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례의 타이틀과 프로 통산 56승(KO승 37회) 5패. 무함마드 알리는 헤비급 역대 최강자 논쟁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복싱의 전설이다. 하지만 그가 지금까지도 많은 추앙을 받고 있는 이유는 단순히 그의 실력 때문만은 아니다.
무함마드 알리의 본명은 캐시어스 클래이(Cassius Marcellus Clay, Jr)다. 아마추어 시절 그는 캐시어스 클래이로서 100승 5패를 기록하며 아마추어 미국 타이틀, 로마 올림픽 금메달 등을 거머쥐며 아마추어 복싱을 석권했다. 이후 프로 무대에서 무패 행진으로 챔피언의 자리까지 차지했다. 챔피언 벨트를 손에 넣은 후 그는 자신이 미국 내 흑인 이슬람 단체인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회원임을 밝히고 무함마드 알리라는 이름으로 개명한다. 그는 캐시어스 클래이라는 이름이 “노예의 이름”이라며 이제 자유인의 이름을 갖겠다고 말했다.
베트남전, 그리고 링 밖의 싸움
두 차례의 타이틀 방어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그의 복싱 인생, 나아가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찾아온다. 베트남전 징병 통보를 받은 것이다. 사실 1964년에 그는 글쓰기 능력의 부족으로 병역 비적합자 판정을 받았는데, 1966년에 징병 검사 방식 및 기준이 변경되어 그가 다시 징병대상자로 분류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그는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이봐, 난 베트콩들과 아무 문제가 없어” (“Man, I ain′t got no quarrel with them Vietcong”)
당시 그는 기자들에게 둘러 쌓여 있었기에 이 발언은 즉각 이슈가 되었다. 그는 수많은 비난을 직면해야 했다. 아직 대부분의 미디어가 베트남전을 미화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그는 징병 거부 입장을 고수했고, 반전 여론에 불을 지폈다.
베트남전 참전 거부는 그의 종교적 신념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사실 그가 영장을 받고 가장먼저 한 공식 발언은 종교적인 것이었다. 그는 “전쟁은 꾸란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며 “우리는 알라나 예언자의 명령 없이는 어떤 전쟁에도 참여하지 못한다.”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그가 단순히 종교적인 이유만으로 참전을 거부한 것이었다면 그리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분명 그의 참전 거부 명분은 인종차별에 대한 반대였고, 그는 유색인종이 억압받지 않는 평화에 대해 이야기했다.무함마드 알리는 고향 루이즈빌에서 마찬가지로 반전 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합류했다. 고향에서 행해진 어느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또 하나의 명언을 남긴다.
“왜 내가 군복을 입고 10,000마일 떨어진 곳까지 가서 베트남의 황인들에게 폭탄을 떨어뜨리고 총을 쏴야 하나? 아직도 내 고향 루이스빌에서는 깜둥이(Negro people)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개 취급을 받으며 기본적인 인권도 부정당하고 있는데? 나는 단순히 세계의 유색 인종에 대한 백인들의 지배를 지속시키기 위해 불쌍한 나라들을 불태우고 죽이는 것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이 그런 악행이 끝나야 하는 날이다. … 나는 내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잃을 것도 없다. 감옥에도 갈 것이다. 뭐 어떤가, 우리는 400년 동안 감옥에서 살아왔다.”
선수자격 박탈, 그리고 복권
1967년 그는 법원의 판결에 의해 타이틀을 빼앗겼다. 도전자가 아닌, 법원이 그를 챔피언의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이후 그는 복싱 선수자격도 박탈당해 더 이상 링 위에 서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그가 반전 여론에 지핀 불씨는 계속해서 타올랐다. 1969년 10월 15일, 베트남전 반대 운동의 가장 큰 상징인 베트남반전통일행동이 일어났다. 미국 전역에서 수백만명의 시위자가 거리로 나섰다. 11월, 12월에도 다시 이뤄진 이 반전 운동은 다음해 6월까지 이어졌다. 1970년에는 전국 450개 이상 대학의 학생들이 등교를 거부하였고, 4백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반전 시위에 나섰다. 1972년에는 반전 시위자들이 자유의 여신상을 점거하는 일도 발생했다. 베트남 전장에서는 미군 병사들이 장교에게 항명하는 사건이 빈번히 발생했다. 결국 이러한 여론은 미국 정부가 베트콩과 평화 교섭을 시작하고, 베트남 주둔 미군을 철수하기로 결정하는 데 공헌했다.
1970년 8월 반전 여론이 전국을 휩싸고 있을 때, 그는 애틀란타 시 체육위원회의 승인으로 다시 링 위에 설 수 있었고, 오랜 공백기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거둔다. 1971년 마침내 연방 법원은 무함마드 알리를 완전히 복권시켰고, 1974년 그는 다시 챔피언 벨트를 차지하게 된다.
이근호 (연세대 정치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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