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미얀마 총선 – 민주화를 향한 문을 열어줄 것인가

Myanmar pro-democracy leader Aung San Suu Kyi and UNHCR special envoy Angelina Jolie Pitt arrive at a hostel for female factory workers in the Hlaingtaryar Industrial Zone in Yangon

지난 7월 말, 영화배우 안젤리나 졸리의 미얀마 방문이 있었다. 그녀는 2001년부터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이번 미얀마 방문에서도 카친주(州)의 난민촌을 방문하고, 여성 공장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 실태를 살펴보는 등 매우 뜻깊은 일정을 소화했다. 세계적인 스타가 자신의 안위에만 만족하지 않고, 지구 반대편 나라의 인권 문제를 제기하고 관심을 환기시킨다는 건 박수 받아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본 기사에서 주목할 인물은 안젤리나 졸리가 아닌, 그녀와 함께 공장을 방문한 아웅 산 수치(Aung San SuuKyi) 여사다. 아무리 유명한 배우가 다녀간들 자국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당국 정치인들의 손에 달려 있다. 수치 여사는 미얀마 야당의 수장이며, 안젤리나 졸리를 미얀마에 초청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적어도 미얀마 국민들에겐 안젤리나 졸리보다 더 의미 있고 존경 받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지금 민족민주동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NLD)의 수장으로서 다가오는 11월에 있을 총선 준비에 한창이다.

미얀마는 올해 11월 8일에 총선을 진행할 예정이다. 특히나 이번 총선에 귀추가 주목되는 이유는 사실상 첫 자유투표로 진행되는 선거이기 때문이다. 미얀마는 2010년 총선을 통해 공식적으로는 군부정권을 민간정부로 이양했지만, 당시 NLD는총선 참가를 거부했다. 허울뿐인 민주주의는 오히려 군부에 정당성을 부여할 뿐이라는 태도에서 비롯된 결정이었다. 당시 <뉴욕타임스>에서도 “이번 총선이 불공정하고 자유를 보장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고 평가했다. 군사정권은 소수민족의 투표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일부 군부 세력을 통합단결발전당(Union Solidarity and Development Party, USDP)으로 편입시키고 지원해주는 등의 불공정한 행위를 자행했기 때문이다.그 결과 2010년 총선에서 USDP는 상·하원 모두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이뤘고, 이듬해 USDP에서 출마한 테인 세인(TheinSein)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하지만 이번 총선이 중요한 이유는 비단 첫 자유선거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바로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 이어지는 대선이 있기 때문이다. 미얀마는 현재 간선제로 대통령을 선출하고 있다.대통령 후보로는 상·하원에서 각각 1명, 상·하원에서 각각 의석의 25%를 차지하고 있는 군부에서 1명을 추천함으로써 총 3명이 지명된다. 그 다음, 후보자 3명을 놓고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선거를 실시하고, 그 결과 최다득표자가 대통령, 나머지 2명은 부통령에 임명되는 방식이다. 따라서 각 정당이 의회를 얼마나 장악하는지는 국가의 수장을 뽑는 대선에서의 영향력을 결정 짓는 일이기도 하다. 특히 야당 NLD의 입장에서는 자당(自黨)의 유력한 대권 주자인 아웅 산 수치 여사의 대선 출마 여부에 영향을 미치는 매우 중요한 순간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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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미국의 격화된 남중국해 갈등

12(현지시간), 미국 국방부가 지난 8 미군이 B-52 폭격기를 이용하여 남중국해 인공섬 상공을 비행한 것을 공식 발표함에 따라 양국의 신경전이 점차 고조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지난 10 미군 구축함이 남중국해 인공섬 근방에 접근한 사건에 이은 번째 진입으로, 중국의 영유권 주장에 대한 미국의 불편한 심기를 여과 없이 드러낸 사건으로 풀이된다. 이에 대해 어번 국방부 대변인은 차례에 걸친 구두 경고를 중국 측의 지상 관제소로부터 받았으나, 작전은 철저한 국제법의 준수 하에 이루어졌으며, 2 모두 일상적인 임무를 무사히 마쳤다 밝혔다.

한편 중국은 최근 자국 영유권을 주장하는 남중국해 인공섬 주변에 지역을 관할하는 ()-11B(J-11B) 전투기를 배치하고 전투 실전 훈련을 진행하는 , 영유권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는 베트남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이는 실정이다. 이렇듯 양측이 남중국해 문제에 대해 팽팽한 신경전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인 만큼, 18~19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이에 대한 논의가 어떻게 진행될지 관심이 주목된다. 정상이 모두 참여하는 이번 회의를 앞두고 미국 국무부가 남중국해 갈등 문제의 현안 논의를 언급하자 중국 외교부는 즉각 이에 반발하는 영유권 갈등에 대한 공식 논의 자체에도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미국은 이번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참석 외에도 중국과 영유권 문제로 갈등을 벌이고 있는 국가 하나인 필리핀 정상을 만나 협력 방안 등을 별도로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함새롬(고려대, 국제)
msaerom@hanmail.net

시스템 : 러시아 제재 1년이(가) 발동되었다. 효과는 미미했다.

1길고 장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국가의 분열과 병합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굳이 로마제국의 분열과 멸망 혹은 USSR의 해체와 독립국가들의 탄생을 예로 들지 않아도 이와 같은 사실은 자명하다.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일어나는 분리독립운동 역시 한 민족의 자연스러운 의지의 표출이며 국가의 운명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사태에 얽힌 서방과 러시아의 갈등 구도를 알기 위해서는 거시적인 관점을 차치하고 현재 직면하고 있는 상황과 그 이면에 감춰진 의미를 들춰보는 것이 필요하다.

 

왜 우크라이나인가?

14년 2월 친 러시아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의 EU 통합을 주장하는 “유로마이단”에 의해서 축출되었다. 그러자, 러시아는 그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러시아계 민족 보호라는 명분을 내세워 크림반도를 침공한다. 러시아의 동향에 따라 독립을 주장하는 동부 지역(돈바스)의 친러 반군이 러시아 정부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국지전을 벌이게 된다. 이에 14년 3월과 7월, 미국과 EU는 러시아의 동부 우크라이나 개입을 저지하기 위해 경제제재를 결정한다.

우크라이나는 지정학적 특성상 러시아와 유럽의 안보에 있어서 주요한 지역이다. 동부 우크라이나 인종 구성은 러시아 계 민족이 주를 이루고 있어 친 러시아 성향이 강하다. 빅토르 야누코비치 역시 정치 활동 초기에 도네츠크(우크라이나 동부의 공업지대)의 주지사를 역임했다. 우크라이나 동남부에 위치한 크림반도의 경우 60% 이상이 러시아 계 인종이며 종교적으로는 대다수가 러시아 정교를 믿는다. 반면, 서부 우크라이나는 히틀러에 의해 동부 지역보다 일찍 소련으로부터 분리되었으며, 지역적으로 유럽의 여러 국가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 친 유럽적 성향을 보이고 있다.

성향이 다른 두 지역은 통합이 아닌 분열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미국 국가 안보 보좌관을 역임한 헨리 키신저는 “우크라이나의 한 지역이 다른 지역을 지배하려 하는 시도는 결국 내전이나 분열로 이어졌고, 이것은 역사적으로 반복되어 왔다.”라고 말한다. 러시아에 있어 접경 지역에서의 갈등은 가장 주요한 안보 이슈이며, 이러한 우크라이나 내부에서의 내전과 분란은 충분히 위협적이다. 이에 러시아는 자국의 안보를 위해 군사적 조치를 취하는 자연스러운 대응을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유럽에 강력한 위협이 된다. EU로 대표되는 유럽 국가들은 나름대로 국가 안보를 위해 러시아에 맞서 정치적, 군사적 대비를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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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경우 우크라이나에 대한 영향력을 약화시킬 수 없는 상황이다. 카터 대통령의 안보 보좌관이었던 브레진스키는 미국의 도전세력이 유라시아에서 나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의 분쟁 여지가 줄어들고 러시아 혹은 유럽이 우크라이나를 온전히 포섭한다면 아시아와 유럽은 유라시아라는 거대한 지역질서를 형성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게다가 중국을 위시한 아시아, 중동, 유럽이 밀접하게 교류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거대한 지역질서가 형성된다면 미국의 경제적 위상이 크게 약화될 수 있다. 최근 미국 내 중국 위협론이 부각되고, G2 구도에 대한 예상이 계속해서 나오는 시점에서 유라시아 지역의 통합과 수정주의 국가로서 중국의 부상은 미국에 큰 위협으로 다가온다. 그렇기에 미국의 입장으로서는 어떠한 형태로든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해서 러시아를 견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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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디의 죽음으로 난민 문제가 재조명되다

지난 2일(현지시간) 터키 휴양지 보드룸 해변에서 시리아 북부 쿠바니 출신의 난민인 세 살배기 어린 아이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주요 외신이 보도한 그의 사진은 ‘파도에 휩쓸린 인도주의’ 라는 이름으로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 등을 통해 전 세계에 퍼지며 공분을 일으켰다.

이에 대해 유럽에서는 난민 유입과 관련하여 보다 효율적인 수용 정책을 펼치자는 자성의 목소리 또한 높아졌다. 특히 지난 4일 BBC 방송에 따르면 영국의 캐머런 총리는 “아이를 둔 아버지로서 (쿠르디의) 사진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고 말한 데 이어, 과거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 EC)에서 제시한 지중해 난민 의무할당제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던 것과는 달리 지난 3일(현지시간) 수천 명의 난민을 영국 내에 추가 수용할 것임을 공식 발표했다. 그의 변화된 태도에는 난민들의 비극적인 삶을 조명한 최근의 언론 보도와 이들을 수용해야 한다는 대내외적인 압박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난민 수용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도 시리아 현지에 위치한 난민캠프의 난민만을 받아들이겠다고 하여 유럽 지역 내에 진입한 난민들이 영국에 정착하는 데에는 여전히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국제이주기구(IOM)에서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올 해 8월 말까지 지중해를 거쳐 유럽에 유입된 난민의 수는 이미 35만 명을 넘어선 상태이며, 이 중 쿠르디와 같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이들의 수는 무려 2643명에 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심각한 난민 위기에 대해 유럽 연합 내부의 대립과 충돌은 커져만 가고 있는 실정이다.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프랑스의 올랑드 대통령이 제시한 EU국가별 난민 의무 할당제에 대해 헝가리의 오르반 총리를 비롯한 폴란드, 슬로바키아 등은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함새롬 (고려대 국제)

msaerom@hanmail.net

페기다의 패기는 어디까지인가

페기다의 패기는 어디까지인가

삼엄한 분위기는 2000년대 초반부터 있었다. EU는 이민자들의 국가 간 이동을 자유롭게 하는 정책을 추진했고, 그 이후로 외국인, 이민자들을 배척하는 우파의 태동은 먹구름처럼 유럽을 서서히 뒤덮었다. 다만 최근 1년 사이, 정치적 “극우”는 분명해졌다. 14년 7월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유럽 연합 국가들 이민자에 대한 강력한 규제 정책을 펴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뒤이어 캐머런 총리는 유럽고용서비스(EURES) 웹사이트에 외국인만을 대상으로 한 구인 광고를 게재하는 것을 금지했다. 2014년 4월 프랑스 지방선거에서는 중도보수 대중운동연합(UMP)과 극우파 국민전선(FN)이 득표율 58%를 차지하며 여당인 사회당을 앞섰다. 한 편에서 보면 우파 강세 분위기는 자연스러운 정치적 귀결이었다. 전 세계적인 경기침체와 특히 영국 내 노숙자의 증가, 그리고 2000년 이후 증가한 이민자 수와 파생된 복지 문제, 프랑스에서의 실업률 증가와 공공부채의 증가는 기존 여당에 대한 반감을 높였고, 보수파는 국민들의 대안으로서 득세하게 되었다.

그러나 새 해의 시작. 유럽의 우파는 극우 민족주의의 형태로 변화하는 급격한 전환점을 맞는다. 프랑스 주간 신문 《샤를리 엡도》는 이슬람을 비롯한 종교에 대해서 강한 풍자만화와 만평을 발간해왔고, 이에 분노한 두 명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1월 7일 《샤를리 엡도》 본사를 테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2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을 입은 이 사건은 유럽 전역을 무슬림에 대한 공포로 몰아넣었으며, 정치권에선 극우민족주의를 연상케 하는 정책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극우정당 UKIP(영국 독립당)의 나이절 패라지 당수는 영국 내 무슬림을 비하하며, 이민정책을 바꾸고 이민자들에 대한 검문을 강화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독일. 매주 월요일 페기다의 이름을 내건 대규모 군중이 행진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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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모토 오사카 시장 실각

(일본 아사히,요미우리,니혼게이자이=외신종합) 하시모토 도루(橋下徹·45) 오사카(大阪) 시장이 ‘오사카 행정구역 재편’에 관한 주민투표 부결의 책임을 지고 17일(현지시각)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지난 2008년 오사카부(大阪府) 지사로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한 지 8년 만의 일로 《아사히 신문》은 “단순한 오사카시(大阪市)의 문제를 넘어 일본 정계의 방향 자체를 바꿀 수 있는 일”이라 보도했다.

이번 사태는 1도(都, 도쿄도)-1도(道, 훗카이도)-2부(府, 오사카부, 교토부)-43현(県)으로 구성되는 일본의 행정구역을 재편해 오사카부(府)를 도(都)로 승격시키겠다는 하시모토의 구상에서 촉발됐다. 이 안은 광역단체인 오사카부와 그 하위행정구역인 오사카시를 통합해 오사카도(大阪都)를 만드는 것으로 구체화됐는데, 이를 위해선 오사카시 해체에 대한 주민 동의가 필수였다. 그래서 하시모토는 2011년 광역단체장인 오사카부 지사를 사임하고 한 급 아래인 오사카 시장에 출마해 오사카시 해체를 주민투표에 상정할 수 있는 권한을 얻는다. 이후 5년 동안 하시모토는 오사카시가 정령지정도시(광역단체 행정에 준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도시)로서 오사카부와 중복행정을 펼치고 있음을 지적하고, 오사카시 해체 후 생활밀착형 행정을 제공할 수 있는 5개 구(区)를 만들 것을 주민들에게 설득했다. 그러나 지난 17일 오사카시 해체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에서 오사카시 전체 유권자 210만 4,000명 중 반대 70만 5,585표 찬성 69만 4,484표로 오사카도 구상은 최종 부결됐다. 이에 대해 요미우리 신문《The Yomiuri shimbun》은 “중복행정 해소로 인한 재정 이득이 불분명하고, 오사카도로 전환을 통한 인구증가가 이뤄지면 삶의 질이 나빠질 것을 염려한 주민들의 선택”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그런데 하시모토의 실패는 단순히 한 정치인의 은퇴로만 끝나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아사히 신문》은 18일 “오사카시 주민투표의 부결이 아베신조(安倍晋三) 총리의 헌법 개정 전략에 타격을 입혔다”고 보도했고 《요미우리 신문》 역시 19일 “하시모토를 국정수행과 헌법개정의 동반자로 여겼던 아베신조 총리가 타격을 받을 것”이란 보도를 냈다. 이는 지난 2012년 하시모토가 창당한 유신당이 현재 일본 제2야당으로 국회의원 51명(중의원 40명·참의원 11명)을 보유했단 사실에 기반한다. 하시모토는 일본 유신당의 실질적 오너로 ‘아베의 남자’라 불릴 만큼 극우적인 성향을 보였고, 유신당의 대표였던 에다 겐지(江田憲司) 역시 《니혼게이자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헌법 개정을 찬성하는 입장을 밝히며 아베 내각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했다. 그런데 이번 오사카시 주민투표의 부결로 하시모토는 정계은퇴를 선언했고 에다 겐지는 유신당 대표를 사임했다. 그리고 19일 민주당 출신의 마쓰노 요리히사(松野賴久)가 유신당의 새 대표로 선출되며 유신당과 아베 내각의 향후 관계가 불투명해졌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지난 11일 기자회견을 통해 “오사카부와 오사카시의 중복 행정 해소에는 당위성이 있다”는 말로 사안에 대한 내각의 견해를 밝혔다. 이는 내년 7월로 예정 된 참의원 선거에서 헌법 개정요건(정족수의 3분의 2)을 충족시키기 위해 유신당과의 협력 관계를 고려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하시모토가 실패하며 아베는 유신당이라는 확실한 아군만 잃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따라 현재 어떤 식으로든 내각 차원의 하시모토 구하기 조치가 이뤄질 것이란 예상이 제기되고 있다.

김찬호(연세대 정치외교)

quasimodo@yonsei.ac.kr

유럽연합(EU), 난민 문제 해결 위해 의무할당제 제시

지난 13일(현지시각) 열린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 EC)에서 EU는 최근 대량으로 발생하고 있는 지중해 난민을 EU 회원국에게 의무적으로 할당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EU가 의무할당제를 제시한 이유는 그리스, 이탈리아, 몰타 등 일부 국가에 집중되고 있는 난민문제를 유럽사회 전체가 공동으로 대처하고자 함이다. 이날 대책 발표를 맡은 프란스 팀머만스(Frans Timmermans) EC 부위원장은 “지중해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극과 관련해 어떠한 대책도 세우지 않을 경우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 있다”며 EU회원국 간 긴밀한 연대를 부탁했다. 이에 대해 이탈리아 국회의원 출신 지아니 피텔라(Gianni Pittella) 유럽의회 (European Parliament) 의원은 “부끄러운 과거로부터 유럽이 깨어나고 있다”며 환영 의사를 나타냈고 UN 난민기구(United Nations Refugee Agency) 고위 관료 역시 “위대한 진전”이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영국은 이미 강제할당정책 발표에 앞서 거부권 행사를 시사하며 EU의 제안에 참여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했으며 아일랜드와 덴마크 역시 수용 불가 입장을 드러냈다. 이어 헝가리, 슬로바키아, 에스토니아도 반대 입장을 표명하면서 EU의 제안은 순조롭게 실행되지 못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테레사 메이(Theresa May) 영국 내무장관은 자국 언론 ≪더 타임스 런던≫(The Times of London)에 기고한 글에서 영국의 입장을 분명히 드러냈다. 그녀는 기고문을 통해 “이런 식의 접근은 단지 밀입국 조직의 활동을 조장하는 결과만을 가져올 뿐이며, 개별 국가들이 효과적인 난민 정책을 발전시키도록 하는 동기를 감소시킬 뿐이다.”고 주장했다.

영국의 반대는 EU의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결정에 수긍할 수 없다는 입장과 더불어 영국 내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해외 이민자 문제에 기인한다. 영국으로 해외 이민자가 집중되는 현재, EU 회원국 간 인력이동의 자유를 보장한 솅겐조약(Schengen Agreement)에 의해 다수의 이민자가 유로존으로부터 영국으로 유입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유로존에 비해 상대적으로 호황을 보이는 영국 경제상황 때문이다. 영국 내 이민자들은 실업문제와 복지부담의 원인으로 지목되어 그들에 대한 영국인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으며 이는 영국이 유럽연합의 탈퇴를 고려하는 중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한편,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정세 불안과 가난 등으로 지중해를 경유해 유럽으로 향하려는 난민은 올 한 해 급증 추세에 있다.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에 따르면 1월부터 4월 20일 현재까지 지중해에서 사망한 난민의 수는 작년에 비해 약 18배 증가했으며, 밀항 과정에서 올해까지 약 1,800여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태형(연세대, 불어불문)
okth10@naver.com

불편한 동침, 남∙북∙러 경제 협력

최근 북한과 러시아의 관계 개선과 남∙북∙러 3자간 경제 협력으로 박근혜 정부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에 발동이 걸릴 조짐이 보이고 있다. 남한은 러시아를 통해 남북 관계를 개선하고 한반도를 동북아 경제 협력의 허브로 부상시키기 위한 기회를 만들 수 있을까?

부산시와 라손콘트란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의 첫 단추

2015년 2월 11일, 부산시는 북∙러 합작기업인 라손콘트란스 대표단을 부산시청으로 초청해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라손콘트란스는 북한과 러시아가 3대 7 비율로 출자해 만든 합작기업으로, 한국의 지방자치단체가 북한의 합작기업과 손을 잡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MOU의 주된 내용은 부산과 북한의 나진항 사이의 해상항로를 건설하고 나진항 현대화 사업에 대한 부산 기업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등 부산을 나진-하산 프로젝트의 주요 거점지역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최근 남북의 관계가 썩 좋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번 MOU 체결은 다소 뜬금없는 감이 있다. 그러나 그 나름의 의의는 있다. 라손콘트란스는 러시아의 철도공사와 북한의 나진항이 나진-하산 프로젝트를 위해 설립한 회사이며 나진-하산 프로젝트는 일찍이 2013년 한국과 러시아의 공동성명을 바탕으로 이미 추진되어 오고 있었던 사업이다. 또한 나진-하산 프로젝트는 박근혜 대통령이 주창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의 일환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번 MOU 체결은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구상 속 남∙북∙러 삼자간 경제협력의 첫걸음을 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부산시 관계자는 파이낸셜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박근혜 정부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구상 실현을 위한 중심기지로서 선도적 참여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러-북합작회사인 라손콘트란스 대표단을 이번에 초청하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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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 유라시아 국제 컨퍼런스 박근혜 대통령 기조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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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동안의 땅따먹기

30년 동안의 ‘땅따먹기’

복잡하지만 중요한 남중국해 분쟁, 한눈에 보기

분노의 베트남

“수백 명이 중국에 대한 복수심에 취한 채 오토바이를 타고 리슈에잉의 공장 지대로 돌진했다. 그들은 당황한 경비들 주위를 질주했으며, 일부는 붉은색과 금색으로 칠해진 베트남 국기를 달고 있었다.” <뉴욕타임즈>는 작년 5월 중순 베트남을 휩쓴 반중 시위를 이렇게 묘사했다. 닷새 동안 지속된 시위로 두 명이 사망하고 100명 이상이 다쳤다. 3000명의 중국인이 대피했고, 공장은 가동이 중단됐다. 17일 류지엔차오 중국 외교부 차관보가 하노이를 방문해 대책 마련에 대한 약속을 받아냈으나, 양측의 갈등이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이번 반중 시위의 근본적인 원인은 남중국해를 둘러싸고 수십 년간 지속된 영토 갈등에 있다. 시위의 방아쇠를 당긴 것은 5월 2일 남중국해로 파견된 석유 시추 장비였다. 27척의 경호 선박을 대동하고 파라셀 군도(중국명 시샤, 베트남명 호앙사) 근처에 도착한 이 40층 건물 높이의 장비는 중국 국영기업인 중국해양석유총공사(CNOOC)가 제작 및 파견한 것이었다. 중국과 함께 파라셀 군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베트남은 두 차례에 걸쳐 초계정을 보내 시추를 방해하려 했지만 중국 선박에 의해 저지당했으며, 오히려 선박 간의 물리적 충돌로 9명의 베트남인이 부상당했다.

분노의 베트남

반중국 시위에 참여한 베트남인들

충돌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시추를 고집하면서 베트남 내에서 반중 감정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베트남 일부 노동자들이 베트남 내 중국 공장을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던 시위는 곧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애초에 시위가 법으로 금지되어있는 베트남에서 반중 시위가 이토록 격화될 수 있었던 것은 정부의 묵인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응우옌 떤 베트남 총리는 흥분한 자국민들에게 “국가의 이익과 이미지에 반한 극단적 행동에 반대한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냈지만, 한편으로는 “애국심을 북돋워 성스러운 주권을 수호해야 한다”며 반중 감정을 부추기는 양면적인 모습을 보였다. 과격한 시위가 더 지속될 경우 오히려 대외 이미지와 경제를 훼손할 것이라는 계산에 이르러서야, 베트남 정부는 300명의 자국민들을 고소하는 등 상황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파라셀 군도에 대한 영유권 자체는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시위는 사그라들었으나, 베트남 정부의 비난과 국민들의 반중 감정은 그 수위가 낮아지지 않았다.

한 뼘의 중요성

파라셀 군도

파라셀 군도

남중국해의 서쪽 부근에 위치한 파라셀 군도는 30여 개의 작은 섬으로 구성되어있으며, 중국과 베트남이 각각 영유권을 주장하는 분쟁지역이다. 남중국해 내에는 파라셀 군도 외에도 총 네 개의 군도가 더 있으며, 모두 둘 이상의 국가가 군도 일부 혹은 전부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특히 남쪽에 위치한 스프래틀리 군도(중국명 난사)는 중국과 베트남을 포함해 총 여섯 국가가 분쟁 중이다. 동쪽에 있는 매클스필드 뱅크(중국명 종사)는 일년 내내 얕은 바다 밑에 잠겨있는 산호초 지대로 사실 섬이라 보기는 어려우며, 이러한 지형의 영유권 문제에 대해 국제 협약과 국제법은 아직 명확한 지침을 갖고 있지 않다.

남중국해의 해저에는 총 260억 배럴 가량의 원유와 다량의 천연가스가 매장돼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해양 생물의 다양성이 매우 높으며, 전세계 선박의 60% 이상이 이곳을 지날 만큼 해상 교통에 있어서 중요한 지점이다. 중국과 인접하지만 필리핀이나 베트남과 같이 미국에 우호적인 국가들 역시 자리하고 있어 지정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각국이 영유권 주장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도 남중국해가 가진 막대한 이익 때문이다.

남중국해 도서분포

남중국해의 도서분포

남쪽으로 전진, 또 전진

중국은 남중국해 군도 중 이미 두 곳(파라셀, 매클스필드)을 실질적으로 점유하고 있으며, 나머지 세 곳에 대해서도 완전한 영유권을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중국이 주장하는 아홉 개의 해상경계선(9단선)을 이으면 남중국해를 둘러싸는 거대한 ‘U선’이 된다. 이미 남중국해의 허리 부분을 장악한 중국의 최종 목표는 남쪽의 스프래틀리 군도 전체와 스카보러(황옌다오) 섬의 영유권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U선을 완성하는 것이다.

남중국해 도서들을 처음으로 실질 점유한 것은 프랑스·일본과 같은 근대 제국주의 세력이었다. 2차 대전 이후 이 도서들은 무주지가 되어 인근 국가들의 경쟁 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각국은 역사적 근거를 통해 영유권을 주장하거나 군사적으로 선점하기 시작했다. 중국 역시 종전 이후 국민정부 시절부터 꾸준히 남중국해 전체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해왔으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뒤에도 태도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중국과 동남아 국가들은 영토를 실질적으로 점유하는 것에는 소극적이었다. 60년대 말까지만 해도 남중국해에 대한 영유권은 각국에 의해 선언적으로 주장될 뿐이었다. 그러나 1968년 유엔과 미국 해양지리국의 합동 탐사팀이 남중국해 해저에 매장된 막대한 양의 지하자원을 밝혀낸 이후부터 갈등은 점차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전진 소제목

중국이 주장하는 ‘U선’과 국제해양협약에서 정한 배타적 경제수역의 경계

중국은 1974년 제2차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때, 베트민이 점유하고 있던 파라셀 군도에 군사 작전을 개시해 도서를 무력으로 점령한 적이 있다. 중국이 점령한 이듬해 베트남전은 종전되었으며, 새로이 통일된 베트남은 파라셀을 돌려받지 못했다. 오히려 중·소 분쟁의 연장선에서 1979년 중국·베트남 전쟁이 발발하자, 양측은 섬의 영유권을 두고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중국은 이 전쟁을 통해 베트남으로부터 남쪽 스프래틀리 제도의 일부 도서를 추가로 빼앗을 수 있었다. 1989년 양측 간 평화협정이 논의되기 시작하면서부터 베트남을 향한 군사 공격은 멈췄지만, 동쪽 필리핀과의 영토갈등은 계속되어 1994년 미스치프 사주(Mischief Reef)가 중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로써 중국은 파라셀 군도 전체와 스프래틀리 군도 내 48개 제도 중 9개를 실점하게 되었다. 필리핀은 미스치프 사주에 건설된 중국 구조물들을 파괴하며 격렬하게 반발했으나, 결국 중국의 점유를 막지 못했다.

분쟁의 ‘문명화’

1995년 대만과 갈등을 겪으면서 ‘중국위협론’이 전세계적으로 대두하자, 중국 지도부는 외교·안보 분야에 있어 보다 조심스럽게 처신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중국위협론은 경제 성장을 최우선 목표로 하고, 그 토양으로서 평화적인 국제 관계를 조성한다는 기본 대외 전략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었다. 이러한 ‘조심성’은 남중국해에서도 발휘되어 미스치프 사주 이후 중국에 의한 추가적인 영토 점령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중국을 비롯한 당사국들은 수세적 태도로 전환해 기존 점령지에 대한 영유권을 보다 공고히 하는 것에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 스프래틀리 군도에는 아직 점령되지 않은 사주들과 암초들이 남아있지만 각국은 추가적인 점령 시도를 하지는 않고 있다. 이 무주지들은 어지러이 널려있는 각국 소유의 섬들 사이에서 일종의 ‘완충지대’로 기능한다.

무력을 통한 확장이 부담스러운 선택이 되자, 분쟁은 무력 충돌에서 치열한 외교전으로 그 양태가 바뀌었다. 또 여기에는 중국과 분쟁 당사국들 간의 경제적 의존성이 매우 높아 극단적인 대결구도를 지속하는 데 큰 무리가 따른다는 점도 작용했다. 1994년 때마침 제정된 유엔해양법협약(UNILOSC)은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된 분쟁에 중요한 가이드라인이 되었다. 이 때문에 갈등의 수위는 영토를 추가 점령하고 타국의 시설물을 파괴하거나 무력 충돌을 일으키는 등의 공격적인 방식에서, 자국의 섬에 경쟁적으로 군사시설과 관측시설을 설치하고 이웃 나라가 섬에 구조물을 설치하거나 해양 탐사를 실시할 때마다 적극적으로 항의하는 것으로 ‘완화’되었다. 다만 간헐적으로 소규모 충돌이 종종 벌어졌는데, 주로 이곳에서 어획하던 민간 어선에 대한 사격과 나포가 주를 이뤘다.

내 것이다, 왜냐하면…

분쟁이 외교전의 성격을 띠게 되면서 점유의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해졌다. 각국은 역사적 근거, 무주지 선점의 원칙, 지리적 근접성, 대륙붕 확장 등을 근거로 남중국해 전체 혹은 일부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중국은 주로 한나라 시기부터 등장하는 남중국해에 관한 무역과 행정 기록을 근거로 남중국해 전체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1949년 중국과 분리된 대만 역시 그 주장과 근거가 중국과 거의 흡사하다. 베트남 또한 주로 역사적 권원에 의존하고 있으며, 파라셀과 스프래틀리 군도 전부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한다. 반면 필리핀은 지리적 근접성과 무주지 선점, 대륙붕 확장을 근거로 제시하며 스프래틀리 군도 일부를 주장한다. 특히 1994년 유엔해양법협약은 세계 각국이 배타적 경제수역을 넘어 최대 350해리 내의 해저 대륙붕을 개발할 수 있다는 대륙붕 확장 원칙을 명시했고, 이로써 필리핀 외에도 말레이시아와 브루나이가 이 분쟁에 ‘참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분쟁 각국의 견해 차이는 좁혀지지 않은 채 선언과 위협만이 오가고 있으며,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결정적인 근거 역시 부족하다.

여럿이 모여도 딱히 방법이 없다

1990년에 접어들면서 무력 충돌을 대신해 외교가 주요한 분쟁 조정 수단으로 등장하게 되자, 동시에 분쟁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 다자주의적 협상 테이블 또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1990년 인도네시아가 주최한 남사군도회의가 그 첫 시도였는데, 참여국들이 자국의 입장을 되풀이하면서 큰 진전을 이루지는 못했다. 2년 후, 중국은 남중국해 전체를 자국의 영해로 포함시키는 국내법을 제정함으로써, 앞서 이뤄졌던 국제적인 노력을 무색하게 했다. 1993년과 1994년에는 영해 확정을 두고 중국과 베트남 간의 회담이 있었으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외교적 노력 지속’이라는 다소 공허한 합의점을 도출했을 뿐이다. 양측의 회담은 1999년에도 한차례 더 있었지만, ‘분쟁을 전면적인 무력충돌로까지는 확대시키지 않는다’는 최소한의 합의만을 반복할 뿐, 분쟁 자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를 드러내진 않았다. 진전 없는 대화가 계속되는 동안, 각국 사이에서 소규모 충돌과 경쟁적인 구조물 건설은 계속됐다.

동남아시아 국가연합(ASEAN)은 다시 한 번 이 분쟁을 다자주의적으로 해결하려 시도했다. 2002년, 아세안과 중국이 앞으로 분쟁을 평화적으로 풀어나가겠다며 공동으로 ‘남중국해 당사자 행동선언(DOC)’을 발표한 것이다. 그러나 선언은 선언일 뿐, 아무런 강제력을 갖지 못한다. 선언에 명시된 “분쟁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한다”는 합의는 분쟁 당사자들의 군사적·외교적 충돌을 완전히 방지하기에는 모호하다. 선언문은 또한 조속한 시일 내에 실질적인 강제력을 갖는 ‘남중국해 당사자 행동강령(COC)’을 공포할 것을 명시하고 있으나, 그 기한이 정해지지 않은 채 무기한 연기되고 있다.

공공의 적

분쟁에 있어 ‘공공의 적’은 아무래도 중국인 듯하다. 모든 도서를 대상으로 한 영유권 주장이 다른 5개국과 직접적으로 충돌하는 데다, 외교무대에서 자국의 주장을 반복적·공격적으로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남중국해를 자국의 ‘핵심이익’으로 설정하고 이를 ‘되찾겠다’는 중국의 거듭된 주장은 경제적·군사적 성장이라는 실질적 능력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거인’을 상대로 동남아 각국이 공고한 연합전선을 구축하려는 움직임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다. 아세안 내에는 영토분쟁의 당사자가 아닌 국가들도 존재하며, 공공의 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스프래틀리 영유권을 주장하는 중국 외 5개국 역시 서로가 경쟁자들이다. 비록 아세안 내에서 중국에 대한 불안감이 크게 번지고 있고, 베트남이 주도적으로 연합전선을 구축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각국을 묶어줄 수 있는 이해관계는 아직 엉성하다. 오히려 ‘경제 거인’의 화를 돋우지 않기 위해 각국은 말소리를 높이길 꺼려한다. 2014년 11월 미얀마에서 열린 아세안 정상회담에서도 남중국해 문제가 주요 의제로 거론됐지만 큰 진전은 없었다. 합의된 범위 안에서는 중국이 공동의 적으로 명시되지도 않았고, 연합적인 대응을 꾸려나가려는 조짐도 찾기 어려웠다. 레 르엉 민 아세안 사무총장은 회담 직후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남중국해 문제에 대해 “정치적 약속과 실제 상황 및 행동 간의 괴리가 심화되고 있다”고 피상적으로 언급했고, 의장 발언에서도 “우리는 남중국해의 상황에 대해 우려한다”는 형식적인 주장이 되풀이됐을 뿐이다.

반면 중국은 아세안의 ‘연합’을 크게 경계하고 있으며, 적극적으로 이를 ‘예방’하고자 한다. 원자바오 전 중국 총리는 2012년 5월 “DOC는 분쟁 타결을 위한 협상 자격을 ‘직접 당사국’으로 제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2년 후인 2014년 5월 10일, 파라셀 군도의 석유 시추선 문제를 두고 아세안 외무장관들이 우려를 표하자, 중국 외교부는 즉각 성명을 내어 “중국은 개별국가가 남중국해 문제를 이용해 중국과 아세안간 우호 협력 국면을 파괴하는 것을 반대한다”고 잘라 말했다. 작년의 아세안 정상회담에서 리커창 중국 총리는 남중국해 문제에 대해 ‘개별 국가 대응’ 원칙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동남아 각국에 총 200억 달러에 달하는 차관 원조를 제의하기도 했는데, 이 역시 남중국해 분쟁과 아세안과의 경제 협력을 구별함으로써 아세안의 공동 대응을 방지하고자 하는 중국의 전략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은 지금까지 매우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아세안이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하자, 애가 타는 필리핀과 베트남은 외부로부터 새로운 ‘중재자’를 요청하고 나섰다.

Here Comes a New Challenger

2011년 6월 28일, 미국의 이지스함을 비롯한 세 척의 함정이 필리핀 남서쪽에 도착했다. 1951년이래 오랜 동맹 관계를 맺고 있는 미국과 필리핀의 합동 군사 훈련이 이날부터 11일에 걸쳐 실시된 것이다. 남중국해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양측의 훈련이 자국을 겨냥한 것이 아니냐는 중국의 비판이 제기됐지만, 필리핀 측은 “이번 훈련은 오래전부터 계획되어있던 것으로, 도발행위로 인식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here comes the new challenger

미국과 필리핀의 연례 합동 군사훈련인 발리카탄(Balikatan). 위 사진은 2013년 훈련 당시의 것이다.

미국은 ‘아시아 귀환 정책’을 표방한 이후부터 차츰 남중국해에 간접적으로 개입하며 목소리를 키워나가고 있다. 2010년 7월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부 장관이 동남아 국가들을 순방할 당시, 남중국해 분쟁에 관여할 것을 천명하여 중국을 당혹스럽게 만들었고, 2010년 9월에는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아세안 10개국 대표들과 만나 해결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부담감과 위기의식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베트남과 필리핀에게는, 미적지근한 아세안보다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미국이 그나마 믿음직한 파트너였다.

중국·베트남 간의 분쟁 사이에서도 미국은 중국의 일대일 해결 방안보다는 베트남의 다자적 접근 방식을 옹호하며 사실상 베트남을 지지하고 있다. 작년 10월 미국은 40년 가까이 지속됐던 베트남에 대한 살상무기 수출금지를 완화하겠다고 공표하기도 했다. 필리핀과의 군사 협력도 계속되어 중국이 석유시추선을 보냈던 작년 5월에는 필리핀 북부에서 상륙훈련이 실시됐고, 9월에는 남중국해 근처에서 양국의 해군 합동 훈련이 실시됐다. 미국은 분쟁 개입의 이유로 무력 충돌 방지, 운항로 확보와 동맹국의 보호를 주장하지만, ‘아시아 회귀’ 자체가 중국 봉쇄 정책의 일환이라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때문에 남중국해 분쟁은 중국과 아세안 국가들 간의 지역 분쟁을 넘어 미·중 두 월드파워 간 대리전의 양상을 띠게 됐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큰형님’의 ‘마이웨이’

2013년 시진핑 정부 출범 이후, 중국은 ‘할 말은 하겠다’는 ‘주동작위’를 대외정책의 새로운 모토로 정했다. 미국의 동아시아 진출이 노골화되고, 베트남의 반발이 거세지면서 남중국해와 관련한 중국의 행보는 매우 예민해졌다. 작년 5월, 파라셀 군도에 석유 시추선이 파견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베트남 정부와 시민들 모두가 격렬하게 반발하면서 시추선은 두 달여 만에 다시 철수했지만, 양측의 앙금은 여전하다. 그러나 베트남이 다양한 국가들을 테이블로 끌어들이며 분쟁을 ‘국제화’하고 있는데 반해, 중국은 이 문제에서만큼은 사실상 고립되어있는 듯하다. 2011년 6월 중국은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대만에게 영토분쟁에서의 공조를 요청했지만 단칼에 거절당한 적이 있다. 남중국해 분쟁이 심화되면서 과거 ‘도광양회(고개를 숙이고 때를 기다림)’라는 모토와 상하이협력기구 등 실질적인 수단을 통해 ‘평화적인 부상’, ‘책임지는 강대국’ 이미지를 구축하려던 노력도 점차 퇴색하는 듯 보인다.

마지막 소제목

올해 1월 21일, 에반 가르시아 필리핀 외교부 차관과 대니얼 러셀 미국 외무부 차관보는 회담에서 남중국해에 대한 중국의 지속적인 ‘위반 행위’를 비난했다. 러셀은 “큰 나라들이 작은 나라들을 괴롭혀선 안 된다”고 강한 어조로 지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중국은 이튿날 즉각 성명을 내어 “중국은 큰 나라가 강한 나라를 괴롭히는 것에 반대”하지만, 동시에 “작은 나라도 터무니없는 요구를 해서는 안 된다”고 못박았다. 중국은 지난해 11월 말 스프래틀리 군도에 군용 착륙시설을 축조하기 시작하거나, 올해 1월 초 관영언론인 인민일보를 통해 남중국해에서의 시추 작업을 위한 선박 개발을 보도하는 등, 외부의 압력에 아랑곳하지 않고 남중국해에서의 ‘작업’을 꾸준히 진행 중이다. 이에 반해 베트남과 필리핀, 미국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다. 지난해 7월 미국 국무부 주도로 열린 네 번째 ‘남중국해 정기 회담’에서 마이클 퓨크스 차관보는 “아세안과의 협력을 증진한다”는 비교적 형식적인 대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2010년의 야심찬 선언과는 달리, 미국이 여전히 ISIS와 우크라이나 등 동아시아 외적인 문제에 묶여있는 것도 문제 해결을 요원케 한다. 고착화된 남중국해 분쟁을 극적으로 타개할 수 있는 수단은 지금으로서는 전무한 셈이다.

김만희(고려대 국어국문)

Manhee87011@naver.com

유흥의 도시 아바나 그리고 너와 나

유흥의 도시 아바나 그리고 너와 나

헤드

지난해 12월 17일 미국 오바마 대통령과 쿠바 라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이 양국간 외교 정상화를 선언했다. 1959년 피델 카스트로가 혁명을 일으킨 2년 후, 1961년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며 국교가 단절된 지 53년만의 일이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특별 성명을 통해 “어떤 나라를 실패한 국가로 몰아붙이는 정책보다 개혁을 지지하고 독려하는 것이 더 낫다는 교훈을 어렵게 얻었다”며 반세기 이상 유지해 온 쿠바 봉쇄정책의 실패를 시인하였다.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의 말대로 ‘이념의 시멘트’에 갇혀있던 두 나라가 드디어 마주보게 된 것이다. 미국 대사관이 세워질 쿠바의 수도 아바나의 59년 혁명 전 모습을 생생하게 나타낸 애니메이션 ‘치코와 리타’는 재즈 아티스트들의 일생을 쿠바와 미국의 급변하는 관계 속에서 담담하게 그려낸다.

사랑을 jazzy 않아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 전쟁을 치렀던 쿠바와 쿠바의 독립을 저지하면서 그들을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두고자 했던 미국의 특별한 관계는 경제적 유대관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독립 후 사실상 미국의 보호령이었던 쿠바는 17세기 말부터 사탕수수의 대규모 지배와 미국으로의 독점적 수출을 통해 미국에 종속된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양차대전과 경제대공황을 지나면서 설탕 값의 폭락과 미국 경제의 침체로 쿠바 경제 전체가 휘청이게 된다.

이후 마차도와 바티스타 정권을 거치면서 쿠바는 다시금 경제재건에 박차를 가했다. 1930년대부터 미국인들의 휴양지로 각광받던 따뜻한 섬에 미 자본을 바탕으로 한 카바레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면서, 쿠바의 수도 아바나는 미국인들의 흥과 더불어 쿠바 음악인들의 생계의 터로 변모하게 되었다. 하지만 유흥 시설과 함께 폭력과 매춘 역시 아바나를 물들이기 시작하여 40년대에 들어서는 아바나의 매춘 여성 인구가 7만 명에 이르게 된다. 더욱이 풀헨시오 바티스타가 1952년 재집권한 이후로는 미국의 대규모 도박산업을 유치하면서 아바나에만 270여개의 호텔과 300여개의 매춘가게가 들어서는 등 아바나 전체가 거대한 유흥도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 가운데, 치코와 리타가 만났다.

치코는 리타는 처음 만난 날부터 서로에게 이끌렸지만 치코에게는 이미 부인이 있었다. 부인의 존재를 뒤늦게 알게 된 리타는 냉정하게 선을 긋지만 치코는 둘을 이어주는 재즈 음악을 빌미로 리타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 둘은 치코와 치코의 오랜 동료인 라몬의 권유로 함께 출전한 경연대회에서 입상한 후 줄곧 쿠바에서 음악 활동을 함께 하면서 동료 아티스트 이상의 정을 나누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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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코와 리타」의 또 다른 볼거리는 당시 쿠바의 시대상황이 작품 내에서 자세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치코와 리타가 함께 경연대회를 나가게 되는 이 장면에서 길거리에 붙여진 선거 포스터로 인해 당시 선거가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실제 1948년 쿠바 대선에서 카를로스 프리오 소카라스Carlos Prío Socarrás가 당선되어 4년간 쿠바를 이끌었다.

 

암흑 속 재즈 한줄기

1950년대 맘보 등의 쿠바 음악이 세계적으로 유행하면서 재즈 싱어 리타에게도 기회가 찾아 왔다. 여느 때처럼 치코와 합을 맞춰 공연하는 리타를 눈여겨 본 미국의 사업가는 리타에게 미국에서 활동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한다. 자신이 리타를 스타덤에 올려줄 수 있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계약은 리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이미 치코를 사랑하게 된 리타는 치코 없이 떠나지 않겠다며 거절하지만 둘 사이를 오해한 치코는 리타를 먼저 떠나버린다. 이후 뉴욕으로 홀로 떠나게 된 리타는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50년대 미국에서는 유색인종 차별이 여전히 존재했다. 리타가 떠난 후 그리움 끝에 그녀를 뒤따라간 치코에게 인종차별은 높은 벽으로 다가왔다. 치코와 리타 일행보다 앞서 뉴욕에서 음악 활동을 하던 쿠바인 아티스트 차노 포소와 치코의 동료 라몬의 대사에서 그들이 겪었던 차별을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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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은 직원용 출입구를 이용해야 하고 버스는 뒷자리에만 앉을 수 있어. 화장실도 따로야”

치코와 리타는 뉴욕에서 재회했지만, 서로 다른 상처를 갖고 있었던 둘은 쉽사리 예전의 관계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러던 와중 라몬이 단순 노동을 통해 생계를 이어가다 리타의 후원가이자 투자자인 미 사업가의 도움으로 치코의 재즈 피아니스트 활동을 지원하면서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치코는 라몬의 회사에 소속되어 유럽 전역에서 순회 공연을 펼칠만큼 손꼽히는 재즈 피아니스트로 성장한다. 이후 치코와 리타는 몇번의 엇갈림 끝에 아바나에서의 그들보다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유명 재즈 싱어와 피아니스트의 관계는 오래 지나지 않아 미 전역에 알려지고 리타의 투자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지만, 그 둘은 크게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이미 치코와 리타는 한 해의 마지막 날, 라스베가스에서 둘의 새로운 시작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다시, 아바나

줄곧 음악 활동을 함께 하며 뉴욕으로도 같이 떠나 치코를 지원했던 라몬은 치코와 리타가 잠깐의 스캔들에 그치지 않고 결혼을 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해 듣게 된다. 라몬은 리타를 스타의 반열에 올린 미국인 사업가의 압박에, 치코의 양복 주머니에 마약을 넣어 그를 마약밀매혐의로 추방시키는 데 일조한다. 결국 치코는 리타와 한 마디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하고 쿠바로 돌아오게 된다. 그런데 치코가 마주한 아바나는 이전처럼 향락으로 가득찬 도시가 아니었다. 상심에 정처 없이 거리를 걷는 치코 뒤에는 거리로 나와 국기를 흔들고 피델 카스트로를 외치는 쿠바인들이 있었다. 아바나는 사회주의 혁명의 성지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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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카스트로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으면서 쿠바는 사회주의화했다. 쿠바의 혁명 정부는 대내적으로는 국유화와 무상교육, 의료 복지 정책을 실시하며 혁명에 박차를 가했고, 대외적으로는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국가들과 무역 블록을 형성했다. 특히 자본주의 국가의 대표격인 미국을 두고 경쟁 구도를 펼치던 쿠바와 소련은 경제적, 군사적으로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1961년 미국과 쿠바의 외교 관계가 결국 단절되고 쿠바인과 미국인은 서로의 나라에 방문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쿠바의 사회주의 혁명은 적어도 치코를 비롯한 재즈 예술가들의 삶에는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쿠바 당국이 본격적인 사회주의 개혁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재즈를 제국주의적인 ‘적들의 음악’으로 간주하고 공연을 금지한 것이다. 쿠바 당국은 재즈 공연 준비를 하는 치코에게 재즈 음악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공산당에 가입할 것을 요구한다. 실제로 쿠바의 혁명 정부는 음악의 파급력을 일찌감치 알고 이를 중요한 정치적 수단으로 여겼다. 기존의 라틴계 음악인 재즈나 살사를 제국주의 예술로 규정하여 금지하고, 스페인어로 ‘새 노래’라는 뜻의 ‘누에바 트로바(nueva trova)’라는 음악 장르를 지원한다. 물론 쿠바 음악이 발달할 수 있었던 장이었던 카바레도 금지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재즈나 살사는 본토가 아닌 미국에서 발달하게 된다.

생존의 문제

시간이 흘러 늙은 치코는 음악을 그만두고 구두닦이로 일생을 살아 간다. 치코의 시간이 흐른 만큼 쿠바의 상황도 변했다. 영화에서는 갑작스레 정전이 되었다가 다시 전기가 들어오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이웃들은 정전이 별로 놀랍지 않다는 반응을 보인다. 실제로 과거 쿠바에서는 애니메이션 속 장면처럼 전력 수급 부족으로 정전이 일상화되었다. 사회주의를 추구한 다른 나라들도 으레 그렇듯 쿠바의 경제 상황은 좋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나 1989년, 쿠바의 경제의 한 축을 담당했던 소련이 붕괴하면서부터 경제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89년 당시 전체 교역량의 80% 이상을 제2세계에 의존했던 쿠바는 식량, 석유, 기계 부품 등의 부족에 시달렸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쿠바 정부는 시장경제를 일부 도입하게 된다. 쿠바의 사회주의는 더 이상 패기와 열정으로 유지되거나 추진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회주의는 생존의 문제가 되어 사람들의 생활 속으로 스며들어왔다.

경제 상황과 함께 80년대 이후 쿠바 음악의 흐름도 조금 바뀌었다. 혁명 체제를 직간접적으로 옹호하는 누에바 트로바의 자리에는 혁명 이후 쿠바의 사회 문제를 지적하는 노비시마 트로바(novísima trova, 더 새로운 음악)가 들어선다. 앞서 언급한 전력 문제 또한 노비시마 트로바의 소재가 되었다. 1995년 이 계열의 음악가 중 한 사람인 프랭크 델가도가 노래한 Cuando se vaya la luz, mi negra(전기가 나가면, 내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Cuando se vaya la luz, mi negra,

mi abuela va a comenzar

a desatar su mal genio,

y a hablarme mal del gobierno.

Y mi abuelo que es ñángara le va a ripostar

que es culpa del imperialismo, de la OPEP, y del mercado mundial.

 

전기가 나가면, 내 사랑

내 할머니는 또 그 나쁜 성질이 나오기 시작하겠죠.

나한테 정부 욕을 시작할테고

빨갱이’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재빨리 대답하겠죠.

제국주의와 OPEP(석유수출국기구), 시장경제의 잘못이라고.

– Frank Delgado(1995), Cuando se vaya la luz, mi negra

 

한편, 과거 치코의 음악에 주목했던 한 사업가와 아티스트가 재즈 피아니스트로서의 명성을 버린채 살아가던 치코를 찾아와 그에게 음악 활동 재개를 제안한다. 재즈를 금지했던 시대적 상황과 실연의 아픔에 의해 음악을 그만 두었던 치코는 피아노를 보자 다시 음악을 시작할 용기를 얻는다. 그리고 치코는 세계 투어 공연과 더불어 그래미 상을 두 손에 쥐면서 재기에 성공하였다. 그 후 그는 다ㅣ 미국으로 돌아와 리타의 행방을 물으며 그녀를 찾아다니지만, 젊은 시절의 리타도, 라몬도, 뉴욕도 이미 변해버린 후였다. 치코과 미국을 떠난 47년간 변하지 않았던 것은 오직 라스베가스, 그리고 너와 나뿐이었다.

이 영화에는 치코와 리타의 이야기와 더불어 한 도시의 역사가 있었다. 미국의 경제적 식민지였던 향락의 도시, 재즈를 억압했던 사회주의 혁명의 중심지, 그리고 혁명의 기운이 한풀 꺾이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던 8-90년대의 도시의 모습까지. 세심하게 재현된 아바나의 모습은 애니메이션 영화에 현실감을 불어넣어주었다. 그런데 만약, 영화가 그때에서 끝나지 않고 지금 현재 아바나의 모습까지 담는다면 어땠을까? 시대적 배경 묘사에 충실한 이 영화에는 아마 60년 간 대립해 온 양 극단의 체제가 누그러지고 오바마 대통령과 함께 외교정상화를 선언하는 피델 카스트로의 모습이나 이를 알리는 신문 기사가 나왔을 지도 모르겠다.

김은경 (국민대 정치외교)

eunkyongkim31@gmail.com

황지윤 (이화여대 정치외교)

jiyoon1201@naver.com

가사 출처: http://blog.naver.com/yupanqui/300378898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