 일본을 향한 열망과 야욕을 짐작해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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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쇼인 묘(왼쪽), 2013년 8월 아베 신조가 요시다 쇼인 신사를 방문 참배하고 있다(출처: 조선일보 DB).

 

아베의 롤모델, 기시 노부스케

아베의 사상적 롤모델이 요시다 쇼인이었다면, 그의 정치 생활에 있어서의 롤모델은 그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이다. 그는 반전 평화주의 노선을 지향하던 그의 아버지(아베 간, 전 중의원 의원)를 외면하고 외가의 계보를 따랐는데, 그 스스로 “나는 아베 신타로의 아들이지만 기시 노부스케의 DNA를 이어받았다”고 인정했을 정도로 기시를 깊이 존경하고 따랐다. 특히 그는 부국강병 일본을 만들기 위한 강한 민족주의적 열망을 그의 외조부로부터 이어 받았다. 2012년 총선거 당시 자민당이 294석을 확보하는 큰 승리를 거두며 정권을 탈환한 후 그 즉시 기시의 묘소를 참배하며 “진정한 독립”을 외쳤던 선대의 사명을 계승하겠다고 다짐했을 정도다. 그렇다면 기시 노부스케는 어떠한 인물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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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아베 신조 가계도. 우) 기시 노부스케(1896~1987) (출처: 헤럴드코리아)

기시는 ‘쇼와의 요괴’라 불릴 만큼 1945년 이전에는 명석한 경제관료로서 일본의 산업정책을 주도하고 만주국을 경략한 장본인이었고, 패전과 동시에 A급 전범으로 수인의 신세였으나 냉전의 수혜로 복권되어 불사조처럼 총리직에 올라 고도성장으로 일본의 부흥을 이끈 정치가였다. 그는 만주국에서 전략적 계획경제로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하여 국방력을 확충하고 다시 경제적 기회를 창출하는 이른바 부국강병의 전형을 보여주었고, 패전 후에는 평화헌법과 냉전의 압력이란 한계 속에서 미국에 안보를 위임하고 경제성장에 진력하는 국가전력을 펼쳤다. 그가 그리는 국가 전략의 최종 목적지는 바로 일본의 진정한 독립, 즉 평화헌법의 개헌을 통한 자위대의 정식 군대 명문화와 집단적 자위권 행사가 가능한 보통국가화였다. 그는 표면적인 이유로는 증대하는 동북아 지역의 안보 위험을 근거로 하여 미국과의 군사 동맹을 공고히 하고 동맹국을 위해 자유로운 무력 행사가 가능하도록 헌법 제9조를 개정을 들었다. 그러나 그의 속내는 일본의 진정한 독립 달성이었으며, 그가 펼친 미일동맹 강화와 경제 성장 정책들은 최종 목적지를 향해 가는 중간단계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그가 그렸던 개헌을 통한 일본의 자주독립 야심은 그의 외손자인 아베 총리로부터 똑같이 재현되고 있다. 그는 그의 외조부가 선행했던 것처럼 헌법 제9조의 개헌을 달성하기 위해 국민들의 지지율을 높이고자 경제 성장에 우선 집중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미국과의 동맹을 더욱 강화하여 자위대의 정식 군대 복귀를 위한 명분을 만들어내고 있다. 경기 부양책을 통한 국민들의 높은 지지율이 확보되고 미국과의 군사 동맹 강화로 인한 주변 국가들의 반발이 수그러지면 개헌을 추진하려는 전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과거 1993년 정계에 첫 발을 내디딘 순간부터 현재까지 ‘헌법 개정은 나의 정치 목표’라는 일관된 의지를 강력히 표명해왔다. 2006년 1차 집권 당시 본격적인 개헌 추진을 가속화하다 퇴진한데 이어, 2012년 재집권 이후에도 ‘개헌은 나의 사명’이라며 그 뜻을 굽히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생전 과업이자, 끝끝내 이루지 못한 숙원이 평화헌법의 개헌이라는 점에서, 아베에게 개헌은 유훈에 가깝다.

 

일본 정치의 보수화와 우익 연맹의 형성

아베의 우익적 사상에 기반한 정치를 가능케 한 다른 환경적 요인은 갈수록 보수화하는 일본 내 정치 세력의 모습이다. 현 일본 정계는 보수와 혁신의 대결이라는 구도는 희석되고, 보수와 보수 내지는 보수와 우익의 대결로 집약되는 정치적 경쟁으로 대변되고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일본의 정치 변화의 거시적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일본 정치가 보수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일본의 정당 체계는 1955년 이후 약 네 차례에 걸친 변화가 있었는데, 첫 번째 정계 개편은 1955년에 이루어진 보수 정당 자민당과 일본사회당으로 구성된 양대 정당 체제의 구축이었다. 그 후 1960년 미·일 안보협정의 재체결을 놓고 벌어진 안보 투쟁의 여파로 인한 보·혁 대결구도가 지속되었으나, 혁신 및 중도 세력이 내부 분열로 몰락하면서 90년대에 보수적 색채가 뚜렷한 정치적 체계가 새롭게 성립되었으며 그 후 2012년 총선을 기점으로 일본 정계의 보수화는 그 색이 더욱 짙어졌다. 2012년 총선에서 자민당은 294석을 얻으며 정권 재탈환의 쾌거를 이룩해낸 반면 중도 보수 정당이었던 민주당은 57석을, 혁신 정당인 사회당은 중의원 2석을 차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2012년 총선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당시 총선에 나선 12개 정당 가운데 자민당을 제외한 대부분의 야당 대표가 전 자민당 소속이었다는 점이다. 상당수의 야당 대표들마저 자민당 의원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은 일본 정당의 광범위한 보수화의 진행을 반증해주며, 이를 기점으로 자민당은 현재까지도 보수 및 우익 세력을 위시한 여당으로 그 세력을 공고히 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당 간 경쟁 체제에서의 보수 정당의 약진, 주요 정당 내 보수 세력의 강화와 더불어 일본 정치 세력의 보수화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요인은 보수 우파 국회의원 연맹의 활성화이다. 다양한 정치 세력이 갈등과 분열을 반복하는 가운데 일본 정계 내에서는 초당적 성격을 가진 다양한 국회의원 모임들이 대거 등장했다. 그 중 대표적인 모임이 ‘모두가 야스쿠니에 참배하는 국회의원의 모임(1997)’과 ‘일본의 앞날과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 모임(1997)’이며, 아베는 이 두 대표적인 모임 모두에서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 중 ‘일본의 앞날과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 모임’은 아베가 사무국장을 맡아 종군 위안부와 난징 대학살 등에 대해 기술한 교과서의 재검토를 강력하게 주장한 대표적인 우익 역사 교과서 의원 연맹으로, 이는 아베 2차 내각 출범 이후인 2014년 1월에 새롭게 개정된 고교 교과서 기준에 따라 편찬된 우익 성향의 교과서 보급 사건과 맥을 같이한다.

 

글을 마무리하며

아베의 사상적 배경이 되어 준 요시다 쇼인과 그의 정치적 롤모델인 기시 노부스케, 그리고 우익적 성향의 정치관을 표출 가능케 했던 일본 내 정계의 보수화 등의 요인들은 현 아베의 평온한 얼굴 뒤 숨겨진 야욕의 얼굴을 짐작케 해준다. 그의 얼굴에서는 과거 정한론을 주창하며 일본을 강성 대국화하고자 했던 요시다 쇼인의 야심이 보이며, 동시에 평화 헌법 개헌을 통한 자주 국방과 일본의 독립을 추구하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의 야망이 보인다. 비록 빠른 시일 내 그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는 없겠지만 그의 강성대국 일본을 향한 강한 열망과, 그 신념을 대변하는 자민당의 다수 우익 세력의 행보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다. 아베의 장기 집권이 2018년까지로 확실시 된 지금, 대한민국의 대일 정책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지피지기의 정신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