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동안의 ‘땅따먹기’
–복잡하지만 중요한 남중국해 분쟁, 한눈에 보기
분노의 베트남
“수백 명이 중국에 대한 복수심에 취한 채 오토바이를 타고 리슈에잉의 공장 지대로 돌진했다. 그들은 당황한 경비들 주위를 질주했으며, 일부는 붉은색과 금색으로 칠해진 베트남 국기를 달고 있었다.” <뉴욕타임즈>는 작년 5월 중순 베트남을 휩쓴 반중 시위를 이렇게 묘사했다. 닷새 동안 지속된 시위로 두 명이 사망하고 100명 이상이 다쳤다. 3000명의 중국인이 대피했고, 공장은 가동이 중단됐다. 17일 류지엔차오 중국 외교부 차관보가 하노이를 방문해 대책 마련에 대한 약속을 받아냈으나, 양측의 갈등이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이번 반중 시위의 근본적인 원인은 남중국해를 둘러싸고 수십 년간 지속된 영토 갈등에 있다. 시위의 방아쇠를 당긴 것은 5월 2일 남중국해로 파견된 석유 시추 장비였다. 27척의 경호 선박을 대동하고 파라셀 군도(중국명 시샤, 베트남명 호앙사) 근처에 도착한 이 40층 건물 높이의 장비는 중국 국영기업인 중국해양석유총공사(CNOOC)가 제작 및 파견한 것이었다. 중국과 함께 파라셀 군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베트남은 두 차례에 걸쳐 초계정을 보내 시추를 방해하려 했지만 중국 선박에 의해 저지당했으며, 오히려 선박 간의 물리적 충돌로 9명의 베트남인이 부상당했다.
반중국 시위에 참여한 베트남인들
충돌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시추를 고집하면서 베트남 내에서 반중 감정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베트남 일부 노동자들이 베트남 내 중국 공장을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던 시위는 곧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애초에 시위가 법으로 금지되어있는 베트남에서 반중 시위가 이토록 격화될 수 있었던 것은 정부의 묵인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응우옌 떤 베트남 총리는 흥분한 자국민들에게 “국가의 이익과 이미지에 반한 극단적 행동에 반대한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냈지만, 한편으로는 “애국심을 북돋워 성스러운 주권을 수호해야 한다”며 반중 감정을 부추기는 양면적인 모습을 보였다. 과격한 시위가 더 지속될 경우 오히려 대외 이미지와 경제를 훼손할 것이라는 계산에 이르러서야, 베트남 정부는 300명의 자국민들을 고소하는 등 상황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파라셀 군도에 대한 영유권 자체는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시위는 사그라들었으나, 베트남 정부의 비난과 국민들의 반중 감정은 그 수위가 낮아지지 않았다.
한 뼘의 중요성
파라셀 군도
남중국해의 서쪽 부근에 위치한 파라셀 군도는 30여 개의 작은 섬으로 구성되어있으며, 중국과 베트남이 각각 영유권을 주장하는 분쟁지역이다. 남중국해 내에는 파라셀 군도 외에도 총 네 개의 군도가 더 있으며, 모두 둘 이상의 국가가 군도 일부 혹은 전부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특히 남쪽에 위치한 스프래틀리 군도(중국명 난사)는 중국과 베트남을 포함해 총 여섯 국가가 분쟁 중이다. 동쪽에 있는 매클스필드 뱅크(중국명 종사)는 일년 내내 얕은 바다 밑에 잠겨있는 산호초 지대로 사실 섬이라 보기는 어려우며, 이러한 지형의 영유권 문제에 대해 국제 협약과 국제법은 아직 명확한 지침을 갖고 있지 않다.
남중국해의 해저에는 총 260억 배럴 가량의 원유와 다량의 천연가스가 매장돼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해양 생물의 다양성이 매우 높으며, 전세계 선박의 60% 이상이 이곳을 지날 만큼 해상 교통에 있어서 중요한 지점이다. 중국과 인접하지만 필리핀이나 베트남과 같이 미국에 우호적인 국가들 역시 자리하고 있어 지정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각국이 영유권 주장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도 남중국해가 가진 막대한 이익 때문이다.
남중국해의 도서분포
남쪽으로 전진, 또 전진
중국은 남중국해 군도 중 이미 두 곳(파라셀, 매클스필드)을 실질적으로 점유하고 있으며, 나머지 세 곳에 대해서도 완전한 영유권을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중국이 주장하는 아홉 개의 해상경계선(9단선)을 이으면 남중국해를 둘러싸는 거대한 ‘U선’이 된다. 이미 남중국해의 허리 부분을 장악한 중국의 최종 목표는 남쪽의 스프래틀리 군도 전체와 스카보러(황옌다오) 섬의 영유권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U선을 완성하는 것이다.
남중국해 도서들을 처음으로 실질 점유한 것은 프랑스·일본과 같은 근대 제국주의 세력이었다. 2차 대전 이후 이 도서들은 무주지가 되어 인근 국가들의 경쟁 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각국은 역사적 근거를 통해 영유권을 주장하거나 군사적으로 선점하기 시작했다. 중국 역시 종전 이후 국민정부 시절부터 꾸준히 남중국해 전체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해왔으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뒤에도 태도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중국과 동남아 국가들은 영토를 실질적으로 점유하는 것에는 소극적이었다. 60년대 말까지만 해도 남중국해에 대한 영유권은 각국에 의해 선언적으로 주장될 뿐이었다. 그러나 1968년 유엔과 미국 해양지리국의 합동 탐사팀이 남중국해 해저에 매장된 막대한 양의 지하자원을 밝혀낸 이후부터 갈등은 점차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중국이 주장하는 ‘U선’과 국제해양협약에서 정한 배타적 경제수역의 경계
중국은 1974년 제2차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때, 베트민이 점유하고 있던 파라셀 군도에 군사 작전을 개시해 도서를 무력으로 점령한 적이 있다. 중국이 점령한 이듬해 베트남전은 종전되었으며, 새로이 통일된 베트남은 파라셀을 돌려받지 못했다. 오히려 중·소 분쟁의 연장선에서 1979년 중국·베트남 전쟁이 발발하자, 양측은 섬의 영유권을 두고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중국은 이 전쟁을 통해 베트남으로부터 남쪽 스프래틀리 제도의 일부 도서를 추가로 빼앗을 수 있었다. 1989년 양측 간 평화협정이 논의되기 시작하면서부터 베트남을 향한 군사 공격은 멈췄지만, 동쪽 필리핀과의 영토갈등은 계속되어 1994년 미스치프 사주(Mischief Reef)가 중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로써 중국은 파라셀 군도 전체와 스프래틀리 군도 내 48개 제도 중 9개를 실점하게 되었다. 필리핀은 미스치프 사주에 건설된 중국 구조물들을 파괴하며 격렬하게 반발했으나, 결국 중국의 점유를 막지 못했다.
분쟁의 ‘문명화’
1995년 대만과 갈등을 겪으면서 ‘중국위협론’이 전세계적으로 대두하자, 중국 지도부는 외교·안보 분야에 있어 보다 조심스럽게 처신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중국위협론은 경제 성장을 최우선 목표로 하고, 그 토양으로서 평화적인 국제 관계를 조성한다는 기본 대외 전략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었다. 이러한 ‘조심성’은 남중국해에서도 발휘되어 미스치프 사주 이후 중국에 의한 추가적인 영토 점령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중국을 비롯한 당사국들은 수세적 태도로 전환해 기존 점령지에 대한 영유권을 보다 공고히 하는 것에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 스프래틀리 군도에는 아직 점령되지 않은 사주들과 암초들이 남아있지만 각국은 추가적인 점령 시도를 하지는 않고 있다. 이 무주지들은 어지러이 널려있는 각국 소유의 섬들 사이에서 일종의 ‘완충지대’로 기능한다.
무력을 통한 확장이 부담스러운 선택이 되자, 분쟁은 무력 충돌에서 치열한 외교전으로 그 양태가 바뀌었다. 또 여기에는 중국과 분쟁 당사국들 간의 경제적 의존성이 매우 높아 극단적인 대결구도를 지속하는 데 큰 무리가 따른다는 점도 작용했다. 1994년 때마침 제정된 유엔해양법협약(UNILOSC)은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된 분쟁에 중요한 가이드라인이 되었다. 이 때문에 갈등의 수위는 영토를 추가 점령하고 타국의 시설물을 파괴하거나 무력 충돌을 일으키는 등의 공격적인 방식에서, 자국의 섬에 경쟁적으로 군사시설과 관측시설을 설치하고 이웃 나라가 섬에 구조물을 설치하거나 해양 탐사를 실시할 때마다 적극적으로 항의하는 것으로 ‘완화’되었다. 다만 간헐적으로 소규모 충돌이 종종 벌어졌는데, 주로 이곳에서 어획하던 민간 어선에 대한 사격과 나포가 주를 이뤘다.
내 것이다, 왜냐하면…
분쟁이 외교전의 성격을 띠게 되면서 점유의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해졌다. 각국은 역사적 근거, 무주지 선점의 원칙, 지리적 근접성, 대륙붕 확장 등을 근거로 남중국해 전체 혹은 일부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중국은 주로 한나라 시기부터 등장하는 남중국해에 관한 무역과 행정 기록을 근거로 남중국해 전체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1949년 중국과 분리된 대만 역시 그 주장과 근거가 중국과 거의 흡사하다. 베트남 또한 주로 역사적 권원에 의존하고 있으며, 파라셀과 스프래틀리 군도 전부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한다. 반면 필리핀은 지리적 근접성과 무주지 선점, 대륙붕 확장을 근거로 제시하며 스프래틀리 군도 일부를 주장한다. 특히 1994년 유엔해양법협약은 세계 각국이 배타적 경제수역을 넘어 최대 350해리 내의 해저 대륙붕을 개발할 수 있다는 대륙붕 확장 원칙을 명시했고, 이로써 필리핀 외에도 말레이시아와 브루나이가 이 분쟁에 ‘참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분쟁 각국의 견해 차이는 좁혀지지 않은 채 선언과 위협만이 오가고 있으며,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결정적인 근거 역시 부족하다.
여럿이 모여도 딱히 방법이 없다
1990년에 접어들면서 무력 충돌을 대신해 외교가 주요한 분쟁 조정 수단으로 등장하게 되자, 동시에 분쟁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 다자주의적 협상 테이블 또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1990년 인도네시아가 주최한 남사군도회의가 그 첫 시도였는데, 참여국들이 자국의 입장을 되풀이하면서 큰 진전을 이루지는 못했다. 2년 후, 중국은 남중국해 전체를 자국의 영해로 포함시키는 국내법을 제정함으로써, 앞서 이뤄졌던 국제적인 노력을 무색하게 했다. 1993년과 1994년에는 영해 확정을 두고 중국과 베트남 간의 회담이 있었으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외교적 노력 지속’이라는 다소 공허한 합의점을 도출했을 뿐이다. 양측의 회담은 1999년에도 한차례 더 있었지만, ‘분쟁을 전면적인 무력충돌로까지는 확대시키지 않는다’는 최소한의 합의만을 반복할 뿐, 분쟁 자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를 드러내진 않았다. 진전 없는 대화가 계속되는 동안, 각국 사이에서 소규모 충돌과 경쟁적인 구조물 건설은 계속됐다.
동남아시아 국가연합(ASEAN)은 다시 한 번 이 분쟁을 다자주의적으로 해결하려 시도했다. 2002년, 아세안과 중국이 앞으로 분쟁을 평화적으로 풀어나가겠다며 공동으로 ‘남중국해 당사자 행동선언(DOC)’을 발표한 것이다. 그러나 선언은 선언일 뿐, 아무런 강제력을 갖지 못한다. 선언에 명시된 “분쟁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한다”는 합의는 분쟁 당사자들의 군사적·외교적 충돌을 완전히 방지하기에는 모호하다. 선언문은 또한 조속한 시일 내에 실질적인 강제력을 갖는 ‘남중국해 당사자 행동강령(COC)’을 공포할 것을 명시하고 있으나, 그 기한이 정해지지 않은 채 무기한 연기되고 있다.
공공의 적
분쟁에 있어 ‘공공의 적’은 아무래도 중국인 듯하다. 모든 도서를 대상으로 한 영유권 주장이 다른 5개국과 직접적으로 충돌하는 데다, 외교무대에서 자국의 주장을 반복적·공격적으로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남중국해를 자국의 ‘핵심이익’으로 설정하고 이를 ‘되찾겠다’는 중국의 거듭된 주장은 경제적·군사적 성장이라는 실질적 능력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거인’을 상대로 동남아 각국이 공고한 연합전선을 구축하려는 움직임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다. 아세안 내에는 영토분쟁의 당사자가 아닌 국가들도 존재하며, 공공의 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스프래틀리 영유권을 주장하는 중국 외 5개국 역시 서로가 경쟁자들이다. 비록 아세안 내에서 중국에 대한 불안감이 크게 번지고 있고, 베트남이 주도적으로 연합전선을 구축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각국을 묶어줄 수 있는 이해관계는 아직 엉성하다. 오히려 ‘경제 거인’의 화를 돋우지 않기 위해 각국은 말소리를 높이길 꺼려한다. 2014년 11월 미얀마에서 열린 아세안 정상회담에서도 남중국해 문제가 주요 의제로 거론됐지만 큰 진전은 없었다. 합의된 범위 안에서는 중국이 공동의 적으로 명시되지도 않았고, 연합적인 대응을 꾸려나가려는 조짐도 찾기 어려웠다. 레 르엉 민 아세안 사무총장은 회담 직후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남중국해 문제에 대해 “정치적 약속과 실제 상황 및 행동 간의 괴리가 심화되고 있다”고 피상적으로 언급했고, 의장 발언에서도 “우리는 남중국해의 상황에 대해 우려한다”는 형식적인 주장이 되풀이됐을 뿐이다.
반면 중국은 아세안의 ‘연합’을 크게 경계하고 있으며, 적극적으로 이를 ‘예방’하고자 한다. 원자바오 전 중국 총리는 2012년 5월 “DOC는 분쟁 타결을 위한 협상 자격을 ‘직접 당사국’으로 제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2년 후인 2014년 5월 10일, 파라셀 군도의 석유 시추선 문제를 두고 아세안 외무장관들이 우려를 표하자, 중국 외교부는 즉각 성명을 내어 “중국은 개별국가가 남중국해 문제를 이용해 중국과 아세안간 우호 협력 국면을 파괴하는 것을 반대한다”고 잘라 말했다. 작년의 아세안 정상회담에서 리커창 중국 총리는 남중국해 문제에 대해 ‘개별 국가 대응’ 원칙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동남아 각국에 총 200억 달러에 달하는 차관 원조를 제의하기도 했는데, 이 역시 남중국해 분쟁과 아세안과의 경제 협력을 구별함으로써 아세안의 공동 대응을 방지하고자 하는 중국의 전략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은 지금까지 매우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아세안이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하자, 애가 타는 필리핀과 베트남은 외부로부터 새로운 ‘중재자’를 요청하고 나섰다.
Here Comes a New Challenger
2011년 6월 28일, 미국의 이지스함을 비롯한 세 척의 함정이 필리핀 남서쪽에 도착했다. 1951년이래 오랜 동맹 관계를 맺고 있는 미국과 필리핀의 합동 군사 훈련이 이날부터 11일에 걸쳐 실시된 것이다. 남중국해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양측의 훈련이 자국을 겨냥한 것이 아니냐는 중국의 비판이 제기됐지만, 필리핀 측은 “이번 훈련은 오래전부터 계획되어있던 것으로, 도발행위로 인식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미국과 필리핀의 연례 합동 군사훈련인 발리카탄(Balikatan). 위 사진은 2013년 훈련 당시의 것이다.
미국은 ‘아시아 귀환 정책’을 표방한 이후부터 차츰 남중국해에 간접적으로 개입하며 목소리를 키워나가고 있다. 2010년 7월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부 장관이 동남아 국가들을 순방할 당시, 남중국해 분쟁에 관여할 것을 천명하여 중국을 당혹스럽게 만들었고, 2010년 9월에는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아세안 10개국 대표들과 만나 해결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부담감과 위기의식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베트남과 필리핀에게는, 미적지근한 아세안보다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미국이 그나마 믿음직한 파트너였다.
중국·베트남 간의 분쟁 사이에서도 미국은 중국의 일대일 해결 방안보다는 베트남의 다자적 접근 방식을 옹호하며 사실상 베트남을 지지하고 있다. 작년 10월 미국은 40년 가까이 지속됐던 베트남에 대한 살상무기 수출금지를 완화하겠다고 공표하기도 했다. 필리핀과의 군사 협력도 계속되어 중국이 석유시추선을 보냈던 작년 5월에는 필리핀 북부에서 상륙훈련이 실시됐고, 9월에는 남중국해 근처에서 양국의 해군 합동 훈련이 실시됐다. 미국은 분쟁 개입의 이유로 무력 충돌 방지, 운항로 확보와 동맹국의 보호를 주장하지만, ‘아시아 회귀’ 자체가 중국 봉쇄 정책의 일환이라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때문에 남중국해 분쟁은 중국과 아세안 국가들 간의 지역 분쟁을 넘어 미·중 두 월드파워 간 대리전의 양상을 띠게 됐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큰형님’의 ‘마이웨이’
2013년 시진핑 정부 출범 이후, 중국은 ‘할 말은 하겠다’는 ‘주동작위’를 대외정책의 새로운 모토로 정했다. 미국의 동아시아 진출이 노골화되고, 베트남의 반발이 거세지면서 남중국해와 관련한 중국의 행보는 매우 예민해졌다. 작년 5월, 파라셀 군도에 석유 시추선이 파견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베트남 정부와 시민들 모두가 격렬하게 반발하면서 시추선은 두 달여 만에 다시 철수했지만, 양측의 앙금은 여전하다. 그러나 베트남이 다양한 국가들을 테이블로 끌어들이며 분쟁을 ‘국제화’하고 있는데 반해, 중국은 이 문제에서만큼은 사실상 고립되어있는 듯하다. 2011년 6월 중국은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대만에게 영토분쟁에서의 공조를 요청했지만 단칼에 거절당한 적이 있다. 남중국해 분쟁이 심화되면서 과거 ‘도광양회(고개를 숙이고 때를 기다림)’라는 모토와 상하이협력기구 등 실질적인 수단을 통해 ‘평화적인 부상’, ‘책임지는 강대국’ 이미지를 구축하려던 노력도 점차 퇴색하는 듯 보인다.
올해 1월 21일, 에반 가르시아 필리핀 외교부 차관과 대니얼 러셀 미국 외무부 차관보는 회담에서 남중국해에 대한 중국의 지속적인 ‘위반 행위’를 비난했다. 러셀은 “큰 나라들이 작은 나라들을 괴롭혀선 안 된다”고 강한 어조로 지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중국은 이튿날 즉각 성명을 내어 “중국은 큰 나라가 강한 나라를 괴롭히는 것에 반대”하지만, 동시에 “작은 나라도 터무니없는 요구를 해서는 안 된다”고 못박았다. 중국은 지난해 11월 말 스프래틀리 군도에 군용 착륙시설을 축조하기 시작하거나, 올해 1월 초 관영언론인 인민일보를 통해 남중국해에서의 시추 작업을 위한 선박 개발을 보도하는 등, 외부의 압력에 아랑곳하지 않고 남중국해에서의 ‘작업’을 꾸준히 진행 중이다. 이에 반해 베트남과 필리핀, 미국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다. 지난해 7월 미국 국무부 주도로 열린 네 번째 ‘남중국해 정기 회담’에서 마이클 퓨크스 차관보는 “아세안과의 협력을 증진한다”는 비교적 형식적인 대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2010년의 야심찬 선언과는 달리, 미국이 여전히 ISIS와 우크라이나 등 동아시아 외적인 문제에 묶여있는 것도 문제 해결을 요원케 한다. 고착화된 남중국해 분쟁을 극적으로 타개할 수 있는 수단은 지금으로서는 전무한 셈이다.
김만희(고려대 국어국문)
Manhee87011@naver.com